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4·3연구소가 정기간행물인 ‘4·3과 역사’를 통해 처음 공개한 제주도 4·3사건 당시 경비대 총살현장의 미군 입회 사진.
이에 주민들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고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反)경찰 활동을 전개했다. 결국 3월10일 총파업이 일어났는데, 관공서와 민간기업 등 제주도 직장의 95%가 참여한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
이에 미군정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해 3·10총파업의 원인이 3월1일에 발포한 경찰에 대한 반감과 이를 증폭한 남로당의 조직적 선동에 있다는 양비론적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군정당국은 근본 원인을 제공한 경찰을 개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치안유지를 위해 친일경찰 경력자를 기용한 것도 민심 이반의 주요 원인이 됐다.
경찰에 대해선 어떠한 문책도 하지 않고 남로당에 대한 강공만을 추구하자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가 모두 외지사람으로 교체됐고, 경찰과 서청 단원 등이 대거 제주에 내려가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4월3일 사태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이렇듯 선무책으로 민심을 수습하기보다는 강경 일변도로 대응함으로써 주민과의 대립·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특히 공산주의자를 소탕한다면서 일반 주민까지 투옥해 주민의 반감을 샀다. 게다가 1948년 3월에는 일선 지서에서 잇따라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도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을 맞았다.
좌익세력은 주민의 이런 저항의식을 조직화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제주도 좌익세력의 중심인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 노출로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다.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 신진세력은 군정당국에 등 돌린 민심을 이용하고 조직을 지키기 위해 당면한 단선(單選)·단정(單政)을 반대하는 구국투쟁으로서 무장투쟁을 추구했다.
평화협상 깨트린 우익청년단체
이러한 때이른 무장투쟁은 당 중앙과 긴밀하게 협의해 내린 결정이 아니었기에 후일 모험주의적 노선으로 비판받을 여지를 남겼다. 과연 남로당의 유격투쟁 결정은 피할 수 없는 조치였을까? 이 조치만 없었다면 1만명 이상의 무고한 양민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으므로 원초적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비록 주민 저항의 원인을 경찰과 청년단체가 제공했다 하더라도 다른 지역에서는 이러한 원인이 이렇게 무자비한 참사로 연결되지 않았으므로 거사를 결행한 측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학병 출신 이덕구와 남로당 제주도 지구당 총책 김달삼(본명 이승진)이 주동자였다.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350명가량의 좌익 세력은 단선·단정 반대 명분을 내걸고 도내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단 등의 우익단체를 공격했다. 이렇게 무장 시위가 거세지는 과정에 중앙당 차원의 지원은 거의 없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제주도민을 동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희생자 모두 좌익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조용한 섬마을에서 일어난 자연발생적인 사건이 남로당과 연결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돼 대한민국의 국기(國基)를 흔들었다. 당시 제주도 사람들은 좌익의 정치적 슬로건인 단정 반대논리에 비교적 동조하고 있었다. 무장유격대를 조직하고 한라산을 근거지로 해 경찰 및 군인들과 대치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