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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밀착취재

이방인들의 고향 仁川

포용과 융합의 용광로인가, 서울로 향하는 임시정거장인가

  • 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이방인들의 고향 仁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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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토박이인 오광철(71) ‘인천일보’ 주필에 따르면 개항 후 인천의 상공업은 번창일로였지만 그 혜택이 인천 토착민에게 돌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당시 최대 이권단체이던 미곡중매인업체 ‘인천근업소’ 회원들만 해도 일본인을 따라 인천으로 온 영남인들이었어요. 이들은 거간으로 활동하거나 정미소 등을 하며 재산을 축적했죠. 율목동에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이방인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대신 토박이를 실향민으로 만들기도 했다. 1902년 제물포항에서는 인천 내리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121명이 겐카이호(號)에 올라 하와이로 떠났다. 이민사(史)의 첫 장을 연 것이다. 이후 많은 사람이 제물포를 통해 하와이로, 멕시코로 이민을 떠났다.

“노예처럼 일하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하와이 이민자들은 조국을 등지지 않았어요. 일제 강점기엔 독립운동자금을 댔고, 광복이 되자 성금을 모아 학교를 세우는 데 보탰어요. 그게 바로 인천의 ‘인(仁)’자와 하와이의 ‘하(荷)’자를 따서 이름을 지은 인하대예요.”

중구청으로 가는 길에 무지개 모양의 돌문(홍예문)을 지나자 색다른 거리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100년 전 일본 거리에 선 듯한 느낌을 주는 일본식 건물들이 인상적이었다. 오늘날 일본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1900년대 초 세워진 일본식 건물들이 남아 있는 ‘재팬타운’이다.



화교들의 쇠락

중구청 입구를 지나자 이번엔 중국풍 건물들이 늘어선 차이나타운이 나타났다. 개항과 함께 인천에 들어와 120년 넘게 이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화교들의 근거지다. 차이나타운은 인천역까지 이어지는데, 곳곳에 ‘북경반점’ ‘파이란’ ‘피아노’ ‘육남매’ 등 이곳이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였음을 알리는 표지판들이 눈에 띄었다.

화교는 개항 후 인천과 중국 산둥반도를 오가며 중개무역을 통해 상권을 장악했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상권이 마비되자 대거 대만, 미국, 동남아시아로 떠났다. 남은 화교들은 주로 잡화상과 음식점을 하며 살았다. 일부는 부두근로자로 전락하기도 했다.

광복 직후 중국과의 무역이 재개되면서 화교사회가 반짝 활기를 띠기도 했다. 인천시사(史) 편찬위원인 김양수(73)씨는 “당시 돈 있는 인천 사람은 다 화교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전했다. 하지만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국교가 단절되자, 화교들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게다가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화교에 대한 차별과 배타정책에 따라 곤궁한 삶을 살아야 했다.

“1961년에 외국인의 토지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을 만들었는데 외국인은 1가구 1주택 1점포만 소유할 수 있게 했습니다. 주택면적은 200평 이하, 점포는 50평 이하로 제한했고요. 또한 점포는 자신만 사용할 수 있고 타인에게 임대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논밭이나 임야 취득도 불가능했고요. 사실상 재산을 증식할 기회를 박탈한 셈이죠. 이 정책은 1998년 IMF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 토지 소유 규제가 풀릴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그는 한국에 정착한 화교들이 외국의 화교들처럼 재산을 축적하지 못한 데는 자초한 면도 없지 않다고 했다.

“외출복 한 벌을 3대(代)가 같이 입을 정도로 근검하게 살았던 것은 인정해요. 그런데 1950년대 해마다 보릿고개 시기가 되면 중국인들이 밀가루를 매점매석했어요. 당연히 밀가루 파동이 일었죠. 이를 안 이 대통령이 화가 나서 중국음식값을 동결해버렸어요. 게다가 화교들은 돈을 은행에 넣어두기보다는 집 안에 쌓아뒀습니다. 그러다 두 차례 화폐개혁이 이뤄지면서 휴지가 돼버렸어요. 일정액 이상은 새 화폐로 교환해주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화교 밑에서 자장면 배달하던 한국인들이 어깨너머 배운 기술로 중국집을 개업하면서 경쟁이 심해졌죠.”

‘짱꿰’와 ‘꺼우리방’

그 사이에 화교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1942년 전국적으로 8만명에 달하던 화교는 지금 2만여 명에 불과하다. 이들 중 인천에 사는 화교는 28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인천화교학교 학생들은 초중고교를 합쳐도 500명이 안 된다고 하니 앞으로 화교 숫자는 더 줄어들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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