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호

“어느 힘있는 집 사모님이야?”

  • 양승숙 전 국군간호사관학교장

    입력2005-02-24 15: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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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힘있는 집 사모님이야?”

    2004년 연말 한 케이블채널 골프대회에 출연한 필자(오른쪽). 라운딩에 앞서 KLPGA 정명인 프로의 코스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저여자, 어느 힘있는 집 부인이야…?”

    골프를 하면서 숱하게 들은 말이다. 워낙 라운딩을 즐기려는 사람은 많은데 골프장은 숫자와 규모가 뻔하다 보니, 군 골프장은 주말마다 각 부대별·처부별로 예약이 할당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듯 치열하게 부킹 경쟁을 해야 하는 터에 웬 여자(?)가 골프를 치고 있으니,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는 어느 힘센 집 ‘사모님’이 군 골프장을 누비고 있다고 오해할 법도 했다.

    군인이라면 으레 남자를 떠올리게 마련이니 밖에서는 아무리 ‘사상 최초 여성 장군’ 운운하며 법석을 떨어도 군복을 벗고 오르는 그린 위에서는 누가 누구인지 미처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을 게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여군 장교가 주말에 골프를 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여성이지만 당당한 군인이라고, 그러니 자격조건이 있다고 열심히 설명을 해야 겨우 티를 받는 일이 있는가 하면 우여곡절 끝에 라운딩에 나서면 멀리서 속 모르는 다른 군인들이 수근대는 이야기를 못 들은 체해야 했다. 혼자 웃어넘기면 그만이지만 한 구석에 남는 야속함은 어쩔 수 없는 법.

    ‘김밥에는 사이다, 피자에는 콜라…’하는 식으로 사람들은 군인이라면 누구나 골프를 잘 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고급 장교만 즐기는 스포츠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요즘에는 계급을 막론하고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골프를 즐긴다.



    직업의 특성상 근무지역에서 좀처럼 움직이기 어려운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휴일에도 일정한 지역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규정에 얽매여 살다 보니 남들처럼 팔도를 누비며 산행을 즐기기도 어렵고, 바다에 나가 일광욕을 즐기기도 쉽지 않은 노릇이다.

    그렇지만 그조차도 예외가 있으니 바로 나 같은 사람이다. 많은 이가 으레 ‘양승숙 장군도 오래 전부터 골프를 쳤겠거니’ 생각하지만, 사실 나의 골프 이력은 그리 길지 않다.

    30여년 군생활 내내 전후방 순환근무와 1일3교대를 하며 살아온 나는 개인시간이 주어지면 무조건 가족을 향해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 시간을 쪼개 골프채를 잡는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겨우 한숨 돌리고 여가선용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된 것은 집이 있는 대전지역의 국군간호사관학교에 보직을 배정받은 대령 말년차부터였다.

    경력이 일천하다 보니 성적에 신경 쓰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저 공 하나 갖고 네댓 시간 즐기며 쌓인 스트레스와 긴장을 풀어버리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내기골프를 싫어하는 반면 웃으며 함께 운동할 수 있는 동반자를 좋아하는 편이다. 부담 없이 서로 편안한 마음을 주고받는 그런 상대 말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골프를 즐기는 상대는 초등학교 시절 짝꿍과 그의 안사람이다. 우리 부부와 친구 부부는 종종 함께 라운딩에 나서곤 한다. 내가 군을 제대해 정계에 입문하고 난 뒤로 내 정치특보 역할을 맡아 고생하고 있는 짝꿍은 나의 골프 원포인트 레슨 선생님이기도 하다.

    이 친구와의 골프가 특히나 재미있는 것은 18홀 내내 모든 동반자를 정신없이 웃게 만드는 그의 엉뚱한 재담 덕분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우리 어머니가 말야, 일찍부터 나를 골프선수로 키우고 싶은 깊은 뜻이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난 그걸 돌아가신 다음에야 알았단 말이지.”

    모두(심지어 그의 안사람까지도)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노라면 그 뒷말이 허를 찌른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에서 돌아오는 그를 보고 어머니는 “너 파하고 왔니?” 하고 묻곤 하셨다는 것이다(요즘은 충청도 이외 지역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지만 ‘파하다’는 어떤 일을 ‘끝내다’ ‘마치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김치를 주셔도 늘 파김치만 주셨다며 “골프에서 파(par)가 좋은지는 어떻게 아셨나 그래…”하고 너스레를 떠니 웃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어지는 재담에 어느 도우미가 “손님, 말도 못하겠어요”라고 웃어대니 이 친구 왈 “말을 못 타니 차를 타고 왔지 이 사람아, 나도 말 탈 줄 알면 갓 쓰고 말 타고 왔어”하고 맞받아치는가 하면, 잔뜩 흐린 하늘 한구석에 하늘빛이 조금 보이자 “구름 한 점도 없네…요기만” 하며 기운을 빼곤 한다. 이쯤 되면 재미있자고 하는 말인지, 주의를 흐트려 게임에서 이기고자 함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다.

    골프가 좋은 운동이라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린 위에서만큼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는 곳은 없지 않은가. 좋은 사람들과 내내 깔깔거리는 것이야말로 골프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 아닐까.

    독자 여러분도 골프장에서 친구들과 나눈 재미난 이야기를 떠올려보시라. 입가에 한가득 웃음이 배어날 것이다. 친구의 ‘생뚱맞은’ 재담에 그저 웃기만 하는 우리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별 이상한 사람들 다 보겠다는 듯 쳐다보곤 하지만, 그런들 또 어떤가. 즐거운 한때, 재미난 추억을 쌓을 수 있다면 그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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