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호

3당 합당 실무기획자 남정판 전 청와대 비서관이 밝힌 5·6공 秘史

“전두환 내각제 추진에 펄쩍 뛴 DJ, 노태우 때는 먼저 제의”

  • 글: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3-06-24 10: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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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당 합당 실무기획자 남정판 전 청와대 비서관이 밝힌 5·6공 秘史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대다. 정치판은 더하다. 하루만 지나도 ‘진부’한 과거사가 돼 버린다. 6·29선언을 이끌어냈던 6·10항쟁의 뜨거운 기억도 16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미 ‘화석’이 돼버린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그 때의 정치사를 다시 꺼낸다?

    문민정부를 지나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가 탄생한 지금 5·6공의 과거사를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보이고,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운 일이다. 전혀 새로운 사실을 폭로하거나 그동안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뒤집는 것도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남정판(南廷判·62) 전 공보처 차관은 권력 심장부의 핵심실세는 아니었다. KBS 정치부 기자생활 도중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직 당한 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청와대로 입성, 대통령 정무비서실 행정관에 이어 노태우 대통령 시절 정무비서관을 지냈다. 이어 노태우 정권 말기인 1992년 5월부터 1993년 12월까지는 국무총리실 공보 및 정무비서관을 역임했고, 김영삼 정부에서는 평통 사무차장과 국가안전기획부 제1특보를 거쳐 공보처 차관을 마지막으로 공직생활을 마쳤다.

    5·6공화국에서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공직생활을 했지만 권력 핵심에 가장 가까웠던 때는 정무비서실 행정관과 비서관 시절이었다. 그 기간은 짧지 않았다. 1984년 12월부터 1992년 5월까지 7년5개월 동안 청와대에서 근무했다.

    비록 역사를 움직인 정치지도자나 정권의 핵심실세는 아니었지만 오랜 기간 두 명의 대통령을 직·간접적으로 보필하면서 국내 정치사를 지켜보았고, 때로는 그 현장 속으로 뛰어들었던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인 셈이다.



    특히 남 전차관이 청와대에 근무했던 시기는 국내 정치사의 가장 큰 변혁기였다. 1987년 4·13 호헌조치와 6·29선언,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 1988년 5공 청산을 위한 청문회와 전두환 백담사 유배, 1989년 중간평가 유보조치, 1990년 3당 합당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정치인들의 회고록이나 각종 비사를 통해 당시 사건들의 중요한 사실관계와 흐름은 이미 대부분 드러난 상태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인 객관적 사실을 담고 있다는 보장은 없다.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기자가 남 전차관을 통해 이미 진부한 과거사가 돼버린 5·6공화국, 특히 노태우 정권의 비사를 정리하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젠가 정리될 정치사의 한 대목을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단서가 될지도 모를 일이라는 것이다.

    또 역사는 한꺼번에 모든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누군가에 의해 한 꺼풀 한 꺼풀씩 벗겨지는 것이다. 실제로 남 전차관과의 인터뷰에선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몇 가지 새롭고 흥미로운 사실들이 언급됐다.

    전두환, “내각제 의지 강했다”

    지난 6월2일 서울시청 앞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P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남 전차관을 만났다. 1987년 6월10일, 수많은 시위대가 가득 메웠던 시청 앞 광장엔 어딘가로 바삐 오가는 차량들만이 가득했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그 날, 남 전차관은 청와대 민정비서실 행정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오래된 서고에서 책을 꺼내듯 남 전차관은 오랜 세월 속에 묻어두었던 기억들을 주섬주섬 뱉어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행정관이었기 때문에 권력의 깊숙한 부분에서 움직였던 내용까지는 잘 몰라요. 다만 기자 출신이어서 행정관으로서의 업무를 벗어난 일을 좀 했어요. 건대 사건이 났을 때 전두환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려 했습니다. 당시 사회가 엄청나게 불안한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에게 담화문을 작성하라고 하는 겁니다. 사무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작성했는데 다행히도 결국 발표되지는 않았죠. 그동안 여러 정치인들이 회고록이나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 계엄령 선포를 서로 자신들이 나서서 막았다고 하던데…. 후후, 그건 아무도 모르죠.”(건대 사건은, 1986년 10월28일부터 31일까지 전국 26개 대학생 2000여 명이 서울 건국대에 모여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 결성식을 갖고 발대식을 벌이던 중, 교내로 진입한 3000여 명의 경찰과 대치하던 끝에 총 1525명이 연행되고 이 가운데 1289명이 구속 송치된 사건을 말한다)

    3당 합당 실무기획자 남정판 전 청와대 비서관이 밝힌 5·6공 秘史
    -전두환 대통령 당시 행정관으로 근무하면서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다른 일이 있나요.

    “청와대 내부에서 내각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은 전대통령이 유럽순방(1986년 4월5일~21일)을 마친 직후입니다. 4월인가 5월인가 그래요. 대통령은 참모로부터 절대 배우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이 세상에서 자기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최고다 이거죠. YS나 DJ, 다 마찬가지였어요. 대신 다른 나라 정상들에게 배우죠.

    그때 전대통령이 다녀온 곳이 영국과 독일 등이었어요. 영국을 방문했을 때 영국 대처 수상으로부터 ‘민주주의를 하려면 내각제를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입디다. 독일에 가서도 총리에게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요. 그래서 오자마자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게 됐던 것이죠. 내각제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가 굉장히 강했습니다. 그런데 집권여당인 민정당 노태우 대표측에서 완강하게 반대하고 저항했습니다. 물론 YS와 DJ도 반대했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각제 개헌문제에 대해 당시 신민당 이민우 총재측과 토론을 많이 했습니다. 막후 실력자였던 김영삼 상임고문이 1987년 초에, 아마도 ‘신동아’였던 것 같은데,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내각제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발언했거든요. 결국 그해 4월 이민우 총재가 내각제를 전제로 한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다가 YS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사실상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아마도 YS의 성격 때문이 아니었나 싶어요. 자신이 해야지 남이 하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는 성격이거든요. 결국 전대통령의 내각제 개헌 시도는 양김의 반대와 함께 내부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4·13 호헌조치는 박철언 작품

    노태우 전대통령이 4년 전 모 월간지를 통해 정리한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과는 사뭇 다른 주장이다. 노 전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유럽에 가기 전에는 내각제에 대해 단 한마디도 없던 전대통령이 누구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강한 소신을 피력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면서 “하여튼 전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내각제를 추진하기로 결정했다”고 술회했다. 내각제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노 전대통령은 다만 “호헌(護憲)에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는데 내각제로 급선회하는 것은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수동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는 정도의 반응만 보였다”고 밝혔다. 결국 내각제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고 1987년 4·13 호헌조치가 강행됐다. 당 대표로 취임할 때부터 호헌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노 전대통령의 바람대로 된 셈이다.

    남 전차관 등 청와대 정무팀은 호헌조치에 크게 반대했지만 안기부의 힘에 밀리고 말았다.

    “청와대 정무팀에서는 전부 다 반대했어요. ‘지금 시점에서 하면 안 된다. 국민들이 다 들고 일어날 것이다’라고 전대통령에게 건의했어요. 정무팀에서 대안을 만들었는데, 꼭 해야 한다면 ‘국민을 설득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 절차를 밟기 위해서는 시일도 필요하고 이벤트도 필요하다. 지금부터 야당을 설득하지 못하더라도 몇 개월 동안 국민을 설득하는 작업을 하고 7~8월에 가서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죠. 그런데 결국 안기부 쪽 생각대로 진행되고 말았습니다. 안기부 박철언팀에서 추진했는데 정무에서 반대하니까 공보수석실로 넘겨서 홍보논리를 만들고, 대책도 세웠어요. 그 전에는 정무에서 다 했는데. 그것 때문에 난리가 났죠.”

    4·13 호헌조치 이후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게 일었고 마침내 6·10항쟁으로 이어져 결국에는 민정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호헌을 철폐하고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6·29선언을 하게 된다.

    3당 합당 실무기획자 남정판 전 청와대 비서관이 밝힌 5·6공 秘史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 노태우 대통령과의 영수회담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불필요한 논쟁입니다만 6·29 선언에 대해 말들이 많았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 양측 모두 서로가 자신들의 결단이었다면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6·10항쟁이 있던 날 노태우 후보를 뽑는 민정당 전당대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축하 리셉션이 힐튼호텔에서 있었어요. 리셉션이 끝나고 전두환 대통령이 청와대로 돌아가야 하는데 시청 앞에서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시위대가 그대로 남아 있었죠. 그날 저녁 전대통령이 관저에 들어가서 이순자 여사하고 6·29 선언을 할 때까지 굉장히 깊은 고민을 했어요. 미국에서 유학중이던 아들이 CNN 뉴스를 보고 한국정치가 굉장히 큰 위기 상황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면서 걱정하는 전화를 했다고 하더군요.

    하루는 영부인 측근인 한 비서관이 ‘전두환 대통령이 직선제를 받으려고 한다. 두 내외분이 그동안 밤잠을 설치면서 고민한 끝에 그런 결심을 하신 모양이다. 이걸 당신이 적절히 활용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노태우 후보 쪽에서는 결사 반대하던 상황이었지요. 활용방법을 고민하던 몇 일 후 당시 정무수석이었던 김윤환씨가 기자들과 이야기를 하던 중에 그런 이야기를 얼추 내비칩니다. 슬쩍 흘린 것이죠. 그때 난 전 대통령이 결심을 굳히고 정무수석에게 노태우 후보측과 접촉해보라는 지시를 내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노후보는 6월29일까지 못 하겠다고 완강히 저항을 했죠.

    그런데 내가 나중에 안기부 (제1)특보로 가서 만난 관계자와 이병기씨(당시 안기부 제2특보)가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노후보 쪽에서 이미 직선제를 하려고 깊이 연구를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러면 왜 반대를 했느냐’고 되물었더니, ‘그걸 받겠다고 하면 전두환 대통령 쪽에서 또 다른 술수를 쓸지 몰라서 반대하는 척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양쪽 이야기가 다 맞다는 것입니다. 노후보 쪽에서도 상당히 연구 검토를 했던 것 같고, 전대통령 쪽에서도 깊은 고민 끝에 결심했던 것이 사실이니까요.”

    -6·29 선언 이후 국회에서 개헌을 할 때 5년 단임 대통령제 이외에 청와대 내부적으로 논의된 다른 대안은 없었나요.

    “정부통령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죠. 내가 제의했었는데, ‘우리가 필요한 사람을 대통령후보로 하더라도 부통령은 호남지역에서 괜찮다고 평가받는 사람을 후보로 하자. 양쪽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라고 그랬더니 안기부에서 반대논리가 나왔어요. 그러다가 DJ와 YS가 붙어서 나오면 이길 길이 없다고. 난 그 두 사람은 절대 붙어서 나올 사람이 아니라고 했는데,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정부통령제는 어느 선까지 논의가 됐었습니까.

    “청와대 비서관 선에서 정리돼서 안기부 쪽까지 건너갔다가 끝났죠. 실무선에서 논의되다가 안기부의 반대로 무산됐던 것입니다. 만약 그때 정부통령제가 받아들여졌다면 국내 정치가 이렇게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남 전차관은 1987년 12월 노태우 정권이 출범한 이후에도 정무비서실 비서관으로 청와대에 계속 남았다. 오히려 전두환 정권 때보다 권력의 핵심부에 더욱 가까워졌다. 1988년 정권 초기 새로 취임한 최창윤 정무수석비서관과 함께 정무팀을 실질적으로 운영하게 된 것.

    남 전차관의 기억은 1989년 3월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 유보조치로 건너뛰었다. 1988년 총선에서 민정당이 참패하고 DJ의 평민당, YS의 민주당, JP의 공화당 등 야3당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여소야대’ 구도 속에서 중간평가는 노 정권의 최대 위기였다. 하지만 야당의 보이지 않는 도움으로 ‘중간평가 유보’로 무사히 넘겼다. 과연 그 막후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와 관련, 그동안 많은 비사들이 쏟아져나왔다. 1989년 3월10일로 예정된 노태우-김대중 영수회담 직전 박철언 청와대 정책담당보좌관이 막후에서 DJ와 회동, 양해를 구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태다. 다만 박보좌관이 노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심야에 동교동 지하실로 DJ를 찾아갔을 때 돈까지 건넸다는 내용은 진위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책평가는 대국민 사기극

    -중간평가를 앞두고 박철언 보좌관이 DJ를 찾아갔을 때 비자금이 전달됐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박철언씨가 직전에 동교동에 간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DJ의 성격상 돈은 전달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DJ는 정부 여당으로부터 돈을 그렇게 쉽게 받지 않아요. 1990년인가 그 해 막내아들(홍걸) 결혼식을 앞두고 청와대에서 영수회담이 있었어요. 내가 부조금을 좀 보내야 할 것 아니냐, 영수회담 때 주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던 적이 있습니다. 노대통령도 흔쾌히 받아들였어요.

    대통령이 영수회담 끝난 직후 부조금을 건넸는데 DJ는 안 받았어요. 측근들이 급하게 의논해서 찾은 대안이 모 기업인을 불러서 대신 전달해달라고 부탁했죠. 그래서 그 기업인이 DJ를 만나서 봉투 두 개를 꺼내 하나는 자신의 성의고 다른 하나는 청와대에서 전달해주라고 해서 가져왔다고 하니까, DJ가 ‘당신이 준 것은 고맙게 받아 쓰겠소. 하지만 이것(청와대에서 보낸 것)은 내가 받을 돈이 아닙니다’면서 거절했다고 해요. 그래서 그 돈은 다시 청와대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DJ가 중간평가 유보를 묵인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YS는 중간평가 하라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세를 했습니다. 반면, DJ는 조용히 관망했었죠.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중간평가는 곧 노대통령의 신임을 묻는 것인 만큼 신임이 통과되면 양김의 존재 자체가 자칫 위기에 빠지게 될 수도 있는 ‘카드’였어요. 어떻게 보면 양김이 코너에 몰려가는 상황으로 볼 수도 있지요.

    박철언씨가 동교동에 갈 무렵, 내 역할은 대통령이 야당 총재를 만났을 때를 대비한 말씀 자료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야당 총재가 제기할 각종 문제에 대한 답변 내용을 준비했던 것이죠. 그리고 회담 당일 날 아침에는 회담 전략을 A4용지 한 장에 만들어 드렸습니다.

    당시 내 판단으로는 양김이 중간평가를 해서는 절대 안 되는 입장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회담 전략에 ‘중간평가를 유보하자는 이야기를 절대 먼저 꺼내서는 안 됩니다. 다만 DJ가 먼저 꺼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십시오. DJ가 먼저 꺼내면 ‘당신과 나 둘이 하면 뭐하냐. 회담 끝나고 나가서 3김이 모여 합의를 해달라’고 하라고 권하십시오’라는 내용으로 정리했습니다.”

    -이날 회담에서는 중간평가가 유보되지 않았습니다. DJ가 신임과 연계해 국민투표를 하는 것은 위헌이라며 중간평가를 문제삼자, 노대통령은 이를 ‘단순정책평가’를 하자는 요구로 받아들입니다. ‘중간평가’를 ‘정책평가’로 사실상 합의한 것이죠. 어떻게 해서 나온 겁니까.

    “정책평가는 국민을 상대로 사기 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지, 말이 됩니까. 정책을 놓고 국민투표가 가능합니까. 정책이 잘못됐으면 고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빠져나가려는 수였던 것이죠. 그 전부터 청와대 안에서 정책평가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나는 말도 안 된다고 도외시해버렸어요. 나중에 보니까 DJ가 청와대에 들어오는데 박철언씨가 옆에 보이더군요. DJ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박철언씨가 와서 정책평가로 하자니까 상당히 반가웠을 겁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합의했던 것이지.

    정무 쪽에서는 처음부터 유보하자고 주장했어요. ‘중간평가를 해서 득 볼 사람이 아무도 없다. 왜 정력 낭비를 하려고 하느냐. 정무 쪽에서 정치학자들에게 알아보니까 세계 정치사에 국민투표로 대통령에 선출된 사람이 중간평가를 받은 경우가 없었다’는 논리였죠. 하지만 결국 정책평가로 결정됐고, 이춘구씨가 팀장이 돼서 중간평가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어요.”

    YS-노, 중평 이전 합당논의 시작

    -결국 중간평가는 유보됐는데.

    “유보발표 1주일 전쯤 측근 참모들끼리 모여서 중간평가 국민투표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최창윤 정무수석이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유보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다른 쪽에서 ‘무슨 소리냐. 이미 다 결정됐고, 정책평가로 하면 되지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주장하더군요.

    2∼3일 지난 다음에 또다시 문제를 제기했어요. 홍성철 비서실장도 상당히 동조했어요. 그러자 대통령이 검토해보라고 하더군요. 김윤환씨에게 DJ측 김원기 의원하고 의논해 보라고. DJ 입장에서는 자신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청와대가 일방적으로 유보한다는데, 정치적으로 부담도 되지 않으니 싫을 이유가 없었겠죠. 그래서 묵인했던 것이고 그래서 유보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YS 쪽은 어떻게 정리했나요.

    “YS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냥 혼자 날뛰라고 내버려뒀죠. 자신의 존재가치만을 높이려고 하는 정치적 제스처로 봤던 겁니다. 그래서 DJ하고만 조율했어요.”

    -좀 이해가 되지 않네요. 유보 발표 이후 YS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요.

    “YS와는 그때 이미 3당 합당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씩 시작될 즈음이었어요. 그러니 큰 반발 없이 넘어갔던 거죠.”

    -그 이전부터 벌써 3당 합당 논의가 있었다는 말인가요.

    “내부적으로 논의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88년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된 직후부터입니다. JP와 합당하자는 이야기가 먼저 나왔어요. 그리고 1989년 1월 영수회담 때 노대통령이 YS에게 ‘이래가지고는 나라가 어렵지 않느냐. 같이 일 좀 합시다’라고 넌지시 그 문제를 던져요. 그때 YS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맞소. 그런데 우리 둘만 할 것이 아니고 JP하고 같이 합시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남 전차관께서는 3당 합당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셨나요.

    “총선 끝나고 난 뒤에 YS 정당 쪽에 있던 사람들과 자주 만났어요. 처음에는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평소에 자주 만나던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냥 만났죠. 그 사람들 이야기가 ‘선거 이후 올림픽도 하고, 청문회도 하고 그랬는데 이러다가는 나라꼴이 큰일나겠다. 무슨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평민당 쪽 사람들과는 대화가 안 된다’고 해요. 당시 평민당 의원들은 진보적인 사람들이 많았던 반면 민주당 의원들은 대부분 보수적인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때 내심 민주당과도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3당 합당 시나리오를 처음 만들어서 보고한 것이 아마 1989년 5월쯤이었을 겁니다. ‘합당을 위한 기본계획서’라는 보고서였는데 기본 이념은 ‘보수대연합’이었죠.”

    1990년 1월11일~13일까지 노대통령은 3당 총재 연쇄 영수회담을 통해 YS와 JP의 ‘합당’ 의지를 확인한 후 1월22일 ‘3당 합당’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새해 벽두 거함 ‘민자당호’가 출범한 것이다. 하지만 민자당은 내각제 개헌문제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파열음을 냈다. 그해 연말 내각제 합의 ‘비밀문건’이 폭로되면서 YS는 당무를 거부하고 마산으로 내려가 칩거하는 ‘마산 파동’을 일으켰다. 남 전차관이 전하는 당시의 웃지 못할 에피소드다.

    “당 대표최고위원이 된 YS가 당무를 거부하니까 대통령이 답답할 것 아닙니까. 민주계가 탈당하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굉장히 시끄러웠어요. 청와대는 YS를 안고 갈 것인가 아니면 결별할 것인가, 두 길밖에 없었는데 결국 YS를 끌어안기로 결정했어요. 그래서 그 주 토요일, 대통령이 최창윤 정무수석에게 상도동에 가서 YS를 만나서 설득하도록 시켰습니다.

    최수석은 상도동에 가서 노대통령의 뜻을 전하고, YS로부터 월요일부터 당무에 복귀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와 대통령에게 그대로 보고를 했지요. 그런데 그날 저녁 ‘YS가 마산에 가기로 했다’는 뉴스가 나온 겁니다. 최수석에게는 당에 복귀한다고 해놓고, 돌아가고 난 뒤에 기자들한테 마산에 내려가겠다고 발표해버린 것이죠. 최수석이 그날 대통령에게 얼마나 혼이 났는지. 결국 보따리를 싸야 할 형편이 되고 말았죠.”

    -YS가 마산에서 올라와 당무에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위 ‘노란봉투’ 사건이 터집니다. 노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 사건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던데요. 봉투 안에는 어떤 문건이 들어 있었나요.

    “YS가 마산에서 올라와 몇 차례 주례회동을 한 이후였을 겁니다. YS가 노대통령을 만나자마자 대뜸 노란 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집어던졌다고 해요.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했던 거죠. 통상적으로 안기부가 정치인들의 동정, 특히 고위직 정치인들의 정보를 수집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데, 그 중에 YS가 경제인들하고 접촉하는 부분을 체크해서 ‘견제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가 봉투 안에 있었어요. 그 후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것말고 또 다른 보고서가 있었다고 해요. 내각책임제를 해서 YS를 흔들어 떨어뜨려서 죽이기를 하자는 내용이었다는 데 그건 내가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문건은 어떻게 유출된 건가요.

    “처음에는 정무팀이 의심을 받았어요. 그 문건이 정무팀으로 내려오는 내용이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YS 측근 한 사람을 불러서 만났습니다. ‘1980년에 언론사에서 해직됐을 때 명분이 YS와 가깝다는 이유였는데 지금 또 YS 때문에 직장을 잃게 됐다. 그러니까 내가 그 문건을 보여달라는 요구는 안 할 테니 YS에게 보고하고 네가 그 문건을 본 후에 그 문건이 깨끗한 상태인지, 아니면 줄이 쳐 있고 코멘트가 있는지만 확인해서 알려달라’고 했어요. 노대통령은 보고서를 보면 반드시 중요한 부분에 줄을 치고 코멘트를 달았습니다. 그만큼 보고서를 열심히 꼼꼼하게 읽었어요.

    오후 되니까 전화가 왔어요. YS에게 물어봤더니 ‘아이다. 남정판이 아이다. 택도 없는 걱정 하지 말라고 그래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 사무실에 출근해보니 나와 정무수석 책상서랍이 뒤죽박죽이 돼 있었어요. 누가 뒤진 것이죠. 다행히 오해는 곧 풀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통령이 그 보고서만 비서실장에게 내려보냈다더군요. 그리고 YS가 가지고 있는 그 문건은 줄이 쳐 있지 않고 깨끗한 상태였어요. 청와대에 오기 전 안기부에서 유출된 것이죠. 그래서 청와대는 혐의를 깨끗이 벗었습니다.”

    한편 1990년 12월20일 백담사에 있던 전두환 전대통령이 연희동으로 돌아왔다. 노 전대통령은 당시 정치지도자들에게 양해를 구한 적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전 전대통령이 백담사에서 연희동으로 귀가할 때 청와대에서 사전에 야당측과 아무런 합의가 없었나요.

    “노대통령은 전 전대통령을 백담사에서 하산시키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모시고 내려와야 하는데 야당과 재야 쪽에서 반대가 거셌거든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고민하다가 결국 DJ에게 부탁을 좀 했죠. 내가 최창윤 정무수석을 모시고 가서 부탁을 했어요. 또 한번은 연말이었는데 최수석이 비서관들을 데리고 전방7사단 위문을 갔을 때였어요. 그때 나는 일요일이라 집에 있었는데 관저에서 최수석을 찾는 급한 전화가 왔어요. 노대통령이 찾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전방7사단에 빨리 오라는 전화연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강풍이 얼마나 부는지 헬리콥터가 뜰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대통령은 전용헬리콥터라도 보낼 테니 빨리 오라고 독촉하고. 결국 최수석 일행은 군 헬리콥터를 타고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내려왔죠.

    그날 대통령을 만났더니 DJ한테 가서 한번 더 부탁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동교동을 찾아가서 부탁을 했죠. 그 다음날 노대통령은 기자간담회를 하면서 전두환 대통령이 고생할 만큼 했으니까 이제는 내려와야 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자 DJ가 전 전대통령이 그 정도면 고생할 만큼 하지 않았느냐고 한마디하더군요. 그랬더니 세상이 조용해지더라구요. 그때 노대통령이 DJ에게 신세 한번 졌죠.”

    YS와 노대통령은 1990년에 이어 그 다음해에도 내각제 문제로 또 한차례 충돌했다. 당시 일각에서는 노대통령이 DJ와 손을 잡고 내각제를 추진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1991년 7월 영수회담은 DJ 쪽에서 먼저 제의했었습니다. 그해 지자체 선거에서 야당이 참패하자, 김원기 의원 등 당내 일부 중진의원들이 불만을 표출하면서 DJ가 궁지에 몰리던 상황이었습니다. DJ 입장에서는 영수회담을 통해 당내 불만을 잠재우려 했던 것이죠. 그런데 영수회담을 앞두고 DJ 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평소 같으면 회담을 앞두고 서로간에 협의를 하는데 전혀 연락이 없는 겁니다. 나중에 보니까 그 회담에서 DJ가 먼저 노대통령에게 내각제를 제안했더라구요. 기억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3∼4차례 내각제와 관련해 발언하면서 내각제 개헌에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최영철 당시 정무장관이 제주도 세미나에 참석, 내각제 관련 발언을 하면서 마침 제주도에 있던 YS가 또 한 차례 크게 반발하게 되죠.

    저도 노대통령에게 DJ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라는 보고서를 세 번 정도 올렸어요. 그랬더니 노대통령이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고 하더군요. 뭔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죠. 결국 내각제 개헌은 YS에 의해 좌절됐는데, YS의 동물적인 정치감각은 정말 뛰어납니다.”

    3당합당 때 이미 YS 낙점

    -청와대에서 돌아가는 상황이 YS에게 정보유출이 돼 문제가 됐던 적이 있다고 하던데요.

    “YS가 주례보고 때, 노대통령이 말씀하실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어요. 첫 번째 의심은 대통령 말씀자료를 만드는 비서관으로 향했는데 다행히 그 사람은 유출자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어요.

    한번은 어느 날 아침 정무비서관 회의를 하는데 어떤 비서관이 YS를 거론하며 욕을 하면서 들어온 적이 있어요. 자리에 앉아서도 계속 욕을 해서 내가 짜증을 냈어요. 그런데 1주일 후 YS 캠프에서 나한테 ‘어느 비서관이 YS 욕을 했다면서’라고 물어보더군요. 그래서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하니까 ‘우리는 그 안에 사람이 없는 줄 아느냐’고 그러더라구요.

    안기부가 감청을 해서 결국 그 사람을 잡아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비서관이었죠.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YS뿐만 아니라 박태준, 심지어 JP까지 다리를 걸치고 있었어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죠.”

    -노대통령이 YS로 후계구도를 결정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3당합당을 한 그 순간 이미 후보는 결정된 겁니다. 결과가 어땠을지 모르지만 중간평가 때 국민투표를 해서 양김의 정치생명을 한꺼번에 끝장내자는 주장도 일부에서 있었어요. 그때 노대통령은 ‘두 분은 역사적으로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노대통령은 1992년 1월 연두 기자회견 때도 사적인 입장을 전제로 ‘김영삼 대표가 대통령 후보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문구를 내용에 포함시켜 발표할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그 전날 밤에 기자회견문에서 빠졌어요. 당시 손주환 정무수석이 뺐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손수석은 권력 누수현상이 급격히 오기 때문에 안 된다고 반대했는데, 결국 그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죠. 결과론이지만 전당대회에서 YS를 선출하기까지 당내 상황이 불필요하게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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