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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⑫

안동 가와카미(川上) 순사 살해사건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시신, 붙잡힌 조선 청년들은 과연 범인인가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안동 가와카미(川上) 순사 살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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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만 훑어보아도 타살이 분명했다. 경찰은 현장조사를 마친 후, 정밀한 사인(死因) 조사를 위해 사체를 안동병원으로 옮겼다. 부검 결과 직접적인 사인은 ‘기도 폐쇄로 인한 질식사’였다. 누군가 공무수행 중이던 현직 일본 순사를 마구 구타한 후 목 졸라 살해한 것이었다.

안동경찰서에는 비상이 걸렸다. 대구에서 검사와 예심판사가 황급히 달려와 수사를 지휘했다. 사건 수사에 소속 경찰이 총동원됐다. 조용한 시골읍내는 일순간 계엄을 방불케 하는 삼엄한 경계 상태에 놓였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옆 자리에 앉아 함께 근무하던 동료를 잃은 순사들의 눈빛에는 복수심이 불타올랐다. 사건을 조속히 해결하라는 상급관청의 주문도 주문이거니와 하루빨리 범인을 잡아 ‘억울하게’ 죽은 동료의 원한을 풀어주고 싶었다.

사건의 실마리는 어렵지 않게 풀렸다. 수사 개시 하루 만에 사체 발견 현장에서 서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모래밭에서 가와카미 순사의 장갑, 수갑 등 잃어버린 유류품 일부를 찾았다. 유류품과 함께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담배쌈지와 부서진 성냥갑, 그리고 범행에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피 묻은 돌멩이가 발견됐다. 모래밭에는 대여섯 사람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단서는 다른 장소에서도 속속 발견됐다. 모래밭과 다리 사이에 있는 논에서는 가와카미 순사의 열쇠꾸러미와 수첩, 6원50전이 든 지갑, 금니 한 개, 명함 10장, 연필 한 자루, 그리고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피 묻은 구두 한 짝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유류품이 발견된 논과 시체가 발견된 다리 사이에 있는 안기천 철교 아래에는 가와카미의 검정색 외투, 두루마기, 목도리, 모자, 포승, 곤봉과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방한모 한 개가 떨어져 있었다. 가와카미의 외투와 두루마기는 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수집된 증거물을 통해 사건 정황의 추론이 가능했다. 첫째, 범인은 한 명이 아니라 대여섯 명이다. 둘째, 범인들은 모래밭에서 가와카미 순사를 집단구타하고 목 졸라 살해한 후 사체를 논과 안기천 철교를 거쳐 다리 밑까지 지고 가서 유기했다. 셋째, 사건 뒤처리가 엉성한 것으로 보아 비전문가의 우발적 범행이다.



원한관계 수사도 착착 진행됐다. 가와카미는 ‘개인적으로’ 누군가의 원한을 살 사람이 아니었다. 가와카미는 유능한 경관이었고, 성실한 가장이었으며 마음씨 착한 이웃이었다. 그러나 ‘공적으로’ 그는 부인할 수 없는 ‘일본 순사’였다. 경찰은 범인을 ‘일본 순사를 미워하는 자’(?)로 단정하고 수사에 박차를 가했다. 사실상 안동에 사는 모든 조선인이 용의자였다.

경찰은 사건현장 인근의 민가를 샅샅이 뒤져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주민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안동경찰서에는 매일같이 수십명의 농민이 끌려와 강도 높은 심문을 받았다. 일본 순사 한 명이 살해당한 바람에 애꿎은 안동 읍민들이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무구한 양민의 수난은 길지 않았다. 가와카미 순사가 살해된 지 엿새 만인 1월25일, 사토 하야오(佐藤速男) 사법주임이 범인 일당을 일망타진했다고 발표했다.

사건이 해결되기까지 고초를 겪은 것은 비단 조선인만이 아니었다. 엿새 동안 우에다 서장 이하 안동경찰서 전 경찰은 불철주야로 수사에 매달렸다. 의자에 기대 새우잠을 자면서 밤낮으로 수사에 내몰렸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범인이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한 다음 차례는 누가 될지 알 수 없었다.

안동경찰서 경찰들 사이에는, 가와카미 순사처럼 이국땅에서 비명횡사하지 않으려면 하루라도 빨리 범인을 찾아내 철저하게 응징해야 한다는 암묵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죽는 것보다야 일주일쯤 잠 못 자는 게 나았다.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사토 사법주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은 사토 주임이 발표한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한 살해 당시의 상황이다.

과수원 살인사건

1932년 1월19일 밤 9시경, 조동래(24), 황석칠(22), 조용화(27), 강점목(20), 안경호(22) 등 시골청년 다섯 명은 안동 읍내 옥동에 있는 과수원에 모였다. 다섯 청년은 과수원지기 오두막에서 한 판에 1전씩 걸고 화투를 쳤다. 한두 시간 지나 판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두루마기를 입은 괴한이 들이닥쳤다. 놀란 청년들은 화급히 호롱불부터 껐다. 조선옷을 입은 괴한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일본말로 다그쳤다.

“무엇을 하느냐? 다 일어서라.”

일본말에 서툰 무식한 시골청년들이었지만 분위기만으로 사태를 직감할 수 있었다. 청년들은 괴한의 말에 순순히 따라 일어섰다. 청년들이 일어서자 옷 사이에 숨긴 화툿장이 우수수 떨어졌다. 괴한은 손전등으로 청년들의 얼굴을 차례로 비추며 자신이 순사임을 밝혔다.

“녀석들, 노름을 한 것이로구나. 순순히 이름과 주소를 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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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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