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민정부를 지나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가 탄생한 지금 5·6공의 과거사를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보이고,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운 일이다. 전혀 새로운 사실을 폭로하거나 그동안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뒤집는 것도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남정판(南廷判·62) 전 공보처 차관은 권력 심장부의 핵심실세는 아니었다. KBS 정치부 기자생활 도중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직 당한 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청와대로 입성, 대통령 정무비서실 행정관에 이어 노태우 대통령 시절 정무비서관을 지냈다. 이어 노태우 정권 말기인 1992년 5월부터 1993년 12월까지는 국무총리실 공보 및 정무비서관을 역임했고, 김영삼 정부에서는 평통 사무차장과 국가안전기획부 제1특보를 거쳐 공보처 차관을 마지막으로 공직생활을 마쳤다.
5·6공화국에서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공직생활을 했지만 권력 핵심에 가장 가까웠던 때는 정무비서실 행정관과 비서관 시절이었다. 그 기간은 짧지 않았다. 1984년 12월부터 1992년 5월까지 7년5개월 동안 청와대에서 근무했다.
비록 역사를 움직인 정치지도자나 정권의 핵심실세는 아니었지만 오랜 기간 두 명의 대통령을 직·간접적으로 보필하면서 국내 정치사를 지켜보았고, 때로는 그 현장 속으로 뛰어들었던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인 셈이다.
특히 남 전차관이 청와대에 근무했던 시기는 국내 정치사의 가장 큰 변혁기였다. 1987년 4·13 호헌조치와 6·29선언,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 1988년 5공 청산을 위한 청문회와 전두환 백담사 유배, 1989년 중간평가 유보조치, 1990년 3당 합당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정치인들의 회고록이나 각종 비사를 통해 당시 사건들의 중요한 사실관계와 흐름은 이미 대부분 드러난 상태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인 객관적 사실을 담고 있다는 보장은 없다.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기자가 남 전차관을 통해 이미 진부한 과거사가 돼버린 5·6공화국, 특히 노태우 정권의 비사를 정리하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젠가 정리될 정치사의 한 대목을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단서가 될지도 모를 일이라는 것이다.
또 역사는 한꺼번에 모든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누군가에 의해 한 꺼풀 한 꺼풀씩 벗겨지는 것이다. 실제로 남 전차관과의 인터뷰에선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몇 가지 새롭고 흥미로운 사실들이 언급됐다.
전두환, “내각제 의지 강했다”
지난 6월2일 서울시청 앞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P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남 전차관을 만났다. 1987년 6월10일, 수많은 시위대가 가득 메웠던 시청 앞 광장엔 어딘가로 바삐 오가는 차량들만이 가득했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그 날, 남 전차관은 청와대 민정비서실 행정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오래된 서고에서 책을 꺼내듯 남 전차관은 오랜 세월 속에 묻어두었던 기억들을 주섬주섬 뱉어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행정관이었기 때문에 권력의 깊숙한 부분에서 움직였던 내용까지는 잘 몰라요. 다만 기자 출신이어서 행정관으로서의 업무를 벗어난 일을 좀 했어요. 건대 사건이 났을 때 전두환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려 했습니다. 당시 사회가 엄청나게 불안한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에게 담화문을 작성하라고 하는 겁니다. 사무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작성했는데 다행히도 결국 발표되지는 않았죠. 그동안 여러 정치인들이 회고록이나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 계엄령 선포를 서로 자신들이 나서서 막았다고 하던데…. 후후, 그건 아무도 모르죠.”(건대 사건은, 1986년 10월28일부터 31일까지 전국 26개 대학생 2000여 명이 서울 건국대에 모여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 결성식을 갖고 발대식을 벌이던 중, 교내로 진입한 3000여 명의 경찰과 대치하던 끝에 총 1525명이 연행되고 이 가운데 1289명이 구속 송치된 사건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