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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1982년 아프리카 가봉에서 전두환 암살 노렸다

“특수부대 1급 킬러 3인, 폭발물 테러 위해 20일간 4000㎞ 잠행”

  •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김정일, 1982년 아프리카 가봉에서 전두환 암살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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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983년 북한은 미얀마 아웅산 묘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북한은 그 전해인 1982년에도 전 전 대통령의 목숨을 노렸다는 사실이 당시 그 계획에 깊숙이 관여했던 전직 북한 관료의 증언과 국정원 관계자들의 설명을 통해 확인되었다. 열사(熱砂)의 땅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20여일 간의 암살준비, 그 시작과 끝.
김정일, 1982년 아프리카 가봉에서 전두환 암살 노렸다

1982년 8월 아프리카 순방길에 오르는 전두환 대통령부부와 가봉의 대통령궁(뒷배경).

‘…그러나 아직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일군의 사람들이 한 인물을 제거하여 모든 체제를 궤멸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국가와 시대상황에 따라서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1963년 11월의 미국처럼 최고권력자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곳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에서 대통령의 죽음은 곧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서막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프레드릭 포사이스, ‘자칼의 날’ 중에서)

걸작 스릴러로 손꼽히는 ‘자칼의 날’은 드골 프랑스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저격범의 활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소설의 배경이 된 1960년대 프랑스가 그러했듯, 1970~80년대 대한민국 역시 군부출신 대통령들의 권력은 막강했다. 2004년의 한국은 대통령 직무정지 상태에서도 주가가 오를 만큼 안정된 나라지만, 한 사람이 온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군사독재 시절에는 분명 달랐다. 그리고 그 점을 평양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시기 북한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여섯 차례에 걸쳐 남한 대통령 제거를 계획했다. 1·21 청와대 습격,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 문세광 저격, 송추무장간첩 사건, 1982년 캐나다에서 진행된 ‘필리핀 청부암살미수’ 사건, 1983년 미얀마(당시 버마)에서 벌어진 아웅산 폭발테러가 그것이다.

3인의 실행조

‘신동아’가 이 기사를 통해 공개하는 1982년 아프리카 가봉에서의 암살계획 또한 이러한 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 당시 계획준비에 참여하고 실행과정에 동행했던 전직 북한관료(신분을 밝힐 수 없으므로 편의상 ‘A씨’로 호칭한다)와, A씨가 북한을 탈출, 망명한 이후 진술과정에 관여했던 국정원 관계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본다.



1982년 8월17일, 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조모케냐타 국제공항. 전두환 대통령 부부가 트랩을 내려와 아프리카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공항에 마중 나와 있던 케냐의 모이 대통령은 팔을 벌려 전 대통령을 환영했다. 아프리카의 8월은 건기에 해당한다. 한 해 중 지내기가 가장 편한 무렵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바람은 선선하고 햇살은 따뜻했다. 경호원들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지만 어느 곳에서도 위협을 감지할 수는 없었다.

12·12와 5·18이라는 원죄를 안고 출발한 전두환 정권은 출범 초기 잦은 해외순방을 통해 정당성 홍보에 공을 들였다. 취임 직후 이뤄진 미국과 동남아 순방을 비롯해 1982년 8월의 아프리카 4개국 및 캐나다 순방, 이듬해의 서남아 순방은 모두 이러한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17일 케냐를 시작으로 18일 나이지리아, 22일 가봉, 24일 세네갈을 거치는 아프리카 순방의 첫 여정은 누가 보기에도 평온한 것이었다.

같은 시각 나이로비로부터 2000km 남짓 떨어져 있는 콩고공화국의 수도 브라자빌. ‘주(駐)콩고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 직원숙소에 머물고 있는 정체 불명의 남자들은 전 대통령의 아프리카 도착 소식에 긴장했다. 이들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평양에서 은밀히 날아온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소속 대외정보조사부 부부장. 그가 본국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의 내용은 간단했지만 충격적이었다. ‘남조선 괴뢰대통령과 수뇌부 척살’.

이들 가운데 핵심임무를 맡은 것은 한 명의 책임자와 두 명의 전투원으로 구성된 ‘실행조’였다. 짧게 깎은 머리와 날렵한 몸매의 이 20대 위관급 장교들은 오랫동안 준비해온 듯 능숙한 일본말을 구사했다.

북한에서 일본 도쿄를 거쳐 콩고에 입국한 이들은 공관 직원에게도 일본식 가명만을 알려준 채 본명을 숨길 만큼 철저히 훈련받은 공작원이었다. 소지하고 있는 여권도 ‘공화국’의 것이 아니라 일본이나 니카라과 등 중남미 국가의 여권이었다.

한밤의 사고

1974년 후계자로 공식지명된 김정일 위원장(당시 직책은 당 중앙위 비서)은 1980년대 초부터 통일전선부와 대외연락부, 작전부, 대외정보조사부(35호실) 등의 대남·대외공작사업부서를 장악해 나갔다. 이 무렵 김 비서가 중앙당 본청에 있던 대남부서들을 따로 모아 ‘3호청사’를 지은 것은 자신의 통제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단, 다른 부서와 달리 해외사업에 주력하는 대외정보조사부는 예전처럼 중앙당 본부청사에 남았다.

‘아프리카 계획’을 추진한 대외정보조사부는 해외사업 가운데서도 ‘비공식사업’을 맡고 있는 부서다. 굳이 따지자면, 지난해 10월 사망한 김용순 대남비서가 이끌던 통일전선부가 우리의 통일부에 해당하고, 대외정보조사부는 국가정보원 1차장 산하의 해외파트에 대응한다. 1978년 최은희·신상옥 사건이나 1987년 KAL기 폭파사건 등이 모두 대외정보조사부의 작품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성격을 놓고 보면 1982년의 ‘아프리카 계획’을 대외정보조사부에서 지휘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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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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