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백두대간 종주기⑥|작점고개에서 늘재까지

세조 따라 걸으니 견훤이 막아서고… 긴 세월 켜켜이 쌓인 역사와 전설

  •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세조 따라 걸으니 견훤이 막아서고… 긴 세월 켜켜이 쌓인 역사와 전설

2/5
안부를 지나 국수봉으로 가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이다. 힘들게 고개를 넘어서자 시원한 바람이 반겼다. 휴식을 취할 만한 곳을 찾는데 왼편으로 넉넉한 자리가 보였다. 보통 산속에서 보는 시멘트 구조물은 흉물스럽기 십상인데 이 물건은 달랐다. 바위에 계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앉으면 식사하기에 적당하고, 올라서면 서부 능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누군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여러 가지를 배려해 만든 자리처럼 느껴졌다.

국수봉에서 큰재로 가는 길에는 겨울과 봄이 공존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난한 오솔길이지만 낙엽 밑에는 아직도 얼음이 붙어 있었다. 몇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비탈길을 내려서니 아낙네들이 포도 과수원에 두엄을 뿌리고 있다. 푹 썩은 두엄 냄새는 언제 맡아도 싫지가 않다. 마치 오랫동안 떠나 있던 고향집을 다시 찾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과수원을 왼쪽으로 흘려보내고 도로변으로 나왔다. 이곳이 바로 920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신곡리로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다. 길가의 농가에 들어가 물을 구하니 귀가 어두운 할머니가 손짓으로 답하며 가마솥을 열어젖혔다. 할머니는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실 물만 조금 가져가.” 가마솥을 들여다보니 검은 먼지가 둥둥 떠다니는 물이 반쯤 담겨 있다. 입으로 후후 불어가며 바가지에 물을 담아 바짝 말라붙은 목을 축였다. 이런 물을 두고 꿀맛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쓰레기로 뒤덮인 생태학교

920번 도로를 건너서자 부산녹색연합생태학교 운동장이 보였다. 원래 이곳은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가 있었는데 1997년 폐교되면서 생태교육장이 들어섰다. 백두대간과 생태교육이면 궁합이 제대로 맞는 셈이다. 알림판의 글씨도 꽤 의미심장했다. ‘우리의 미래와 통일을 위해 민족정기 및 환경교육을 할 귀중한 교육장을 우리 스스로 지키고 보호하도록 합시다.’ 하지만 운동장을 지나 교실쪽으로 들어서자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유리창은 여기저기 깨져 있고 화단에는 쓰레기가 가득했다.



마음이 울적해지니 몸도 무거워졌다. 야트막한 산지를 따라 회룡재까지는 가볍게 넘었으나 회룡재에서 개터재로 가는 동안 다리가 풀렸다. 이 구간에서 그나마 위안이 돼준 것은 서편 능선을 붉게 물들인 노을이었다. 개터재에서 윗왕실까지는 고즈넉한 산길. 어둠 속에서 마을이 가까워지자 경운기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마을 어귀에서 택시를 기다리는데 버스정류소 옆에 작은 누각이 하나 보였다. 랜턴을 비춰 읽어보니 ‘최만개 효자각’이라 쓰여 있다. 조선시대 최만재라는 사람의 효행을 기리는 비각이었다. 중병에 걸린 어머니를 위해 뒷산에 단을 쌓아 천일기도를 올리자 어머니의 병이 깨끗이 낫고, 한겨울에 어머니가 참외를 먹고 싶어해 정성껏 기도하니 꿈에 노인이 나타나 참외 있는 곳을 알려주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시묘살이를 하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3년간 곁에서 그를 지켜주었다고 한다.

3월21일 새벽. 경북 상주시 공성면 윗왕실 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백학산까지는 긴 오르막. 잡목과 소나무 숲길을 지나자 길게 뻗은 과수원이 나타나고 일찍부터 거름을 내는 농부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행여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들의 심기를 건드릴세라 잰 걸음으로 통과했다. 높은 산이 없어 힘은 덜 들었지만 수차례나 독도에 애를 먹었다. 백두대간은 49번 지방도로를 건너 지기재동 마을쪽으로 가다가 오른쪽 산줄기로 이어지는데 하마터면 엉뚱한 곳으로 들어갈 뻔했던 것이다.

인적이 드문 숲길에 퍼질러 앉아 우유와 빵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소나무 향기에 취해 1시간 남짓 걷다 보니 널찍한 아스파트길이 나왔다. 여기가 바로 신의터재. 본래 지명이 신은현이었던 이곳은 임진왜란 때 김준신이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뒤부터 신의터재로 불렸다. 하지만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려는 의도로 그 이름을 ‘어산재’로 바꾸었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6년에야 신의터재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신의터재 인근 화동면 판곡리에는 낙화담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김준신의 가족들이 왜병의 손에 죽을 수 없다며 이곳에 몸을 던졌다고 전해진다.

신의터재에서 무지개산까지 완만하게 이어지던 백두대간은 윤지미산에서 한껏 치켜 오른다. 윤지미산 정상에는 쉬어가기에 무난한 공터가 있지만 조망은 그리 뛰어나지 않다. 오히려 윤지미산 못미쳐 왼쪽으로 바라다보이는 판곡저수지가 추천할 만하다. 윤지미산에서 화령재까지는 급한 내리막. 화령재는 6·25전쟁 당시 격전지로 유명하며 현재 전적비가 남아 있다.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수도사단 제17연대(연대장 김희준)가 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에 매복해 있다가 인민군 제15사단을 궤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승리해 국군은 낙동강 교두보를 확보했다.

2/5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목록 닫기

세조 따라 걸으니 견훤이 막아서고… 긴 세월 켜켜이 쌓인 역사와 전설

댓글 창 닫기

2023/04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