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 레오 스트라우스 지음, 함규진 옮김/구운몽/ 492쪽/2만5000원
하지만 그의 우려와 달리 이에 대해 크게 놀랄 사람은 드물 것 같다. 그것은 그야말로 마키아벨리 시대부터 있어온 “구식의 단순한 견해”이기 때문이다. 정작 놀랄 만한 것은 스트라우스가 이 짤막한 결론을 대단히 복잡한 독법(讀法)을 통해 도출했다는 점이다.
사실 스트라우스(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어떤 텍스트에 담긴 주장보다 그 속에 감추어진 ‘비의(秘義)’를 ‘해독’하는 독특한 방식에 있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리비우스 논고’(본서에는 ‘로마사 논고’로 번역되어 있으나 이 편이 더 낫다)와 같이 그 의도가 불분명한 저작들은 통상적인 방식으로 읽어서는 안 되며, 마키아벨리가 권위 있는 것으로 간주했던 독법에 따라 읽어야 한다. 그런데 마키아벨리가 지침으로 삼은 작가는 리비우스이므로, 마키아벨리가 리비우스를 읽은 방식을 연구하면 그것과 똑같은 식으로 쓴 마키아벨리 저작들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그 독법이란 과거의 신학자들이 성서를 읽던 방식이다.
스트라우스의 秘義 독법
비의를 해독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떤 작가가 자신의 텍스트를 어떤 이유 때문에 비의적 방식으로 썼다는 확신이 있어야 하며, 그러한 확신은 비상한 방식으로 읽어낸 비상한 내용의 메시지로 입증되어야 한다. 하지만 비의적 텍스트의 독법은 대개 집단 내부의 극소수 사람에게만 알려져 있으므로 그것을 보통의 독자가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스트라우스는 이 책에서 자신의 독해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는 친절을 베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자상한 안내에도 불구하고 지성이 뛰어나지 못하거나 이미 마키아벨리에 오염된 학자들과 독자들은 그 과정 자체를 납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스트라우스는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비의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지녔다. 그는 우선 마키아벨리가 ‘군주론’과 ‘리비우스 논고’에 세상사의 모든 것에 통달한 자신의 지식을 남김없이 담았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그가 한 말은 무엇이나 의미가 있다. 모순적으로 보이거나 오류로 생각되는 경우도 다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어서 그렇게 해놓은 것이다. 심지어 어떤 주제에 대해 침묵한다면 그 또한 숨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양심, 공동선, 왕과 참주/폭군의 차이, 하늘에 대해 침묵했다. 반면 ‘리비우스 논고’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이런 주제는 통념상 중요하기 때문에 마키아벨리의 침묵은 범상치 않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트라우스의 비의 독법이 작동된다.
‘리비우스 논고’에는 돈이 전쟁의 원동력이라는 통념을 반박하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그러한 주장에 대한 전거로 리비우스를 들며, 전쟁에 필수적인 세 가지 요소로 다수의 훌륭한 병사, 분별 있는 지휘관, 행운을 꼽았으나 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키아벨리는 리비우스가 돈 문제에 대해 아예 침묵함으로써 전쟁에 돈이 중요하다는 통념을 부정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 방법을 자신의 글쓰기에 적용했다는 것이 스트라우스의 주장이다.
이러한 ‘마키아벨리 코드’ 해독법을 앞에서 제기한 ‘군주론’의 침묵 문제에 적용해보면, 마키아벨리는 양심, 공동선, 폭정, 기독교 신앙이 정치를 하고 국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하다는 상식과 통념을 부정한다는 숨겨진 의미가 비로소 드러난다. 이만하면 무릎을 칠 만하지 않은가.
진부한 주장? 진정한 의도!
암호 해독법에서는 대개 숫자가 중요한 법인데, 스트라우스 식 해독법 또한 텍스트에 숨겨진 숫자의 의미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다. 마키아벨리는 ‘리비우스 논고’ 2권 5장에서 세계의 영원성이란 주제를 논했다. 마키아벨리는 이 세계가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는 통념이 근거 없음을 논증한다. 스트라우스는 마키아벨리가 여기서 기독교 창조론을 부정함을 직감한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기 때문에, 스트라우스는 다시 비장의 암호 해독기를 작동시킨다. 그러고는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하늘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시작된 것이며, 1666년에서 3000년 사이의 수명을 가진다”고 한 마키아벨리의 불경한 의도를 읽어낸다.
평소 비교(秘敎)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이 대목에서 ‘1666년’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숫자에 깊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1600년도 아니고 1666년이라니! 스트라우스는 이 숫자가 어디서 나왔는지 밝히지 않기 때문에 독자의 궁금증은 커진다. ‘리비우스 논고’의 해당 대목을 찾아보는 수밖에. 그곳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이러한 종파들은 5000~6000년 사이에 두세 차례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전의 기록들을 잃어버렸다.”
마키아벨리는 여기서 홍수와 역병 같은 대규모 자연 재해가 종파와 언어의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논했다. 하지만 스트라우스에게 영감을 준 것은 위의 짤막한 한 문장이었다. 5000을 3으로 나누면 1666.666...이 나온다. 이것이 ‘1666년’의 계산법이다. 숫자의 비밀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는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추’를 탐독하기 바란다. 그곳에는 스트라우스 식 암호를 역으로 푸는 방법이 나와 있다.
스트라우스는 “마키아벨리가 악의 교사”였다는, 익히 알려진 주장을 하는데 왜 이렇게 ‘비상한’ 독법을 사용해야 했을까? 그것이 단지 진부한 주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마키아벨리가 숨긴 ‘진정한 의도’임을 만천하에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악덕’을 권고한 것이나 ‘리비우스 논고’에서 고대 로마를 예찬한 것은 일면 새로운 주장처럼 보이겠지만, 그것은 단지 “성서적 전통의 전복 혹은 그것에 대한 내재적 비판이라 불릴 만한 것”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스트라우스가 이 책에서 마키아벨리의 주장들을 끊임없이 성서와 연결시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대의 마키아벨리 학자들을 일절 언급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들 누구도 이런 숨겨진 비밀을 해독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와 아메리카
이제 한 가지 의문만이 남는다. 신학자가 아니라 고전학자인 스트라우스가 왜 이토록 기독교 중심주의/근본주의에 집착했는가 하는 점이다. 답은 책의 서문 뒷부분에 나온다. “미합중국이야말로 세계에서 마키아벨리의 원리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세워진 유일한 나라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가 최상의 국가로 칭송한 로마는 형제를 살해한 자에 의해 창건됐다. 일찍이 토머스 페인은 미국의 독립이 통치의 원리와 실제에서 혁명의 정신을 따라 자유와 정의에 입각하여 이루어졌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 현대의 폭정은 “선한 목적이면 어떤 수단도 정당화된다는 마키아벨리의 원리”에 뿌리가 닿아 있다(과연 마키아벨리가 그런 생각을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 “자유의 보루”가 아닌가. 비록 “적어도 미국의 현실이 미국의 열망과 떨어질 수 없는 한”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스트라우스는 감히 단언한다. “아메리카니즘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반대편에 있는 마키아벨리즘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트라우스는 대단히 복잡한 우회로를 거쳐 매우 단순하고 전혀 새롭지 않은 결론에 이르렀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보통의 독자는 스트라우스의 논지를 따라가기 어렵다. 마키아벨리의 저작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비의적 텍스트를 해독하는 스트라우스의 비의적 방식을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야말로 스트라우스를 정점으로 한 ‘성배 기사단’의 존재를 영속케 해주는 중요한 요소다. 근본주의적 기독교 신앙에 기초를 둔 순혈의 아메리카니즘이라는 성배는 그것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마키아벨리스트라는 적들로부터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스트라우시안과 네오콘의 기사들이 그렇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