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호

노무현 정부 ‘3년차’에 부쳐

대결은 이제 그만, 국민에너지 결집해 재도약 이뤄내야

  • 글: 오연천 서울대 교수·행정학 ycoh@snu.ac.kr

    입력2005-01-24 16: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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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화와 쇄신의 기치를 내건 노무현 정부는 지난 2년간 역대 어느 정부보다 의욕적으로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하지만 개혁은 의지와 선언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참여정부는 이제 개혁 수행을 위한 역량의 한계를 냉철히 돌아보고 국민통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노무현 정부 ‘3년차’에 부쳐

    1월4일 노무현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국무회의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노무현정부의 탄생과 출범은 1980년대 이후 한국정치사에 가장 뚜렷한 획을 그은 전환점이었다. 집권 3년째를 맞은 ‘참여정부’의 국정운영 성과를 냉철하게 진단하고, 이를 토대로 바람직한 국정운영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선출과정은 사실상 지역 패권주의의 틀에서 민주화 기여도를 다툰 정당 보스들 간의 ‘제한적’ 경쟁이었다. 이 시절의 정권 경쟁은 기득권 정치세력 내에서 국정 최고지도자의 예측 가능한 선택에 좌우됐던 만큼 후보간 또는 대통령간 정책 차이를 찾기 힘들었다. 따라서 국정운영 기조의 뚜렷한 변화가 기대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난 2002년 대선은 그 양상이 사뭇 달랐다. 정치권의 중심축에서 벗어나 있던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참여정부의 공과를 따지기에 앞서 노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가능케 한 동력원이 무엇이었는지를 반드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노 대통령은 비록 소수파로 출발했지만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며 도덕적 우위를 다짐으로써 다수를 제압하는 행동지향형 지도자다. 아울러 지적 호기심이 매우 강하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한국사회의 각 영역에서 아직 중심권에 진입하지 않은 운동형 신진인사, 또는 비(非)기득권 인사로 구성된 노 대통령 참모 그룹은 개발연대 산업사회의 퇴조와 시민사회의 출현에 따른 한국사회의 권력이동과 변화욕구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셋째, 노무현 캠프는 그 동안 단선적(單線的)이었던 영·호남간 지역대결구도를 영남권 내의 대결구도로 바꾸는 한편, 세대간, 소득계층간, 이념간, 그리고 기득권의 향유 정도에 따른 개혁 대 반개혁이라는 다층적 대결구도를 이끌었다. 특히 행정수도 이전과 같은 과감한 지역균형발전 공약을 제시함으로써 외연적 지지기반을 넓히는 데 성공했다.

    정국 이끌어가는 역량의 한계

    노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로 표현되던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타파를 뜻하는 것이었다. 과거 정권에서 통치수단의 양칼로 간주되던 검찰권과 선별적 세무조사권에 집착하지 않고, 여당 영수로서 정치자금을 조달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국회의원 공천권을 마다한 것 등은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노 대통령과 참모그룹의 특성, 지지계층의 성향, 그리고 대선 공약의 파격성과 진보성향의 선거전략에 비춰 국정운영 패러다임의 획기적 변화와 주요 국가정책의 불연속성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정국을 이끌어가는 역량의 한계였다. 노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가능케 한 탈권위주의적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다양한 시대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참여정부의 산적한 개혁과제를 밀고 나가는 데 필요한 권위와 역량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달라진 국정운영 패러다임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인적, 물적, 상징적 자원이 부족했다. 이런 점에서 참여정부는 힘든 출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말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참여정부 초기의 상당수 개혁과제는 기존 정치, 행정, 경제질서를 영 기준(zero-base)에서 바꿔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기존 시스템의 저항을 극복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설득작업을 병행해야 했다.

    과거 정부들의 예를 봐도 지지기반의 결집이 견고하지 않은 정권 초기에 국정 최고지도자는 선거유세 당시의 쇄신정책이나 공감대 형성이 쉽지 않은 개혁정책을 곧바로 밀어붙이지 않고 추진속도를 조절함으로써 권위의 공백을 메우고 힘의 결집을 도모하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실익 없는 언론매체와의 전쟁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도덕적 우월주의를 앞세워 시민사회의 개혁적 에너지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기득권층과의 괴리에 따른 힘의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념적 스펙트럼의 완충을 시도하지 않았고 애초 설정한 정책기조의 색깔을 더욱 명확히 드러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개혁기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혼선을 빚었다. 시민사회로부터 다양한 의견과 주문이 쏟아졌으나 이를 제도적으로 수용하고 소화해낼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노무현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집권측은 자신들의 주장만 강변하는 특유의 수사법과 독선적으로 비치는 의견집약 방식을 통해 정치적 반대자나 비판적 국민의 감정을 악화시켰다.

    가령 후보 시절 노 대통령이 유력 언론매체를 공격한 것은 선거전략상 또는 자신의 이념 성향을 국민에게 선명하게 알리는 방편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집권 후에도 몇몇 유력매체와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운 것은 전선의 외연만 넓힐 뿐 아무런 실익이 없다는 일반인의 상식을 뒤엎는 것이었다. 더욱이 유력 매체의 사주나 편집자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매체의 애독자들은 대통령이 이해하고 감싸야 하는 국민의 일부가 아닌가.

    어처구니없게 불거진 대통령 탄핵정국도 노무현 정부의 정책실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탄핵의 시발점은 선거법 위반으로 간주된 노 대통령의 독특한 정치적 발언이었다.

    무모하게 탄핵정국을 주도한 주요 정당과 소속 국회의원들은 총선에서 참패를 맛봄으로써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하지만 탄핵정국의 원인은 노 대통령에게 있었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의 겸허한 자기 성찰이 아쉬웠다.

    탄핵정국은 국정 최고지도자의 신중치 못한 언행이 경우에 따라 정책기조의 본질을 호도하고 국민을 큰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행정수도 이전 위헌판결도 참여정부의 과욕이 빚은 정책실패의 대표적인 예다. 노 대통령도 언급했다시피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공약이 대통령 당선에 도움을 주었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국토의 균형 발전을 위해 수도권 과밀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데 반대할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행정수도 이전이 국토균형발전을 위한 최선의 대안인지, 그리고 국가경쟁력 배양이 긴요한 현 상황에서 수도이전을 추진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 철저한 토론과 준비가 있어야 했고, 최소한의 국민적 동의가 선행돼야 했다.

    제왕적 대통령제 폐해 없애려 노력

    노무현 정부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인사시스템 개혁도, 최근 교육부총리 퇴진과정에 그 허점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비록 과거에 비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집권당 출신이라는 점만으로 공직에 진출하는 관행이 여전히 살아 있고 특정지역 출신 인사들에 대한 선별적 배려가 눈에 띄는 것은 인사시스템의 개혁을 무색케 하는 점이다.

    변화와 쇄신의 기치를 걸고 정권을 획득한 만큼 노무현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의욕적으로 각종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그러나 개혁은 의지와 선언 못지않게 어떻게 실행력을 확보하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개혁의 목표와 대상이 특정 정치집단의 비현실적인 이념이나 검증되지 않은 주관적 경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면 5년 내내 실험만 하다가 끝날 수도 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고치려는 대증요법으로는 개혁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 병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파헤치는 원인요법이 주축이 돼야 한다. 개혁수행을 위한 역량의 한계를 냉철히 인식하고 인내심을 가지면서 이를 극복하는 것이 개혁성공을 위한 핵심전략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토론공화국’으로 불릴 만큼 참여정부는 토론을 정책결정의 필수과정으로 중시하고 있다. 토론을 통해 최선 또는 차선의 대안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토론에 참가한 사람들 중 최상급자가 결론을 예단하는 언급을 자제하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최상급자의 언급은 단순한 의견이 아니고 바로 하급자들의 도미노적 공감과 지지로 나타나 아예 합목적적 결론도출의 통로를 막는 것이기에 ‘최고지도자는 말을 아껴야 한다’는 경구가 동서고금을 통해 전해오는 것이다.

    아무리 제왕적 대통령제가 극복됐다 하더라도 대통령책임제에서 대통령의 언급은 그 자체가 가장 권위 있는 최고의 규범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노 대통령은 순발력과 논리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을 듣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토론에서 노 대통령이 말을 많이 하면 나머지 토론자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많이 말하기보다는 많이 듣고, 말을 하더라도 자기 생각의 일부만을 표현하는 여백의 멋과 인내의 지혜를 보여줌으로써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토론을 유도하고 그를 통해 바람직한 결론을 도출해야 할 것이다.

    갖가지 논란과 비판이 따르긴 하지만 지난 2년간 노무현 정부가 몇몇 분야에서 역대 정권과 확연히 구별되는 성과를 얻은 것은 사실이다. 돈 안 드는 선거풍토 조성과 정치자금의 투명화를 통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는 데 성공했고, 사법집행 중추기관인 검찰과 경찰의 중립적 위상을 확립하면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또 전통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하던 젊은 층과 노동계층, 빈곤층 등 정치적 소외그룹을 새로운 정치문화 발전의 장으로 이끌어내고 그들의 에너지를 적극 활용해 국민 참여의 폭을 확대함으로써 성장 중심의 개발경제시대에 견고하게 굳어진 기득권층의 우선권을 무력화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아울러 분권화·지방화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복지정책의 근저를 강화함으로써 성장시대에 오랫동안 무시되던 ‘균형’의 개념을 복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무적인 성과와는 별개로 언제 호전될지 모르는 경기침체와 더욱 악화되는 서민경제, 진전 없는 대북관계와 불안한 안보, 그리고 답보상태인 국가경쟁력은 노무현 정부의 무기력함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노 대통령의 성공은 정부의 성공이자 국민 모두의 성공이다. 만약 노 대통령이 국민의 행복과 국가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안들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국민이 모두 그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다. 지지자, 반대자를 떠나 참여정부의 실패를 방관할 수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노 대통령은 왜 많은 국민이 참여정부에 대해 불안해하는지를 직시해야 한다. 자신과 가족의 현재와 미래가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득권을 침해했기 때문에’ ‘노무현 후보에게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에’라는 떠넘기기식 대응은 사태를 더욱 어렵게 할 뿐이다. 경제와 안보에 대한 다수 국민의 불안은 노무현 정부의 불안정한 정책기조와 서투른 국정운영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겸허한 문제인식에서 국정쇄신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

    참여정부의 이념적 표상인 ‘형평’과 ‘균형’을 도모하기 위한 국정과제는 현 수준의 시책을 유지하는 선에서 마무리할 필요가 있다. 권위주의체제를 타파한 노 대통령 특유의 창조적인 정치에너지를 국가안보를 포함한 대외정책을 굳건히 하고 국민경제를 재도약시키는 데 쏟아부어야 할 시점이다.

    3년이라는 시간적 제약과 국가적 가용자원의 한계를 감안, 명실상부한 ‘선택과 집중’의 원리에 따라 자원배분의 우선순위를 과감하게 재조정하는 것이야말로 국민이 기대하는 정책목표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무릇 ‘교만함에는 약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국정 최고책임자의 최고 덕목은 겸손과 반대자를 껴안을 수 있는 포용력이라고 본다. 노 대통령은 이미 야인 또는 대통령 후보 시절 상대방의 논리를 제압해야 했던 정치적 경쟁자의 위치가 아니다. 가장 많이 듣고, 가장 많이 인내하고, 가장 고독하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 국정 최고지도자로서 국민 에너지를 다시금 결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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