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故) 이승만 전 대통령의 아들 이인수(李仁秀·75, 전 명지대 법정대학장) 박사는 KBS 1TV 드라마 ‘서울 1945’가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최근 KBS 임원진과 드라마 제작진을 검찰에 고발했다. 그는 고발 경위를 설명하며 열변을 토했다.
이에 대해 KBS 제작진은 “드라마가 다큐멘터리도 아닌데, 지엽적인 것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 ‘서울 1945’는 이념 드라마가 아닌 멜로 드라마”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이 박사는 장 박사와 함께 7월6일 “‘서울 1945’가 허위사실로 고인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며 드라마 제작진과 KBS 임원진을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이 박사는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며 기자에게 먼저 인터뷰를 제의해왔다. 이 박사와의 인터뷰는 8월5일 이화장에서 6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 왜 ‘서울 1945’ 방영이 중단돼야 한다고 봅니까.
“언론이 거짓말로 국민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KBS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국민을 속이는 내용을 방송해선 안 되죠. ‘서울 1945’는 근본적으로 잘못됐습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호도하고 있어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남북분단의 원흉으로, 여운형씨 암살 사건의 배후로 규정하고 있잖아요. 배우들의 대사와 행동, 제작진의 교묘한 편집을 통해 시청자들이 그렇게 믿도록 만들어놨어요. 이건 명백한 ‘범죄’입니다. KBS 관계자들이 ‘멜로 드라마니 괜찮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입니다. 실존한 인물을 그리면서 그게 말이 되나요? 조작된 역사를 홍보하고 있는 거죠.
‘서울 1945’는 현 권력층을 만족시키기 위해 만든 거예요.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은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승리한 나라’라는 뜻으로 말한 적이 있는데, 그런 역사관(觀)에 따라 제작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멜로 드라마라 괜찮다’니…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에서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는 오랜 고민거리다. 특히 허위사실 방영에 의한 실존인물의 명예훼손 논란은 최근 들어 부쩍 늘었다.
영화 ‘그 때 그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엔카’에 심취한 ‘정력가’로 묘사했다. 가수 심수봉씨는 “궁정동 안가에서 엔카를 부르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이 영화는 결국 법원의 결정에 의해 앞부분이 삭제된 채 상영됐다. 삭제된 부분은 픽션이 아닌 현대사의 실제 장면을 촬영한 기록 영상. 법원의 결정은 실제 장면을 영화에서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영화의 모든 내용이 ‘창작된 것’임을 명백히 한 것이다. 제작진의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면서 동시에 실존인물에 대한 명예훼손 논란은 최소화하려는 의도로 해석됐다.
그러나 ‘서울 1945’에선 광복 전후의 실상을 담은 사진들이 픽션과 섞여 방영되고 있다. 장중한 음악과 함께 흑백 기록사진들을 보여주는 대목이 끝나면 바로 뒤이어 마지막 사진 속 배경과 유사한 드라마 세트장이 등장하면서 흑백 화면이 컬러로 서서히 바뀌고 픽션이 시작된다. 시청자들에게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구분하기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여운형 반대쪽은 다 기회주의자?
이인수 박사측은 이승만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내용이 이 같은 화면처리로 인해 실제 사실인 것처럼 시청자에게 전달되는 효과가 크다고 본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현 정권의 ‘과거사 부정’ 정책에 대한 동조적 분위기와 상업주의가 방송·영화계에서 자주 결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박사는 “KBS가 권력자의 의중만 헤아려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가 보기에 ‘서울 1945’에 나오는 여운형은 미화됐다.
“드라마에서 여운형씨는 정의의 화신이고, 그 반대쪽 사람들은 모두 기회주의자로 그려졌어요. 이건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패전을 예감한 조선총독부로서는 조선에 체류하는 일본인 75만여 명의 생명과 그들의 재산을 어떻게 보호하느냐가 최대 과제였어요. 총독부측은 우선 송진우씨를 찾아가서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준다고 약속하면 행정, 치안 등 총독부가 가진 권력을 주겠다’고 회유했습니다. 그러나 송진우씨는 거절했어요. 일본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으면 친일정권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일제 때 일본인들은 조선인 지주들을 보호해줬어요. 지주들은 총독부와 가까운 사이였어요. 그런데 송진우씨 같은 지주집단이 총독부의 제의를 거절한 겁니다. 그래서 여운형씨를 찾았어요. 송진우씨는 직접 찾아가서 만났는데, 여운형씨의 경우는 8월15일이 되어 총독부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릇’의 차이죠.
총독부는 똑같은 제의를 했는데 여운형씨는 그 자리에서 서슴없이 승낙했습니다. 그리고 총독부로부터 2000만엔, 지금 돈으로 약 2000억원을 받았습니다. 그 돈으로 전국에 치안대를 조직하고 정치 기반을 만들었죠. 여운형씨는 일본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튿날인 16일 휘문중학교에서 군중대회를 열었어요. 그 자리에서 ‘패전한 일본인의 마음을 알아주자’고 연설했습니다. 또 박헌영씨와의 권력경쟁에서 밀릴 것 같으니까 김일성에게 자신의 딸을 인질로 주면서 그와 손을 잡았습니다. 그런 여운형씨를 ‘서울 1945’는 가장 정의로운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문석경, 말도 안 되는 설정”
▼ ‘서울 1945’가 ‘연방제 통일을 지향하는 준비작업’이라고까지 하셨는데….
“여운형씨 같은 사람을 부각하고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매장시키고 있잖습니까.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는 거죠. 공산당과 손잡고 통일을 했어야 옳았다는 얘기 아닙니까. 강정구 교수 식(式)의 논리죠.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가연합 통일론’을 주장하면서 북한이 내건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일맥상통한다고 했죠. 그런데 ‘국가연합 통일론’은 1960년 8월15일에 김일성 주석이 남한에 제안한 겁니다. 김 전 대통령은 자기가 고안한 것처럼 말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의 딸 문석경을 극중 이승만 전 대통령이 양녀로 삼는 장면도 나오더군요.
“일제로부터 갓 해방된 나라를 이끌어 보겠다는 정치인이 친일파의 딸을 양녀로 삼는다니…. 이런 설정이 말이 됩니까. 만일 이 전 대통령이 정말로 그렇게 했다면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 드라마는 이 전 대통령을 파렴치하고 치졸한 인간으로 만들어놨어요. 이 전 대통령은 양녀를 둔 적이 없어요. 친일파는 돈암장(이 대통령이 귀국 직후 살던 곳)에 얼씬도 못하게 했습니다.”
▼ 왜곡 논란의 핵심은 여운형씨 암살과 관련한 부분인 듯합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나오자 국내에서는 반탁운동이 거셌습니다. 그때 백범 계열은 미군정을 접수해버리자고 했어요. 송진우씨는 그 얘기를 듣고 어처구니없어 했습니다. 미 군정을 상대로 싸우면 안 된다고 만류했죠. 그 때문에 송진우씨가 죽게 된 거죠. ‘백의사’라는 임정의 암살단이 한 짓입니다. 그 계통이 여운형씨도 죽였어요. 미 정보부 보고서에 나와 있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암살에 관여했다는 어떠한 증거나 정황도 없습니다.”
▼ 이 전 대통령이 미 군정의 비호 아래 친일파와 손잡고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처럼 묘사한 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실제로 이 같은 견해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역사학자들도 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미 국무성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했어요. 당시엔 국무성에서 한반도 문제를 담당하고 있었으니까요. 이 전 대통령은 국무성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달라고 했지만 그들은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국무성과 긴장관계에 있었어요. 국무성은 1946년 2월 남한의 미 군정에 비밀지시를 내렸어요. ‘이승만은 국무성과 사이가 안 좋고, 김구는 중국 정부의 앞잡이이니 두 사람을 정치에서 제외시키고 제3자 김규식을 내세워 대통령으로 만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압박을 이겨내고 이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건국했습니다.”
KBS 1TV 주말 드라마 ‘서울 1945’의 인터넷 홈페이지.
“이 전 대통령은 친일파의 돈을 쓰지 않았어요. 여운형씨는 건국준비위원회 만들 때 일본 돈을 썼고, 김구씨도 송진우씨의 돈을 받았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국내에 들어와 정치 활동을 하려면 헌금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이 전 대통령은 스스로 나선 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 받들어서 영수가 됐어요. 자신의 조직을 직접 만드는, 그런 분이 아니었어요. 그러니 정치자금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김구 찾아간 이승만을…”
▼ 드라마의 다른 부분은 어떤가요
“사실과 다른 부분이 아주 많아요. 이 전 대통령이 국내에 들어올 때는 성대하게 환영을 받은 것으로, 김구씨는 쓸쓸히 귀국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를 게 없었어요. 이 전 대통령이 올 때도 마중 나온 사람이 없었어요. 두 사람을 거짓으로 대비시켜 놨습니다. 또 김구씨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귀국하기 전에 이 전 대통령은 경교장 등 그들이 살 곳을 사전에 답사하며 마련해줬어요. 김구씨가 경교장에 입주했을 땐 직접 찾아가기도 했어요. 그런데 드라마에선 ‘백범이 왔는데 안 가보시겠냐’는 질문에 이 전 대통령이 ‘그 사람이 와야지, 내가 가야 하겠나’라고 말하는 식으로 해놨어요.”
이인수 박사는 광복 후 백범의 활동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백범이 북한에 가서 김일성에게 ‘왜 선거 안 하느냐, 통일 선거하자’고 했으면 좋았을 겁니다. 그러나 백범은 ‘4·30 공동성명’에 도장을 찍었잖아요. 그 내용이 ‘외국 군대 철수’ ‘5·10 선거에 반대한 56개 단체를 중심으로 한 정부 수립’ 입니다. 56개 단체란 북로당, 남로당, 공산주의 방계단체, 한독당, 민족자주단체 등입니다. 한독당과 민족자주단체 2개 단체를 우익으로 본다고 해도 54대 2로 공산주의 쪽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백범은 거기다 도장 찍고 온 사람입니다.
또한 백범이 국내에 들어올 때 중국의 장제스 총통은 통신사까지 딸려 보냈어요. 그런 장제스가 위어만 공사를 경교장에 보내 ‘남북협상은 잘못된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위어만 공사는 백범에게 ‘당신 공산주의자냐, 지금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해야지 왜 그러느냐’고 충고했습니다. 이에 백범은 ‘내가 남북요인회담에 간 것은 북한의 실정을 알기 위해서였다. 이미 북한에는 군대가 조직돼 있어 향후 3년 동안 남쪽에서 열심히 군대를 양성해도 북한을 이길 수 없다. 곧 소련이 부추겨서 남쪽을 급습해 인민공화국이 될 텐데, 왜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이게 백범의 최종 노선이었습니다.”
이인수 박사는 전주 이씨 종친회 추천으로 1961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로 입적된 후 그해 12월13일 하와이에서 이 전 대통령을 만났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은 4·19혁명으로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였다.
▼ 1961년 하와이에서 이 전 대통령은 어떤 말을 하던가요.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어머니(이 전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아버님에게 ‘한인 기독교 단체에서 여비를 대준다고 했으니 경비 걱정은 말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외국에 있으면 되겠냐’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내년 3월에 모시고 귀국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그러나 결국 이 전 대통령은 다시 귀국하지 못했죠.
“아버님이 하와이에 간 걸 두고 ‘망명’이라고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아요. 아버님은 3개월 정도 하와이에서 쉬다가 입국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 국내 사정이 확 달라졌죠. 민주당이 집권하고, 이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고…. 그들은 자기네 정권을 안정되게 유지하는 게 최대 관건이었어요. ‘이승만’이라는 변수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때까지도 아버님을 따르는 세력이 많았기 때문에 그걸 감당할 수 없었던 거죠.”
▼ 이 전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어떻게 지냈습니까.
“검소하게 지내셨어요. 식사도 간소하셨고…. 늘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셨어요.”
이인수 박사는 대학원 학업, 이 전 대통령 사후 문제, 이화장 관리, 결혼 등 산적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1965년 7월19일 이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까지 한국과 하와이를 오가는 생활을 했다. 그는 1965년 7월4일 이 전 대통령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자 서둘러 하와이로 갔다. 7월19일 이 전 대통령이 타계할 때 고인 곁을 지켰고, 이 전 대통령 사후 유해를 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전 대통령의 빈소는 7월23일 이화장에 마련됐으며, 유해는 27일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곡해
▼ 이 전 대통령이 임종 때 남긴 말씀이 있습니까.
“병환이 깊어 말씀을 하실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아버님은 하와이에서 함께 지낼 때 제게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자유를 주셨으니 굳세게 서서 다시는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라.’ 성경의 갈라디아서 5장 1절이 아버님의 유언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하시던 날 ‘역사를 잊지 말고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는 당부도 하셨어요. 아버님은 특히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박사는 “국민에게 잘못 알려진 것이 너무 많다”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단독정부’ ‘단독선거’에 대한 곡해라고 말했다.
“아버님은 ‘단독정부’ ‘단독선거’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북한에는 1946년 2월8일 이미 인민정권이 수립돼 있었어요. 그거야말로 단독정권이죠. 하지만 남한에는 남한 인민을 대변할 기구가 없었어요. 세계에 우리 민족의 민의를 대변해서 말할 수 있는 조직체가 없었단 말이죠. 우리 국민의 정당한 의사를 대변할 위원회 같은 조직이 있어야 한다는 게 이른바 ‘정읍 발언’의 내용입니다.”
1945년 12월27일 체결된 모스크바 3상회의 의정서에 따라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됐다. 1월16일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예비회담을 시작으로 3월20일 제1차 회의가 열렸지만 아무런 성과 없이 5월6일부터 무기휴회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6월3일,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전북 정읍에서 정부 수립에 대한 구상을 피력했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기 휴회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도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님이 하와이에서 제게 그러셨어요. ‘단독정부라는 말을 누가 만들어냈는지 모르겠다. 나는 과도 정부로 남북을 대표하는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는데, 선거를 반대한 사람들이 단독정부 운운하며 민심을 현혹하려 한 것 같다. 단독정부는 본래의 뜻이 아니다’고.”
역대 정권의 ‘反이승만 전통’
▼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왜곡’이 생겨나는 이유를 뭐라고 봅니까.
“역대 대통령들은 정권이기주의에 빠졌어요. 문민정부다, 국민의정부다, 참여정부다 하면서 자기 정권만이 유일한 정통성을 지닌 정부라고 주장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한 위대한 업적을 깔아뭉갤 수밖에 없어요. 전두환 정권 때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출간한 ‘민족의 시련과 영광’이라는 책을 보면 ‘대한민국 건국은 잘못된 것이고 전두환 정권만 정통성을 갖고 있다’는 식의 내용이 나와요. 요즘 상황과 비슷하죠.
대통령이 대한민국 역사를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양심이 있다면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거예요. 자기가 어디서 태어나 공부하고 정치하고 대통령이 됐는데….”
이 박사는 8월7일 검찰에 출두해 ‘서울 1945’ 고발과 관련해 진술했다. 이날 이 박사는 기자와 통화하면서 “검찰에 크게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왜 이 박사는 검찰에 고발을 하고 여러 강연회에 나가 이 드라마를 비판하는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좌파들은 정직하지 않아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성도 없어요. 타협하지도 않죠. 지금 우리나라는 좌파 문화 속에 침몰해가고 있어요. ‘좌파의 색안경’을 국민에게 주입하는 첨병이 KBS입니다. 기본으로 돌아가 정직해져야 합니다. ‘서울 1945’를 검찰에 고발한 것은 단지 아버님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위기에 처한 국가의 운명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