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전쟁이 끝난 후 북한에서는 경제발전 방식을 두고 치열한 노선 갈등이 벌어졌다. 김일성파는 사회주의 건설의 토대를 세워야 한다며 중공업을, 반대파는 인민생활 향상을 내세워 경공업을 먼저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노선 투쟁은 결국 권력 투쟁으로 비화했고, 김일성 반대파는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북한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1950년대 노동절(5·1) 집회에서 군중의 환호에 답하는 김일성.
전후 북한의 실태는 경제를 복구하고 새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거의 맨손으로 시작해야 할 정도로 처참했다. 공업과 농업을 망라해 피해를 보았는데 공업 중에서도 중공업과 기간산업부문의 공장 설비는 완전히 파괴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경제적 파괴에 더해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식민지적 경제구조의 후진성과 낙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속된 점은 북한을 더더욱 힘들게 하는 또 하나의 제약이었다.
이제 북한은 정부 수립 이후 마련해놓은 이른바 ‘전쟁 이전 평화적 건설시기’(1948~50)의 경제적 자산이 거의 손상된 채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그것도 단순한 복구를 넘어 사회주의 건설을 이뤄야 하는 험난한 시기에 말이다.
사실상 1953년 이후 북한에는 통일된 발전전략이 부재했다. 그리고 이 같은 1950년대의 상황은 (지금의 북한체제의 일원성을 고려할 때) ‘역사상 정치적으로 가장 풍부했던 시기’였다. 전후 복구와 사회주의 건설을 놓고 다양한 노선이 제출됐고 그것이 정치적 경쟁과 갈등으로 확산됐기 때문이다.
복구와 건설을 둘러싼 노선 갈등
전쟁 이후 북한에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지는 명약관화했다. 전쟁으로 파괴된 경제를 신속히 복구해 피폐해진 인민생활을 하루빨리 향상시키는 것이 가장 긴급한 과제였다.
그러나 저발전 국가의 사회주의가 모두 그러하듯 당시 북한은 전후 복구말고도 또 다른 국가목표를 고려해야 했다. 바로 사회주의의 건설이었다. 파괴된 경제를 단순히 원상태로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공업화의 기초를 축성’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하는 동시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렇듯 북한에 있어 전후 인민경제의 복구발전과 사회주의 건설은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당면한 경제복구와 건설은 사회주의적 지향을 전제로 진행돼야 했고 그것은 이 시기 북한의 경제노선에 ‘전략’이 필요함을 뜻했다.
그러나 당시 북한에는 단일한 리더십과 합의된 사회주의 경제건설 노선이 확고하게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곧 이 시기가 발전전략을 새롭게 짜는 과정임을 뜻하며 동시에 발전전략을 둘러싼 각 세력간의 치열한 갈등과 대결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전후 1953년 8월에 개최된 당중앙위 6차 전원회의에서 축적 방식에 관련한 노선, 즉 ‘중공업의 우선적 장성과 농업 및 경공업의 동시발전 노선’이 채택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56년에 발간된 자료에 실린 이 회의 연설문에는 김일성의 동시발전 노선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다만 공업복구 건설에서 ‘선후차(先後差)를 두어야’ 하고 그것은 ‘기본시설에 우선을 두어야 한다’는 정도로만 언급돼 있다.
이는 중공업 우선의 복구 노선과 인민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경공업 등도 신속히 복구해야 한다는 노선 간에 절충이 이뤄졌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또 1953년 6차 전원회의 이후 중공업과 경공업의 우선순위를 놓고 당내 갈등이 존재했고, 갈등이 실질적으로 해소된 1956년에 들어서야 체계적 논리로서 ‘동시발전 노선’ 슬로건이 제시됐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1956년 이전까지는 중공업 우선과 경공업 우선의 노선 대립이 명백히 존재했다.
당시 김일성을 비롯한 주류세력은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절실한 이유로 첫째, 시간을 앞당겨 사회주의건설의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북한을 민주기지로 강화해야 한다는, 이른바 전후에 조성된 특수한 정치정세를 들었다. 둘째로 전쟁으로 인해 중공업이 가장 심대한 손해를 입었다는 사정을 들었다.
또한 중공업을 우선 발전시키지 않고는 농업과 경공업뿐 아니라 기본 건설부문, 교통운수의 발전 등 사회적 생산 전체가 발전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그것이 정당한 노선임을 강조했다.
나아가 이 같은 중공업의 우선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원래 중공업의 일정한 토대를 가지고 있던 점, 중공업 발전에 유리한 지하자원과 동력이 있다는 점, 사회주의 형제국가의 원조가 있다는 점 등을 꼽았다.
중공업이냐, 인민복리냐
그러나 중공업우선 노선에 대한 당내 반대파의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반대파의 논리는 전쟁피해로 고통 받고 있는 인민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중공업보다는 경공업 발전에 치중해야 하며 외국의 원조도 당분간은 인민복리 수준을 높이는 데에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대파는 중공업우선 방침에 대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그 어떤 문헌에도 없고 다른 나라에서도 해본 경험이 없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하겠는가?’ ‘기계에서는 밥이 나오지 않는다’ ‘인민생활이 어려운데 중공업 발전에 치우친다’고 비판했다. 전쟁으로 인민생활이 영락했으니 당분간 중공업은 다른 나라에 의존하고 외국 원조를 경공업에 투자해 인민생활을 향상시켜야 하며 거기서 축적되는 자금을 점차 중공업에 배정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주류파는 다음의 논리로 주장을 일축했다.
“중공업을 앞세우지 않고서는 경공업과 농촌경리를 발전시킬 수 없습니다. 관개시설을 많이 설치하고 농촌에 비료와 농기계를 공급하지 않고서는 알곡수확고를 높일 수 없으며 일반적으로 농업을 발전시킬 수 없습니다. …관개공사를 하자면 변압기, 모터, 시멘트, 철근, 전기 등이 필요한데 이것은 다 중공업에서 생산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경공업에 섬유원료를 대줄 수가 없습니다. 인조섬유, 화학섬유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화학공업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화학공업을 발전시키자면 전기공업을 발전시켜야 하며 석탄공업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 같은 논리에 기초해 중공업우선 세력은 인민생활을 앞세운 경공업우선 노선에 대해 이렇게 반박했다. 첫째, ‘먹고 말자’는 구호는 본질적으로 중공업의 우선 발전을 거부하는 것이고 이는 사회주의 확대재생산을 거부하고 혁명의 근거지를 약하게 하는 투항주의적 깃발이다. 둘째, 이들은 중공업과 인민생활을 대립시켰고, 셋째, 축적 없는 소비는 허망한 것임에도 이들은 축적과 소비를 대립시켰다.
반대와 반박을 거치면서 당내 갈등은 종국으로 치닫는데 그 결정적 계기는 1955년 12월에 있었다. 김일성은 중공업과 경공업의 노선갈등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고 이른바 ‘사상사업에서 주체의 확립’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당내 선전작업을 담당하던 소련계 전체를 공격했다. 소련계의 거두 박창옥을 비롯해 박영빈, 기석복 등에 대해 구체적 비판이 가해진 후 경공업 우선을 주장하던 세력은 점점 입지가 좁아지고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어 박창옥은 국가계획위원장직과 당 정치위원직에서 해임돼 기계공업상으로 좌천됐다. 박영빈은 당 선전선동부장과 중앙위원에서 해임돼 상업성 부상으로 내려갔으며 대신에 중공업 중시론자 이종옥이 후임 국가계획위원장이 됐다.
스탈린과 김일성, 마오쩌둥(왼쪽부터)의 대형사진과 3국 국기가 나란히 걸린 가운데 열린 북한군 수뇌부 회의. 1950년대 중반 소련과 동구권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지자, 김일성 반대파는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1956년 1월에 열린 당중앙위 상무위원회에서는 박창옥과 그 추종자들의 행위에 대한 규탄과 이를 청산하기 위한 전당적인 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로 결정했고 이에 따라 3월에는 소련파로서 이미 비판을 받았던 기석복과 정률의 자아비판서가 ‘노동신문’에 발표되기도 했다. 경공업중시 세력이 패퇴했음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전후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떠오른 또다른 핵심 쟁점은 농업협동화와 관련된 것이었다. 당시 북한이 내세운 협동화는 전쟁으로 처참하게 파괴된 농촌경제를 복구하고 농업부문에서 생산력을 급속히 발전시키기 위해 비효율적인 개인 중심의 소농(小農)경리를 집단화 방식에 따른 사회주의 농촌경리로 개조한 것이다.
즉 6·25전쟁으로 농업의 생산기반이 거의 붕괴했고 이와 더불어 부농(富農)의 월남과 중농(中農)의 빈농화 등 빈농 중심의 계급관계가 조성된 상황에서 농업생산력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농업을 집단화해 국가 통제하에 두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사회주의적 협동화는 원칙적으로 자본주의적 요소(착취)의 제한과 청산을 위해, 그리고 농촌의 낙후성과 빈궁을 해결하기 위해 농업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을 도모하는 방책이었다는 것이 북한측 설명이다.
북한의 협동화를 놓고 당시 불거진 갈등 양상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특히 논쟁의 진행과정에 협동화를 둘러싸고 각 파가 구체적으로 어떤 주장을 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단지 훗날 김일성의 발언을 통해 ‘협동화추진과 협동화유보’ 세력이 다음과 같은 쟁점을 놓고 대결구도를 이뤘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한때 일부 교조주의자들은 ‘사회주의공업화를 실현하지 않고는 생산관계의 개조가 불가능하다’느니 ‘현대적 농기계 없이는 농업을 협동화할 수 없다’느니, 또는 ‘사회주의적 개조의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느니 하면서 우리 당의 사회주의적 개조정책에 대해 의심을 품었으며 동요했습니다.”
당시 반대파의 주 논리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아직 남북이 통일도 안 됐는데 북반부에서만 협동화를 할 수 있는가’ ‘협동화는 조국통일에 지장을 주지 않겠는가’라는 지적.
이에 대해 협동화추진 세력은 ‘통일 여부는 북한에서의 민주기지 강화에 달려 있으며 민주기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의 유일적 지배가 필요하고 농촌도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둘째, 협동화 속도에 대해 ‘너무 빠르지 않은가’ ‘중농의 이익이 침범되지 않는가’ 하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주류파는 ‘경험적 단계를 거쳐 대중적 발전을 이루었고 양적 성장과 질적 공고화를 동시에 추구했으며 농민의 자발적인 자원성의 원칙에 철저히 따른 것이었기에 속도나 농민 이익 침범은 문제될 게 없다’ 논리로 반박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반대논리는 사회주의 공업화가 협동화의 전제가 된다는 것으로 ‘기계도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협동조합을 조직하겠는가’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수준을 뛰어넘지 않는가’라는 것이었다. 즉 ‘먼저 트랙터, 나중에 집단화’였던 셈.
이에 대해 주류파는 농업기계화가 협동화의 필수적 전제는 아니라며 오히려 “농업 생산력을 고찰함에 있어서는 다만 생산력에 의한 요인인 노동도구의 측면만 볼 것이 아니라 생산력의 다른 한 요인인 노동력의 측면, 우리 농민의 노동력의 질적 변화와 발전을 반드시 고려에 넣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계화나 공업화가 늦더라도 생산력에 걸맞은 조합규모를 유지하고 이미 가지고 있는 생산수단의 통합에 기초해서 농민이 열의를 가지고 나선다면 협동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김일성은 기계화 대신에 이른바 농민의 ‘노력조직화론’을 통해 생산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소련과 달라 농호당 배당되는 토지가 작기 때문에 노력조직만 잘하면 기계화를 하지 않아도 능히 협동조합을 조직해 운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계화를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기계화는 좋은 일이요, 또 꼭 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다만 협동조합을 조직하는 즉시 기계화를 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나라 조건에서는 협동조합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우리가 북한의 농업협동화 논쟁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생산력 발전에 앞선 생산관계의 개조’ 문제다. 즉 생산관계를 개조할 만한 객관적인 생산력의 발전토대가 미약한데도 북한에서는 농업협동화를 통해 생산관계 개조를 먼저 진행했던 것이다.
결국 협동화를 둘러싼 논쟁은 당시 경제노선의 특징적인 한 요소를 탄생시키는데, 바로 생산관계 개조에서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객관적 조건보다는 오히려 인민의 열의와 자각이라는 주체적 조건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이다.
권력투쟁의 정점 ‘8월 종파사건’
이 같은 공식은 이후 북한 경제노선과 원칙의 핵심 축을 이룬다. 즉 ‘생산력과 기술의 발전수준은 비교적 낮다 할지라도 인민이 낡은 생산관계의 개조를 절실히 요구하며 또한 그것을 맡아 할 만한 혁명역량이 준비됐을 때는 사회주의적 개조를 미룰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의 독특한 협동화 노선에서 정립된 이 같은 ‘생산력 발전에 앞선 생산관계 개조론’은 이후 동일한 맥락에서 경제관리체계나 사회주의적 경쟁운동(집단적 혁신운동)에서도 물질적 인센티브보다 오히려 정치사상적 자극을 더욱 중요시하는 방침으로 발전하면서 북한식 발전전략의 한 고리가 된다.
1950년대 북한에서 전후 복구와 사회주의 건설을 놓고 갈등과 대립이 치열했다는 것은 정치세력 사이에 각축전이 진행됐음을 뜻한다. 합의된, 일치된 발전전략이 부재한 상태에서 새로이 그것을 형성하고자 하는 과정은 반드시 이견그룹과 정책갈등을 유발하게 마련이며 1950년대 북한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실제로 1950년대 전후 경제발전 과정에서 이른바 ‘축적의 방식’을 놓고 벌어진 갈등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중공업우선 노선의 승리로 귀결됐지만, 이는 단순히 경제 노선의 갈등에 머물지 않고 김일성 주류세력과 반대파의 전면전을 예고했다.
경제정책에서 완전히 밀려난 경공업중시 세력이 다음으로 취할 수 있는 수순은 1956년 소련에서의 탈(脫)스탈린 움직임을 기회로 주류파와 전면적인 정치 대결을 벌이는 것밖에 없었다. 결국 중공업우선 노선과 농업협동화 노선을 둘러싼 갈등은 북한내 각 정치세력간 대립으로 이어졌고, 이는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통해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주류세력과 이에 반대하는 소련파 및 연안파의 권력투쟁으로 마무리된다.
북한에서 정치권력을 둘러싼 공식 당내 투쟁으로 유일무이하게 기록된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의 기원은 경제발전 노선에서 불거진 대립과 갈등이었다. 즉 ‘8월 종파사건’은 중공업우선 노선과 농업협동화 노선의 갈등을 기저에 깔고 1956년 2월 20차 소련공산당대회에서의 개인숭배 비판이 계기가 돼 권력투쟁으로 비화한 것이다.
정치갈등 이면에 존재하는 경제노선의 갈등은 실제 ‘8월 종파사건’ 과정에도 표면화된바, 이는 당시 상업상 윤공흠이 “무원칙한 중공업우선 정책으로 경공업과 농업경제가 낙후됐고 이리하여 인민생활이 극히 빈곤한 상태에 빠져 있는 실정”을 비난한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주류파의 공격으로 곧바로 제지당했다. 훗날 중공업우선 노선을 주장한 세력은 다음과 같이 경공업우선 노선을 역사적으로 단죄했다.
“만약 반당종파분자들이 떠벌리던 대로 우리가 형제 국가들의 원조로 일용품이나 천과 쌀 같은 소비품만 가져왔더라면 당시는 잘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일시에 때려 먹었더라면 오늘에 와서는 앞길이 캄캄하고 해마다 다른 나라로부터 쌀이나 천을 얻어와야만 했을 것이다.”
“만약 최창익, 박창옥 등 반당·반혁명 분자들이 떠벌린 대로 전후 시기에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지 않고 경공업 발전에만 치중했거나 또는 형제국가 인민이 주는 고귀한 원조를 모두 소비품으로 탕진해버렸다면 오늘 우리는 자립적 경제토대는 고사하고 인민생활을 계속 유지하는 소비품도 생산할 수 없는 궁지에 빠졌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김일성 추종파의 완승
1956년, 중공업우선 노선과 농업협동화 노선의 갈등은 김일성을 비롯한 주류파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이제 김일성 반대세력은 노선투쟁 패배와 함께 권력으로부터도 배제되면서 불행한 마지막 운명을 준비해야 했다. 이제 생존을 위해 김일성과 마지막 대회전을 벌이는 일밖에는 남지 않았던 것이다.
1956년 2월에 개최된 소련공산당 20차대회는 이들이 다시 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여겨졌다. 이 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비밀연설을 통해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비판하고 레닌적 집단지도체제를 주장했다. 또한 전쟁불가피론에서 평화공존에 따른 전쟁가피론을 제창하고 평화적 방법 등을 포함한 사회주의 이행의 다양성을 선언했다.
이를 계기로 동구 인민민주주의국가 등 국제 사회주의 진영은 탈스탈린운동의 성격을 띤 자유화, 민주화의 물결에 휩싸였다. 북한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같은 국제정세가 소련계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에 상당한 힘을 실어줬다. 1956년 흐루시초프가 제기한 개인숭배 문제가 이제 소련파에 의해 북한의 뜨거운 감자로 제기된 것이다.
북한은 1956년 3월 중앙위 전원회의를 열고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을 번역, 청취했고 이런 상황에서 조선노동당은 4월에 3차 당대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 반대파의 김일성 비판이나 집단지도체제 요구는 없었다.
토론과정에서도 대부분의 발언자는 노동당이 본래부터 집체적 지도원칙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기존의 당 노선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 비판은 원천적으로 봉쇄됐고, 개인숭배는 오히려 종파주의자들에 대한 비판 도구로 이용됐다.
결국 3차 당대회는 소련의 입김에도 반대파의 희망과는 달리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주류파의 승리로 귀결됐고 중앙위원 선출에서도 김일성 계열이 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분위기에 밀려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하지 못했던 반대파가 그대로 숨을 죽인 것은 아니었다. 이제 다른 방식으로 마지막 반격을 준비했다.
반대파의 마지막 저항
당대회를 자신의 뜻대로 성공적으로 마친 김일성은 6월1일부터 7월19일까지 소련과 동구를 순방했다. 이 기간은 반대파가 세력을 규합하고 전열을 재정비하는 데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이들은 합법 출판물에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글을 게재하고 당내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반(反)김일성 세력을 규합한 중심인물은 연안계의 대표주자 최창익과 이미 1955년에 교조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국가계획위원장과 정치위원에서 밀려난 소련계 박창옥이었다. 이들의 반김일성연합에는 당시 북한주재 소련대사 이바노프의 개입도 한몫을 했다. 이바노프는 김일성이 북한을 비운 사이 최창익에게 접근해 당 중앙위의 합법적인 결의로 김일성을 당에서 축출하자고 제의했고 박창옥에게도 이런 뜻을 전했다.
이제 김일성에 대한 대반격의 준비는 완료됐다. 때마침 폴란드와 헝가리에서는 탈스탈린운동의 영향으로 스탈린주의자들이 곤경에 처하는 등 자유화와 민주화바람이 거세게 일었고, 이것이 반대파를 더욱 고무시켰다.
반대파의 준비된 저항은 김일성이 해외순방을 마치고 귀국보고를 하기 위해 소집한 8월30일의 전원회의에서 시도됐다. 상업상 윤공흠이 발언했으나 오히려 이를 비판하는 당 주류파의 공격이 대세였고 그 결과 반대파는 숙청됐다.
당시 전원회의에서 나온 구체적인 발언내용은 확인할 길이 없다. 단지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의 각료해임을 알리는 9월5일자 노동신문에 실린 ‘경제건설에 대한 당적 지도의 강화와 우리 당의 사상의지의 가일층의 공고화를 위해’라는 논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회의 분위기와 결정사항을 짐작할 뿐이다.
“당 중앙위는 집체적 지도를 엄격히 견지했으며 당의 통일을 항상 눈동자와 같이 고수했으며 당내 민주주의를 백방으로 발양… 그러나 민주주의 발양과 비판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당의 규율을 저해하며 당의 통일을 저해하는 행동은 당내에서 절대로 허용될 수 없다.
자유를 운운하면서 당의 영도에 대한 대중의 신임과 존재를 훼손하며 당의 중앙집권적 지도를 무시하며 당 지도부에 대한 불신임을 조성하며 당의 정책결정을 뒷골목에 앉아서 비난 혹은 반대하며 간부들을 중상해 당의 단결을 와해하려는 따위의 일체 자유주의적 무정부주의적 반당적 종파적 행동은 오직 우리 당을 외부로부터 반대하는 원수들의 비난공격과 상통하며 이것은 바로 적들이 원하고 있으며 자기들의 적대행동에 이용하려고 한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경계해야 한다.”
회의에서 반대파가 당내 개인숭배와 함께 당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지만 주류파의 반격에 밀려 그것이 당의 통일을 방해하는 해당(害黨)행위로 규정됐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원래 전후 경제노선에 대한 갈등이 정치갈등으로 비화된 저간의 사정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다.
싱겁게 끝나버린 8월 전원회의는 그러나 그 상태로 끝나지 않았다. 중국으로 망명한 서휘 등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미코얀 소련 부수상과 펑더화이(彭德懷) 중국 국방부장이 급거 입국해 김일성에게 8월 전원회의의 결정을 번복하도록 종용했던 것이다.
중·소의 원조를 받고 있고 여전히 중국군이 진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일성은 어느 정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해임 결정을 한 지 한 달이 채 못 돼 노동당은 9월23일 전원회의를 열어 최창익 박창옥의 당중앙위원 복직과 윤공흠 서휘 이필규의 당적 회복을 결정했다. 물론 결정 번복을 한 이 회의는 후일 공식적인 북한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
‘수령제 행진’의 신호탄
그러나 김일성 세력은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외세를 등에 업고 당의 노선과 정책에 반기를 든 이들 반대파를 그대로 둘 수 없었던 것. 드디어 1956년 12월 전원회의를 계기로 김일성은 반대파를 아래로부터 제거하는 공작에 돌입했다. 전원회의 결정서에 대한 ‘중앙당집중지도사업’과 당증재교부사업을 통해 당원과 대중을 동원함으로써 반대파에 대한 전인민적 비판작업을 추진했다.
이른바 전국적인 ‘반종파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외세의 개입으로 중단된 반대파 숙청을 아래로부터의 비판을 이용한 ‘군중주의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동시에 대중사업과 대중 토론을 통해 김일성 중심의 주류세력이 정당한 노선을 견지했음을 당원으로부터 직접 확인받는 과정이었다.
이상의 광범위한 반종파투쟁과 대중장악은 결국 반대파에 대한 대중적 비판을 끌어냈다. 반종파투쟁의 성공을 바탕으로 합법 출판물을 통한 반대파 비판이 더욱 거세졌다. 요지는 그들의 경제정책과 주장은 그릇된 것이었고, 주류파의 ‘경제정책이 과거에 있어서나 현재에 있어서나 시종일관 정확’했다는 것.
아울러 종파분자들은 ‘전쟁의 참혹한 피해로 아직 일부 유족하지 못한 것을 이용해 그것이 마치 우리 당의 경제정책이 잘못된 결과인 듯 떠들면서 당과 대중을 이탈시키고 당 정책을 파탄내려는 반당적 종파행동’을 감행했으며 ‘조선인민과 우리 혁명의 배반자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배신자로서 스스로를 폭로하고 말았다’고 비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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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8월 종파사건’은 ‘극히 흉악한 것이었으며 만일 우리 당이 그들을 제때에 폭로 분쇄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당과 혁명에 엄중한 후과(後過)를 초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역사적으로 정리됐다.
‘8월 종파사건’과 이후의 반종파투쟁이 이후 북한의 정치발전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특히 그 사건이 당시의 경제노선 갈등과 맞물린 상태에서 진행된 점은 경제적 발전전략이 정치적 차원으로 확산됐음을 입증한다.
또 그러한 정치적 권력투쟁의 과정이야말로 북한이 정치적 결과로서 하나의 방향, 즉 현재의 북한사회를 정치적으로 규정하는 이른바 ‘수령제’를 형성하는 단초였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경제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정치적 대결로 귀결되고, 그 과정에 반대파가 제거됨으로써 ‘수령제’라는 유일지도체제를 향한 행진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