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원장은 어린 시절 스스로 진로를 선택했다. 의사의 길을 인생의 목표로 정한 것은 고교 1학년 때다. 거창하게 노벨의학상을 꿈꿨다. 부모는 “의사는 너무 힘들어서 여자가 하기는 어렵다”며 만류했지만, 박 원장은 뜻을 꺾지 않고 부모를 설득했다.
박 원장은 의대를 졸업하고 전공의 과정을 마친 후 연세대 의대 산부인과 강사이자 세브란스 병원 전문의로 일했다. 그때 또 한 번 힘겨운 선택을 한다. 어느 날 병원으로 한 임신부가 긴급하게 실려왔다. 뱃속의 아이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문제는 죽은 태아의 몸무게가 4kg에 달할 정도로 커서 제왕절개수술을 해야 했던 것. 사산(死産)을 하려고 산모의 배에 칼을 댄다는 것이 못내 박 원장의 마음에 걸렸다.
그 순간 박 원장의 뇌리에 오래 전 의학책에서 본 구식 수술방식이 떠올랐다. 다소 위험이 따르지만 전통방식인 ‘수술적 분만방식’을 시도할 만하다고 판단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박 원장은 이를 시도했고, 결국 개복 수술 없이 사산아를 산모의 몸에서 빼내는 데 성공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교수들은 “정말 용감하다”고 박 원장을 극찬했다. 이때 박 원장이 깨달은 게 있다.

박금자 원장이 2004년 총선에 뛰어들었을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던 선·후배가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의학박사 송유봉, 방송인 이숙영, 하우스레서피 Tea & Cake 권혁란 대표, 박 원장.
하지만 모든 일이 용기만으로 되는 건 아니다. 박 원장은 산부인과를 운영하면서 여성 문제에 대해 조금씩 눈뜨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시민운동에 나섰다. 1995년에는 한국성폭력연구소 대표를 맡았다. 시민운동의 현실적 한계는 다시 그를 정치권으로 이끌었다. 박 원장은 2000년 총선을 앞둔 1999년 말 비례대표 ‘안정권 공천’을 약속받고 ‘젊은 피 수혈’ 차원에서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그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 비례대표 순번 발표를 앞두고 치열한 당내 로비 과정에서 순번이 자꾸만 뒤로 밀린 것. 발표 결과 16대 국회의원 임기 중에는 의원직 승계를 기대하기 어려운 순번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