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한미군 훈련장 증설 찬성하는 나더러 ‘반미 자주파’라니…
- 작통권 환수해야 하지만 시기, 방법에 문제
- 국내용과 대외용, 말과 행동 따로 노는 이중 외교
- 이종석 장관의 면담 제안 거절…외교안보 라인 인적 쇄신 필요
- 노 대통령, ‘외교 초과달성’ 오판…反日 이슈도 지나치게 악용
- 그래도 가장 신뢰할 만한 나라는 미국
- 여당 내 ‘정치개혁 근본주의자’ 때문에 외교안보 현안에 소홀
그러던 그가 언제부터인가 이종석 통일부 장관으로 상징되는 현 정권의 외교안보 라인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노 대통령이 힘주어 말하는 자주국방, 자주외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지를 내비치고 있다. 특히 노 대통령의 외교적 아마추어리즘, ‘확성기 외교’ 등으로 인한 국익 훼손 우려에 대해서는 이른바 ‘보수 진영’과도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여권에서는 친노 핵심 인물들의 ‘결별 명분 쌓기’라는 말도 흘러나오는 상황이다.
안보정책 시스템 낙제 수준
최 의원은 변호사 출신의 초선 의원이지만, 통일외교안보 분야의 정보력과 분석력은 상당한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국회 출입기자들도 6자회담, 북한 미사일 발사, 김대중 전 대통령 방북처럼 예민한 외교안보 상황이 불거지면 으레 최 의원을 찾곤 한다. 여당발(發) 대외비 문건의 창구로 통한다며 그를 ‘열린우리당의 정형근’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는 “정형근 의원처럼 ‘빨대’(핵심 정보원의 속칭)가 많다고 할 순 없지만 평소 미국 중국 일본 등지의 관련 저널은 물론, 외교안보 관련 연구소 등에서 출간되는 주요 자료들을 챙겨본다. 여기에서 축적된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현안을 파헤치기 때문에 정교함과 집중력이 좀 도드라져 보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 정부 출범 이후 이라크 파병 반대를 필두로 그가 보여준 ‘자주 지향적 행보’가 여당 의원으로서 ‘국익 외교’를 표방하는 그의 진정성에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그는 지난 2월 청와대 내의 이른바 ‘자주파’ 핵심으로부터 입수한 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관련 국가안전보장이사회(NSC) 기밀문건을 공개해 논란을 일으켰다. 한국군이 북한에 대한 전쟁 억지력 도모는 물론 동북아 지역분쟁에도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대미(對美) 각서가 2003년 10월 외교부와 NSC 주도로 체결됐는데도 노 대통령에게는 보고되지 않았을 만큼 안보정책 결정 시스템이 엉망이라는 게 그 요지였다.
이어 6월에는 국회 상임위에서 “북한 미사일 위기가 한창이던 5월30일, 이종석 장관이 청와대 안보수석비서관, 합동참모본부의장 등 대통령직인수위 출신 인사들과 함께 군납양주 10여 병을 놓고 ‘승진 파티’를 벌였다”고 폭로해 이 장관을 궁지로 몰기도 했다. 그러자 정계에서는 ‘강경 자주파’ 최재천 의원이 ‘온건 자주파’ 이 장관을 손보려 한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그러나 최 의원은 ‘신동아’와 한 인터뷰에서 현 정권의 ‘자주외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요컨대 매번 확성기에 대고 ‘자주’를 내세우지만 아마추어리즘과 이로 인해 초래된 동맹국 및 주변국에 대한 외교적 ‘신뢰의 위기’ 때문에 가장 비(非)자주적인 결론만 도출되고 말았다는 설명이다. 그는 “언론 등에서 나를 두고 ‘반미파’ ‘자주파’라는 말을 쓰는데,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돈키호테’라고 쓰는 신문도 봤다. 나는 ‘국익파(國益派)’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고 운을 뗐다.
“국익파의 관점에서 볼 때 현 정권의 통일외교안보 정책과 그 이행 프로세스는 그야말로 최하점이며, 대대적인 인적 쇄신만이 이 난국을 풀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본다.”
말로만 자주…한국이 최대 피해국
▼ 전시작전통제권(작통권) 문제로 불이 붙긴 했지만, 이전부터 한미동맹에 균열이 있다는 데는 여러 전문가가 의견을 같이해왔다.
“2002년 미 국방부가 발간한 외교정책 문서를 살펴보면 ‘전략적 유연성(GPR)’이 핵심 키워드로 담겨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는 미군의 성격이 ‘주둔지 개념’에서 ‘거점 개념’으로 바뀌는 것, 다시 말해 신속기동군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한미군도 용산은 물론 전국 60개 기지가 합쳐져 대부분 평택으로 가게 돼 있다. 미국은 이미 수년 전부터 전략적 유연성을 핵심으로 주한미군의 전략적 배치를 시도했지만 우리는 이 전략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동맹에는 신뢰가 필요한데 불필요한 자주 논쟁, 동북아 균형자론 논쟁이 있었다. 북한 미사일과 북핵 문제에 대한 시각, 북한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관점이 꼭 같지는 않더라도 ‘양국이 서로 양해할 수 있는 선’까지는 가야 하는데, 이런 것들이 무너졌다. 협상 따로, 말 따로, 행동 따로, 총론 따로, 각론 따로의 오합지졸 외교정책 때문이다. 여기에다 외교상 불필요한 메시지를 남발해서 한편으로는 국내정치에 악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불신을 초래한 결과다.
일본도 미국과의 GPR 협상과정이 쉽지 않았다.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이 방일을 취소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용산기지 이전 때 민족정기가 어쩌고 하면서 실컷 떠들었지만 결국 이전비용을 우리가 다 물어줬다. 일본은 주일미군 기지가 오키나와에서 괌으로 이동하는 비용의 59%만 부담한다. ‘말로만 자주’와 ‘실리적 자주’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 요즘 ‘뜨거운 감자’가 된 작통권 환수는 필요하다고 보나.
“나는 강화된 국방력으로 주권의 마지막 단계인 ‘전쟁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미국도 전략적 유연성 개념을 밀고 나가지 않나. 대북억지력 그 자체보다는 동북아 기동군의 효율적 운용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작통권과 전략적 유연성은 서로 잘 맞물릴 수도 있다. 미국의 전략상 한미연합사에 묶이는 것 자체를 달갑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전략적 유연성 개념이 도입되면 국내 군수물자를 미군에 지원할지도 모른다. 공동사용목록으로 관리된다는 것도 문제다. 이른바 보수세력도 이런 근본적이고 상위적인 개념에 포커스를 맞춰 대책을 마련해야지, 작통권 하나만 놓고 한미동맹이 결딴나는 것처럼 보이게 해선 안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절차적 정당성이 선행돼야 한다. 이런 사안을 지도자의 ‘영도자적 결단’에만 의존한다는 건 문제다. 작통권 문제 대처방안을 충분히 마련한 다음, 내부적으로는 우선 남남(南南) 갈등이 불거지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했는데, 정부는 그러지를 못했다. 한미간의 충분한 협의와 북한의 전쟁능력에 대한 평가가 선행됐는지도 의문이다. 유사시 한미동맹에 불협화음이 노출될 만한 이슈인지에 대해 사전에 스크리닝하는 절차도 없었다. 어설픈 밀실협상이 빚어낸 뼈아픈 대가다.”
전직 국방장관들 이해 더 구했어야
▼ 노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회견을 요구해 작통권 환수 의지를 강하게 밝혔는데.
“작통권 환수 의지는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세심한 정책관리를 위한 고도의 판단이 있었는지가 중요하다. 작통권 문제를 공론화하기엔 북한 미사일 사태 발생 이전이 훨씬 나은 타이밍 아니었나. 윤광웅 국방장관도 전직 국방장관들에 대해 ‘과거에 일하신 분들…’이라는 식으로 말할 게 아니라 먼저 그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했어야 한다. 그러질 못해 아마추어 소릴 듣는 것이다.”
▼ 야당과 다수 국민의 불안감은 여전하다.
“전시작통권이 넘어와도 양국의 전쟁상황에서 서로 개입하게 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그대로 유지된다. 또 한국은 법적으로 종전(終戰) 상태가 아니라 정전(停戰) 상태다. 그래서 여전히 유엔군사령부가 남아 있으며, 미국도 유엔군의 일부로 존재한다. 더욱이 이른바 ‘작계 5027’ ‘작계 5029’ 등도 있어 북한 돌변·급변상황 발생시 미군 지상군이 최대 69만명 증파될 수 있는 근거도 그대로 있다. 작통권 환수 자체를 한미동맹 위기로 직결시키는 것은 안보 위기를 과장하는 면이 있다. 어차피 전쟁을 우리 독자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작통권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연계 부분에 대해서는 최 의원과 견해가 다른 전문가도 많다. 한미방위조약에 전시작전권이나 ‘자동개입’ 문제가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게 쟁점. 3조에 ‘공통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각자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고만 돼 있어 전시 자동개입에 대한 법적 구속력은 없다는 해석이다. 반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관련 조약에는 ‘회원국이 공격받을 경우 즉각 자동적인 방위조치를 취한다’고 명시돼 있다. ‘작계’ 역시 작통권이 한국으로 넘어오면 한국군 주도로 다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미군 사격장은 우리에게 이익
▼ 최 의원이 여당의 대표적 반미자주파라는 시각이 있다.
“일종의 ‘국가보안법 논리’라고 본다. 친미파와 동맹파는 국익파이고, 자주파는 반미파이자 곧 친북파이며 빨갱이로 연결하는 논리다. 나는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정부정책을 검증하자고 주장한다.
한미 관계를 보자. 나는 논란이 되고 있는 주한미군에 군산 직도사격장을 마련해주는 데 찬성한다. 이곳에서 미군은 열화 우라늄탄을 발사하는 A-10기로 훈련을 할 것이다. 이는 북한의 재래식 대전차 무기와 장사정포로 대변되는 거점 미사일 공격도 방어할 수 있는 무기다.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고 본다. 매향리 대체 사격장도 허용하자는 게 내 주장이다. 내가 이걸 강하게 주장하면 이번엔 친미파라고 몰아붙일 건가.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봐야 한다. 나는 ‘진보파’에서 싫어하는, ‘미국의 소리’ 방송 같은 해외 우익의 목소리도 늘 경청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나는 ‘공식적 친노(親盧)’ 의원은 아닌 것 같다. 대통령과 찍은 사진도 한 장 없고, 요즘도 따로 전화 통화하지 않는다. 대선(大選) 당시 노 대통령이 지향한 목표지점이 나의 그것과 같고, 정치개혁을 위한 시대정신이 맞아떨어졌기에 ‘노무현호(號)’에 승선했을 따름이다.”
▼ 이종석 장관과 특별한 악연(惡緣)이라도 있나.
“개인적인 연은 없다. 이 장관이 최근 내게 만나자고 연락을 하지만 난 안 만난다. 통일 문제가 개인적 차원의 것이 아니지 않나.
꼭 이 장관 한 사람을 거명하자는 게 아니라 현 정부의 외교안보정책 비전과 시스템, 인적구성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종석 장관은 참여정부 2년 동안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실질적으로 이끈 사람인데, 외교에 대한 철학이 부족하다. 세계 정서를 제대로 못 읽는다. 전략적 유연성 개념, 한반도에서 미래 주한미군의 역할, 이런 걸 못 읽고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조금씩 다른 언행으로 신뢰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현재 정부의 외교안보통일 라인은 행정관리자형이나 특정분야 전문가로만 구성돼 있다. 한미동맹 전환기엔 세계사적인 비전과 철학을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전체 스태프들이 단순한 ‘현재 상황 관리’에 머무르고 있고, 중장기적 비전이 없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청와대만 쳐다보고 있다.”
쓸데없는 말을 왜 하는지…
▼ 얼마 전 노 대통령이 “외교는 초과달성했다”고 말했는데.
“역시 세계를 제대로 못 읽는 게 문제다. 북핵 문제를 미국과 거래 가능한 이슈로 본 게 가장 큰 잘못이다. 이라크 파병이나 용산기지 이전 지원과 거래할 수 있는 개념으로 오판한 것이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테러집단이나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한 국가에 대해서는 언제든 선제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우리는 미국의 이런 정세변화는 도외시한 채 북핵 문제 하나만을 내재적 변수로 본 것이다.
지난해 9월 6자회담 이후 이런 오판 상황은 절정에 달했다. 당시 회담국간 공동성명이 채택되자 다들 그렇게 떠들지 않았나. 드디어 동북아는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다자간 협상이 실현됐다, 북미간 평화협정이 가능하고 작통권 환수도 가능하다, 그러면 유엔사도 철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렇게 안일하게 상황을 본 것이다.
현실은 어땠나. 9·19공동성명은 그날 저녁에 깨진 것이나 다름 없다. 미국은 바로 다음날 북한의 위폐(僞幣) 문제를 공론화했다. 미국의 대북 인권정책은 이미 2004년에 결정된 것이고, 위폐생산에 대한 문제 제기도 내부적으로는 2005년 6월 결론을 내고 시기를 조율하고 있었다. 미국의 이 같은 전략, 전술을 읽어내지 못하고 잘못 판단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독자적 안보능력이 약한 나라 아닌가. 그렇다면 총체적으로 이런 외교 문제에 매달려야 하는데 너무 안일하다. 정보수집도 취약하고, 정책을 구체적으로 밀고 나갈 맨파워도 턱없이 떨어진다. 국가정보원장에게도 문제가 있고, 유엔 사무총장 선거에 덥석 나간 외교부 장관도, 물론 당선되면 자랑스러운 일이겠지만, 일의 우선순위를 제대로 챙겼는지는 의문스럽다.
외교안보 현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참여정부 들어 김대중 정부 이전 상황으로 돌아간 듯하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도 끊기지 않았나. 당장 외교안보라인 전체의 쇄신 없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본다. 대통령도 외교정책의 일관성 유지를 정말 무겁게 여겨야 한다.”
대통령 입만 바라보는 참모들
▼ 여권에서 보는 한미동맹 관리의 실책은 무엇인가. 청와대, 정부의 외교안보 참모진의 문제점은 뭐라고 보나.
“미국의 세계전략을 잘못 이해하니까 당연히 엇박자를 그린 것이다. 자주나 자존을 강조하다 보니 어긋나 보일 수밖에. 전세계적으로 미국의 일극(一極)체제를 인정하는 분위기다. 우리만 미국의 현실과 세계전략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독자적인 외교역량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축구를 보자. 공간활용을 통한 압박축구가 현대적 대세다. 훌륭한 공격수라면 공간을 창조해야 한다. 개인기가 안 되면 효과적인 2대 1 패스가 있다. 미국, 북한과는 끊임없이 대화하고 신뢰를 쌓으며 우리의 주도권을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신뢰는 점점 떨어지는데도 말로만 ‘자주’를 외친다. 그러니까 미국이 웃는 것이다.
얼마 전 워싱턴의 외교라인 관계자를 서울에서 만났다. 그는 내가 국회에서 이종석 장관의 경솔한 말(‘북한의 미사일 발사에서 가장 큰 실패자는 미국’)에 대해 지적하는 것을 잘 봤다며 자기들도 내 의견에 공감한다고 했다. 그는 (이 장관이)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미국과 한국의 공동책임이다’는 식으로 말했으면 좋지 않았겠냐고 했다. 적어도 그 정도 표현이라면 자기들도 듣기 거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물론 나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서 우리가 가장 큰 실패자라고 보지만, 그 정도면 외교적으로 의미있는 수사(修辭)가 아니었을까. 이 장관의 그런 쓸데없는 발언, 대통령이 나서서 다시 거들어준 그런 발언들이 한미관계의 신뢰를 건드리는 주범이다.
외교정책에서 의사결정의 ‘컨트롤 타워’가 없다는 것도 문제다. 세계의 지정학적 변수들을 초단위로 파악해야 하는 분야에서 의사결정이 너무나 하향 일변도다. 이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중대한 결함이라고 본다. 참모들이 직언을 하고 새로운 대안을 만들려는 노력이 미미하다. 지금 외교안보팀에는 기회주의적 속성이 있으며, 지나치게 보신주의적이다. 자리에 연연하는 태도가 엿보인다. 이러니 중장기적으로 초당파적 외교운영을 못하게 된다.”
‘조건 없는 지원’ 약속은 어디로?
▼ 미국은 한국의 계속되는 유화정책에도 북한은 변한 게 없으며 오히려 김정일 정권의 수명만 늘여주고 있다고 불만스러워한다.
“미국은 이미 국무부 재무부 국방부 등 여러 차원에서 대북(對北) 압박 수단을 만들었다. 이를 위해 몽골, 베트남 등 옛 적성국가와도 연대한다. 미국의 이런 외교전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데다 우리의 일관성 없고 예측 불가능한 외교 행정까지 더해져 미국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느닷없이 ‘북한에 조건 없이 지원하겠다’고 한 게 불과 몇 달 전인데 이젠 쌀이나 비료도 안 보내겠다는 것 아니냐.
최대한 신뢰를 구축해 미국을 설득해가면서, 북한을 ‘가출한 불량소년’ 다루듯 해야 한다. 북한이 지금 한반도를 무대로 사실상의 인질극을 벌이고 있다는 시각에 동의한다. 인질범을 계속 달래면서 스스로 무기를 놓게 해야지, 지나치게 압박하면 인질이 다치지 않겠나. 한반도에서 인질은 곧 우리민족이다. 근본적으로 북한의 개방 내지 붕괴가 멀지 않다고 본다. 그때까지 우리 정부의 주도로 북한에 대한 자본주의 정착 훈련, 사회간접자본을 구축해주는 노력은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최재천 의원 사무실에는 그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찍은 사진이 크게 걸려있다. 그는 여전히 “햇볕정책은 필요하다”고 말한다.
“북한이 유엔에 가입했기 때문에 북한이 붕괴되면 어느 누구의 땅도 아닌 유엔의 땅이 될 공산이 높다. 이런 논리는 뉴라이트 진영에서도 수긍하는 바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염두에 둔 중국이 당연히 진출하지 않겠나 싶고, 러시아 일본 미국도 들어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궁극적으로 다국적군이 북한을 통치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이런 상황보다는 국제사회의 암묵적 공인으로 자연스럽게 북한을 접수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북핵 문제를 공조해 해결하고 동맹 사이에는 무엇보다 신뢰를 다시 쌓아서, 다자안보체제로 가면서 독일 모델처럼 주변 강국이 우리의 존재를 승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우리가 북한에 개입한다는 것은 국제법상 근거가 없다.
이런 현실에서 보면 북한은 남의 땅이다. 다만 현재 한미 간에 맺어진 작전계획, 개념계획을 보면 북한에서 쿠데타나 민란이 발생하거나 최고지도자에게 급변상황이 생기면 미국이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이 명시돼 있다.”
한일관계 ‘의도적 악화’ 의혹
▼ 아무리 동맹 수준은 아니라고 하지만, 정부가 최근접 주변국인 일본과의 관계를 너무 악화시켰다는 지적이 있다. 한일관계가 정말 이래도 되겠나.
“일본이 불과 60년 전에 저지른 전쟁을 반성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여전히 일본은 독일과 동질성을 찾기보다는 이스라엘과 동질성을 찾는다. 원폭 피해자라는 생각이 앞서 있다. 한일관계는 일본이 반성을 제대로 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게 최우선의 전제라고 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정부 역시 국내정치적 관점에서 지나치게 반일(反日) 이슈를 악용한 측면이 있다. 대통령의 극단적 발언이나 e메일, 인터넷을 통한 실속 없는 문제 제기 등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지나치게 높은 레벨에서 이런 문제들을 쏟아낸다. 가령 독도 문제는 해양수산부, 외교부, 해양경찰 수준에서 대처하면 되는데, 이런 문제까지 대통령에게 하중이 간다. 참모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정치적 발언을 쏟아낼 시스템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니까 매번 대통령이 나선다.
이런 지나친 외교공세로 인해 일본을 대북, 대미 문제에서 지렛대로 삼을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 우리 정부가 이른바 김영남·메구미 납치사건을 북한과 협력해 일본에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깨끗하게 해결해줬다면, 그래서 북일(北日)수교를 촉진했다면, 체제보장으로 생겨나는 북한의 경제발전 과정에 우리가 더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지 않았을까.”
▼ 무너진 한미일 3각동맹을 복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미국과 일본은 물론 북한에까지 특사를 파견해야 한다는 게 나의 일관된 생각이다. 한일 간에는 특히 별도의 ‘전략대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중국과 일본도 전략대화를 하지 않나. 미국, 일본, 호주도 마찬가지다. 한미일이 이런 회담체를 가동하면 한국의 보수파를 달래는 효과도 나타날 것이다. 지금 미국과는 차관급 레벨에서도 대화 채널이 잘 가동되지 않는데, 이는 외교정책의 치명적 실패이다.
일본이 브라질, 독일, 인도를 이끌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우리가 앞장서 반대했다. 일본은 이에 대해 엄청난 불만을 갖고 있다. 독일도 이 때문에 우리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인도인들 우리를 도와주겠나. 반기문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출마 역시 외교의 주고받기적 속성을 감안할 때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불투명하다. 그간 한국의 이런 외교 행보가 실질적 외교무대에서 어떻게 우리의 발목을 잡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한미일 3국은 그야말로 허심탄회하게 백지상태에서 서로 불협화음을 노출시켜 치유책을 찾는 수밖에 없다. 신뢰의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솔직히 시인해야 한다. 북한에 대한 근본적 시각차이도 인정해야 한다. 한승주 전 미국대사 같은 분을 미국 공화당 네오콘(신보수주의)들에게 보내 대화 채널을 가동하는 것도 방법이다. 일본과도 언제까지 이런 어정쩡한 외교를 유지할 것인가. 고이즈미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 박태준씨든 김종필씨든 다 특사로서 대안이 된다.
북한 온건파도 남한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있다. 외교인데 뭔들 못하겠나. 낮은 레벨부터 다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임동원씨가 안 되면 박지원씨라도 보내 볼 생각을 해야지. 최근 북한에 대한 스탠스를 예전과 달리 취하고 있는 중국에도 찾아가서 그들의 생각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가장 믿을 만한 우방
▼ 미국에서는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증진을 바탕으로 이중 플레이를 한다고 보는 듯하다.
“중국이 한편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임엔 분명하다. 동북공정, 백두산공정을 보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중국 그 자체보다 중국을 기반으로 하는 동북아 질서에 대해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철강공동체, 화폐공동체, 더 나아가 정치공동체로의 변화를 모색하는 유럽연합(EU)의 사례를 연구해볼 만하다.
한중일 사이에 이런 구도를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우선은 3국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통해 경제자유지대를 넓혀가는 방안이 있겠고, 6자회담이나 다자안보체제를 통해 전쟁의 위협을 없애고, 한 50년쯤 후에는 공동체로 나아갈 준비를 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막연히 중국이 미국을 대체하느냐 마느냐, 중국시장에 최대한 많이 진출해 이익을 남기면 된다는 식의 단편적 정치, 경제논리는 경계해야 한다.”
▼ ‘전략외교가 가장 비(非)전략적인 외교일 수 있다’는 엄연한 현실에 묶여 있다 보니 미국이냐 중국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계속 대두되는 듯하다.
“북한이 변하지 않는 한 전쟁위험은 계속 존재한다. 통일 이후에도, 제국주의의 경험을 가진 나라가 존재하는 한 한반도의 안전보장은 그래도 미국과의 안전보장을 통해서 풀어가는 게 가장 유리하다. 우리가 일본, 중국, 러시아의 침략은 다 받아 봤지만, 적어도 미국의 침략을 받아본 적은 없지 않나. 역사적으로 볼 때 그래도 가장 신뢰할 만한 동맹은 미국이다. 선택의 문제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우선순위의 문제는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주한미군은 앞으로도 계속 주둔해야 한다. 이는 절대다수의 한국민이 바라는 바다.”
▼ 한미동맹의 복원방법이라면.
“한미동맹이 수 틀리면 한순간에 깨질 수 있다고 보는 관점엔 문제가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합리적 동맹이 아니다. 하지만 단소리는 몰라도 쓴소리는 수면 아래 라인에서 오가야 한다. 우리는 아주 사소한 데서 점수를 많이 잃어왔다. ‘미국은 한반도에 전략적 이익이 있으니 안 떠날 거야’라고 외치는 한국 정부의 태도는 마치 꼬맹이가 다 큰 청년에게 공연히 대들어보는 치기 어린 행동으로 비칠 소지가 크다. 전세계에서 한국만큼 미국문화가 널리 퍼진 나라가 또 있을까. 재미동포는 물론 재미 유학생도 무시할 수 없는 숫자다. 이런 폭넓은 대중적 교류상황에서 우리가 쓸데없이 잃는 게 너무 많다. 동맹관리가 좀더 정교해져야 한다.”
FTA가 한미동맹 ‘보험’ 될까?
▼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안보 문제에 지나치게 소홀한 것 같다. 정보도 부족한 것 같고.
“열린우리당의 ‘정치개혁 근본주의자’들이 가장 좁은 의미의 정치개혁, 다시 말해 정당개혁, 기간당원제에만 매달리고 있다. 지극히 형식적인 이슈들에 관심을 가진 나머지 진짜 국가적인 이슈를 개발하고 이끌어가는 데 소홀했다. 국회가 살고 우리당이 살고 정치가 살려면 의원들이 통일외교안보 및 정보 분야에서도 정부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해 정부를 일정부분 견인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다. 이런 면에서 나를 비롯한 우리당이 비판을 달게 받아야 한다.
우리당은 관심 분야가 너무 협소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포용하기는커녕 ‘당신들은 뭘 모른다’는 식의 오만과 독선을 드러내곤 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정책을 당에서 추동할 집행력이 크게 줄어들어 안타깝다.
다만 ‘참여정부’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외교안보 관련 정보를 국회의원, 심지어 여당 의원조차 접근할 수 없도록 차단하고 있다는 점은 지적받아 마땅하다. 용산기지 이전과 관련된 회의록 공개를 2년 반 동안 100회가 넘도록 국방부에 요청했는데 아직까지 감감 무소식일 정도이다. 정부 관계자들이 정권과 이해를 같이하는 여당에까지 폐쇄적인 외교안보관을 가지고 대하니 정부의 합리적인 의견조차 묵살되고, 정치권에서는 합리적인 비판이 이뤄지지 않는다.
한미동맹이든 작통권 환수든 대부분의 외교안보 이슈에 있어 아무리 여당 인사라 해도 웬만한 자기노력이 없이는 신문만 들여다보고 상황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엄중한 외교안보 현실을 정부 내 특정 인사들이 자의적으로 독점하고 재단해 멋대로 대책을 세워서는 안 된다.”
▼ 한미 FTA가 한미동맹과도 연결될 것으로 보는가. 정부 일각에서는 FTA를 한미관계 강화를 위한 ‘보험’으로 인식하는 시각도 있는 듯하다.
“미국이 호주나 중동 국가들과 FTA를 체결할 때는 안보적 요소를 가미했지만,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국가나 칠레, 스위스 등과 체결할 때는 그런 요소를 개입시키지 않았다. FTA에 안보동맹 요소를 결부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더욱이 우리와 미국은 이미 일부 공산품의 관세율 차이를 빼면 서로에 대해 거의 다 열린 시장 아닌가. 지적재산권, 금융·서비스 산업 부문은 당연히 좀더 검토돼야 한다.
정권의 지도자 그룹에서는 FTA에 안보적 요소가 있다고 볼 수 있겠으나, 미국에서도 그렇게 인식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럼에도 절차적 정당성이 대단히 취약한 상황에서 시한을 못박아놓고 협상을 끝내려는 태도는 잘못됐다. 국회의 통제와 개입 여지를 좀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