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주 앉았을 때 차일석 박사는 대뜸 그렇게 물었다.
“음… ‘서라벌’에서 온 말일걸요. 신라 향가 처용가에도 ‘셔블 밝기 달에 밤드리 노니다가’란 구절이 나오잖아요.”
내가 듣기에도 엄청 싱거운 대답, 무안해서 얼른 다시 물었다.
“서울이 왜 서울입니까?”
인터뷰어로서 내 질문은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그 물음 하나에 일흔 넘은 노(老)관료의 입에서 서울에 관한 역사·지리·정치·인구·교통·주택에 관한 분석과 통계들이 해박하고도 실증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서울은 네 개의 산으로 둘러싸였잖습니까. 북에 북악, 남에 남산, 동에 낙산, 서에 인왕. 이걸 내사산이라 부르는데, 겨울에 내사산에 눈이 쌓이면 울타리처럼 둥그렇게 보이거든요. 높은 곳에 올라서서 보면 동그라미가 그려진 거 아닙니까. 그래서 서울이라고요. 눈의 ‘설(雪)’ 플러스 울타리의 ‘울’ 해서! 하하.”
유머가 몸에 배어 있다. 열정적이다. 박람강기(博覽强記)하다. 젠틀하다. 서울을 지독하게 사랑한다!! 첫눈에 읽히는 차일석 박사의 풍모다. 그는 1960년대 서울의 광경을 두루마리처럼 내 앞에 주루룩 펼쳐 보았다.
“1960년대는 한국사의 격동기였어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허정 과도정부를 거쳐 1960년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자 서울에 첫 민선시장이 뽑혔습니다. 카이저 수염을 기른 김상돈씨로, 그는 내 이모부였어요. 그런데 임기를 반도 못 채우고 5·16이 일어나서 서울시정은 군사정권에 넘어가버리죠. 군 중장 출신의 윤태일씨가 서울시장이 됐는데, 내무부가 지휘감독하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와 달리 서울시는 임시조치법을 만들어 국무총리 직속으로 승격됐어요.”
미처 몰랐던 서울의 현대사다. 모든 분야가 그랬지만, 그중에서도 서울의 외형은 특히 놀랍게 변모했다.
두 불도저의 ‘무궁화 계획’
“1962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됐잖아요. 거기 따른 수출 드라이브 정책으로 서울에는 의류·옷·가발공장과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체들이 마구 생겨났어요. 지방에서 근로인구가 마구 몰려들었죠. 그 때문에 1960년 245만이던 서울 인구가 1965년에 347만으로 늘어났어요. 5년 만에 100만명이 불어난 거예요.
그런데 서울의 도시공간은 그때까지 1950년대 전쟁 직후와 별반 달라진 게 없었어요. 강북 시가지는 예전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서울 내사산 기슭을 비롯해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청계천과 정릉천 냇가에는 판잣집이 다닥다닥했어요. 교통수단은 전차와 일부 노선버스가 전부인데, 그 범위는 서북쪽으로는 무악재 고개를 넘지 못했고 동쪽으로는 청량리, 동북쪽으론 미아리 고개, 서남으로는 신촌과 마포나루, 동남으로는 왕십리가 고작이었다고요. 도시계획이 있기는 했으나 현황 측량지도조차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였어요. 거기다 갑자기 인구가 비대해져버렸으니 1960년대 중반, 그야말로 서울은 초만원이었지요.”
바로 이 무렵 차일석 박사는 서울시 부시장이 된다. 1966년대 부산시장으로 건설사업부문에서 성과를 올리던 김현옥씨가 서울시장이 됐고, 그가 시장이 되자마자 당시 연세대에서 도시행정을 강의하던 차일석 교수를 건설담당 부시장으로 지명했다. 명콤비가 탄생한 것이다.
연세대 교수 시절 차일석은 중앙도시 계획위원으로 위촉돼 부산직할시 승격의 타당성에 관한 조사보고서를 만든 적이 있다. 당시 부산시장이 바로 김현옥이었다. 현장조사하러 간 자리에서 세계 여러 도시를 예로 들어가며 도시계획에 관해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