- 변화와 개혁을 화두로 시작한 한나라당 대표 경선.
- 하지만 후보간 줄세우기와 줄서기, 그리고 돈과 자리를 놓고 지저분한 ‘뒷거래’가 판을 치면서 구태를
- 되풀이하고 있다. 한나라당 대표 경선 및 전당대회를 앞두고 벌어진 정치인들의 아름답지 못한 뒷모습.
한나라당 대표 경선 출마자 6명이 합동정견발표회장에 참석, 순서를 기다리고있다. 최병렬, 강재섭, 김형오, 서청원, 이재오, 김덕룡 후보(왼쪽부터).
대표 경선에 나선 6명을 포함, 3개 당직에 이미 도전장을 내밀었거나 앞으로 내밀 의원들을 합치면 20명 선에 이를 전망이다. 여기에 대표 경선(6월24일) 때 함께 투표하는 16개 시도 지역운영위원(40명) 경선에 나선 의원들은 30명이 넘고, 이들과 겨룰 지구당위원장 및 지방의원도 20명이 넘는다.
지역운영위원 경선에 나선 의원들 가운데 일부 정원 미달 지역의 경우 사실상 당선이 확정된 상황이긴 하지만 어쨌든 통계상으로만 보면 한나라당 국회의원(153명) 가운데 3분의 1이 직접 선거에 나서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선거 홍수’에 휩쓸려갈 지경이라는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북핵 사태, 경제 위기, 노무현(盧武鉉) 정부의 국정 혼란 등으로 사회 전반이 어수선하지만 정작 당내에선 선거가 최대 이슈다. 당 권력의 향방을 가름하는 최대 행사인 만큼 의원이나 당직자, 보좌관들까지 모이면 하나같이 오로지 경선 얘기뿐이다.
이번에 시리즈로 치러지는 각종 선거는 한나라당에 있어 도전과 모험이자 동시에 희망이다. 내년 총선 때까지 당을 이끌 선장과 원내사령탑, 지역사령관들을 뽑아 당의 골격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기도 하지만 누가 전면에 등장하느냐에 따라 짧게는 총선에서부터 멀게는 차기 2007년 대선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원들이 직접 선거에 나서 뛰면서도 한편으론 대표 경선 주자들 뒤에 열심히 ‘줄서기’를 하고 있는 것도, 또 대표 경선 주자들이 의원들과 원외 지구당 위원장들에게 줄서기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은 그런 이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의원들의 줄서기와 줄세우기는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대단히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줄서기를 둘러싼 다양한 행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표 경선에 나선 주자들의 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당권도전에 나선 이유와 목적이 줄서기와 줄세우기를 설명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대표 경선에 나선 주자들은 모두 6명이다. 서청원(徐淸源 동작갑 5선), 김덕룡(金德龍 서초을 4선), 최병렬(崔秉烈 강남갑 4선), 강재섭(姜在涉 대구서 4선) 등 이른바 ‘빅4’와 김형오(金炯旿 부산 영도 3선), 이재오(李在五 서울 은평을 재선) 의원이다.
우선 서청원(60) 의원을 보자. 지난 대선 때 당 대표였던 그는 대선패배에 따른 대표 경선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고 출마를 강행했다. 타주자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지만 일단 원내외 지구당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세몰이에서는 다소 앞선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수도권과 출신 지역인 충청권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그는 내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어 대권도전을 향한 초석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도전이 갖는 위험성의 비중을 고려할 때 낙선은 사실상 ‘정치생명의 끝’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분석이다.
3당 합당을 성사시켜 오늘의 한나라당을 탄생시킨 주역이면서도 줄곧 비주류의 길을 걸어온 김덕룡(DR·62) 의원. 그는 민정계가 장악해온 당내에서 호남 출신이라는 운명적 한계를 안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변화와 개혁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화두와 맞물려 힘을 받고 있다.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한 일부 언론의 여론조사에서 약진, 경선 결과와 상관없이 당내에서 지분을 확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65세로 출마 후보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최병렬 의원은 ‘인큐베이터론’을 내세우고 있다. 요약해 말하면 자신은 내년 총선을 승리로 이끈 다음 차기 대권주자를 만드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경쟁 진영에서는 최 의원이 내각제를 통해 총리직을 노릴 것이라거나, 일부 주자와의 연대를 통해 차기 전국구 1번을 내정받은 뒤 국회의장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할 것이라는 얘기를 흘리고 있다.
대구 경북(TK)이 기반인 강재섭(54) 의원은 후보 중 가장 젊다. ‘고령’으로 가득한 현재의 한나라당으로는 이미 한계에 부딪쳤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TK의 압도적 지지 속에서 ‘젊은 지도자론’을 주창하고 있는 그는 이번 경선 결과와 상관없이 차기 대권에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확고히 한 상태.
이같은 출마의 명분으로 볼 때 가장 위험한 도전을 감행하고 있는 후보는 서의원이다. 그는 지난 대선 때 당을 이끌었던 대표로, 대선 직후 대표 경선에 나서지 안겠다고 공언했다가 과감히(?) 번복하는 결단을 내렸다. 당 간판으로 누려온 ‘대표 프리미엄’을 이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관측이다. 그는 지구당 위원장들의 줄세우기에도 가장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원내외 지구당위원장들의 줄대기는 이처럼 각 주자들의 출신 지역 및 출마 이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구당위원장들의 가장 큰 관심은 뭐니뭐니해도 총선 공천 문제에 집중돼 있다. 특히 정치 입문을 노리는 원외 지구당위원장들이나 사무처 당직자들은 공천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걸어야 하는 처지. 그 절박함의 강도가 현역 의원들과는 현격히 틀리다. 줄서기의 시작과 끝은 오로지 공천이라고 봐도 과장이 아니다.
이번 경선을 둘러싸고 당내에서 유행어처럼 돌아다닌 ‘지하철 계보’라는 용어는 그런 맥락을 설명해주는 가장 정확한 언어임에 틀림없다. 지하철 계보는 겉으로는 A후보를 지지한다고 공언하고 다니면서도 뒤로는 B 또는 C후보 측 인사들을 만나 지지를 약속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한쪽에만 줄을 섰다가 지지했던 후보가 경선에서 탈락했을 경우 뒷감당을 하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에서 비롯된 행태다.
A후보 캠프에 속해 있는 한 초선 의원의 말. “그 사람은 누가 봐도 B후보를 지지하는 사람이었고 나도 그런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만나자는 연락이 와 나갔더니 ‘A후보에게 잘 말해달라. 뒤에서 열심히 돕겠다고’고 하더라. 많이 놀랐다”
D후보 캠프의 한 재선 의원은 “각 후보 진영에서 흘리고 있는 지구당위원장 지지 세력 가운데 지하철 계보를 빼면 절반이나 남을지 모르겠다. 우리 캠프를 도와주는 줄로 알고 있던 의원들이 다른 캠프 관계자들과 접촉중이라는 얘기를 나도 여러 번 들었다”고 말했다.
반면 아예 총대를 메고 특정 후보를 위해 일하는 의원들의 경우 종종 난처함을 호소하기도 한다. 처음부터 A후보가 당대표가 돼야 한다며 발벗고 나선 수도권의 한 초선 의원은 “특정 주자 캠프쪽에서 ‘A후보가 안되면 각오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수 차례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멀리 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지하철 계보와는 조금 다르게 겉으로는 철저한 중립을 표방하면서 뒤로는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당직자들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한 당직자는 “당직을 맡고 있는데 노골적으로 나설 수 없다. 하지만 내 지구당원들의 정서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내년 총선에선 그들의 힘이 절대적이다”고 말했다. 당 실무를 책임지는 국장급 당직자들은 평소 친분 관계와 지역연고 등에 따라 눈에 보이지 않게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원들의 줄서기는 초선이나 정치 신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고령의 중진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내년 총선에서 대대적인 세대교체론 바람이 불 경우 자신들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또 내년 총선 출마를 노리는 의원 보좌관들과 중간 당직자들도 줄서기에 대단히 적극적이다.
‘실탄’의 효력은 여전
각 주자들의 줄세우기는 방법과 강도에서 천양지차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차기 공천이나 주요 당직을 약속하면서 물밑 거래가 이뤄진다는 게 정설이다.
B후보 캠프에 속해 있는 한 초선 의원은 “B후보가 대표가 되면 대변인을 요구할 생각이다. 이미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한 원외 지구당위원장은 기자에게 “A후보가 ‘앞으로 나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해달라. 당의 물갈이 작업을 맡아줬으면 한다’며 줄서기를 요구해왔다”고 밝혔다.
이처럼 당내에선 “A가 되면 원내총무는 ○○○를 밀어준다더라” “C가 될 경우 사무총장에는 △△△가 내정돼 있다” 등의 말들이 끊이지 않는다. C후보가 최근 당내 개혁 성향의 초·재선 의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중진 L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긴급 지원을 요청하면서 “원내총무나 사무총장직을 주겠다. 도와달라”고 말했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선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돈이지만, 줄세우기에 있어서도 ‘실탄’은 효용성이 큰 수단이다. 선거운동이 본격화하기 시작할 무렵, 자금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진 일부 주자가 ‘3, 5, 10’으로 돈을 나눠주고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만나는 위원장들의 친분관계를 분류해 300만원, 500만원, 1000만원씩 지급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돈 선거를 개탄하는 목소리도 많다. C후보의 한 특보는 “그동안 여러 번 C후보를 도와 선거를 치러보았지만 사실 조직선거를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조직선거를 해보려고 하니까 모든 게 돈이었다. 돈이 안 들어가면 꿈쩍도 안 했고, 돈이 들어가면 정확히 투입된 만큼만 움직였다. 조직은 곧바로 돈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깨달았다”고 털어놨다. 말로만 정치개혁을 떠들고, 당 쇄신을 외칠 뿐 정작 밑바닥에서는 여전히 돈이 최고의 수단인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는 얘기였다. 그는 “우리도 어쩔 수 없어 요로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실탄이 준비되는 대로 쏠 것이다”고 덧붙였다.
한나라당세가 극도로 취약한 일부 지역의 지구당위원장들은 선거가 있을 때마다 한몫 잡는 기회로 삼는다는 말이 당내에선 파다하다. 어차피 원내 진출이 난망한 상황이다 보니 대선과 총선, 당내 경선 같은 선거가 치러질 때 금전이라도 챙기고 보자는 심리가 저변에 퍼져 있다는 게 얘기다.
각 주자들의 공격적인 줄세우기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다. 수도권 한 초선의원의 말. “어느 날 기자 몇 명과 저녁을 먹으며 특정 후보를 비난했는데 며칠 뒤 그 후보측 인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따위로 하면 재미 없을 줄 알라’는 노골적인 경고였다.”
이 때문인지 줄서기를 거부하는 의원들의 경우 고민이 적지 않다. 영남 지역의 한 재선 의원의 고백. “가장 두려운 건 대표 경선이 끝난 뒤 홀로 허허벌판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이긴 쪽도 진 쪽도 아닌 곳에 혼자 서 있는 것처럼 외로운 건 없다.” 정치는 세(勢)의 싸움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이 의원은 “그래서 나도 연고가 있는 후보를 지지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털어놨다.
D후보에게 줄을 섰다는 사무처 한 중간당직자의 말에는 대표 경선을 둘러싼 정치지망생들의 깊은 고민이 묻어 난다. “B나 C후보가 대표가 되면 당 사무처에 피바람이 불어닥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우리도 궁극적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이상 일단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사무처를 크게 손대지 않을 것으로 보여지는 후보를 미는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
깊은 상처로 심각한 후유증 우려
이같은 줄서기의 양상은 대표 경선이 끝난 후 7월10일경 있을 원내총무 및 정책위의장 경선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23만명이라는 사상 초유의 대규모 당원에 의해 선출될 ‘제왕적’ 당대표가 자신의 수족처럼 부려야 할 총무와 정책위의장 경선을 가만히 앉아 바라볼 수만은 없을 것이라는 관측 때문이다.
현재까지 총무 경선에는 홍사덕(洪思德) 임인배(林仁培) 박주천(朴柱千) 의원 등 4, 5명, 정책위의장 경선에는 전용원(田瑢源) 김만제(金滿堤) 홍준표(洪準杓) 주진우(朱鎭旴) 의원 등 6, 7명 정도가 출마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가운데는 유력한 대표 후보와 함께 합동 선거활동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한 예로 H의원의 경우 대표 경선에 나선 C후보와 함께 의원들의 골프 모임을 찾아다니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도 어떤 후보는 당권주자 A의 지원을 받고 있고, 다른 후보는 당권주자 D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말이 끊이지 않는다.
이처럼 총무나 정책위의장직을 노리는 의원들이 당권주자들에게 줄을 대는 이유는 차기 대표의 입김이 경선에 미칠 영향력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내년 총선 공천에 미칠 차기 대표의 영향력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는 만큼 대다수 의원들이 총무 및 정책위의장 경선에 대한 대표의 의중을 절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D후보 진영의 한 참모는 “대표가 되면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총무, 정책위의장 후보들이 줄을 섰다. 어차피 일하기 편하고 말을 잘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도와줄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며 “우리가 편한 사람이 뽑힐 수 있도록 노골적으로는 아니어도 최대한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치열한 줄세우기와 줄서기의 심각한 후유증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권력이 갖는 무게와 의미를 무시할 순 없지만 후보들 간에 인신공격과 마타도어가 난무하고, 지지자들 간에 상대 후보 헐뜯기가 일상화하면서 선거가 끝나도 그 상처가 쉽게 치유되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이 대두되는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권력의 속성상 다시 함께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견해도 적지 않다.
한나라당이 두 번의 대통령 선거 패배라는 충격에서 벗어나 새롭게 당을 정비하고, 원내 제1당으로서 변화와 개혁의 화두에 걸맞은 면모를 보여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