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호

고성 오광대놀이 ‘농부 춤꾼’ 이윤석

“천한 민족은 신명을 아랫도리로 풀고 귀한 민족은 어깨 위로 끌어올리지”

  •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사진 정경택 기자

    입력2005-07-29 13: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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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얀 베수건 어깨에 걸고 싱긋이 웃으며 점잖게 맴을 돈다. 커다란 싹이 움트듯 파릇한 도약, 시원스러운 어깻짓, 유연한 팔동작…. 화장 긴 소맷자락을 활짝 펼치니 비상하는 학의 형상이다. 농부 춤꾼, 이윤석은 오늘도 말뚝이탈을 쓰고 활달하고 장엄한 춤사위를 펼친다.
    고성 오광대놀이 ‘농부 춤꾼’ 이윤석
    분명 전에 어디선가 이런 사람을 본 적 있다! 고성에 내려가 오광대 보존회의 이윤석(56) 회장을 만나면서 나는 내내 그게 누구일까를 떠올리느라 바빴다. 허우대 훤칠하고 심덕 곱고 말수 적고 신명 많은 그 사람은 앞에 앉은 이윤석 회장과 이미지가 얼추 같았건만! 한때 가까이 있었던 게 분명한 그가 도대체 누구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야 나는 그게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나오는 용이임을 화들짝 깨달았다. 상민이지만 언행과 생김새에 귀족 같은 품위가 흐르던 용이. 과묵해서 좀체 입을 열지 않지만 어쩌다 씨익 웃을 때면 산천초목까지 환하게 밝히던 사람.

    ‘토지’에 명멸하는 수백명의 등장인물 중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그려내던 용이와 이윤석 회장은 여러 모로 닮았다. 집에 와 급히 ‘토지’를 펼쳤다. 마침 첫 장면은 사물이 돌아치는 마당이다.

    별안간 경풍 들린 것처럼 꽹과리가 악을 쓴다. 빠르게 드높게. 꽹과리를 따라 징소리도 빨라진다. 깨갱 깨에갱 더어응응음 -깨갱 깨애갱! ~덩더응응음 - 장구와 북이 사이사이에 끼여서 들려온다. 신나는 타악소리는 푸른 하늘을 빙글빙글 돌게 하고 단풍든 나무를 우쭐우쭐 춤추게 한다.

    동네 아낙들이 모여서 수군댄다.



    “쯔쯔 저 좋은 목청도 흙속에서 썩을랑가?”

    “서서방이 죽으면 자지러지는 상두가 못 들어서 서분을끼요.”

    “세상에 저리 신이 많으면서 자기 마누라밖에 없는 줄 아니 그것이 어디 보통 드문 일가?”

    “신주단지를 그리 위하까? 천생연분이지 머.”

    뒤의 숙덕거림은 목청 구성진 서 서방을 향한 것이지 용이를 두고 한 건 아니다. 그러나 지난 30년간 오광대놀음을 구경한 고성의 아낙들은 춤추는 이윤석을 향해 한두 번쯤 저렇게 숙덕거린 적이 있을 것이다. 이윤석은 스무 살에 혼인한 아내를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라 거침없이 말한다.

    “내 소원이 뭔가 하면 세상에서 우리 집사람보다 더 고운 여자를 한번 만나보는 겐데 그걸 안죽도 못 이뤘구만.”

    논길을 가는데 농부 같지 않은 차림에 날씬하게 균형 잡힌 몸매의 여인 하나가 앞서 걷고 있었다. 모르고 지나쳤는데 알고보니 이윤석 회장의 부인이다. 평생 농사일을 도맡아 했지만 어쩌면 얼굴에 그을린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다. 전혀 손자가 넷이나 되는 할머니 같지 않다.

    “저 사람 처음 시집왔을 때 인물 좋다고 소문나서 이웃 동네서도 구경 오고 아주 난리가 났다니까요.”

    그러면서 용이처럼 또 씩 웃는다.

    ‘하얀 베수건 어깨에 걸고 싱긋이 웃으며 큰 키를 점잖게 가누어 맴을 도는 이용, 그는 누구니 누구니 해도 마을에선 제일 풍신 좋고 인물 잘난 사나이, 마음의 응어리를 웃음으로 풀며 장단에 맞춰 춤을 춘다. 아낙들은 제 남편 노는 꼴을 반쯤은 부끄럽고 반쯤은 자랑스러워 콧물을 홀짝인다’는 소설 속이 아니라 그대로 어느 날 고성 장거리의 풍경이다.

    그 중심에 ‘농부 춤꾼’ 이윤석이 있었다.

    판사, 의사, ‘땐사’

    경남 고성은 백년 전만 해도 인근의 통영이며 거제도까지 포괄하던 큰 군이었다. 최근엔 커져만 가는 인근의 마산, 진주, 삼천포를 당하지 못하고 단독 선거구도 못되는 작은 동네로 머물러 앉았지만, 고성 특유의 자존심과 미(美)는 그래서 더 효율적으로 보존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고성에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아름다움을 여럿 발견했다. 우선 느긋한 시간 흐름이다. 자그만 읍엔 바빠서 돌아치는 사람이 별반 없다. “거 누구 좀 부르지!” 해서 전화만 하면 머잖아 벙싯 웃으며 그 ‘누가’ 문을 쓱 밀고 들어온다. 다음은 제각기 얼굴에 떠오르는 따스한 표정들이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수줍은 듯 혼자 씨익 웃는 웃음들, 그 귀한 표정이 오광대패 여럿의 얼굴에 공통으로 얹혀 있는 것을 나는 놀랍게 지켜봤다. 그건 제 잘남을 다툴 필요가 없는 농경 사회적 웃음이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외경하는 이들의 순하고도 힘센 표정이다.

    그 다음 내가 주목한 건 넉넉하고 푸진 인심이다. 칼국수를 만들었으니 먹고 가라, 옥수수를 쪄 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라, 어제 갯가에서 잡은 바지락을 삶았으니 안 먹으면 큰일난다, 사방에서 다정하고 은근한 청들이 넘쳐난다. 사람살이란 대저 이래야 하는 게 아닌가. 나눠 먹고 함께 웃고 서로 존재에 감사하는 공동체적 삶의 원형이 여기 그대로 보존돼 있구나! 마지막으로 가장 잊지 못할 건 그들의 입에서 연신 술술 흘러나오는 재담과 해학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세상에 ‘사’자 돌림이 세 가지가 있는 거는 아시죠?”(춤꾼)

    “하하. 모르겠는데요.”(나)

    “아, 그걸 몰라서야 쓰나요. 첫 번째가 판사 검사, 두 번째가 의사 약사, 세 번째가 뭐시냐 하면 바로 우리 같은 땐사(dancer)!”(춤꾼)

    그 여유와 웃음과 인심과 해학 속에서 잉태된 것이 바로 오광대춤이다. 고성의 오광대는 한번도 명맥이 끊기지 않고 오롯하게 살아남았다. 이 또한 드나드는 사람이 많지 않은 폐쇄적인 소읍이기에 가능한 일일 게다.

    1960년대 초반, 일군의 민속학자들이 소문으로만 남은 오광대 탈놀이의 자취를 찾으러 마산과 통영 인근을 헤매던 중 우연히 고성에 들렀다. 동구나무 아래 모인 노인들에게 혹시 오광대란 말을 들어봤냐고 물었다. 촌로 몇이 손을 번쩍 들었다. 다름 아닌 고성 권번의 대접받는 춤 선생이던 김창후, 홍성락, 천세봉이었고 이들은 당연히 고성 오광대춤의 명인이었다. 당장 춤사위를 눈앞에 펼쳐 보여줬다.

    자료조사를 통해 잊혀진 민속을 복원해야 했던 다른 무형문화재와 달리 고성오광대는 옛 형태가 몸에서 몸으로 고스란히 이어져 있었으니 1964년 문화재법이 만들어지자마자 곧바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었다.

    산대놀이, 야류(野遊), 오광대

    그러면 춤은 왜 생겼나. 농사짓던 사람들이 어이 해 탈 쓰고 북 들고 장구 메고 춤꾼으로 나섰나. 춤꾼 이윤석의 삶을 말하기 전에 그의 삶 자체이기도 한 고성오광대의 유래와 특색부터 얘기하는 것이 순서겠다.

    고성오광대는 가면극이다. 여느 탈춤처럼 탈을 쓴 채 춤을 추고 재담을 한다. 알다시피 전승되는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황해도 전역에서 행해지는 가면극의 명칭은 그냥 탈춤이고, 지금은 봉산(중요무형문화재 17호) 강령(34호), 은율(61호), 세 곳만이 전승된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지역에서 전승되는 탈놀이는 산대놀이라 부른다. 예전에는 산대라고 하는 가설무대를 세워 놀음을 했던 모양으로 거기서 이름이 연유했으나, 요즘은 평지에서 공연해도 이름만은 산대놀이다. 지금 송파산대놀이(49호)와 양주별산대놀이(2호)가 남아 있다.

    경상도 지역에서 낙동강 서편 지역은 경상좌도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가면극을 아류(野遊)라 불렀다. 집에서 노는 게 아니라 들놀이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인데 동래야류(18호)와 수영야류(43호)가 있다. 경상우도의 가면극이 바로 ‘오광대’로 고성(7호), 통영(6호), 가산(73호)에 그 형태가 남아 있다. 이밖에 탈춤, 야류, 산대놀이, 오광대와 흡사하나 다른 몇 가지 특징으로 구별되는 하회 별신굿(69호)과 강릉 관노놀이라는 가면극이 따로 전승되고 있다.

    지방마다 명칭은 달라도 가면극의 내용은 대개 비슷하다. 사방신에게 놀이 시작을 알리는 의식무를 춤의 서두로 삼으면서 파계승과 양반을 풍자하고 처첩간의 갈등을 서사의 골격으로 삼는다. 서양극처럼 발단에서 전개, 절정, 결말이 일목요연하지는 않다. 이야기와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지 않고 과장(科場)별로 다른 엉뚱한 내용이 등장하고 물론 춤도 달라진다.

    우리가 언제부터 가면극을 추게 됐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승려와 양반계급을 비판하는 내용이 중심축인 걸로 미루어 조선왕조 서민들이 울분을 푸는 도구였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 경제 사회적으로 대중의 위치가 급부상한 조선 후기, 18세기 말엽쯤에 와서야 이런 가면놀이가 신명나게 공연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볼 뿐이다.

    대개의 탈놀이는 불명확한 구전으로 전해지지만 고성만은 다른 어디에도 안 보이는 특별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고종 30년, 서기로는 1893년, 고성에 부임한 부사 오홍묵은 호기심과 관찰력이 탁월한 벼슬아치였던 모양이다.

    그는 낙도와 산골오지로 둘러싸인 고성의 풍물과 대소사를 꼼꼼히 기록해서 ‘고성총쇄록’이란 진귀한 사료를 남긴다. 거기 음력 섣달 그믐날 관아마당에서 벌어진 오광대 놀음에 대한 생생한 관찰기가 있다. 역시 기록만이 세월을 뛰어넘는다.

    ‘…내가 풍운당을 돌아보니 아전의 무리들이 나악을 갖추고 유희를 하고 있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니 해마다 치르는 관례라고 답변한다.…(중략) 나희배들이 징을 치고 북을 두드리며 펄쩍 뛰어 오르는 등 온통 시끄러이 떠들며 일제히 관아의 마당으로 들어온다. 마당 한가운데 석대 위에는 미리 큰불을 마련해놓았는데 대낮처럼 밝다. 악기를 마구 두들겨 어지럽고 시끄러워 사람의 말을 구분하기 어렵다.…(중략) 괴이하고 이상한 무리들이 순서대로 번갈아 가며 나와 서로 바라보며 희롱하고 혹은 날뛰며 소란스럽게 떠들거나 혹은 천천히 춤을 춘다. 이같이 하기를 오랫동안 하다 그쳤다. 이곳의 잡희는 함안의 것과 대략 비슷하지만 익살은 보다 나은데 복색의 꾸밈은 다소 떨어진다.’

    고성부사 오홍묵은 아전(서민)들의 놀음을 외면하지 않고 비교분석까지 한 관리였다. 그러나 우리 역사 대부분이 그렇듯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전승은 기운을 잃는다. 수탈로 생활은 피폐해지고 서러운 겨레붙이가 함께 모여 흥겨워하는 꼴을 일제가 달가워했을 리 없다. 대신 서구식 신파극과 곡마단과 신식 가수들이 등장해 탈놀이의 관객이 점차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고성만은 조금 달랐다. 왜 달랐는지 명확하게 설명할 순 없다. 다른 지방과 달리 아까 동구나무 밑의 세 명이 건재했던 것이다. 그들은 몇십년 오광대를 공연하지 못했지만 기능까지 잊은 건 아니었다. 해방되자마자 분주히 오광대 모임을 규합해 1946년 당시 고성읍 최신식 건물인 가야극장에서 감격에 찬 한 마당을 펼친다. 당시 공연은 16㎜ 필름으로 기록되었다. 1970년대 이윤석 회장도 여러 번 돌려본 적 있지만 지금은 자취를 잃고 말았다.

    “짜임새가 엉성하긴 했어도 다섯 과장이 알뜰하게 갖춰진 공연이었어요.”

    그러나 곧 전쟁이었다. 전쟁 속에서 말뚝이를 잃고 양반을 잃으면 춤은 계속될 수가 없다.

    조용배와 천세봉의 전설

    하지만 고성엔 희한하게도 어느 시절 어느 난국에도 언제나 ‘춤에 환장한 영감’ 한둘이 반드시 있었다. 그들이 오광대 춤을 끈질기게 이어갔다. 권번 춤선생이던 김창후(1887~1965), 홍성락(1887~1970), 천세봉(1892~1967)이 모두 타계하자 이어서 전세대보다 더욱 탁월한 춤꾼 조용배(1929~91)와 허종목(1930~95)이 등장했다. 이윤석은 바로 이들에게서 춤을 배웠다. 이윤석뿐 아니라 현재 오광대 춤꾼 모두 두 사람의 문하생이다. 고성읍 동외리 ‘고성 오광대 보존회’ 강당엔 그 어른들의 노랗게 낡은 사진이 액틀에 담겨 드높이 걸려 있다.

    조용배와 허종목의 행적은 이미 전설이 됐다. 고성 사람들은 군수 이름은 몰라도 애어른 없이 등 뒤에 피리(단소) 꽂고 초서와 매난국죽에 능란한 붓 한 자루 괴춤에 차고 풀 먹인 도포 입고 논길을 휘적휘적 걸어가던 조한량(조용배의 별명)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조한량은 한때 승려생활을 하다 고성 인근에 은거하던 석암 선생에게 한학을 배우던 중 오광대에 입문했고, 허종목 또한 마산상고 재학시절 기방 춤선생에게서 굿거리춤, 지성승무, 양반춤, 학춤을 고루 배운 후 고향에 돌아와 오광대에 입문한다. 그들은 매일 30리 길을 다니며 김창후에게서 양반춤을, 천세봉에게서는 말뚝이와 승무를, 홍성락에게서는 가면제작을 배웠다.

    고성 오광대놀이 ‘농부 춤꾼’ 이윤석

    이윤석 회장은, 환갑의 나이에도 자태가 여전히 고운 아내와 방울토마토 농사를 짓는다.

    그런 조용배, 허종목 두 사람이 나눠지던 오광대의 짐을 1970년대 들어 한몸에 몰아서 받은 이가 바로 이윤석 회장이다. 그는 이미 개인이 아니었다. ‘스타’라기엔 사람들과 같은 눈높이에 한몸으로 얽혀 있어 적당치 않고, 굳이 이름을 붙이라면 ‘두령’쯤은 될 것 같았다. 고성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증거를 나는 잠깐 만에 여러 번 엿봤다.

    이윤석은 고성오광대 보존회 회장이기 전에 마암면 명송리에서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다. 춤꾼보다 농사꾼이 본업임을 자꾸 강조한다. 아니 춤과 농사가 둘이 아닌 삶을 살았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오광대는 농한기나 명절에 그저 동네 한 바퀴를 도는 풍물패와는 다르다. 국가가 지정한 무형문화재쯤 되니 여기저기 공연도 많고 전수자도 길러내야 한다. 농사에 매일 수 있는 절대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면서 농사를 계속하자면 엄청나게 부지런할 수밖에 없고 아내의 전폭적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고성 사람들은 입 모아 오늘의 이윤석이 있는 것은 다 그의 아내 덕분이라고 평한다. 밭에 일거리를 두고 훌쩍 춤추러 가버리면 남은 일은 고스란히 아내 몫으로 돌아갔고, 그걸 언제나 군말 없이 감당해줬다는 걸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20년 전부터 비닐하우스를 시작해 별의별 작물을 다 심어봤지만 목돈을 만진 기억은 별반 없다. 추수 때의 가격을 정확히 짚어내 농사 품목을 정해야 하건만 늘 뒷북을 치거나 너무 앞서가버렸다. 오이, 호박, 고추, 국화, 안개꽃, 큰 토마토, 방울토마토가 다 그랬다.

    오광대 보존회의 젊은 총무 황종욱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재담가로 “고성에 하우스 농사만 했다 하면 꼭 잘못 짚는 사람 둘이 있어요. 우리 회장님하고 또 저기 사는 누구하고! 고추값이 좋은 해는 토마토를 심고, 토마토가 값이 나가는 해는 고추를 심고. 어찌 그리 딱딱 잘도 맞추는지. 그리고 설령 새벽에 마산 청과시장이나 김해 화훼공판장에 나가 제값 받고 팔아도 소용없어요. 보존회에 전수하러 나올 시간이 급해 과속딱지를 끊으면 그 돈은 결국 모조리 국가로 귀속되는 걸….”

    올해는 농사 재미를 좀 볼 것 같냐고 물었더니 그는 “재미를 못 봤다는 건 바꿔 말하면 화를 피했다는 뜻과 같아요. 아 내가 그까짓 짧은 재미를 위해 큰 화를 불러들일 사람 같습니까?” 한다. 농담이지만 대충 삶의 태도가 읽힌다. 안달하지 않고 매사 느긋하다. 양말에 구멍이 난 걸 누가 지적하면 그는 태연히 “아, 이거 무좀 방지용이야” 하고 말은 늘 에둘러서,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휘어지게 한다.

    “턱 하면 울 너머 호박 떨어지는 소리고, 탁하면 누구네 집파리 잡는 소리제.”

    “여기서 나고 여기서 죽을 낍니더”

    나는 이윤석의 비닐하우스에서 앵두처럼 고운 방울토마토를 배불리(?) 따먹었다. 과일가게에서 파는 놈과 모양은 같아도 맛은 달랐다. 싱그럽기도 하려니와 당도가 훨씬 높았다(토마토도 당도를 따지는지는 모르지만….) 상품가치가 덜 되는 자잘한 놈은 따로 골라놨다. 갖다 줘야 할 곳이 아주 많다. 가까운 절의 차 없는 스님에게 한 상자, 혼자 사는 노인에게 한 상자, 식이요법이 필요한 친구에게 또 한 상자.

    그는 고성에서 나고 자라 지금껏 고성을 뜬 적이 없다.

    “여기서 나서 여기서 살고 여기서 죽을 낍니더.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는 거 아입니꺼. 좋은 재목들은 다 서울로 뽑혀서 가버리고. 선산 지키는 나무도 필요하다 아입니꺼.”

    자조의 빛깔 전혀 없이 스스로 굽은 나무라고 할 수 있는 힘은 오광대의 신명을 함께 푸는 동료들에게서 나왔을 게다. 저 활달한 성품에 자그만 고을이 답답하지 않을까? 거기에도 해답은 있다.

    그가 오광대에 입문한 1970년대 이후 작은 마을 고성엔 방학만 되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많을 때는 한해 1000명을 헤아리는 숫자가 찾아왔다. 오광대를 배우려는 대학 탈춤반 학생이거나 직장 문화패들이었다. 그가 앞장서 전수 조교가 됐다. 앉아서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지리적으로는 오지였으나 고성은 문이 활짝 열린 동네였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 중국에서도 춤 배우겠다고 찾는 사람들이 늘 있었으니 소외도 고립감도 없었다. 지금껏 3만명이 고성에 와서 오광대 춤을 배워갔다. 그들은 모두 이윤석의 거침없고 활달한 말뚝이춤에 반했다. 마스터까지는 못해도 잠시나마 말뚝이춤의 매력과 멋을 시늉은 해보는 것이다.

    내가 내려갔을 때는 상명대 국문과 팀과 부산 동의대 탈춤반 신입생들이 오광대의 기본무를 배우고 있었다. 이윤석은 앞장서서 춤동작을 시범 보이면서 “자, 동작을 크게 하라고. 암만 크게 해도 아무도 돈 달라는 사람 없으니 팔을 활짝 벌려. 쩨쩨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하기도 하고 “양악에 길들어 우리 가락이 괜히 어렵지? 그냥 몸을 가락에 턱 맡겨버려” 하기도 했다. 가르치는 데 이력이 난 솜씨였다.

    과연 오래지 않아 학생들의 몸은 장구와 북장단에 절로 풀렸다. 어깨가 저 혼자 들썩거렸다. 우아한 어깻짓을 하면서 이윤석이 하는 말을 나는 아하, 하며 받아 적었다.

    “고상하지 못한 민족은 신명을 아랫도리로 푼단 말이야. 다리와 엉덩이만 요란하게 비비적대며.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고귀한 민족은 신명을 어깨위로 두둥실 끌어올리지. 이렇게! 이렇게!”

    세 명의 어머니

    철이 들고 보니 그는 어머니가 셋이었다. 그 때문에 바늘방석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백부는 고성서는 제법 살림이 넉넉한 축이었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둘째부인을 얻었지만 생산을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작은집 둘째이던 그가 백부 앞으로 입적이 됐다. 물론 그가 어릴 적 일이니 이윤석은 내막 모르는 채 친모와 친부를 숙모와 숙부라 부르며 자랐다.

    “모두 한집에 살았어요. 생부는 백부 밑에서 머슴 살다시피 했으니까….”

    그러니 가족구성원 자체가 갈등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중 들어온 백모가 강신을 받았다. 영험하다고 소문이 나서 여기저기서 불러대는 사람이 많았다. 기질이 강하고 경제력도 있어 집안은 그 작은 백모 위주로 돌아갔다. 신 내린 그 어머니가 윤석을 특별히 사랑했다. 늘 끼고 살고 싶어 했다. 자연히 세 어머니가 어린 윤석을 앞에 두고 경쟁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힘없는 친모는 “내가 네 친엄마다”라는 말도 못한 채 그저 몰래 불러내 먹을 거나 건네며 눈물짓는 식이었지만, 나이 들면서 점점 사태를 짐작하게 됐다.

    “사랑을 엄청나게 받았어요. 그러나 동시에 엄청 눈치를 봐야 했고. 집안에 분란과 갈등이 하도 많으니 지긋지긋하데요. 어린 마음에도 결심을 딱 했어요. 내가 만약 가정을 갖는다면 싸우지 않고 사는 게 우선이라고. 절대 분란을 만들지 않겠다고….”

    공부는 재미가 없었다. 운동이 좋았다. 인근 회화면의 회화중학교를 다닐 때는 배구도 하고 기계체조도 했다. 한동네엔 오광대 예능보유자인 허판세 선생이 살고 있었다. 신명나고 흥미 있어 그 집을 드나들며 잔심부름도 하고 구경도 했다. 꽹과리 장단에 절로 어깨춤이 추어질 적도 많았다. ‘춤은 생명력이구나’ 하는 깨달음 비슷한 것도 그 무렵 느꼈다.

    그는 분란 많은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일 없이 바다 기슭에 앉아 있곤 했다. 울분이 터지면 둥더덩 덩덩 하는 북가락이 마음속에 솟아났고 그 장단을 한참 따라가다보면 마음이 씻은 듯 가라앉았다.

    학교 졸업 후엔 동네를 어슬렁대다 돈을 한번 벌어보자 싶어 참꼬막잡이 배를 한 2년 타기도 했다.

    “그때 모은 돈으로 집 짓고 논도 좀 사고 했어요. 노인네들 성화에 다시 집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어느새 스무 살이 됐고 동네 사람 누군가가 중매를 서겠다고 나섰다. 키 크고 인물 좋고 심덕 무던하고 살림 있고 부지런하고, 어느 모로나 일등 신랑감이었으니 주변 사람들이 그냥 두지 않았다. 일찍부터 중매가 시작됐다. 아니, 1960년대 말엽 경상도 고성에선 남자 나이 스무 살이 장가가기 딱 좋은 나이였다.

    신부 또한 남 주기 아까운 처녀라 했다. 일 야물게 잘하고 마음씨 곱고 얼굴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했다. 양부가 중풍으로 누워계셨다. 죽기 전에 윤석이 혼인하는 걸 보고 눈 감는 것이 양부의 ‘꿈에도 소원’이고 ‘한이 일시에 풀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혼이 싫어 무작정 부산으로 도망쳤다. 양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찾으러 다닌다고 해 할 수 없이 돌아왔다.

    “동네 어른들은 윤석이라고 발음하기 어려우니 다들 나를 윤시라 불렀어요. 하루는 누가 (그는 사촌 처형의 남편으로 나중에는 동서가 됐지만) 윤시야 불러서 갔더니 무조건 택시를 태워요. 다짜고짜 ‘용산 가자!’ 하는 거예요.”

    그렇게 신부집에 갔더니 사람들이 새 신랑감을 구경하러 한방 가득 모여 있었다. 정작 신부는 사방사업에 나무 심으러 따라가버리고 없었다. 신부집에서는 신랑감이 대만족이었다. 신부 얼굴 한번 못 본 채 일은 급속도로 진행됐다.

    “부모님이 저렇게 원하시니 일단 엑서사이즈(exercise·연습)로 결혼 한번 해보지 뭐 해싸면서 철없이 굴었지요. 실제로 별 실감도 안났고….”

    결혼식 당일에도 고개를 들 수 없어 신부 얼굴은 확인하지 못했다.

    그의 결혼 스토리는 아무래도 한 세대 전의 얘기 같다. 서양문명이 우리 전통을 훼손하기 이전 우리 땅 서민의 결혼 풍습 또한 고성에는 그때까지 살아 있었나보다. 1949년생 이윤석은 1968년에 결혼한다. 그의 나이 스무 살, 신부는 두 살 위인 스물두 살! 적은 나이도 희귀한 경우도 아니었다. 모든 게 아주 자연스러웠다.

    선녀같이 고운 색시

    혼인날 밤 얘기는 살아 있는 민속이다. 신랑을 매달아놓고 발바닥을 치는 거야 기본이고, 신랑 신부 둘을 한꺼번에 꽁꽁 묶어놓고 대추와 밤을 입에 넣어주라는 놀음도 하고 하여튼 별의별 장난을 다 쳤다.

    “신방에 들어갔더니 병풍을 쳐놓고 그 앞에 주안상을 차려놓고 상 앞에 신부가 족두리를 쓰고 앉아 있어요. 얼매나 와들와들 떨래쌓든지…. 병풍 뒤에는 봉창문인데 문 뒤엔 온 마을 사람들이 방안을 들여다보려고 다 모여 있었어요. 얼매나 떠들어쌓든지…. 그러거나 말거나 불 끄고 누웠는데 사람들이 하도 밀쳐 봉창문이 우지끈 떨어져 나가는거야. 병풍 뒤에 장난 좋아하는 청년 몇이 턱 누워 있고 난리법석이었제….

    나는 첫날밤에 신부 가슴을 만지면 안 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어서 가슴에 닿지 않을라고 얼매나 조심을 했든지 몰라. 신랑이 가슴을 만지면 색시가 가슴앓이 한다는 말이 있었거든. 데라진 놈들은 그러든 말든 다 만졌겠지만 나는 그때만 해도 하도 숫내기라서….

    이불은 새로 풀을 해서 움직이면 버스럭거리지, 맨살에 닿으면 자꾸 간지럽지, 병풍 뒤에는 장정들이 기침을 해가며 누워 있지…. 우여곡절 끝에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는데 아침에 우리 장모님이 문 앞에 멍석을 쳐놓으셨대요. 해뜨는 줄도 모르고 늦도록 자라고….”

    이튿날 신부를 데리고 신행을 왔다. 동네 우물가엔 이미 아무개집 며느리 인물이 하늘에서 하강한 선녀 같다는 평이 자자하게 퍼져 있었다. 이웃 동네서 새색시 구경을 하러들 왔고 신랑 눈에도 색시는 ‘진짜로’ 고왔다.

    그 고운 색시는 시아버지 둘에 시어머니 셋인 살림을 덜컥 맡아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 살아냈다.

    “고생 많이 시켰지요. 시집오자마자 중풍 걸린 시아버지를 4년이나 수발했지, 불때는 부엌이라 나무하러 다니면서 밥했제, 신랑은 철이 없어 저녁 먹으면 밖으로 놀러나가 새벽 2~3시에 친구들 잔뜩 끌고 들어오제…. 그러다 애 둘을 낳아놓고 스물넷에 턱 하니 군대를 가버리제….”

    입대할 땐 마암면민이 다 울었다. 리어카에 소주 한 박스를 싣고 여럿이서 “윤석이 낼 군에 갑니다!” 외치고 다녔다. 아픈 사람들 빌어주러 면내 온 골짜기를 안 가본 데 없이 다 다닌 갈래댁(작은 백모의 택호), 온갖 병을 손 비비고 절하는 것만으로 고쳐주던 그 갈래댁 외아들이 군에 간다는 말에 면민이 모두 나와 전송하고 눈물을 찍어내는 분위기였다. 이 또한 한 세대 전의 풍경이건만 고성에는 오롯이 남아 있었다.

    “군대 안 갔으면 나는 날건달같이 살았을지도 몰라요. 최전방 철책선 근무를 했는데 군대 가서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잘못 살아왔드라 이겁니다. 특히 집사람한테 너무 고생을 시켰드라고요. 목적도 없이 건들거리기나 했지, 내 고장 내 동네 내 집 중한 걸 하나도 몰랐으니…. 두 번째 휴가를 나와서 셋째를 만들어놓고 다시 들어가 철이 다 나서 제대를 했지요.”

    3년의 설득, 바위 같은 약속

    고성 오광대놀이 ‘농부 춤꾼’ 이윤석

    말뚝이탈을 쓰고 오광대놀이 춤사위를 펼치는 이윤석 회장. 유연한 팔동작이 시원하고 헌걸차다.

    그는 이제 어중간한 윤석이가 아니었다. 제대한 후 1975년 5월 오광대판에 들어갔다. 허판세 어른에게 진작부터 보고 들어 기본 장단과 몸짓은 이미 익혀놓은 후였다. 아내는 오광대 입단을 반대했다.

    “당시만 해도 오광대판에 들어가면 사람 베린다고 했거든요. 잡놈들이 하는 것이란 평도 있었고…. 조한량이 처가의 재종처남인데 무매독남으로 귀하게 커서 동래고등학교를 보내놨더니 공부는 안 하고 소리와 춤과 그림에만 미쳐 여자를 여럿 거느리고 파란만장하게 살았거든요. 그분도 오광대판에 있었으니….”

    철든 윤석은 아내를 설득한다.

    “오광대는 우리만의 소중한 신명이다. 그걸 대대로 이어가는 게 도리다. 농사짓는 기운은 그렇게 여럿이 모여서 한과 흥을 풀어내야 새로 얻을 수 있다. 당신한테 해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다른 걸로는 절대 마음 아프게 할 리 없다!

    내가 세 가지를 약속하마. 첫째, 평생 술 먹고 헛소리하는 일 없을 거고 둘째, 노름판엔 근처도 안 갈 것이며 셋째, 여자문제로 애먹이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그 설득에 3년이 걸렸다. 그리고 평생 그 약속을 바위처럼 지켰다. 유연하고 활달한 동작으로 춤판을 휘어잡는 그에게 유혹의 손길이 없었을 리 없다.

    “과부가 허벅지를 찌르는 심정으로 그걸 이겼다니깐요” 해놓고는 멋쩍게 씨익 웃는다. “재미있는 얘기 해줄까요? 그렇게 내 곁에 맴돌다 간 애들이 결혼 적령기가 되면 이번에는 다시 날 찾아와 주례를 서달라고 한단 말이에요. 우리 부부 사는 게 좋아 보인 모양이지요. 참 나!”

    그는 제대하고 돌아와 말씨부터 고쳤다. 아내에게 꼬박꼬박 경어를 썼다.

    “살다보면 짜증나는 일이야 없을 수 없지요. 그러나 높임말을 해 버릇하니 갑자기 욕을 할 수도 없고 소리를 지르기도 어렵드라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단 한번도 싸워본 적이 없어요. 암만 늦게 들어가도 집사람한테 낮에 있었던 일을 다 얘기해요. 설령 그 사람이 잠들었더라도 듣든 말든 나 혼자 궁시렁궁시렁 하면 그게 전부 느낌으로 전해지나봐요.”

    그는 꿈을 확실히 이뤘다. 어렸을 때 혼자 결심한 대로 안 싸우고 사는 가정을 만들었을뿐더러 환갑 나이에도 아내를 늙지 않게 가꾸는 데도 성공했다.

    “그게 다 남편이 관리를 잘한 탓이거든요. 우리 집사람 뒤에서 보니까 서른 살 같지요?”

    말뚝이춤과 덧배기춤

    이윤석의 춤은 말뚝이춤과 덧배기춤이다. 굿거리로 뛰다가 급작스레 방향을 전환해 땅에 엎드렸다가 천천히 일어서는 남성적이고 웅장한 춤이다. 무대 위에서 추는 춤이 아니라 너른 마당에서 다 함께 신명을 지펴내는 춤이다.

    말뚝이춤은 예전부터 전해오는 말뚝이탈을 쓰지만 무대 위에서 혼자 덧배기춤을 출 때 그는 탈을 벗는다. 덧배기 춤이란 이윤석만의 춤이다. 그는 오광대 다섯 과장을 전부 배웠지만 그 중 두 번째 과장에 나오는 말뚝이춤이 전문이다.

    말뚝이는 서민을 천대하고 멸시하는 양반을 조롱하고 비판하는 서민의 대변자로 커다란 몸짓으로 단연 놀이마당을 압도한다. 특히 힘있게 뻗는 춤사위, 말채로 땅을 내리꽂는 동작은 역사의 아픔을 풀어내고 인간 평등을 주창하는 활달하고 장엄한 은유의 몸짓이다. 보고 있는 이의 석 달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동작이다.

    화장 긴 소맷자락을 활짝 벌릴 때 그는 비상하는 학 같다. 커다란 어깻짓과 유연한 팔동작은 시원하고 헌걸차다. 그는 30년째 이 춤과 사설을 계속하고 있지만 연희 판마다 기분은 새롭고 기운은 충천한다.

    덧배기는 경상도식 자진모리 장단으로 장단 이름뿐 아니라 남성적인 마당춤을 지칭하는 용어가 됐다. 이윤석은 고성오광대에 나오는 여러 춤사위를 즉흥적으로 엮어서 덧배기춤을 춘다. 180㎝가 넘는 거구를 굵고 부드럽게, 강하고 매끄럽게 매듭 지어내는 것이 일품이라는 평이다.

    다음은 무용평론가 진옥섭씨의 말이다.

    “그의 춤엔 흙냄새가 물씬 풍긴다. 싹이 움트는 듯한 빼족하고 파릇한 도약, 열매 맺어 늘어진 가지같이 나긋하게 익은 팔놀림, 한량 스승들이 떠난 후 천상 농사꾼으로 흙에서 춤을 일군 사람다운 춤이다. 그간 우리는 탈춤을 탁배기 사발과 멍석판, 그리고 검증 못할 신명론으로만 풀어왔다. 이윤석의 춤은 자로 잰 듯 반듯하고 때가 되면 솟구쳐 배기며 교묘히 풀려 나온다.”

    탈춤은 무대춤과는 다르다. 아무리 좋아도 개인의 명성은 가려진다. 탈로 얼굴이 가려져 관객에게 표정이 보이지 않으므로 춤판의 특출한 천재란 있을 수 없다. 집단이고 공동체일 뿐이다. 춤추면서 가장 기쁜 순간을 물었을 때 이윤석이 한 대답이 바로 그걸 증명한다.

    “공연 자체야 원래 다 함께 신명을 지피는 거고 자기 푸념이 몸짓으로 나오는 것이니 말할 것도 없지요…. 근근이 예산 맞추고 계획 짜서 무사히 공연을 끝냈을 때, 홀가분한 기분으로 단원들과 탈을 벗고 막걸리 한잔 할 때, 그때가 기분이 제일 좋지요. 그 맛에 공연을 계속하는지도 몰라요.”

    인간답게 살기 위한 몸부림

    오광대는 본질적으로 저항의 춤이다. 거의 다 농부인 오광대패는 춤추면서 자신의 존엄을 깨달았고 그러다보니 농민운동의 중심에 서는 일이 많았다. 이윤석은 예술을 거창하게 정의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춤이고 예(藝)라고 생각한다.



    “사는 게 다 예술이지요. 물질적인 것을 갖추고도 마음의 평화가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럴 확률은 적잖소? 그러니까 우리는 물질 대신 마음을 편하게 가지기로 작정했고 그걸 춤으로 펼치는 거지요.”

    두어 해 전엔 하와이 대학에 가서 오광대춤을 가르쳤다. 외국인들 사이에 우뚝 서서 팔을 쳐올리면서 그는 자신이 무한히 확장되어 대대로 오광대를 춤춰 온 한량들을 껴안고 함께 있다고 느꼈다.

    고성엔 오광대패가 있다. 춤꾼 이윤석이 말뚝이탈을 쓰고 장단에 맞춰 얼쑤덜쑤 춤춘다. 그는 고성을 지키는 큰바위 얼굴이다. 말뚝이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고성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뤄 서로 기대고 오순도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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