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위기 이후 혼돈의 시대가 그에겐 절호의 기회
- 입사한 곳마다 정부 발주 싹쓸이
- “보고서는 담배 한 대 피우면서 읽을 분량으로 만들 것”
- 워크아웃, 배드 컴퍼니, 미래 ABS…새로운 금융기법 소개
- “정건용 전 산은 총재, 황영기 우리은행장은 언제든 통화할 수 있는 사이”
- 아시아에 한국 구조조정 경험 팔 목적이었으나…
8월9일 ‘금융 브로커’로 알려진 김재록(金在錄·49) 전 인베스투스글로벌 회장이 수의를 입고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으로 들어섰다. 그의 어머니가 방청석 맨 앞줄에 앉아 아들의 공판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흘긋 뒤를 돌아본 김씨는 어머니를 보고는 간단하게 목례만 했고, 회사 직원들을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파란 수의를 입은 채 어머니 앞에서 웃을 수 있는 아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고는 검사와 치열한 공방전이 시작됐다.
▼ 2001년 12월4일 여의도 산은캐피탈 8층 세종클럽에서 정건용 전 산업은행 총재에게 미화 1만달러를 준 사실이 있지요?(검사)
“있습니다.”(김재록)
▼ 2003년 5월부터 2004년 2월까지 서울 양재동의 80평대 사무실을 정건용에게 무상으로 제공했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시점은 총재 자리에서 물러난 뒤였습니다.”
▼ 그 기간에 정건용의 여비서에게 급여를 지급했지요?
“회사가 정식 채용해서 급료를 준 겁니다.”
▼ 그 여비서는 오랫동안 정건용과 함께 일한 사람이지요?
“맞습니다.”
▼ 정건용이 이용하는 헬스클럽이 양재동에 있어 사무실을 그쪽으로 정한 것이지요?
“임차료가 싸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 돈은 왜 준 겁니까.
“평소 존경하던 선배님이니까 준 겁니다.”
▼ 사무실은 왜 제공했나요?
“경질돼서 나온 선배에게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정건용은 회사 자문위원도 아닌데요.
“내 마음속의 자문위원입니다.”
▼ 정건용이 산은 총재 시절, 김재록씨를 불러서 ‘내 이름을 팔고 다니지 말라’고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있지요?
“있습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정 총재에게 안 좋은 얘기를 했기 때문에 해명하려고 만났습니다.”
▼ 김재록씨가 임병석 세븐마운틴그룹(현 C·그룹) 회장에게 ‘황영기(우리은행장)는 내가 행장 시켰다. 내가 아니면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사실입니까.
“그건 임병석의 일방적인 말일 겁니다.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황영기씨가 행장이 될 무렵 저는 미국에 있었습니다.”
로비스트와 컨설턴트의 차이
검찰은 이날 김씨에게 크라운제과, 사조산업, 세원텔레콤, 세븐마운틴그룹과 불법 계약을 맺은 것과 정건용 전 산은 총재에게 뇌물을 공여했다는 것을 추가 기소했다. 변호인은 검찰이 기소한 부분에 대한 대응자료를 준비 중이라고 밝혀 공판은 또다시 연기됐다.
1시간30분 동안 수많은 말이 오고갔지만, 한 가지 머릿속에 오래 남는 게 있다. 판사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을 되풀이한 김씨에게 그 뜻이 정확하게 뭐냐고 물었다. 이에 김씨는 “프로젝트가 실행 가능성이 있었다면 기억했을 텐데, 그렇지 않은 건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실패한 것은 잊고 싶었다는 뜻이었을까.
컨설팅 업계에서 로비스트와 컨설턴트는 백지 한 장 차이라고 한다. 구별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그래도 컨설턴트들은 명확한 기준이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로비스트는 혼자 뛰지만, 컨설턴트는 조직이 뛴다. 로비스트는 ‘손님’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지만, 컨설턴트는 ‘손님’과 ‘시장’이 동시에 원하는 것을 가져다준다. 또한 로비스트는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려는 사람’이지만, 컨설턴트는 ‘해야 하는 일을 해내는 사람’이다. 김씨가 법정에서 수차례 “실패한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았다는, 따라서 자신은 로비스트가 아닌 컨설턴트였다는 점을 호소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김재록씨는 당시 이한동 신한국당 고문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여행사를 전전하던 김씨는 운동권 출신 동생의 소개로 이 고문의 보좌관이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이 고문이 신한국당의 대권주자를 염두에 뒀으므로,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김씨의 인생에도 꽃이 피어날 터였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이 대권 후보로 이회창씨를 지목하자 이 고문은 대통령의 꿈을 접어야 했다. 정권에 배신감을 느낀 탓인지, 이 고문은 이회창씨와 대권을 놓고 경쟁하던 김대중 후보 진영에 김씨를 소개했다. 1997년 대선 막바지에 김씨를 만난 김대중 후보는 간단한 면접 뒤 그를 “똑똑하다”며 칭찬했다고 한다.
김씨가 이제껏 거물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 곁에서 배회한 것은 출세욕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이렇다 할 학벌이나 혈연도 없이 뭔가 일을 벌이자면 ‘배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1997년 12월 금융위기 전후로 진념 전 경제부총리와 가깝게 지낸 것이나, 그 후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정건용 전 산업은행 총재, 황영기 우리은행 회장과 “언제든 통화할 수 있는 사이”로 지낸 것도 이들의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과 절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그는 고등학교만 졸업한 과거를 숨길 수 있었다.
학벌, 인맥, 그리고 술
1997년 금융위기는 그에게 ‘기회’였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혼돈의 시대에 그는 ‘대통령 특보’라는 명함 한 장 들고 금융시장에 뛰어들었다. 야당이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정권을 잡았을 때 ‘특보’ 직함은 썩 괜찮은 이력이었다. 사실 그는 1997년 대선 캠프에 뒤늦게 합류했고, 내부에서 반발하는 바람에 제대로 특보 활동을 한 적은 없다. 그러나 김씨는 그 이력을 적절하게 활용했다.
1998년 3월 세동회계법인에 자리를 얻어 들어가면서 그의 ‘금융가 마당발 인생’은 시작된다. 하지만 입사 후 처음 3개월 동안 그는 금융업계의 생존원리를 깨닫고 좌절했다. 기업의 감사 프로젝트 하나 따내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 줄 몰랐던 것이다. 학벌은 물론 술과 로비로 다져진 ‘인맥’을 얼마나 광범위하게 구축했는지에 일의 성패가 달려 있었다. 이런 시장에서 그는 애당초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검찰은 정건용 전 산은 총재가 김재록씨에게서 미화 1만달러와 사무실을 무상 제공받은 사실을 밝혀냈다.
이들은 재정이나 경영이 어려운 회사를 찾아 적절한 조언을 해주고 자문료를 받는 비즈니스를 논의하고 있었다. 이런 사업이라면 인맥이 없는 자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회계감사보다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는 얘기에 귀가 솔깃했다. 이들은 김씨에게 함께 일을 키워보자고 제안했다. 그가 주력할 ‘컨설팅’ 사업을 시작하는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김씨는 본격적으로 이 일에 뛰어들었고, 회사 이름도 세동회계법인에서 세동경영회계법인으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회계감사보다 경영 컨설팅에 주력해야 회사가 클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대표를 설득해 1998년 6월 경영 컨설팅 부서를 만들고 30명을 충원했다.
특이한 것은 회사 내 회계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증권사의 기업금융 담당자와 기업체의 자금 또는 기획부에서 일한 사람들 중심으로 팀을 구성했다는 점이다. 기업을 상대하려면 기업을 아는 직원이 필요했다. 틀린 것을 찾아내는 회계감사보다 새로운 일을 만들어낼 줄 아는 기획자를 우대하자 회계법인 내에서 반발이 적지 않았다.
새 팀을 꾸려 입찰에 참가해 처음으로 수주한 일이 1998년 기획예산위원회에서 발주한 정부 경영진단 프로젝트였다. 김씨는 앤더슨컨설팅, 한국개발연구원(KDI) 그리고 한국지방행정연구원과 컨소시엄을 맺어 참가했다. 51개 정부부처를 개혁하기 위해 실시한 경영진단 프로젝트에서 세동경영회계법인은 정부의 주요 부처를 배당받았다.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원회, 기획예산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예산청, 국세청, 관세청, 조달청, 통계청 등 재정·금융 분야를 관장하는 9개 기관이 세동경영회계법인의 실사 대상이었다.
정보력, 설득력 탁월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금융계는 깜짝 놀랐다. 메이저 회계법인도 아닌 세동이 주요 금융부처의 실사를 맡았기 때문이다. DJ 정권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실에서 근무한 정부 관계자는 “1997년 김씨가 기아자동차 경제연구소에서 근무할 때 진념 기아자동차그룹 회장을 만난 적이 있고, 1998년 초 김씨가 진 회장을 권노갑 의원에게 소개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진 회장은 권 의원을 만난 뒤 1998년 3월 기획예산위원장으로 발탁됐다. 그는 “진 회장이 김씨를 통해 권 의원을 소개받은 사실을 잊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금융가에선 진 위원장 덕분에 김씨가 정부 실사의 주요 부분을 맡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진 전 부총리와 김씨의 관계는 적어도 2002년까지는 이어졌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김씨는 2002년 진념씨가 경기도지사에 출마할 때 1억원을 제공한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검찰은 정치자금법상 공소시효가 지났고, 직무상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며 처벌은 하지 않았다.
김재록씨가 진념씨와의 친분을 이용해 정부 발주 프로젝트를 수주했다는 소문에 대해 김씨와 함께 일했던 한 컨설턴트는 이렇게 말했다.
“금융위기 이후 국내 주요 회계법인은 부실한 감사로 비난의 표적이 됐다. 개혁의 대상으로 찍혔기 때문에 정부 발주 프로젝트를 얻기 힘들었다. 반면 세동은 업계에서 마이너였기 때문에 오히려 지적당할 것이 적었다. 진념씨가 도와줬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정부 경영진단 비용으로 총 4억원을 받았는데, 이마저도 4개 기관이 나눠 가졌기 때문에 오히려 투입한 노력에 비해 손해였다.”
그의 말대로 수입은 적었지만 김씨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경제부처의 고위 관료들을 사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그는 한 번 만난 사람에게 호감을 사는 비결을 알고 있다. 천하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도 김재록이 한 말은 묵묵히 들을 정도로 정보력과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사람을 만나면 우선 정치·경제·사회 분야의 거대한 흐름을 거론하면서 대화를 시작한다. 신문을 꼼꼼하게 읽고, 흐름을 정리하는 능력은 거물 정치인 곁에서 일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다.
김재록씨는 진념 전 경제부총리가 2002년 경기도지사에 출마할 때 1억원을 건넸다.
재벌회장에게 주는 ‘특급 정보’
그와 함께 보고서를 만들었던 A씨는 “예측이 정확했다고 평가를 받았지만, 사실 별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지금이라도 2002년 신문을 펴고 대선 후보들의 지지율 추이를 봐라. 노 후보가 꾸준히 지지율을 높인 것이 확인될 것”이라며 “개인적인 감정을 갖고 보니까 오판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흐름을 정확히 짚어주면서 그는 자신만의 해석을 곁들인다. 다시 노 후보가 승리한다고 예측한 보고서로 돌아가보자. 김재록은 “민주화란 하층부와 상층부가 상호작용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회창 후보보다 노 후보가 이런 점에서 적격”이라며 “국민은 이런 점에서 노 후보를 지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드러난 데이터의 추이와 이에 대한 상식적이고 명쾌한 분석, 이런 얘기를 들은 ‘손님들’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상대에게 이처럼 거시적 설명을 끝낸 뒤, 그는 미시적인 영역으로 옮겨간다. 상대가 속해 있는 업종의 현황과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다. 그가 몸담았던 세동회계법인이나 아더앤더슨 한국지사엔 수많은 이사급 전문가가 포진해 있다. 이들의 학벌과 인맥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화려하고 탄탄하다. 이사들의 회의석상에서는 별의별 정보가 다 나온다. 인맥을 동원해 알아낸 정보여서 상당히 정확하다. 김씨는 이런 회의에 들어가 내용을 꼼꼼하게 메모했고, 이것을 가공해서 만나는 사람에게 제공했다. 그가 내놓은 방대하고 정확한 정보량에 놀랄 수밖에.
그는 거물급 인사를 만나면 ‘초특급 정보’를 꺼내놓는다. 예컨대 재벌 회장을 만나는 자리라고 가정해보자. 김씨는 친분을 맺은 정부 고위 관료들로부터 얻은 최신 정보를 재벌 회장에게 제공한다. 재벌 회장은 묵묵히 그걸 듣고는, 김씨와 헤어진 뒤 직원들에게 그의 말이 사실인지 조사하도록 지시한다. 결과는 김씨의 말이 맞다. 재벌 회장은 그를 기억해둔다.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눴고, 2006년 4월 현대차 비자금 사건이 터졌을 때 “김재록이란 이름만 기억할 뿐”이라고 발을 뺀 사람이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다.
김재록은 빠른 속도로 대한민국 최상층으로 진입했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 일한 B씨는 “한국의 이너서클이 생각보다 좁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설명한다. 이너서클 멤버 중 누구 한 사람의 입에만 오르면 금세 그의 이름이 퍼진다는 얘기다.
세동회계법인에서 근무하던 시절, 김재록은 정부 발주 물량을 싹쓸이해 화제가 됐다. 금융가에는 그가 고위 관료들과 친하다는 소문이 정보지를 통해 나돌기도 했다. 그에 대한 평은 ‘뛰어나다’ ‘사기꾼이다’ 등 양극단을 달렸는데, 오히려 이것이 신비로움을 덧씌웠다. 이렇게 되면, 그때부터는 누굴 만나도 “얘기 많이 들었다”며 격의 없는 만남으로 이어진다. 그러면 그는 “형, 동생 하자”며 말을 텄다.
센스 있는 도움, 기발한 시도
그러나 이렇듯 거물과 인연을 만든다고 해서 이것이 곧바로 일감을 따내는 것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사장을 안다고 해서 어느 날 뚝딱 자문업무를 던져주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어떤 회사라도 의사결정 과정이 있게 마련이다.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실무진이 외부 컨설팅 회사의 제안에 공감하지 않는다면 사장이라도 어쩔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경영 자문은 실무자를 설득하는 게 ‘처음이자 끝’이다.
김재록은 어떻게 현대자동차, SK, 대우자동차판매 등 굵직한 기업들과 컨설팅 계약을 맺을 수 있었을까. 그가 고객에게 접근한 방법은 이렇다. 김재록은 우선 신문을 보면서 기사에 등장한 기업의 문제점을 찾아낸다. 경제 고위인사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들은 얘기, 회사 임원회의 때 컨설턴트들이 세상 소식이라며 들려준 정보 등을 떠올리며 읽다보면 행간에 기업의 문제점이 보인다고 한다.
그러고는 회의를 소집해 방향을 정한다. 해당 기업의 담당자를 만나 제공할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한다. 보고서는 통상 48시간 이내에 작성해야 한다. 경쟁자가 접근하기 전에 먼저 만나야 하는 이유도 있지만, 이렇듯 서두르면 일을 집중해서 하기 때문에 보고서에 군더더기가 붙지 않는다고 한다.
보고서는 오너용 3∼4쪽짜리 요약본과 실무자를 위한 70∼80쪽짜리 보고서 두 가지 버전으로 작성한다. 요약본은 최고경영자가 담배 한 대를 피우면서 쭉 훑어볼 만한 분량으로 압축하는 게 핵심이다. 여기엔 앞서 설명했듯이 거시적인 흐름, 업종의 변화 예측, 그리고 회사의 문제점을 풀 방법 등이 깔끔하게 서술돼 있다. 이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은 특이하게도 정치권에서 일했던 직원이 담당했다. 기업을 처음 방문할 때는 실무자를 만나 요약본만 주고 “검토해달라”고 부탁한다. 일이 성사되면 실무자용으로 제작한 두툼한 보고서를 건넨다.
김재록의 전성기는 사실상 금융위기 직후부터 김대중 정권 말기까지였다. 그가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와 친분을 맺는 등 김대중 정권의 고위 관료들과 격의 없이 지낸 이유 중엔 그가 새로운 ‘금융기법’을 알려주거나 제안한 점도 있다. 물론 이들이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어려움을 당할 때 ‘센스 있게’ 도움을 주면서 친분을 유지하기도 했지만.
금융위기 이후 초유의 구조조정 사태가 벌어지면서 정부는 부실기업 처리 방식을 놓고 고민이 많았다. 당시 김재록은 외국계 컨설팅사로부터 새로운 금융기법을 전수하는 데 주력했다. 금융위기 직후, 한국사회에 등장한 워크아웃, 빅딜, 배드 컴퍼니, 미래 ABS(자산유동화증권) 등은 모두 그가 국내 처음으로 도입했던 것이다.
청산과 법정관리 정도만 시행되던 시절, 채권금융기관의 주도로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워크아웃은 신선했다. 이를 고합그룹에 적용했다. 대기업 간의 대규모 사업교환(빅딜)도 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구조조정 방식이었다. 회사의 부실자산을 배드 컴퍼니에 넘겨 처리하도록 하는 것도 새로운 경영정상화 기법이었다. 자산유동화증권을 미래에 발생할 자산에도 적용하는 것은 기발한 시도였다. 이를 금호타이어에 응용했다.
“업계 관행이었다”?
이렇게 전성기를 구가하던 김재록은 아더앤더슨을 나와 2003년 인베스투스글로벌을 설립하면서 새로운 꿈을 꾸었다. 그는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처럼 컨설팅과 투자가 병합된 비즈니스를 아시아에서 펼쳐보고 싶었다. 컨설팅 수임료로는 큰돈을 벌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국내 구조조정 프로젝트도 대부분 정리돼 새로운 일감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3년은 간접투자자산운용법의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던 해였다. 이 법이 통과되면 사모펀드를 설립할 수 있고, 그가 하려는 비즈니스가 가능해진다. 이 법은 예상보다 1년을 넘겨 2004년 12월 국회를 통과했다.
사실 컨설팅업계에서 브랜드가 없다는 것은 위험하다. 그래서 토종 브랜드로 국내 컨설팅 시장에서 활동하는 곳은 거의 없다. 그러니 그가 아더앤더슨을 나와 신생업체를 설립한 것은 ‘모험’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30여 명의 직원이 그를 따라 회사를 그만뒀다. 그와 함께 일한 직원 C씨는 이렇게 말했다.
“김재록 회장은 외부에서 직원 욕을 하면 참지 못했다. 과할 정도로 직원을 보호했다. 김 회장은 약속 때문에 술을 한잔 하고 새벽 2시에 사무실에 들어와도 직원들이 제출한 보고서를 끝까지 읽었다. 우리의 노력을 진지하게 알아줬다.”
김재록은 장차 은행업을 꿈꾼 것 같다. 그가 직원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한 것이 ‘시장경제’였다고 한다. 시장경제는 사업주체들에게 기회를 균등하게 배분해야 제대로 돌아가며, 진입장벽이 있다면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정부가 은행을 소유하거나, 은행이 보수화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예컨대 기술력 있는 기업이 자금을 융통하지 못해 도산한다면 그건 은행 책임이라는 얘기였다. 그래서 그는 우리은행과 손잡고 사모펀드를 개설하고, 회사를 투자은행으로 전환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의 구속과 함께 꿈은 무산됐지만.
구치소에 책 넣지 마라”“
검찰이 그에게 기소한 내용 대부분은 ‘불법 대출알선’에 관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은행이 할 일을 일개 컨설팅 회사가 약속했다는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재록이나 직원들은 이 부분이 잘못됐다는 것을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회사의 경영을 정상화하는 방안을 내놓을 때 증자나 자본유치 방안은 으레 들어가는 항목이었다는 게 회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컨설팅 업계가 관행적으로 자문하던 것이 법에 저촉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도 했다.
김재록은 브로커였을까, 컨설턴트였을까. 검찰은 그가 브로커였다고 판단하고 있다. 예컨대 김씨가 아더앤더슨 부회장 시절, 정건용 전 산은 총재에게 1만달러를 줬고, 그 대가로 산업은행이 주채권은행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업들의 구조조정 업무를 수주했다는 것이다. 이에 김씨는 “산업은행이 주채권은행인 기업의 구조조정 업무를 맡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대한 대가로 돈을 준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법정에서 진실이 가려질 부분이다.
그가 대주주인 인베스투스글로벌에는 현재 12명의 직원이 남아 있다. 회장이 구속되면서 28명이 나갔다. 김씨는 직원들에게 “재판이 길어지면 나가도 좋다”고 말했다고 한다.
구속 초기, 책을 넣어달라던 김씨는 요즘 책을 넣지 말라고 부탁한다. “명상을 하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그와 10년 동안 함께 일해온 회사의 한 관계자는 “우리가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며 “그가 구속돼 많은 것을 잃었지만, 얻은 게 있다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