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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 ⑪

좌익 모험주의와 우익 폭력의 대충돌, 제주 4·3과 여순사건

  •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 wblee@aks.ac.kr

좌익 모험주의와 우익 폭력의 대충돌, 제주 4·3과 여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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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선·단정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4·3 직후 미군정은 이를 치안의 위기 상황으로 간주하면서 경찰력과 서청을 증파하면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 단순하게 대응했다. 그러나 사태가 쉽게 수습되지 않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국방경비대에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다.

한편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무장대측 김달삼과 4·28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사태 해결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우익청년단체의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깨졌다. 무장대와 토벌대의 타협은 애초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희생자가 그렇게 많지 않았으므로 이 단계에서 봉합됐다면 갈등의 증폭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므로 아쉬운 대목이다. 4·3습격에 남로당의 책임이 크다면 4·28협상 무산에는 청년단체의 책임이 크다 할 것이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과 24군단 작전참모 슈 중령을 제주도에 파견하고 경비대 9연대장을 교체해 5·10선거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5월10일 실시된 총선거 결과 제주도 총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오직 2개 구에서만 선거가 실시되지 못한 것이다. 제주도민이 4·3사건의 와중에서 좌익의 영향을 받아 선거에 반대했음을 보여준 결과였다.

그러자 미군정은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전개하며 1948년 6월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5월20일에는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해 무장대측에 가담하고, 6월18일에는 신임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부하 대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었다.

이후 사태는 소강국면을 맞는 듯했다. 무장대는 김달삼 등 지도부의 ‘해주 대회’ 참가 등으로 조직 재편의 과정을 겪었다(후일 김달삼은 북한의 국가훈장 2급을 받았다고 함). 군경 토벌대는 정부 수립과정을 거치면서 느슨한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소강상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9월9일 북쪽에 또 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됐다. 이승만 정부는 10월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했다. 그런데 이때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남으로써 또 한번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다.

초토화작전과 대살(代殺)

결국 1948년 11월17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령 제31호로 제주도에 계엄령(제헌헌법 제64조에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계엄을 선포한다’고 규정돼 있는데 우리 계엄법은 1949년 11월24일에 제정 공포됐으므로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 공포의 근거로 삼은 법률은 일제의 계엄법인 셈이다)을 선포했다(1948년 12월31일자로 해제). 이에 앞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주민의 희생이 가장 컸던 시기는 계엄령이 선포된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 동안이었다. 계엄령은 당시 제주도민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돼 공포의 대상이었다. 서청 등 우익세력과 경찰·군대는 무장대를 색출한다며 중산간마을을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 좌익과 아무런 관련 없는 주민이 많이 희생됐다. 중산간마을 주민이 가장 많이 피해를 당했으나 소개령(疏開令)에 따라 해변 마을로 내려온 사람들 중에서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공포에 떨던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추운 겨울을 한라산에서 숨어 지내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심지어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도 집행했다.

이러한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과 관련해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적혀 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된 후로는 진압·선무 병용작전이 전개됐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했다. 이때 많은 주민이 하산했다. 1949년 5월5일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끝났다. 5월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으며 5월15일엔 마무리 토벌을 주도했던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해체됐다. 이어 1949년 6월 무장대 총책 이덕구의 사살로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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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 wblee@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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