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호

김정일, 1982년 아프리카 가봉에서 전두환 암살 노렸다

“특수부대 1급 킬러 3인, 폭발물 테러 위해 20일간 4000㎞ 잠행”

  •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4-04-28 10: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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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983년 북한은 미얀마 아웅산 묘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북한은 그 전해인 1982년에도 전 전 대통령의 목숨을 노렸다는 사실이 당시 그 계획에 깊숙이 관여했던 전직 북한 관료의 증언과 국정원 관계자들의 설명을 통해 확인되었다. 열사(熱砂)의 땅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20여일 간의 암살준비, 그 시작과 끝.
    김정일, 1982년 아프리카 가봉에서 전두환 암살 노렸다

    1982년 8월 아프리카 순방길에 오르는 전두환 대통령부부와 가봉의 대통령궁(뒷배경).

    ‘…그러나 아직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일군의 사람들이 한 인물을 제거하여 모든 체제를 궤멸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국가와 시대상황에 따라서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1963년 11월의 미국처럼 최고권력자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곳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에서 대통령의 죽음은 곧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서막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프레드릭 포사이스, ‘자칼의 날’ 중에서)

    걸작 스릴러로 손꼽히는 ‘자칼의 날’은 드골 프랑스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저격범의 활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소설의 배경이 된 1960년대 프랑스가 그러했듯, 1970~80년대 대한민국 역시 군부출신 대통령들의 권력은 막강했다. 2004년의 한국은 대통령 직무정지 상태에서도 주가가 오를 만큼 안정된 나라지만, 한 사람이 온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군사독재 시절에는 분명 달랐다. 그리고 그 점을 평양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시기 북한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여섯 차례에 걸쳐 남한 대통령 제거를 계획했다. 1·21 청와대 습격,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 문세광 저격, 송추무장간첩 사건, 1982년 캐나다에서 진행된 ‘필리핀 청부암살미수’ 사건, 1983년 미얀마(당시 버마)에서 벌어진 아웅산 폭발테러가 그것이다.

    3인의 실행조

    ‘신동아’가 이 기사를 통해 공개하는 1982년 아프리카 가봉에서의 암살계획 또한 이러한 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 당시 계획준비에 참여하고 실행과정에 동행했던 전직 북한관료(신분을 밝힐 수 없으므로 편의상 ‘A씨’로 호칭한다)와, A씨가 북한을 탈출, 망명한 이후 진술과정에 관여했던 국정원 관계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본다.



    1982년 8월17일, 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조모케냐타 국제공항. 전두환 대통령 부부가 트랩을 내려와 아프리카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공항에 마중 나와 있던 케냐의 모이 대통령은 팔을 벌려 전 대통령을 환영했다. 아프리카의 8월은 건기에 해당한다. 한 해 중 지내기가 가장 편한 무렵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바람은 선선하고 햇살은 따뜻했다. 경호원들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지만 어느 곳에서도 위협을 감지할 수는 없었다.

    12·12와 5·18이라는 원죄를 안고 출발한 전두환 정권은 출범 초기 잦은 해외순방을 통해 정당성 홍보에 공을 들였다. 취임 직후 이뤄진 미국과 동남아 순방을 비롯해 1982년 8월의 아프리카 4개국 및 캐나다 순방, 이듬해의 서남아 순방은 모두 이러한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17일 케냐를 시작으로 18일 나이지리아, 22일 가봉, 24일 세네갈을 거치는 아프리카 순방의 첫 여정은 누가 보기에도 평온한 것이었다.

    같은 시각 나이로비로부터 2000km 남짓 떨어져 있는 콩고공화국의 수도 브라자빌. ‘주(駐)콩고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 직원숙소에 머물고 있는 정체 불명의 남자들은 전 대통령의 아프리카 도착 소식에 긴장했다. 이들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평양에서 은밀히 날아온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소속 대외정보조사부 부부장. 그가 본국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의 내용은 간단했지만 충격적이었다. ‘남조선 괴뢰대통령과 수뇌부 척살’.

    이들 가운데 핵심임무를 맡은 것은 한 명의 책임자와 두 명의 전투원으로 구성된 ‘실행조’였다. 짧게 깎은 머리와 날렵한 몸매의 이 20대 위관급 장교들은 오랫동안 준비해온 듯 능숙한 일본말을 구사했다.

    북한에서 일본 도쿄를 거쳐 콩고에 입국한 이들은 공관 직원에게도 일본식 가명만을 알려준 채 본명을 숨길 만큼 철저히 훈련받은 공작원이었다. 소지하고 있는 여권도 ‘공화국’의 것이 아니라 일본이나 니카라과 등 중남미 국가의 여권이었다.

    한밤의 사고

    1974년 후계자로 공식지명된 김정일 위원장(당시 직책은 당 중앙위 비서)은 1980년대 초부터 통일전선부와 대외연락부, 작전부, 대외정보조사부(35호실) 등의 대남·대외공작사업부서를 장악해 나갔다. 이 무렵 김 비서가 중앙당 본청에 있던 대남부서들을 따로 모아 ‘3호청사’를 지은 것은 자신의 통제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단, 다른 부서와 달리 해외사업에 주력하는 대외정보조사부는 예전처럼 중앙당 본부청사에 남았다.

    ‘아프리카 계획’을 추진한 대외정보조사부는 해외사업 가운데서도 ‘비공식사업’을 맡고 있는 부서다. 굳이 따지자면, 지난해 10월 사망한 김용순 대남비서가 이끌던 통일전선부가 우리의 통일부에 해당하고, 대외정보조사부는 국가정보원 1차장 산하의 해외파트에 대응한다. 1978년 최은희·신상옥 사건이나 1987년 KAL기 폭파사건 등이 모두 대외정보조사부의 작품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성격을 놓고 보면 1982년의 ‘아프리카 계획’을 대외정보조사부에서 지휘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82년 8월초 콩고에 입국한 3인의 실행조가 대외정보조사부 소속이었는지 인민무력부 특수부대로부터 차출된 인원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자신들을 지원한 현지 공관원들에게조차 정확한 신분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 이들은 입국 직후부터 전 대통령의 주요 방문예정지를 답사하며 사전정보를 수집하고 거사장소를 물색했다.

    일본 도요타자동차제 랜드 크루저 지프에 몸을 실은 이들은 일본인 상사원으로 신분을 위장한 채 아프리카의 험한 흙 길을 누비며 콩고, 가봉, 적도기니를 넘나들었다. 무려 4000km가 넘는 긴 여정이었다. 현지 안내와 자동차 운전을 담당할 두 사람이 동행했다. 이들은 콩고 인접 국가에 주재하는 북한 공관에서 차출됐다. 이들이 답사여행에 항공편이 아닌 자동차를 이용한 것은 공항에 비해 육로가 비교적 검색이 까다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면부지의 험지 아프리카에서 벌이는 일이 마냥 순조로울 수 만은 없는 일. 답사 여행이 한창 진행중이던 8월 중순, 이들은 임무를 포기해야 할 정도의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다. 적도기니의 산길을 달리던 지프의 핸들축이 부러지면서 자동차가 언덕 밑으로 10차례 이상 구를 만큼 큰 사고를 당한 것. 그 바로 아래에는 200m에 달하는 경사지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자동차가 나무에 걸린 덕분에 이들은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실행조를 포함해 탑승자 전원이 곳곳에 흉터가 남을 만큼 큰 부상을 입었지만 병원에 누워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응급치료를 받은 이들은 곧바로 임무를 속행하기 위해 차를 달렸다. 이들이 수집한 정보는 바로 콩고대사관에 설치된 본부에 전달됐고, 본부는 이를 평양 중앙당 본청에 있는 대외정보조사부에, 대외정보조사부는 김정일 비서에게 보고했다. 계속되는 교신 끝에 ‘거사’의 구체적인 계획이 완성됐다. 디데이는 8월22일, 장소는 가봉의 수도 리브르빌이었다.

    검은색 여행가방

    암살 방법으로는 당초 계획했던 대로 폭발물 설치를 택했다. 8월22일 가봉에 도착하는 전두환 대통령 일행이 이날 저녁 대통령궁(Palais Presidental) 영빈관에서 열리는 환영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대기하는 지점에 폭발물을 설치하고, 이를 원격조정장치로 폭파시킨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실행조는 답사여행 내내 지프 한 켠에 폭발물과 기폭장치, 원격조정장치 등이 들어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샘소나이트 여행용가방 두 개를 싣고 다녔다.

    시내 중심가를 바라보고 있는 가봉 대통령궁은 1970년대 개발붐이 한창이던 시대에 거액을 들여 건설한 가봉인들의 자랑거리로,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대리석과 그리스에서 수입한 기둥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건물이었다. 대통령궁은 번화가에서 멀지 않은데다 그 주변은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까닭에 도주가 용이했다. 또한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리브르빌의 고가도로는 쫓기는 이들에겐 필수적인 안전요소였다.

    구체적인 거사장소를 고르는 일은 현장을 답사한 실행조의 몫이었지만 거사를 벌일 나라를 결정하는 것은 평양의 권한이었다. 전 대통령 암살이 성공할 경우 해당국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조치는 배후로 의심되는 북한과의 국교단절 및 대사관 추방. 본부가 마련된 콩고가 1965년 한국과 단교한 이래 북한대사관만 설치돼 있던 나라인데 비해, 가봉은 남북한과 동시 수교를 맺고 있는 상태였다. 특히 전 대통령이 순방하는 네 개 나라 중 규모가 작은 나라라는 점도 고려했다. 나이지리아 등 아프리카 강국들과 달리 가봉의 경우 국교가 단절된다 해도 북한 입장에서 크게 잃을 것이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계획이 완성되자 남은 것은 실행뿐이었다. 이들이 거사를 위해 다시 가봉으로 출발한 것은 전 대통령이 아직 나이지리아에 머물고 있던 8월19일 무렵이었다. D-3일, 콩고 브라자빌의 본부를 떠나 인적이 드문 밤길을 300여㎞ 달렸다. 험한 산지를 넘어 가봉 국경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인 8월20일 새벽. 강철 같던 실행조 요원들의 얼굴에도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다섯 시간이 넘는 밤길 주행이었지만 아무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같은 시각, 거사 예정지인 가봉의 수도 리브르빌에서 10km 남짓 떨어진 오웬도항. 호텔과 상점이 즐비해 흡사 마이애미 비치를 연상케 한다는 이 호사스러운 도시 앞바다에는 산뜻한 계절을 맞아 레저를 즐기는 요트가 즐비했다. 그 바다 한켠에 주변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배 한 척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북한국적의 ‘동건애국호’였다.

    ‘동건애국호’는 거사 후 실행조 일행이 한층 강화된 검문검색이나 국제적인 추적을 피해 안전하게 본국으로 대피할 수 있도록 평양의 중앙당 작전부에서 보낸 ‘퇴로’였다(이듬해 발생한 아웅산 사건 때 공작원들을 원산에서 미얀마까지 실어 나른 것도 바로 동건애국호였다). 아프리카 거사계획이 수립된 직후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대서양에 당도했던 이 배는 리브르빌로 장소가 결정되자 오웬도 앞바다에 머무르며 초조하게 거사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김정일, 1982년 아프리카 가봉에서 전두환 암살 노렸다

    1983년 10월 미얀마 아웅산 묘소에서 폭발물이 터지기 직전 촬영한 한국 대표단 모습. 하단의 얼룩은 사진기자의 핏자국이다.

    아프리카의 국경 풍경은 이채롭다. 국경이라면 흔히 철조망과 삼엄한 경비를 연상하지만 콩고와 가봉의 접경지대에선 초라한 검문소에서 권태에 지친 경찰들이 요식행위에 가까운 검문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국경을 넘은 새벽, 실행조를 포함한 일행 다섯 명은 혹시나 하며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았지만 예상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국경 초소 근무자는 이들의 여권을 쓱 훑어보고 도장을 꽝꽝 내리찍었다. 여권을 돌려받은 일행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며 가봉의 국경도시 프랑스빌에 들어섰다. 호텔을 찾아 여장을 풀자 어느새 오전이 다 가고 있었다. 거사 예정시간으로부터 50시간이 남은 시점이었다.

    그러나 콩고주재 북한대사관 본부에 보고전화를 하고 돌아온 책임자의 표정이 심하게 굳어졌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임에 틀림없었다. 모두들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철수하랍니다. 계획이 취소되었답니다.” 구체적인 이유나 설명은 없었다.

    전 대통령의 일정이 바뀐 것인지, 계획이 새어나가기라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본부의 부부장이 던진 말은 딱 한마디, 평양의 중앙당 본청에서 작전중단 지시가 내려왔다는 것 뿐이었다.

    이들이 갑작스러운 작전취소의 배경을 알게 된 것은 본부로 돌아오고나서 한참 뒤였다. 계획을 취소한 것은 책임자였던 김정일 비서가 아니라 김일성 주석이었다. 당초 김 비서는 김 주석에게 관련사실을 보고하지 않고 아프리카 계획을 추진했다. ‘주적(主敵)’의 목숨을 끊어야 승기를 잡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도, 이를 통해 아버지 못지않은 정치적 위상을 확보하겠다는 욕심도, 가봉 정도는 잃을 수도 있다는 정치적 판단도 모두 김 비서의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실행 시간이 다가오자 김 비서는 그간의 독자추진을 접고 ‘금수산 의사당’에 머무르고 있던 아버지에게 관련내용을 보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올 것이 분명한 사안을 김 주석의 승인 없이 감행하는 데 부담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김 비서는 1980년 노동당 중앙위 조직지도부장이 되면서 실권을 장악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외교분야는 1985년 무렵까지 김일성 주석의 결재를 거쳐야 했다는 것이 당시 북한 외교부 관계자의 전언이다.

    아프리카 계획을 보고받고 김 주석은 대노한 것으로 전해졌다. ‘가봉쯤은 잃어도 좋다’는 김 비서의 판단과는 달리, 김 주석은 ‘계획이 성공하든 실패하든일단 일이 터지면 아프리카 전체가 등을 돌리게 될 것’이라며 김 비서를 질책했다는 것. 단순히 가봉과의 단교 정도가 아니라 비동맹회의의 중심축인 아프리카 국가들이 일제히 북한과의 관계를 재검토하게 만드는 무모한 시도라는 꾸중이었다고 한다.

    못다 이룬 시도, 그러나…

    남한과 체제경쟁을 치열하게 벌이던 1980년대 초반 북한에게 아프리카는 특별한 곳이었다. 세계를 통틀어 남한보다 더 많은 나라(47개국)와 수교를 맺고 있는 유일한 대륙이었고, 40여개 나라에 공관원을 파견한 땅이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북한이 미묘한 입장에 처할 때마다 ‘주한미군 철수’ 등을 주장하며 가려운 곳을 긁어준 응원군이었으므로 북한은 이들에게 농업이나 군사지식을 아낌없이 제공해왔다.

    특히 중국이나 소련과의 외교가 특별히 강화될 것도 약화될 것도 없는 관계였던 반면 대(對)아프리카 외교는 공들여 준비해야 하는 중요한 분야였다. 북한 외교부에서 아프리카를 담당하는 6, 7국은 단연 활동이 많은 부서였고, 김정일 위원장도 여러 차례에 걸쳐 “외교부 일은 6,7국이 다한다”며 치하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듯 공들여온 아프리카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전 대통령 암살계획을 김 주석이 승인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후계자 공식지정 8년차, 내정 관할 2년차에 불과했던 김 비서가 간과한 ‘큰 그림’을 김 주석은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실행조가 작전취소를 하달받은 나흘 뒤인 8월24일 아침, 2박3일간의 가봉 방문일정을 마친 전 대통령 일행은 리브르빌의 레옹음바 국제공항에서 봉고 가봉 대통령의 배웅을 받으며 세네갈로 향했다. 대통령 일행을 태운 공군1호기가 세네갈과 라스팔마스를 거쳐 캐나다로 떠난 것은 8월28일. 올 때처럼 떠날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그 광경을 TV와 신문을 통해 지켜본 북한 관계자들의 심정이 갑갑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계획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듬해 10월 북한은 미얀마의 수도 양곤(당시 명칭은 랑군)에 인민무력부 소속 특수부대원들을 보내 아웅산 사건을 감행한다. 아프리카 계획과 아웅산 사건이 여러모로 비슷하다는 사실은 두 사건이 같은 선상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두 경우 모두 투입된 핵심 실행조는 세 명이었고, ‘동건애국호’가 동원되었으며, 전 대통령의 외국순방을 노렸고, 폭발물을 사용했거나 준비했다. 차이가 있다면 아웅산 사건은 실행에 옮겨져 수행중이던 서석준 부총리 등 17명의 한국인을 숨지게 했다는 점이다.

    아웅산 사건은 김일성 주석의 반대에 부딪혀 아프리카 계획을 포기했던 김정일 비서가 이듬해 계획을 갈고 닦아 실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프리카에 비하면 역내 단결이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던 서남아시아의 분위기, 이미 남한 쪽으로 상당히 기울어진 서남아시아의 대세 등을 감안해 미얀마를 결행 장소로 선택했고, 김 주석도 최종적으로 계획을 승인했던 것으로 관측된다.

    안기부도, 경호실도 몰랐다

    대통령에 대한 위해가 매우 중대한 사안임엔 틀림없지만, 이를 실행 전에 감지한다는 것, 특히 머나먼 이국 땅에서의 암살계획을 미리 파악해 대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아웅산 사건의 경우에도 사전정보가 거의 없었듯 가봉에서의 암살계획에 대해 당시 우리측 정보기관은 전혀 알지 못했다.

    관련정보가 한국 관계당국에 처음 전달된 것은 10여년이 지나서의 일. 당시 계획에 참여해 실행조 요원들과 동행했던 A씨가 망명해 우리 정보기관에 진술한 것이 처음이었다. A씨는 “가봉에서의 움직임을 설명하자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관계자들이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누구에게서도 이 내용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 중반까지 안기부 간부를 지내다 퇴직한 한 인사는 “캐나다에서의 암살계획이나 미얀마 아웅산 폭탄테러 이외에 다른 암살계획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1990년대 초반 은퇴한 전 안기부 대공수사국 관계자는 “탈북 관료 A씨의 진술이 가봉 암살 계획에 관해 안기부가 입수한 첫 정보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회사(국정원 관계자들이 국정원을 가리킬 때 쓰는 용어)에서도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회고했다.

    그렇다면 대통령에 대한 위협을 가장 먼저 감지해 대응할 책임을 지고 있는 청와대 경호실은 어땠을까. 유감스럽게도 대통령 암살 계획을 감지하지 못하기는 경호실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1981년부터 85년까지 대통령 경호실장을 맡고 있던 장세동씨는 “당시 아프리카가 남북한이 동시에 수교한 국가가 많은 지역이었으므로 순방에 앞서 경호 수위가 높았지만, 특이징후나 구체적인 위협에 대해서는 보고 받은 바 없다”고 말한다. 이후에도 관련 내용을 전해들은 적은 없었다는 것. 그러면서 장씨는 “그러한 정보를 책임자였던 내가 몰랐을 리 없으므로 잘못된 정보일 것으로 본다”며 “구체적인 사실과 근거를 확인한 뒤에 기사화해달라”고 말했다.

    한편 A씨의 진술로 인해 충격을 받은 것은 한국의 안기부뿐만이 아니었다. 정보협조를 받은 일본 정보기관도 발칵 뒤집혔다. 암살계획의 핵심 요원들이 일본 여권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도쿄를 경유해 아프리카로 향했다는 것은 자국의 출입국시스템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

    극단의 시대

    서울에 온 직후 일본측 정보요원들을 만나 당시 북한 요원들이 사용한 일본식 가명, 인상착의 등을 전달했다는 A씨는 “KAL기 사건 등으로 인해 이미 북한 공작원들이 일본 여권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일본 여권 소지자들이 남한 국가원수를 암살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아찔해 하는 눈치였다”고 전했다. 아웅산 사건 당시 미얀마에 입국했던 북한 공작원들은 선박을 이용해 원산에서 양곤으로 바로 이동했기 때문에 일본과는 관련이 없었다.

    80년대는 극단의 시대였다. 각기 20여년 동안 철권으로 나라를 지배한 전임자로부터 권좌를 물려받은 남과 북의 권력자에게, 공존이나 협력 같은 말은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던 시기였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무너뜨리는 것이야말로 승리의 지름길이던 일촉즉발의 시대에, 남북간의 긴장과 갈등은 정통성이 부족했던 두 권력자의 권좌를 받쳐주는 ‘안전판’이었다.

    아웅산 사건 직후 귀국한 전두환 대통령에게 군 최고지휘관들이 즉각적인 대규모 보복공격을 주장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82년 아프리카에서 전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면 남과 북은 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일 비서의 아프리카 계획은 대립의 시대가 낳은 모험주의의 위험성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다. 그 극단의 증오를 극복하고 남측 지도자가 평양을 방문해 북측 지도자를 포옹하기까지는, 웃음 띤 얼굴로 총기가 즐비한 인민군의 사열을 받게 되기까지는, 그로부터 17년 10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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