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대로 나는 만화와 골프 두 가지를 모두 열심히 했다. 골프는 내가 좋으니 말릴 수도 없이 지성으로 했고, 골프를 하려면 그린피가 필요하니 돈을 벌기 위해 만화 역시 열심히 그렸다. 만화 그리는 작업실 한쪽에 초록색 우단의 퍼팅연습기를 펼쳐놓고는 만화 한 컷 그리고 퍼팅 한 번 굴리곤 했다. 만화 한 편 끝내면 펜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골프채와 옷가방을 챙겨 들고 골프장으로 달려나가 ‘굿샷!’을 외쳤다.
십여 년 전 욕실에 앉아 있다 안구 망막에서 출혈을 일으켜 한쪽 시력을 완전히 잃은 적이 있다. 초도 근시안이나 당뇨환자도 아닌데 어느날 갑자기 한쪽 눈 청맹과니가 되고 만 것이다. 한창 골프에 물이 올랐던 시절이라 치명타가 아닐 수 없었다. 우선 한쪽 눈만으로는 거리 조절이 안 되다 보니 특히 솔을 지면에 붙여서는 안 되는 벙커샷에 있어 왕초보나 다름없는 어려움을 감수해야 했다. 또한 퍼팅이 아주 엉망이 되어 세 번 퍼팅을 밥 먹듯 하게 됐으니 이를 어쩌랴!
동반해서 지켜보던 할멈이 나중에 스코어카드에 적힌 보기 성적을 보더니 그만 눈물까지 흘려서 괜시리 한쪽 눈 안 보이는 나도 눈물이 날뻔했으니. 그러고 보니 언젠가 하루는 골프장에 나가 온종일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퍼팅 연습만 했던 기억도 난다. 아는 직원들이 안쓰러운 시선으로 흘금거리는 가운데 오전 10시부터 5시까지, 그러니까 남들이 18홀 한탕 도는 시간 동안 그린 위에서 아픈 허리 주물러가며 퍼팅 굴리기 칼만 갈았던 것이다. 그런 열정에 골프장 신령님도 마음이 동하신 것일까, 결국 예전의 테크닉을 되찾게 되었고, 남들의 칭찬에 “한 눈으로 치니까 일목요연해서 더 잘 맞는다”는 따위의 농담도 지껄이게 됐다.
그 안 보이는 눈을 수술할 때도 나는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했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수술대에 손발 묶인 채 누워 안구에 마취주사 바늘이 꽂히는 순간부터 이미지 게임을 시작해 고통과 공포를 쫓아내는 잔꾀를 부렸다는 말씀이다. 머리 속으로 택한 골프장은 안양CC. 대폭 수리개조한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제1번 코스가 평범한 파5 홀이었다.
의사들이 눈알을 쑤시든 말든 나는 나대로 드라이브를 꺼내 들고 신중하게 티샷을 하고 스푼으로 2온을 노리고 버디 퍼팅으로 마무리하고…. 그런 식으로 실전대로 신중한 게임을 해서 대단한 효과를 보았다. 2번홀 벚꽃나무숲을 지나 3번홀. 되돌아온 클럽하우스 근처에서 벙커를 피해 구릉 너머로 장타를 날리고 4번홀 파3짜리 앞 벙커 조심하고, 그늘집에 들어가 맥주깡통 하나 딱 소리나게 까고 5번홀 살구밭에서 잘 익어 샛노란 열매도 하나 따먹으며 도그래그 가로질러 1온 시도하고….
그렇게 클럽을 바꿔가며 꼼꼼하게 경기를 치르며 아홉 홀을 마쳤다. 일본식 그늘집에 도착했더니 2시간30분 걸린 안구수술도 때맞춰 끝이 나 묶였던 손발이 풀려나는 것이 아닌가. 참, 시간 한번 똑 떨어지게 맞대그려!
수술대에 누워서도 골프를 칠 정도니 만화를 그리는 동안이라고 다를 리 있겠는가. 어느 틈에 그림들 속에도 골프란 놈이 비집고 들어와 있었다. 내가 택하는 만화 소재는 주로 중국 고전이나 우리의 역사 이야기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장면이 나타나는 것이다. 삼국지의 장비가 바지랑대같이 긴 드라이버를 휘두르는가 하면, 관운장도 청룡언월도 대신 우드 3번을 바람개비처럼 돌리고 있지를 않나, 진시황이 라운딩을 하며 여가를 보내지 않나….
그러다가 아예 골프를 주 소재로 하는 만화를 그리기로 했다. ‘숭게숭게 감추어 은근슬쩍 삽입시킬 게 아니라 처음부터 당당하게 좋아하는 골프이야기를 만화로 엮어서 돈도 벌어보자’, 그렇게 교활한 발상으로 모 주간지에서 시작한 지면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다 보니 이제는 간교한 기술만이 점점 더 늘어서 만화의 소재를 얻기 위해 골프 라운딩을 나가고, 필드에 나가 잔디에서 주운 아이디어로 또 만화를 그리고, 그렇게 화수분에서 떡 꺼내 먹듯 하고 있는 중이다. 하고많은 예술 장르 중에 좋아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작품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만화를 업으로 타고난 사람이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게다가 골프라는 부록마저 덤으로 받고 있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