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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의 ‘딥 인사이드’

3년 전 중국 동북공정의 실체 최초 폭로한 ‘신동아’의 현장 취재

광개토태왕비 앞에는 發福 비는 잔돈만 수북이…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3년 전 중국 동북공정의 실체 최초 폭로한 ‘신동아’의 현장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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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고구려를 도둑맞았다”

중국 한(漢)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4군을 설치했는데, 중국은 한4군 중 하나인 현도군(玄?郡)의 고구려현에서 고구려가 태동했다고 보고 있다. 동북공정은 고구려가 중국 영토인 현도군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 역시 중국 역사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는 바람에 중국은 고구려사를 한민족에게 도둑맞았다고 분석한다. 중국측은 그들의 논리를 증명하기 위해 ‘고려가 고구려의 후예라면 고려 태조인 왕건은 고구려 왕실과 같은 고(高)씨 성이어야 하는데, 왕(王)씨 성을 썼다’고 지적한다.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 세력은 국호를 조선으로 삼으며 기자조선의 뒤를 이었다고 했다. 그로 인해 중국사의 일부인 고조선도 한국 역사로 빼앗기게 됐다는 것이 동북공정의 주 논리이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펼쳐진 중국의 동북공정은 고구려사를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때마침 건학 100주년을 맞은 동국대가 서울 중구청과 함께 동국대생과 서울 중구 관내 고등학생을 선발해 고구려 유적지 탐방에 나섰다. ‘신동아’는 동북공정의 정체를 폭로한 3주년을 맞아 이 팀과 함께 만주 지역에 들어가 중국이 고구려사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그리고 동북공정이 지금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동북공정의 위력은 상상외로 강력하고 우리의 대응은 한심할 정도로 무력하다.

[제 1부] 고구려는 없다, 그러나 ‘북한 사파리’는 있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지 못하고 한반도만 차지했을 때 신의주는 불야성(不夜城)이었다고 한다. 신의주의 남쪽에 의주가 있는데 1906년 일제는 의주역을 지나 압록강변(신의주역)까지 경의선을 이었다. 대륙 진출을 노린 일제는 의도적으로 신의주를 발전시켰다. 1913년 신의주를 부(府)로 승격시킨 것. 부는 지금의 시(市)와 비슷하니, 신의주는 의주군보다 크고 발전한 지역이 되었다.

반면 압록강 북쪽에 있는 중국 안동(安東· 1965년 丹東으로 개명)은 어둠의 세계였다. 신의주가 화려해질수록 안동에 있는 중국인들은 신의주와 일제를 동경할 수밖에 없었다. 1911년 일제가 신의주와 안동을 잇는 철교를 완성하자 적잖은 중국인이 신의주로 건너와 화교(華僑)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신의주보다 단동의 밤이 더 밝아졌다. 덩샤오핑(鄧小平)이 단행한 개혁개방의 물결이 단동에까지 몰아친 것. 그로 인해 단동으로 도주하는 탈북자가 많아졌다.

2001년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김정일은 반세기 만에 뒤바뀐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신의주특별행정구 설치를 계획했다. 다음해 9월 김정일은 중국 자본을 끌어들일 요량으로 중국인 사업가 양빈(楊斌)씨를 행정장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중국은 2002년 10월 양씨를 탈세 혐의로 구속함으로써 김정일의 꿈을 간단히 꺾어버렸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단동은 더욱 화려해지고, 신의주는 특구가 되었지만 어둠이 깊어가고 있다.

압록강 단교를 보는 눈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낙동강 전선으로 몰린 한국군과 유엔군은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전세를 역전시키고, 그해 10월26일 한국군 6사단 7연대가 압록강변의 초산에 태극기를 꽂는 쾌거를 이루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일진일퇴가 거듭되던 11월21일엔 미 7사단 17연대가 유엔군 부대 중에서는 최초로 압록강가 혜산진에 성조기를 꽂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참전을 결정했다. 그에 따라 펑더화이(彭德懷)로 하여금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의 의용군 형태로 위장한 26만 대군을 이끌고 1950년 10월19일부터 압록강 철교 등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가게 했다. 한반도에서 활동하는 중공군의 위세가 커지자 미 공군은 B-29 폭격기 편대를 출격시켜 1950년 11월8일 오전 9시 압록강 철교를 끊어버렸다.

그날 이후 압록강 철교는 ‘압록강 단교(斷橋)’가 되었다. ‘압록강 단교’는 한국인과 중국인에게 전혀 다른 역사의 현장이다. 한국인의 눈에 비친 압록강 단교는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혼쭐난 중국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중국인은 압록강 단교를, 한반도를 거쳐 대륙으로 올라오려는 미국군을 압록강에서 철저히 막아낸 구국항쟁의 상징으로 본다.

중국은 6·25전쟁을 조선(북한)을 지원하며 침략해오는 미국에 맞서 나라를 지켜낸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 전쟁으로 정의한다. 이들에게 보가위국은 항미원조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이러한 정의를 내린 순간 중국은 6·25전쟁에 임의로 개입한 침략국가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자기 나라를 지켜낸 방어국가가 된다. 단동에는 이를 기리는 항미원조 기념탑과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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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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