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호

“윤광웅 국방장관은 작통권 환수를 원치 않았다”

이종석 극본(?), 노무현 감독·주연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드라마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06-09-04 16: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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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광웅 장관은 작통권 환수 주장한 군인 아니다
    • 김희상 보좌관 퇴진 이후 국방은 ‘주인 없는 말’ 신세
    •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자주국방 로드맵의 정체
    • 국방 문제에 과도하게 개입한 민정수석실, 그로 인한 NSC의 위축
    • 이원형씨 비리 사건 계기로 갑자기 추진된 방위사업청 신설
    • 윤광웅 장관은 항명으로 미 해군을 지킨 알레이버크가 될 수 있는가
    “윤광웅 국방장관은  작통권 환수를 원치 않았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단독행사) 문제를 놓고 온 나라가 둘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다. 가장 극적인 갈등은 역대 국방부 장관(차관과 대장 포함)과 윤광웅 현 국방부 장관 사이의 대립이다. 8월2일 역대 국방장관들은 윤 장관에게 집단으로 면담을 요청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논의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이에 대해 윤 장관은 다음날 브리핑에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로드맵을 위한 약정서(TOR·Terms Of Reference)에는 한국군이 전시작전통제권을 단독으로 행사하더라도 주한미군은 계속 주둔하고, 유사시 미군의 압도적인 증원 병력도 전개하는 것으로 돼 있다”고 밝히며, 역대 국방장관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 갈등에 노무현 대통령이 뛰어듦으로써 점입가경(漸入佳境)의 사태가 벌어졌다.

    8월9일 노 대통령은 연합뉴스와의 회견에서 “주한 미 육군부대의 평택기지 입주에 맞춘 2009년에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면서 “우리는 자기 군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갖지 않은 유일한 나라이다.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고 병력수로는 세계 6위의 군사강국인데 작전통제권을 갖지 못하고 있다. 작전통제권이야말로 자주국방의 핵심이고, 자주국방이야말로 주권국가의 꽃이라는 게 핵심이다”며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남북간 긴장완화를 위한 군사적 신뢰구축을 위한 군사협정을 할 때도 한국군이 전시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어야 대화를 주도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미국도 이제 한국을 자주국가로 대우해야 될 때가 왔다고 말한다. 한나라당이 하면 자주국가이고, 참여정부가 하면 안보위기나 한미갈등이 되느냐? 한국 대통령이 미국 하자는 대로 ‘예, 예’ 하기를 한국 국민이 바라는가?”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의지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는 노 대통령 개인의 의견이지 대한민국 국민의 다수 의견은 아닐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의 의견이 과연 국민의 의견과 일치하는지 확인하려면, 국회의 동의 절차를 거치거나 국민에게 직접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 역대 국방장관들은 8월10일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는 국회의 동의 절차라도 거쳐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영어 잘하는 윤 장관

    노 대통령과 윤 장관은 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주장하는가? 두 사람의 발언에는 주목할 부분이 있다. 윤 장관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로드맵을 위한 약정서(TOR)에는 한국군이 전시작전통제권을 단독으로 행사하더라도 주한미군은 계속 주둔하고, 유사시 미군의 압도적인 증원 병력도 전개하는 것으로 돼 있다”고 한 것과, 노 대통령이 “앞으로 남북간 긴장완화를 위한 군사적 신뢰구축을 위한 군사협정을 할 때도 한국군이 전시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어야 대화를 주도할 수 있다”고 한 부분이다.

    윤 장관과 노 대통령의 이 발언에는 배경이 있으므로 반드시 기억해두어야 한다. 윤 장관 발언을 분석하기 위해 먼저 그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기자는 윤 장관이 준장이던 시절(1992년)부터 그를 알아왔다. 그는 중장까진 선두로 진급을 거듭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잘나가던 그의 운세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제동이 걸렸다.

    해군의 중장 보직 가운데 최고 요직인 작전사령관을 하던 그는 DJ 정부 출범 후 참모차장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작전사령관이 된 호남 출신 동기생이 대장에 진급해 참모총장에 임명됨으로써 군복을 벗게 되었다. 그의 전역에 대해서는 “유능한 군인인데 때를 잘못 만나 뜻을 펼 기회를 잡지 못하게 됐다”며 아쉬워하는 후배가 많았다.

    윤 장관은 해군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군인으로 꼽힌다. 지금도 연례안보장관회의에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을 만나면, 통역 없이 토론할 정도로 유창한 영어 실력을 발휘한다. 군 내부에서는 ‘영어 잘하는 장교는 친미파’라는 의식이 존재해왔다. 영어를 잘하는 장교는 미군과 접촉할 기회가 많고, 자연히 한미연합체제에 대한 이해가 높아져, 다른 장교들보다 미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은 데서 생겨난 통념(通念)이다.

    해군과 공군은 육군에 비해 한미연합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한다. 한국 해군과 공군은 유사시 일본 요코스카를 모항(母港)으로 미 해군 7함대, 한국 오산을 기지로 한 미 7공군과 한덩어리가 돼 전투에 들어간다. 전시가 되면 한미연합사에는 지상군구성군사령부, 해군구성군사령부, 공군구성군사령부, 연합해병대사령부, 연합특수전사령부, 연합심리전사령부의 6개 구성군사령부가 만들어진다.

    연합사의 해군구성군사령부 사령관은 미 7함대 사령관(중장)이 맡고, 부사령관은 한국 해군의 작전사령관(중장)이 맡는다. 연합사의 공군구성군사령부 사령관은 미 7공군 사령관(중장)이 맡고, 부사령관은 한국 공군의 작전사령관(중장)이 맡는다. 연합사의 해·공군구성군 사령관을 미군 중장이 맡는 것은, 미 해군과 공군의 전력이 한국 해공군보다 압도적으로 강하기 때문이다.

    미 해군과 공군은 유사시 부대 배속이 자유로운 ‘편조(編造)’ 개념으로 부대를 운용한다. 따라서 전시가 되면 7함대와 7공군은 평시보다 훨씬 더 많은 부대를 거느리게 된다. 한반도에 전시가 선포되면 7함대와 7공군은 미 해군과 공군의 거의 모든 정예전력을 배속받으므로, 한국 해군과 공군 전력을 월등히 앞선다.

    그는 작통권 환수 주장한 적 없다

    지상전에 참여한 병사는 적군의 공격을 받더라도 싸우는 무대가 육지이다 보니 운이 좋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함정과 항공기는 바다와 하늘에 떠 있으므로, 적군이 쏜 무기에 맞으면 ‘모 아니면 도’의 ‘제로섬(zero sum) 위기’를 맞는다. 병력이 다치지 않았더라도, 함정과 항공기가 침몰하거나 추락하면 최후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해군과 공군은 ‘압도적인 우위’를 선호한다. 해전과 공중전에서 압도적인 우위는, 아군은 전혀 위험에 직면하지 않고 적군을 몰살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해·공군은 단 한 대의 장비, 단 한 명의 병사도 잃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 좋은 예가 2003년의 이라크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미군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 해·공군은 아군끼리의 오인(誤認) 사격과 사고를 제외하면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내지 않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한국 해·공군 관계자들은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기에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는 한미연합을 중시한다. 윤 장관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10여 년 넘게 만나온 기자에게, ‘한미연합이 필요하지 않다’나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다. 군을 떠나 현대중공업 고문으로 일할 때도 그는 미 해군사(海軍史)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한미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윤광웅 국방장관은  작통권 환수를 원치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방 문제에 정통하지 못하던 당선자 시절에 이미 전시작통권을 환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김희상 전 국방보좌관은 그런 노 대통령에게 전시작통권을 환수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득하려 했다.

    윤 장관은 부산상고 동문(윤 장관이 선배)이라는 것 외에는 노 대통령과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그는 16대 대통령선거 직전 노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고 했다. 국방분야의 인맥이 취약했던 노 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해 그를 비상기획위원장에 임명함으로써 두 사람의 인연은 엮이기 시작했다.

    비상기획위원장 임명장을 받은 후 윤 장관은 “임명장을 주면서 대통령이 ‘한미연합은 우리의 생존에 중요하므로 그대로 유지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도 우리 것을 어느 정도는 관철해 나가자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미연합이 우리 안보에 중요하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 대통령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인수위의 ‘자주국방 로드맵’

    그러나 윤 장관은, 노 대통령이 안보문제에 대해 어떤 식견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 시기 안보문제를 놓고 대통령과 심도 있는 관계를 가진 사람은 예비역 육군 중장인 김희상 국방보좌관이었다. 김희상 보좌관도 대장 진급이 유력했으나 그는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씨와 고등학교(경복고) 동문이라는 이유로 김대중 정부 시절 대장 진급에 실패했다.

    김희상씨도 윤 장관처럼 별다른 인연이 없이 노 대통령을 만난 경우다. 정치적인 이유로 DJ정부 시절 불이익을 받았다는 공통점을 안고 있는 두 사람은 노 대통령이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려 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못하고 노 대통령을 만났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속내를 보인 후 두 사람의 행적은 전혀 달랐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 증거로 거론되는 것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외교·통일·안보분과위원회에서 만든 평화체제 로드맵이다. 평화체제 로드맵은 대외발표용 명칭이고 인수위 내부에서는 자주국방 로드맵으로 불렀는데, 이 로드맵에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언론은 이 내용에 주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평화체제 로드맵이나 자주국방 로드맵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외교·통일·안보분과위원회에는 각군에서 파견된 장교들도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도 전시작전통제권 환수가 담긴 로드맵을 작성하는 데 협조했다는 사실이다. 이 분과위에서 활동했던 한 인사는 “군인들도 진급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면, 그리고 문제가 되는 사안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면, 소신을 버리고 리더의 요구에 맞춰주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인사는 “당선자이던 노 대통령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자주국방 로드맵에 포함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취임 후 바로 관계자들을 불러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대한 검토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는 김희상씨가 이끄는 국방보좌관실과 국방연구원(KIDA) 출신의 서주석 박사가 이끄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기획실, 그리고 국방부에 전달되었다.

    대통령 지시를 검토한 3개 기관 가운데 국방보좌관실과 국방부가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올렸고, NSC는 환수해도 된다는 결론을 보고했다. 의견이 엇갈리자 노 대통령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문제를 공론화해도 좋은지 알아보기 위해 이 문제를 검토한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내부 토론을 시켰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김희상씨는 7월31일자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작전통제권 문제에 대해선 2003년 6~7월쯤 청와대에서 격론이 벌어진 적이 있다. 당시 노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환수 추진론자들과 논쟁이 붙어 책상을 치며 싸웠다. (중략) 그후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통령 앞에서 책상을 친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사표를 써 비서실장에게 제출했으나 며칠 뒤 반려됐다. 당시 국방부도 작통권 환수 추진 공론화에 대해 ‘곤란하다’는 입장이었다.”

    이 토론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김희상 보좌관의 주장을 반박한 이는 서주석 NSC 전략기획실장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그 토론회에서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이는 김 보좌관 한 사람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대통령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고 가만히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상황에서 김 보좌관의 주장은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토론회를 지켜보기만 했다고 한다. 이 토론회가 있은 후 김 보좌관은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그의 고등학교 동기동창인 문희상 대통령비서실장을 찾아가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문 실장은 이를 대통령에게 올리지 않아, 김 보좌관이 낸 사표는 자동으로 반려된 셈이 되고 말았다. 사표는 반려됐지만 이후 김 보좌관 입지는 크게 위축됐다고 한다.

    이듬해 2월11일 노 대통령은 김 보좌관을 비상기획위원장으로 내보내고 비상기획위원장을 하던 윤광웅씨를 국방보좌관으로 불러들였다. 김희상씨 방출 여파는 컸다.

    사고로 희생된 병사 유가족 위로

    청와대에 들어온 윤 보좌관이 국방문제에 깊이 개입하지 못하고 겉도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로 인해 청와대에서 국방문제는 ‘주인 없는 말’ 신세가 됐다고 한다. 윤광웅씨는 매우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다. 이 시기 윤 보좌관을 지근거리에서 모셨던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전후방 각지의 여러 부대에서는 사고로 인해 소중한 목숨을 잃는 병사들이 발생한다. 사고로 병사가 숨졌다는 보고가 올라오면 윤 보좌관은 가능한 한 숨진 병사의 유가족을 찾아가 위로했다. 그는 국가를 위해 복무하다 희생된 사람은 국가가 돌봐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국방보좌관임에도 국방문제에 대해 개입하기 힘들었던 그는 사고로 희생된 병사의 가족을 위로하는 것이 대통령의 일을 대신해주는 거라고 믿고 그 일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국방보좌관이 국방문제에 개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인 잃은 말’ 신세인 국방문제를 NSC의 서주석 전략기획실장이 끌고 가게 되었다. 그러나 NSC는 조기경보기 도입(EX) 사업과 한국형 헬기(KHP)사업 등 무기도입 문제만 다뤘지, 참여정부의 국방전략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하는 ‘큰 그림’은 다루지 않았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같은 큰 그림은 대통령이 담당할 영역이고 NSC는 대통령이 원하는 바를 도와주는 참모 기능을 해야 한다는 묵시적인 동의가 있었기에, NSC는 ‘작은 그림’에만 몰두하게 됐다.

    이렇게 되자 민정수석실이 ‘주인 없는 말’인 국방문제를 끌고 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계기는 2003년 연말에 터진 이원형 전 국방부 품질관리소장의 비리 사건이었다. 문재인씨가 이끄는 민정수석실은 이원형씨가 군납업체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을 포착해 경찰청 특수수사과로 하여금 수사하게 해 이씨는 구속 기소됐다. 이 일을 계기로 민정수석실은 ‘군에서 무기를 비롯한 물자를 도입하는 과정에, 여전히 비리가 많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민정수석실은 ‘무기나 물자 도입을 전문으로 하는 조직을 만들어야 이 비리가 근절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변호사 출신인 이용철 민정 2비서관이 중심이 돼 방위사업청(약칭·방사청) 신설안을 만들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국방부는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방사청이 집행하는 예산은 국방부 예산보다 많다. 군정권은 각군 본부가, 군령권은 합참이 갖고 있으므로, 국방부는 무기 도입을 비롯한 예산권을 갖고 각군 본부와 합참을 통제해왔다. 그런데 방사청이 만들어지면 국방부는 예산권까지 내놓게 돼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게 된다. 반면 방사청은 국방부를 능가하는 국방 실세가 될 수 있다.

    ”알레이버크는 항명을 통해 미 해군을 육군에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막았다. 그리고 참모총장이 되어 해군의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했다. 그 결과 그는 생전에 자기 이름을 붙인 함정을 본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

    민정수석실의 국방업무 개입

    이런 이유로 조영길 장관이 이끄는 국방부는 ‘방사청 신설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내놓았으나 대통령 최측근인 문재인 수석이 이끄는 민정수석실의 의지를 막지 못했다. 윤광웅씨가 이끄는 국방보좌관실과 이종석 사무차장과 서주석 전략기획실장이 이끄는 NSC는 이 문제에 대해 침묵했다. NSC의 침묵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청와대에서 방사청 신설 추진 과정을 지켜본 한 관계자의 증언이다.

    “방사청 신설은 애초 자주국방 로드맵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민정수석실이 방사청 신설을 추진한다고 하면 국방부는 물론이고 국방보좌관실을 대신해 대통령에게 국방문제를 보좌하던 NSC도 확실한 의견을 올려야 하는데, NSC는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원형씨 독직사건을 계기로 민정수석실이 즉흥적으로 추진한 방사청 신설에 대해 NSC가 반대의견을 피력하지 않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문재인 수석이 이끄는 민정수석실이 추진하는 것이라 손놓고 있었다는 것이 첫째 이유다. 둘째 이유로는 NSC와 민정수석실이 매우 껄끄러운 관계였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노 대통령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문제를 놓고 관계자들을 불러 토론을 시킨 2003년은 청와대 안에서 자주파와 동맹파 간의 갈등이 가장 첨예했던 시기다. 자주파와 동맹파의 갈등으로 김희상 보좌관이 경질되고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이 퇴임했다.

    그리고 이종석 NSC 사무차장이 주축이 돼 미국과 용산미군기지를 평택으로 옮기는 문제를 협의하게 되었다. 기세를 잡은 자주파는 이종석 사무차장도 친미 외교를 펼쳤을 것으로 보고 민정수석실 비서관들과 함께 뒷조사를 했다.

    이라크 파병문제가 거론됐을 때 김희상 보좌관과 국방부는 최고 1만명의 한국군을 파병하자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들은 파병 병력이 많을수록 한국군이 안전하고, 전후 한국 업체들이 이라크에서 많은 사업을 따낼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또 미국이 단단히 신세를 졌다고 생각할 것이므로 외교적으로도 얻을 것이 많다고 판단했다.

    반면 이종석 차장은 미국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파병만 하자는 안(案)을 제시했다. 이 차장은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반도 문제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갈 수 있다. 그러나 파병된 병력에서 희생자가 발생하면 반미여론과 함께 철군 여론이 높아질 것이니, 한국군은 가장 안전한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노 대통령은 이 차장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자주파는 이러한 주장을 관철한 이차장을 친미주의자로 본 것이다. 이들은 이 차장이 용산기지 이전협상에서도 국익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렸을 것으로 보고 뒷조사를 했다. 이 조사는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지만 이 일로 인해 NSC와 민정수석실은 매우 서먹해졌다. 이 때문에 민정수석실이 방사청 신설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NSC는 개입하지 않았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방사청 신설안에 대한 결재를 받을 때 민정수석실에서는 무려 14명의 관계자가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고, NSC에서는 이종석 사무차장만 배석했다고 한다. 민정수석실은 지난 1월1일 방사청이 개청되자, 방사청 신설 업무를 주도한 이용철씨를 방사청 차장으로 넣는 데도 성공했다.

    이용철씨가 방사청 차장에 임명된 데 대해 국방부에서는 비전문가라며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민정수석실은 이용철 차장이 있어야 무기나 물품 도입 비리를 차단할 수 있다고 보고 이용철씨의 차장 임명을 관철했다고 한다.

    2004년 6월 정부는 남북군사회담을 여는 데 성공해 DMZ 상에서 심리전을 중단하자는 합의를 도출했다. 그리고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의 남북 해군간 충돌을 막기 위한 긴급 교신에 대한 합의도 이끌어냈다. 이러한 합의는 NSC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 것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7월14일 북한 함정이 서해 NLL을 침범하자 우리 함정이 경고사격을 했다. 그러자 북한측은 긴급교신을 시도했는데도 한국 함정이 이를 무시하고 사격했다고 주장했다. 청와대의 지시로 NSC가 중심이 돼 진상조사가 펼쳐졌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희한한 사실’이 밝혀졌다.

    북한 경비정이 NLL을 침범하자 한국 경비정은 약속한 대로 “백두산”을 세 번 호출했으나 북측은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그에 따라 경고사격 준비를 하고 네 번째로 호출하자 북한 경비정은 약속한 “한라산”을 부르며 “지금 내려가는 것은 우리 어선이 아니고 중국 어선이다”는 다섯 번째 송신을 했다. 이에 우리 고속정이 “북상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는 여섯 번째 송신했으나 대답이 없었다.

    2분 후 한국 고속정이 경고사격을 가하자, 북한 경비정은 ‘남하하는 것은 중국선박이다’고 송신하고(일곱 번째), 이어 ‘귀측(한국 고속정)은 변침하여 남하하라’고 송신한 후 NLL 북쪽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일방적인 송신을 북한은 교신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청와대 오판을 덮은 윤광웅 장관 카드

    당시 남북한 함정이 대치하던 NLL 상에는 중국 어선이 없었다. 북한 경비정은 중국 어선을 추적하는 양 위장해 NLL을 넘었고, 한국 고속정은 긴급교신을 통해 충분한 경고를 한 후 경고사격을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조사반은 그 책임을 해군 작전사령관 등 엉뚱한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 문제로 노 대통령과 국방부의 결정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청와대와 군부의 갈등이 커지자, 7월말 노 대통령은 조영길씨를 해임하고 윤광웅씨를 국방장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해군 출신이고 성품이 온화한 윤 장관은 육군 출신이 다수인 국방부를 장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NSC는 한국군 전체 규모를 50만으로 감군한다는 개혁안을 검토했다. 이 안에 대해 윤 장관은 동의했으나 많은 병력을 줄여야 하는 육군에서는 시기상조론이 나왔다.

    그로 인해 남재준 총장을 대표로 한 육군과 청와대-국방부가 대립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 와중에 터진 것이 육군의 장군 진급 비리 사건이다(2004년 10월). 이 사건은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개입해 일으킨 것이다. 2004년 장군 진급 심사는 예년과 달리 국방부와 합참 등에 근무하는 대령들의 진급률이 낮았다. 진급에 실패한 사람들은 남 총장을 따르는 사조직이 진급을 독점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때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강호식 비서관이 윤광웅 장관을 만났다. 바로 그날 윤 장관의 지시로 김승열 차관보가 계룡대로 내려가 남 총장에게 일부 진급자를 바꾸라고 했으나 남 총장이 거부했다. 그리고 얼마 후 민정수석실로부터 육군에 아직도 사조직이 있다는 정보를 넘겨받은 군 검찰단이 수사에 들어가면서 진급비리 파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군 검찰부는 사조직을 밝혀내지 못했고 사조직의 우두머리로 지목된 남 총장의 비리도 찾지 못한 채 용두사미로 수사를 끝내고 말았다. 민정수석실의 잘못된 정보를 토대로 ‘실패한 표적 수사’를 한 셈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민정수석실이 군 인사문제에까지 개입해야 하는가’란 논쟁이 일어났다. 그후 국방문제에 대한 민정수석실의 개입이 줄어들었다.

    육군 사조직 문제를 거론했다가 실패한 청와대는 2005년 남재준 총장 후임자를 정할 때 고심했다. 이때 만난 NSC의 핵심 관계자는 기자에게 “50만 감군안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을 차기 육군총장에 임명하고 싶다”는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었다. 2005년 3월 군 대장 인사가 단행되었다. 그런데 그후론 국방부와 합참 사이에 한랭전선이 형성됐다.

    청와대를 대신한 국방부가 합참과 대립각을 세운 사례로 지난 5월초 평택 미군기지를 짓기 위해 대추분교 등을 강제철거했을 때 일어났다. 이때 경찰병력과 함께 군병력도 동원됐는데, 동원된 군병력에 진압봉과 방패를 줄 것인지를 놓고 합참과 국방부의 의견이 갈렸다. 합참은 병사들이 진압봉 등을 들고 나가야 한다는 의견이었고, 국방부측은 ‘잘못하면 제2의 광주사태가 일어난다’며 빈손으로 출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대립에서 국방부가 승리했다. 그 결과 병사들은 맨손으로 나갔다가 철거에 반대하는 시위대로부터 얻어맞게 되었다. 이에 대해 국방부측은 ‘병사들이 맞는 모습이 언론에 비쳤기 때문에 여론이 평택기지를 지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며 만족해했다. 반면 합참측 의견을 취재한 언론은 ‘시위대에게 두들겨 맞는 군대가 과연 군대냐?’며 국방부의 결정을 비판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윤 장관의 고민

    윤 장관이 위태위태하게 국방부를 끌고 나가는 동안 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청와대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의지를 구체화했다. 시기상으로 보면 평택기지 수용 추진과 함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추진 의사를 밝힌 것이다. 평택기지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한 세트로 추진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의지는 “주한 미육군이 평택기지에 입주하는 2009년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는 게 좋겠다”고 한 발언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군령권을 담당하는 합참은 되도록 환수시기를 늦춰 정보전력의 자주화가 이뤄지는 2012년쯤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일부 비평가들은 “2012년을 제시한 것은 2007년 말 대통령선거가 치러지면 노무현 정부의 영향력도 상실된다는 것을 고려한 결정”이란 의견을 제시했다.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윤광웅 국방장관은 합참의 주장을 수용했다.

    윤 장관의 심정은 8월3일 브리핑에서 그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로드맵을 위한 약정서에는 한국군이 전시작전통제권을 단독으로 행사하더라도 주한미군은 계속 주둔하고, 유사시 미군의 압도적인 증원 병력도 전개하는 것으로 돼 있다”라고 한 대목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윤 장관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요구를 중단하라는 역대 국방장관들의 요구에 대항해 이 말을 했다. 그러나 이 말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윤 장관은 역대 국방장관의 요구와 결과적으로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 장관의 말을 분석해보기로 하자.

    먼저 ‘유사시’라는 표현이다. 유사시(有事時)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용어다. 일본은 전쟁을 포기하고 교전권과 군비(軍備)를 부인하는 내용을 담은 평화헌법 제9조 때문에 국군을 갖지 못하고 자위대라는 변형된 군사조직을 운영한다. 정식군대가 아니기 때문에 자위대는 일반적인 군사용어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병을 ‘보통과’, 포병을 ‘특과’, 공병을 ‘시설’로 부른다.

    같은 이유로 일본은 전시(戰時)라는 말 대신 유사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말이 언론을 통해 한국에 알려지면서, 언젠부턴가 한국에서도 전시 대신 유사시를 쓰는 경우가 많아졌다. 따라서 윤 장관이 ‘유사시 미군의 압도적인 증원 병력이 전개돼 오기로 약정했다’고 한 것은 ‘전시가 되면 미군의 압도적인 증원병력이 전개돼 오기로 약정했다’라고 옮겨도 무방하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과 노무현 대통령

    노 대통령과 ‘한반도 평화보고서’는 어떤 관계?


    “윤광웅 국방장관은  작통권 환수를 원치 않았다”
    대통령직인수위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자주국방 로드맵에 넣었다면,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해야 한다는 노 대통령의 생각은 국방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던 시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역대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 중 그 누구도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추진하지 않았는데, 국방문제에 대해서는 비전문가인 노 대통령이 이를 추진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누가 노 대통령에게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라는 아이디어를 심어주었는가.

    이 의문과 관련해 주목할 것이 2002년 이종석 현 통일부 장관이 필자로 참여해 한울출판사에서 펴낸 ‘한반도 평화보고서’란 책이다(사진). 당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이던 이 장관은 박건영 당시 가톨릭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박선원 당시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 전문연구원, 박순성 당시 동국대학교 북한학과 교수, 서동만 당시 상지대 교수(그후 국정원 기조실장 역임)와 이 책을 공동집필했다.

    이 책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현재 노 정권이 펼치고 있는 남북정책과 국방정책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노 정권은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주한미군 주둔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만 추진하고 있는데, 이 책에는 똑같은 정책을 펼치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책은 1994년 북한이 핵위기를 일으켰을 때 미국이 북핵시설에 대한 국부 폭격을 준비하자 북한도 그 대응책으로 남한 공격을 준비하면서 한반도에 위기가 발생했다며, 미국의 자의적인 작전권 행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한국은 작전통제권을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1992년부터 북한이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미국측에 ‘주한미군 철수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시사를 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남북정상회담 이후인 2000년 10월 워싱턴을 방문한 북한군의 조명록 차수가 미북공동커뮤니케에 평화체계 수립 문제를 포함시킨 것은, 조 차수가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주한미군 주둔에 대해 양해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또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도 주한미군 주둔에 대한 북한의 태도를 다시 한번 확인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추정을 토대로 이 책은 북한은 주한미군의 주둔을 용인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남북한이 평화협정을 맺어야 하는데, 평화협정을 맺는 전 단계로 북한에 신뢰를 주기 위해서라도 미군이 갖고 있는 작전통제권을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8월9일 노 대통령이 “앞으로 남북간 긴장완화를 위한 군사적 신뢰구축을 위한 군사협정을 할 때도 한국군이 전시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어야 대화를 주도할 수 있다”고 한 말과 일맥상통한다. 7월5일 북한이 무더기로 미사일을 발사한 후 노 정부는 남북장관급회담을 예정대로 한다고 밝혔는데, 이 책 또한 남북회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해 7월 노 정권은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전제로 북한에 대해 전력(電力)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이 책은 ‘KEDO를 통해 경수로 2기를 건설해주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북한이 흑연 감속로를 재가동하게 되면, 한반도는 다시 위기 국면으로 빠져들 수 있다’며 북한에 대한 전력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노 정부가 펼친 국방개혁 가운데 하나가 방위사업청의 신설이다. 노 정부는 미국 일변도인 무기 수입선(先)을 다변화하고 무기와 물자 도입에서 투명도를 높이기 위해 방사청을 신설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똑같은 주장이 이 책에도 실려 있다.

    이 책은 ‘한반도 군축에 있어 또 하나의 걸림돌은 군축에 사활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미국 내 군산(軍産)복합체의 방해다. 군축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무기 자본의 대(對)한반도 영향력을 통제하고 축소지향적 군축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군비(軍備) 수입선이 다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무현 정부가 펼치는 국방정책과 대북정책이 이 책 내용과 흡사하다 보니 노 대통령이 이종석 통일부 장관의 아이디어를 수용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추진한 것은 아닌가 하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이 장관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지는 않았다. NSC 사무차장 시절 이 장관이 미국측과 용산기지 이전 협상을 벌이자, 노 대통령은 민정수석실을 동원해 이 장관이 친미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았나 조사했다.

    이 때문에 노 대통령은 이종석 장관에 대한 신뢰와 별건으로 이 장관이 필자로 참여한 이 책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한반도에 전쟁이 벌어지고 그에 따라 미국에서 압도적인 증원군이 도착했다면, 한국군과 미군에 대한 작전통제는 누가 할 것인가란 문제가 등장한다. ‘단일 전구(戰區·Theater)에는 하나의 작전통제권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전쟁에 적용되는 대원칙이다. 같은 전구에 작전통제권이 둘 있다면, 둘은 전쟁을 하는 양쪽의 작전통제권이 된다.

    현 체제대로라면 한반도 전구에서는 한미연합사가 양국 군을 작전통제한다. 그러나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해 한미연합사가 해체된 다음이라면, 한미 양국 군은 두 나라 군대를 통제하기 위한 사령부를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령부는 어느 나라 사령부일까. 안보문제 전문가들은 “증원군을 보낸 나라가 미국이라면 그 사령부는 미군의 사령부다”라며 이러한 설명을 덧붙인다.

    “자국의 젊은이와 자국산 물자를 희생해가며 참전한 나라가 작전통제권을 갖지 않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더구나 미국처럼 슈퍼파워 국가가 증원군을 보냈다면, 십중팔구 미국군이 작전통제권을 행사한다고 봐야 한다.

    한국군이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한 때는 평시(平時)이다. 한국군은 평시작전통제권과 전시작전권을 갖고 있지만 진짜로 전시가 되면 작전통제권을 미군에 넘겨주는 셈이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이 실제적으로 갖고 있던 것은 평시작전통제권이라고 할 수 있다. 평시작전통제권은 지금도 한국군이 갖고 있다. 그렇다면 굳이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안보문제 전문가들은 “한미연합사는 한미 양국 대통령의 지침을 받은 한미 양국 합참의장의 지시를 받아 움직인다. 한미연합사령관에는 미국 육군대장이 취임하지만, 한국은 연합사 운영의 50% 지분을 갖고 있다. 비유해서 말하면 한미 양국이 50대 50으로 투자하고 직원도 50대50의 비율로 회사를 만든 후, CEO만 미국인을 임명한 것과 같다. 이렇게 만든 회사를 미국 회사로 보자는 것이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자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합사 없이 전시에 미군의 지원을 받는다면 한국군은 100% 미군의 통제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연합사를 유지한다면 한국은 전시에 50%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노 대통령은 ‘이른바’ 민주화 운동가, 법률문제 전문가, 노동문제 전문가인지는 몰라도 국방문제 전문가는 아니다. 그러나 윤 장관은 국방문제 전문가이다. 그가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했지만 실제로는 환수가 아닌 상황을 만들겠다고 한 것은, 노 대통령의 요구도 만족시키면서 한국도 지켜야 한다는 현실을 수용해 만든 고육책(苦肉策)일 것이다.

    북한이 실전 배치한 미사일을 동해로 발사한 지금 한국의 안보당국자가 말장난에 가까운 언어의 유희를 펼치는 것이 옳을까. 그보다는 대통령에게 한반도 상황을 정확히 보고하고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물러나는 것이 자신도 지키고 국가도 지키는 방안이 되지 않을까.

    미 해군이 자랑하는 이지스 구축함을 가리켜 ‘알레이버크급(級) 구축함’이라고 한다. 3연임을 하며 무려 6년간(1955~61년) 미 해군 참모총장을 지낸 알레이버크 제독(1901~96)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알레이버크 총장이 미국이 자랑하는 이지스 구축함에 그의 이름을 붙이는 영예를 누리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윤 장관은 현대중공업 고문 시절 기자에게 알레이버크 총장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준 적이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이렇다.

    알레이버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함대에 속해 일본 해군과 싸웠다. 전쟁이 끝난 후 제독이 된 그는 미 해군본부의 조직 연구 및 정책 담당 국장이 되었다(1948년). 2차 세계대전은 미 육군 항공대(당시 미 공군은 육군 소속이었다. 미 공군은 1947년 육군에서 독립했다)의 B-29 폭격기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끝났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강력한 군축(軍縮)에 착수했는데, 그로 인해 육·해군을 합쳐 통합군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육군이 해군을 흡수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주장이었다. 1946년 미국은 초대형 전략폭격기인 B-36의 시험비행에 성공했다. B-36은 원폭을 투하한 B-29보다 훨씬 큰 폭격기다. 때문에 이 폭격기에 원폭을 싣고 가 떨어뜨리면 모든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막연한 ‘신화’가 생겨났다.

    그로 인해 ‘함재기를 싣고 가 싸우는 해군의 항공모함은 필요 없다’ ‘B-36을 띄워 원자폭탄을 투하하면 모든 전쟁에서 이길 수 있으니 해군도 필요 없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항모·해군 불용론은 해군을 육군에 통합시켜야 한다는 주장과 맥을 같이했다. 미 해군의 위기감이 높아졌다.

    알레이버크 제독의 항명

    1949년 알레이버크가 중심이 된 미 해군 수뇌부는 미 하원 군비축소위원회에 출석해 “미 공군이 B-36 폭격기를 구매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통합군 창설로 국방 예산을 축소하겠다는 트루먼 행정부의 논리에도 모순이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정부 정책에 반하는 ‘항명(抗命)’을 한 것이다.

    미군사(美軍史)에서 ‘제독들의 반란(the Revolt of the Admirals)’으로 기록된 이 항명으로 미국 조야가 발칵 뒤집혔다. 이 일로 알레이버크는 ‘반(反)통합군 및 반(反) B-36 폭격기 주의자’로 몰려, 해군 감찰감실의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진실을 이야기했을 뿐 항명한 혐의는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후유증은 대단했다. 무장한 군대인 해군이 결사적으로 반대한다는 것이 확인됐으니, 통합군 창설을 추진하던 정치인들이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통합군 창설 논의가 중단되고, B-36에 대한 관심도 식어버렸다.

    B-36은 알레이버크 소장이 예언한 대로 훌륭한 폭격기가 아니었다. B-36은 388대가 실전 배치됐지만 1955년 신형 폭격기인 B-52가 출현하면서 실전 배치 8년 만에 퇴역했다. B-36 퇴진에는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비롯한 핵미사일 개발도 큰 영향을 끼쳤다. 원폭을 싣고 적진에 들어간 폭격기는 적 방공(防空網)에 걸려 격추될 수 있지만, 핵미사일은 그런 위험이 없다. 핵미사일의 등장으로 전략폭격기의 가치는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핵미사일은 함정은 물론이고 잠수함에도 실릴 수 있다. 특히 잠수함은 적국의 핵무기 선제공격으로 미국이 초토화하더라도, 싣고 있던 핵미사일을 발사해 수십분 전 미국을 초토화한 적국을 똑같이 초토화할 수 있다. 이를 ‘제2격(the Second Strike)’이라고 하는데, 핵미사일을 탑재한 잠수함의 제2격 능력 때문에 적국은 미국을 공격하지 못하는 ‘공포의 균형(the Balance of Horror)’이 이뤄진다. 이로써 불용론 소리를 들었던 미 해군은 미국의 안전을 지키는 핵심 세력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반전은 먼 훗날 이뤄진 것이다. 항명을 한 알레이버크는 한직(閑職)을 전전했다. 무려 7년간 소장 계급을 달고 있었던 것이다.

    직언으로 6년간 총장 재직

    핵미사일 개발 등으로 B-36의 조기 퇴진 움직임이 나타나던 1955년, 미 해군은 또 다른 문제로 고민하게 되었다. 당시 해군은 2차 세계대전 후의 지나친 감군으로 심각한 병력 부족을 겪고 있었다. 미 해군은 5만6000여 병력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는데 미 행정부는 해군의 고통을 외면했다.

    부족한 병력을 메우려면 징병제를 도입해야 했다. 그러나 미 행정부는 육군과 공군은 징병제로 병사를 뽑아주면서도 해군에 대해서만은 계속 모병제를 고수하도록 요구했다. 답답해진 해군 수뇌부는 ‘소신파’인 알레이버크 소장에게 돌파를 맡겨보기로 했다.

    1955년 소장이던 알레이버크는 무려 92명의 상급자를 제치고 일약 해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놀랄 만한 발탁 인사의 대상이 된 알레이버크는 윌슨 국방장관과 토머스 해군장관이 해군의 징병제 도입에 반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찾아가, “해군도 징병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직언했다.

    소신파가 카리스마를 움직였다. 알레이버크 총장과 면담한 후, 며칠 전 ‘해군은 모병제를 채택한다’는 서류에 서명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결정을 뒤집은 것이다.

    이러한 돌파력 덕분에 알레이버크는 3연임을 했다. 1961년 출범한 민주당의 케네디 행정부는 알레이버크에게 미 해군총장을 계속 맡아 달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알레이버크는 ‘이제는 새로운 사람이 해야 한다’며 퇴역을 자청했다.

    1982년 존 레만 미 해군장관은 분명한 소신으로 미 해군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알레이버크를 기리기 위해 미국에서 처음 건조하기로 한 이지스 구축함(DDG-51)에 그의 이름을 붙인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함정은 1989년에 진수됐는데 노환에 시달리던 88세의 알레이버크가 부인과 함께 진수식에 참석했다. 이로써 그는 생전에 자기 이름을 붙인 함정의 진수식을 본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 그후 미국은 같은 형의 구축함을 48척 더 건조했는데, 전부 알레이버크급으로 불리고 있다.

    손원일과 윤광웅

    일반인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같은 고도의 안보문제는 국가 지도자가 심사숙고해서 결정했을 것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노 대통령은 “평택기지로 주한 미육군이 이전하는 시기를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시기로 삼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이는 심각한 고민 없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시기를 결정한 대표적인 사례다. 국가 지도자의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결정을 바로잡아주는 것이 전문가들이 해야 할 임무다.

    미국은 ‘문민 우위’를 철저히 지키는 나라다. 그러나 문민이 그릇된 결정을 내리면 미국 군인들은 자리를 걸고 소신을 지켰다. 미국과 미군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문민 우위의 범위 내에서 항명한다는 미군의 전통은 그후로도 이어졌다.

    1975년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를 단행했다. 그러나 이때 북한군은 전력을 증강하고 있었다. 카터 대통령이 현실을 도외시한 채 주한미군 철수를 강행하자 1977년 싱글러브 8군 참모장은 ‘워싱턴 포스트’ 기자에게 “주한미군을 철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인터뷰 말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그렇게(철군) 결정한다면, 나는 이를 수행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워싱턴 포스트는 마지막 말을 빼고 인터뷰를 보도했다. 그로 인해 싱글러브 소장은 8군 참모장에서 해임되었으나 카터 대통령은 현실을 바로 알고 주한미군의 철수를 중단했다.

    지난 6월9일 해군은 현대중공업에서 손원일잠수함 진수식을 열었다. 장보고급 잠수함 9척은 대우중공업에서 건조했는데 윤 장관이 고문으로 있던 시절 현대중공업은 대우중공업을 제치고 손원일잠수함 건조권을 따냈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윤 장관은 노 대통령을 모시고 손원일잠수함 진수식에 참여했다.

    손원일씨는 해군 창설의 주인공으로, 최초 해군제독, 최초의 해군총참모장, 최초의 해군 출신 국방부 장관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손원일씨에 이어 해군 출신으로는 두 번째로 국방장관에 임명된 이가 윤광웅씨다. 윤 장관은 손 제독에 이어 자기 이름을 함정에 넣는 군인이 될 수 있을까. 알레이버크를 존경하는 윤 장관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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