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호

차기 일본 총리 물망, 아베 신조 관방장관

근친혼 불사하는 순혈 우익가문 귀공자, 한·중에 ‘비호감’, 脫亞入歐 고수할 듯

  •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일본정치 khyang@mail.skhu.ac.kr

    입력2006-09-06 17:0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지금 분위기대로라면 차기 일본 총리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현 관방장관이 될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1954년 9월생으로 올해 나이 불과 52세. 아베는 어떤 인물이며, 일본 총리가 된다면 한반도에 어떤 메시지를 보낼까. 또한 한국의 차기 대선주자들과는 ‘궁합’이 잘 맞을까.
    차기 일본 총리 물망, 아베 신조 관방장관
    이미 집권 자민당 국회의원의 과반수 지지를 획득한 아베 신조 관방장관은 아소 다로(麻生太郞),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 후보를 큰 표차로 따돌리고 독주하고 있다. 5선(選) 의원에 불과(?)한 그가 차기 수상감에 오른 것은 장수사회, 원로사회 일본에서 이례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일본 총리가 연공서열로 선출되어온 관행으로 본다면 더욱 그렇다.

    2001년 4월 서열파괴 식으로 당선됐다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도 당시 59세로, 국회의원이 된 지 29년째인 11선 의원에다 총재선거에 3번이나 도전한 경력이 있었다. 아베의 라이벌인 아소는 67세에 9선, 다니가키는 62세에 9선이다. 중도하차한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도 71세, 6선 의원이다. 정치 경력이나 나이에서 아베는 다른 후보에 비해 크게 떨어지고, 각료급인 관방장관을 제외하면 대신(大臣) 경험이 전혀 없는 점도 열세였다.

    그러나 아베의 ‘출신 성분’은 이렇듯 총릿감으로는 빈약한 경력을 보완해준다. 그는 ‘자민당의 귀공자’로 통한다. 아베의 가문은 하토야마(鳩山) 가문, 아소(麻生) 가문과 더불어 정치 명가(名家)로 알려져 있다. 그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기시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등 외가쪽의 두 조부가 총리를 지냈다. 기시 총리의 사위이자 아베 신조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는 외상을 지낸 후 총리 자리를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3대 名家, 사토·기시·아베

    아베의 지역구인 야마구치(山口)현은 메이지 유신의 산실인 쇼슈번(長州藩)의 본거지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유신지사를 양성하던 곳이다. 야마구치현은 태평양 전쟁 이전에만 5명의 총리를 배출했다. 전후에도 2명의 총리를 만들어낸 아베의 외가 혈맥이 흐르는 곳이다. 아베의 친조부는 아베 히로시(安倍寬) 중의원으로 아베 가문은 친가, 외가 모두 일본 정치귀족의 맥을 이어온 셈이다.



    아베 신타로는 ‘마이니치(每日)신문’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그는 취재차 자주 접하던 기시 총리 부인의 소개로 딸인 요코(洋子)와 결혼했는데, 아베 신조는 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도쿄에서 자란 아베는 기시 집안에서 귀여움을 받고 자라, 친가보다는 외가에 더 친근감을 가졌다고 한다. 아베의 세 형제 가운데 형 히로노부(寬信)는 우시오(牛尾)전기의 회장 딸과 결혼해 현재 미쓰비시(三菱)상사 중국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동생 기시 노부오(岸信夫)는 외가에 양자로 들어가 현재 자민당 소속 참의원이다.

    일본의 명문가인 아베, 사토, 기시 가문은 서로 양자를 주고받거나 근친혼을 맺어 집안 혈맥을 유지해왔다. 이 때문에 아베 신조의 몸엔 이들 3대 명가의 피가 모두 흐른다. 한국에서도 재벌가의 혼맥이 자주 화제가 되지만, 정치인 가문들이 양자 입적이나 근친혼까지 하며 ‘성골(聖骨) 순혈’을 유지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아베 신조의 조상은 대동아공영권 구상을 주도하면서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맺어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A급 전범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외상, 전후 일본 재건에 앞장선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수상과도 사돈관계로 맺어진다. 사토 집안은 이들 요시다, 마쓰오카, 기시 가문과 혼맥이 닿아 있다. 메이지 일왕 시기 시마네(島根)현 지사였던 사토 노부히로(佐藤信寬)의 아들 사토 노부히코(佐藤信彦)는 지방 정치가이자 뛰어난 한학자였는데, 그 아들(松介)이 마쓰오카 집안과, 딸(모요)이 기시 집안과, 또 다른 딸(사와)이 요시다 집안과 각각 혼맥을 맺었다.

    차기 일본 총리 물망, 아베 신조 관방장관

    아베 신조 관방장관의 선친인 아베 신타로 전 일본 외상.

    사토 노부히코의 아들(松介)이 낳은 딸 히로코(寬子)는 사촌인 사토 에이사쿠 총리와 근친혼을 했다. 사토 노부히코의 딸 사와는 자신의 아들 히로시(寬)를 요시다 총리의 딸과 혼인시켜 사돈을 맺었다. 사토 노부히코의 또 다른 딸 모요는 사토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온 남편(秀助) 사이에 10자녀를 뒀는데, 이 가운데 사토와 기시가 총리가 됐다. 기시는 부친의 바람대로 기시 집안에 다시 데릴사위로 들어가 큰아버지의 딸인 사촌여동생과 근친혼을 했다. 여기서 난 딸 요코가 아베 신타로 전 외상과 결혼해 낳은 둘째아들이 바로 아베 신조다.

    따라서 아베 신조는 4대에 걸쳐서 세 명의 총리, 두 명의 외상 등 5명의 거물정치가, 다수의 전현직 국회의원과 친인척 관계이다. 특히 아베 신조의 외가는 일본 최고의 정치 명문가라 할 수 있어 당연히 그에게는 외가가 더 크게 보였을 것이다.

    외가에 한국계 피 섞였다?

    앞서 언급했듯 아베 신조의 외조부는 사촌과의 근친혼을 통해 아베의 어머니를 낳았다. 아베 신조는 근친혼을 통해 태어난 자손이다. 일본 민주당 총재를 지낸 간 나오토(菅直人)도 사촌여동생과 결혼했다. 일본에서 근친혼은 일왕 가문을 포함해 드물지 않지만, 아베 외가에선 유독 눈에 띈다.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일본 왕실이 백제계 사람들과 혼맥으로 맺어져 있어 한국에 애정을 느낀다”고 발언한 바 있다. 그런데 최근 출간된 동아일보 김충식 논설위원의 저서 ‘슬픈 열도’에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사토 전 총리가 도공(陶工) 심수관씨를 만나 “당신네가 일본에 온 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묻자 심씨는 “400년쯤 되었다”고 했다. 그러자 사토 전 총리는 “우리 선조도 조선에서 건너와 야마구치(山口)에 정착했다”고 답했다는 것. 사토 가문에 한국계의 피가 흐르고 있다면, 사토 가문의 피를 받은 아베 신조도 한국과 인연이 전혀 없다고 하긴 어렵다.

    아베 신조는 도쿄도 무사시노(武藏野)시에 있는 세이케이(成蹊)대 정치학부를 졸업했다. 정치명문가인 하토야마 집안은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도쿄대 법학부에 입학시켰다. 그외 일본의 상당수 유력 정치가도 세칭 명문대 학벌을 지니고 있다. 일본 정치 엘리트 사이에서 아베의 학벌은 상당히 뒤처지는 게 사실이다. 일본 명문가의 교육열은 대단하다. 이들 가문은 초등학교만 입학하면 대학까지 진학할 수 있는 코스로, 명문 게이오(慶應)대나 릿쿄(立敎)대에 자제들을 보낸다. 그래서 아베가 학벌 문제로 열등감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도 나온다.

    아베는 대학졸업 후 미국 사우스캘리포니아대 정치학과에서 2년간 유학했는데, 여기서도 공부보다는 여러 경험을 쌓으며 외국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의 비서관이던 32세 때 모리나가(森永)제과 사장의 딸이자 명문 성심여학원 영문과를 나온 일곱 살 연하의 아키에(昭惠)와 결혼했다.

    미치코(美智子) 왕비의 대학 후배인 아키에는 올해 45세로, 덴쓰(電通)광고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했고 한때 라디오 DJ로도 활동하는 등 밝고 활달한 성격이다. 이 때문에 아베의 대중적 인기에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부인은 韓流 즐기는 스포츠우먼

    아베는 술이 약한 편이다. 그러나 부인 아키에는 주량도 꽤 될 뿐 아니라 스키, 테니스, 골프를 즐기는 만능 스포츠우먼이다. 특히 일주일에 한 번 강사를 집에 불러 한국어를 공부했을 만큼 ‘한류(韓流) 팬’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키에가 한국어를 배우게 된 동기는 흥미롭다. 아베가 2002년 북한을 방문한 뒤 아키에는 일본 정치인의 성패에 한국, 한반도가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음을 감지하고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베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주요 이슈로 부각시켰는데, 이는 아베를 거물 정치인으로 급성장시킨 결정적 계기가 됐다.

    현재 아키에의 한국어 실력은, 한나라당 모 의원이 “남편이 총리가 되면 한국어를 구사하는 최초의 일본 영부인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는 수준에 다다랐다. 독신인 고이즈미 총리가 재직한 지난 5년5개월간 일본의 퍼스트레이디 자리는 비어 있었다.

    아베는 고베(神戶)제강에서 약 3년 반 근무한 뒤 1982년 부친인 아베 신타로 외상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중의원에 당선된 것은 39세 되던 1993년. 그 뒤 정치인으로 빠르게 성장하면서 2000년 7월 모리(森喜朗) 내각에서 관방 부장관, 2002년 10월 고이즈미 내각에서 관방 부장관, 2003년 9월 자민당 3역인 간사장에 올랐다. 간사장은 자민당 운영 및 선거시 자금과 유세지원을 총괄하는 요직으로 영향력이 큰 자리다. 이후 2004년 자민당 개혁추진본부장, 2005년 10월 제3차 고이즈미 내각에서 관방장관에 취임했다.

    북한과 아베의 ‘적대적 공생’

    앞서 언급했듯 아베의 정치적 성장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다름 아닌 북한이다. 그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 미사일 발사에 강경 대응했는데, 이것이 일본 유권자의 정서에 먹혀들었다. 2001년 12월 일본 해상보안청 함정이 일본 영해에서 북한 괴선박을 격침시켰을 때, 2002년 북한을 방문해 납치 문제에 대한 김정일 위원장의 사과를 요구했을 때, 2003년 피랍 일본인이 일본에 일시 귀국한 뒤 일본이 북한과의 약속을 파기하면서 북한에 돌려보내지 않았을 때 아베는 과감하고 일관되게 대북 강경 자세를 보여 여론의 지지를 얻었다.

    일본 지방도시 곳곳엔 주인을 잃고 버려진 신발 한 짝 위에 큼직하게 ‘일본은 피랍자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새겨진 대형 포스터가 나붙어 있다. 아베와 일본 국민을 정서적으로 묶어준, 그의 승승장구 배경이다.

    현직 총리의 강력한 지원은 아베가 출세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이다. 아직 젊은 나이여서 총리 자리에 부담을 느끼는 아베에게 고이즈미 수상은 노골적으로 자민당 총재선거에 입후보하라고 설득했다. 내각제인 일본에선 집권 여당인 자민당의 총재에 당선되면 자동적으로 내각의 총리가 된다.

    자민당 내 유명한 한국통인 야마모토 이치타(山本一太) 참의원은 아베의 열렬한 지지자다. 그는 모리 전 총리의 자제 발언에도 굴하지 않고 아베 띄우기에 열을 내고 있다. 최근에는 ‘왜 지금 아베 신조인가’라는 책을 냈을 정도다.

    야마모토는 ‘구조개혁’은 불가피한 시대적 조류이며, 고이즈미의 구조개혁을 계승할 적임자는 아베라고 주장한다. 아베의 정책수행 능력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해선 아베가 결단력과 담력의 정치력을 갖추고 있다고 반박한다. 외무성이 북한 문제에 대해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할 때 아베는 몇 차례나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아베의 높은 국민적 지지도는 그가 총리가 되어야 할 큰 이유 중 하나로 거론된다. 고이즈미의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임기 내 6할대 이상의 지지율을 유지했기 때문이라는 것. 우정(郵政) 개혁, 불량채권 처리, 부활하는 일본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신산업정책 추진,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한 연금 및 사회보장 개혁, 미일동맹 강화를 비롯한 일본의 동북아 외교정책 수립,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에 대한 강경 대처는 국민적 지지를 업은 강력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이러한 정책이 거꾸로 국민적 지지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논리다.

    자민당 총재 선출(9월) 직후인 오는 10월 오사카(大阪)와 가나가와(神奈川)현에서 중의원 보궐선거, 내년 7월에는 참의원선거가 기다리고 있다. 자민당으로선 선거에서 이기자면 ‘아베 총리’의 높은 대중적 인기가 필요하며, 더욱이 야당인 민주당의 ‘선거 귀재’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대표와 맞붙을 만한 자민당 간판 얼굴로는 아베 외엔 대안이 없다는 게 야마모토의 주장이다.

    50대 초반 총리의 등장 가능성은 일본의 변화된 환경이 낳은 예고된 산물이다. 1990년대 내내 장기 불황과 정치 불신이라는 ‘제도 피로’에 빠진 일본정치는 대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찬밥 신세인 야당으로 전락한 적도 있는 자민당에 선거에서의 승리가 연공서열식 정치문화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됐다. 이런 가운데 자민당 총재선거 방식이 403명의 현직 자민당 국회의원 위주 원내투표가 아닌 일반 당원 참가방식으로 변경됐다. 1차투표자인 당원들의 표심에 2차투표자인 국회의원들이 동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대중적 인기가 있는 정치인에게 유리한 제도다.

    ‘관저정치’ 속 ‘관방장관’

    아베의 부상(浮上) 이후 관방장관은 총리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로 인식되기도 한다. 관방장관은 일본 정부의 주요 정책을 기획 및 홍보하는 내각 내 요직. 관방장관은 본인 홍보에도 안성맞춤이다. 매일같이 TV에 등장하는 관방장관 출신(후쿠다 야스오, 아베 신조)이 총리 후보로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베도 매일 두 차례 기자회견을 통해 정국 현안에 대한 정부 방침을 브리핑하면서 일본 국민에게 매우 친숙한 인물이 되었으며 대중정치가로 성장했다.

    관방장관은 한국으로 치면 대통령비서실장, 국무총리, 청와대 대변인, 국정홍보처장 등을 합쳐놓은 자리라는 평가도 있다. 일본의 온갖 내정과 외교 문제에 종합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그 결과를 본인이 직접 대내외에 발표한다.

    관방장관은 매우 높은 수준의 핵심 정보를 수시로 보고받는다. 대통령 중심제인 한국의 청와대 비서실 인력이 650여 명인데 의원내각제인 일본 총리실도 각 성청에서 파견된 700여 명의 비서진을 거느리고 있다. 따라서 의원내각제 일본의 총리 관저는 청와대와 견주어 정보와 정책, 조직, 재정 면에서 뒤지지 않는다. 총리 비서실이 유명무실하던 과거와는 판이하다.

    특히 고이즈미 총리가 들어서면서 총리실과 내각 관방장관의 위상이 눈에 띄게 높아졌고 ‘총리 관저 주도형’ 정책결정이 두드러졌다. 아베는 총리 관저를 수시로 드나들며 고이즈미식 ‘관저정치’의 2인자 노릇을 해왔다.

    언제부턴가 일본 유권자들은 젊고 신선한 이미지의 지도자를 선호하게 됐다. 한국에서처럼 일본에서도 ‘미디어 정치’가 득세하면서 외모가 준수하고 귀족가문 등 ‘스타성’을 갖춘 정치인이 인기를 얻게 된 것. 또한 일본의 새로운 정치세대는 과거보다 미래에, 동북아보다 미국과 유럽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아베는 이렇듯 달라진 유권자 취향을 어느 정도 충족시켰다는 평이다. 고이즈미(영국 런던정경대 출신)에 이어 아베(미국 사우스캘리포니아대)도 영미적 세계관(觀)에 익숙하다.

    한국, 중국, 일본 정치권은 모두 세대교체의 과정에 있다. 노무현 대통령,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고이즈미 수상은 세대교체 바람의 산물이다. 그러나 일본에선 특이하게 이러한 세대교체가 정치 기득세력의 2세, 3세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고이즈미 현 총리뿐 아니라 아베, 아소, 후쿠다 등 차기 총리 후보군(群) 모두 기존의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정치 명문가 출신 국회의원은 전체 의원의 거의 4할에 육박한다.

    ‘개혁 계승자’ vs ‘역량 미흡’

    특히 집권 자민당에는 아버지로부터 지역구를 물려받고 가문에서 재정적 도움도 얻는 ‘귀공자형 의원’이 많다. 이들 정치 귀족과 재계, 고위 공직 집단, 언론계는 혈연·혼맥·학연으로 일체화해 일본을 이끄는 주류 계층을 형성한다. 아베 역시 아버지가 사망하자 아버지의 지역구에서 어머니 가문의 지원을 얻어 의원이 됐다.

    이처럼 정치권력의 세습이 일상화되어 있어 일본에선 자수성가한 서민 출신이 정계에 진출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장기적으로 보면 소수의 기득권 가문이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일본사회의 활력이 저하되고 서민층 등 사회 약자 보호에 취약점을 드러낼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아베가 대중정치가로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점은 2004년이다. 당시 아베는 참의원선거 지원 사령탑인 자민당 간사장으로 전국을 다니면서 지원유세를 벌였다. 운 좋게도 그때까지 자민당 주류이던 다케시타(竹下)와 하시모토(橋本) 파벌이 사분오열되어 더는 총리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모리파의 청화회(淸和會)가 신흥 주류로 등장하면서 모리파벌이면서 핵심요직인 자민당 간사장을 차지한 아베는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본 국민은 아베를 지지하는 이유로 대(對)북한 강경자세(42%), 구조개혁을 계속 추진할 것 같아서(19%)라는 답을 내놨다. 아베는 저서 ‘아름다운 나라’에서 정치가를 투쟁하는 정치가와 투쟁하지 않는 정치가로 양분한다. 이어 국가와 국민을 위해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행동하는 정치가가 위대한 인물이며, 자신도 항상 투쟁하는 정치가로 남아 있고 싶다고 썼다. 국민 사이에선 “‘외로운 늑대’ 고이즈미가 자민당을 파괴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구조개혁을 단행했다면 미진한 구조개혁 작업은 아베가 계승해 완수할 것”이라는 기대심리가 번지고 있다.

    고이즈미가 ‘내정형’이라면 아베는 ‘외교형’으로 비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베는 일본정부의 개혁 작업에도 직접 관여해왔다. 그는 도로공단 등 공공기관의 민영화를 주도해 매년 1조4000억엔의 세금을 절약했다. 단 1엔만 있으면 주식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회사등기 요건을 완화했고, 재도전 사업을 통해 실업자 재취업을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아베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후생연금이 확대 적용되도록 각계에 요청하기도 했다. ‘귀공자여서 서민의 아픔을 알 리 없다’는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아베는 정부 각 부처와의 업무조정을 담당하는 자신의 비서관에 고졸 철도원 출신 이노우에 요시유키(井上義行)를 임명했다. 아베는 배고픈 대학생 히라사와 가쓰에이(平澤勝榮)에게 과외를 받으면서 서민의 어려움을 알게 됐다는 점도 강조하고 다닌다. 훗날 히라사와는 자민당 의원이 됐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단편적 경험일 뿐이다. 아베가 구조개혁을 추진할 역량을 갖췄는지는 미지수다. 당내 기반이 취약한 아베가 총리 취임 뒤 야마사키 다쿠(山崎拓),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고가 마코토(古賀誠) 등 자민당 내의 노회한 중진의원들을 설득하면서 정국을 주도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복잡한 사안을 단순명쾌하게 정리하면서 인기를 누린 고이즈미와 비교하면, 아베는 정책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차기 일본 총리 물망, 아베 신조 관방장관

    아베 신조 관방장관은 ‘강한 일본’을 주창한다.

    아베 브레인, 노 대통령 비판

    과거사에 대한 아베의 인식은 일본 극우파와 궤를 같이한다. 아베는 공공정신, 향토애와 애국심 등을 담아낼 교육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일본의 미래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의원모임’의 사무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아베는 “2차대전 당시 일본의 전쟁 책임은 아직 학문적으로 정의되지 않고 있으며, 이에 대한 평가는 후세의 역사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언급했다(2006년 2월16일 ‘아사히신문’ 보도). 또한 아베는 여성국제전범재판(일본군위안부 문제)을 다룬 프로그램의 방영을 중단하도록 NHK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2005년 1월12일 ‘아사히신문’ 보도).

    아베 신조는 ‘일본을 지킨다’에서 “정치가는 항상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7월초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자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아베는 핵과 미사일로 무장한 북한의 침략 가능성에 예방공격도 불사하는 강경대응, 거대중국의 압력에 굴하지 않는 대결형 외교 자세라는 ‘원초적 본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민당 중진들의 저항, 구조개혁 반대파의 비난, 야당과 진보언론의 흠집 내기, 한국·중국·북한의 비판에 맞서면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 언론은 고이즈미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이래 동북아 각국의 정상간 대화가 두절된 것을 심각한 사태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난 아·태경제협력체(APEC) 회의 이래 한일 양국 수뇌간 의견교환은 부재한 상태로, 대화 단절이 가져오는 부작용이 크다는 평이다. 북한 미사일 사태를 둘러싼 한일간 갈등은 전형적인 사례였다. 아베 관방장관, 아소 외상, 누카가 방위청 장관의 대북한 선제공격 발언이나 유엔안보리 7조 적용 추진은 한국 정부와 사전협의 없이 나온 것이다.

    아베 역시 야스쿠니·독도·북한 문제에서 한국과 기본인식이 다를 뿐 아니라 우파 정치인들에 둘러싸여 있다. 아베 체제 이후 한일관계의 근본적 개선이 가능할지 불투명하다. 아베의 외교 브레인인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 전 태국대사는 공개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했다. 오카자키는 “노 대통령이 오로지 국내정치에 이용하고자 수차례 대일 비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고 주장했다(2006년 7월 ‘중앙공론’).

    아베가 총리 취임 이후에 맞을 동북아 외교의 첫 관문은 야스쿠니 문제다. 고이즈미 총리는 참배를 강행하겠다고 밝혔으며, 중국과 한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아베는 외교 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해 야스쿠니 참배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우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의 언행을 보면 야스쿠니 참배 문제는 언제 터질지 모를 ‘지뢰’이다. 아베는 지난해 5월 미국 강연에서 “차기 총리도 야스쿠니에 참배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고, 자민당 간사장이던 2004년과 간사장 대리이던 2005년에도 8월15일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한 바 있다.

    “소형 원자탄 보유해야”

    특히 6월21일 강연회에서 아베는 “일본을 위해 돌아가신 분들께 존경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은 당연하며,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다만 중국과 한국에서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어서 참배 여부를 미리 말할 필요는 없다”고 밝혔다.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서는 자민당 내에서도 반대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별도의 추모시설을 만들자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일본 국민 사이에선 참배 반대 49%, 찬성 43%로 반대 의사가 약간 더 많다. 아베가 총리에 취임한다면 야스쿠니 참배가 국내외에 미칠 부정적인 요인을 고려해 신중한 태도를 취할 것으로 보인다.

    6월23일 아베의 측근인 나카가와 히데나오 자민당 정조회장은 고이즈미 총리에게 무명용사 묘지인 지도리가후치(千鳥ヶ淵) 전몰자 묘역을 확충해 외국 국빈들이 헌화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한 바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 전 총리는 한국인 징용과 관련이 있으며, 그의 가문과 혈연관계인 사토 전 총리는 1965년 한일국교를 정상화했다. 부친 아베 신타로는 외상 재직 때 한국인 로비스트 박동선씨를 고용해 대미외교에 활용했으며 한국 보수정치인들과 친분이 있었다. 아베 신조와 통일교와의 관련설이 일본 잡지에 제기되기도 했다.

    아베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고 인사한 적이 있다. 두 사람에겐 우파 2세 정치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아베는 한국을 방문해 노무현 대통령을 예방하기도 했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8월9일 일본을 방문해 아베와 회담한 뒤 그를 합리적인 인물로 평가했다고 한다.

    한일 관계 개선될 여지도

    대북(對北) 강경파인 아베가 6자회담 등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노무현 정부와 협력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아베는 심지어 2002년 5월 와세다대 강연회에서 북한 문제를 염두에 두면서 “소형이라면 원자폭탄 보유도 별 문제 없다”고 주장했다. 강연 뒤 간담회에선 “북한을 핵 공격으로 초토화할 수 있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가 전문적 군사지식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국회에서 답변하면서 소형폭탄의 TNT 화약을 NTT(일본전신전화공사의 영어 약자) 화약으로 잘못 읽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

    아베가 불필요한 마찰을 지양하고 주변국에 대해 현실적 외교 노선을 추구할 것이란 시각도 있다. 아베는 지난 4월 독도 문제로 한일관계가 위기에 처했을 때, 외무성 야치(谷內) 사무차관을 보내 갈등을 일단 봉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월 초엔 자신이 주도해 중국에 대한 엔 차관 동결을 해제하기도 했다. 일부 전문가는 아베가 한일, 중일 관계에서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점을 들어 총리 취임 후 한국이나 중국과의 관계가 개선될 수 있다고 내다본다.

    중국은 기대를 걸면서도 관망하는 자세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중일 관계가 장기적으로 악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아베는 정경분리를 원칙으로 하지만 중국에 대한 인식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중국과는 서로 얼굴을 붉히더라도 할말은 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언급한 적도 있다.

    아베는 미일동맹을 기축으로 호주, 인도까지 포함하는 아시아·태평양 국가 연대를 제안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1000년 이상 계속된 일본외교의 전통적인 대(對) 중국 견제 심리, 영미 중시의 탈아입구(脫亞入歐)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괴짜 총리 고이즈미에 비하면 아베는 덜 복잡한 인물이다. 일본 외무성 관계자에 따르면, 고이즈미 총리는 외로운 늑대라는 별명처럼 다른 정치인들에게 잘 접근하지도 않고 자신에게 주변사람이 가까이 오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측근인사들과 명절 선물을 주고받는 일도 없으며,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조그만 초콜릿을 보낸 여성 국회의원에게 수신인 지급으로 선물을 되돌려 보내기도 했다.

    이에 비해 아베는 인정에 약한 면도 있다. 고이즈미식 깜짝 인사보다는 원칙을 중시하는 스타일이다. 아베가 총리에 오를 경우, 내각과 자민당 주요 직책에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구조개혁 추진론자, 헌법 개정론자, ‘신(新)국방족’ 등 우파 정치인이 대거 중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新국방족’ 중용될 듯

    현재, 아베 내각 물망에 오르는 당내 인사로는 후견인 격인 나카가와 히데나오(中川秀直) 자민당 정조회장, 도쿄대 출신인 모범생 스타일의 마치무라(町村信孝) 전 외상, 재정개혁을 주장하는 요사노 가오루 의원, 라이벌이면서 북한 미사일 발사에 유엔 안보리 7조 적용을 이끌어낸 아소 다로 현 외상, 중국통인 아마리 아키라(甘利明) 의원, 외교전문가 시오자키 야스히사 중의원, 교육과 역사문제 우파인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예스맨’ 다케베 쓰토무(武部勤) 자민당 간사장, ‘친(親)아베파’인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방위청 장관, 아베의 ‘친위대장’격인 야마모토 이치타 참의원,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총무대신과 이시하라 노부테루(石原伸晃) 전 행정개혁 담당대신 등 지인그룹, 미국정치 전문가이자 소장파인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의원,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참의원이 거론된다.

    자민당 간사장과 정조회장 후보로는 누카가 후쿠시로(額賀福志郞) 방위청 장관,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경제산업 대신, 친한파 의원 규마 후미오(久間章生)가 오르내리고 있다. 이미 자민당 내에서는 아베를 지지하는 소장파 국회의원 모임이 조직되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외곽 지지단체(安晋會)에는 게이오대 출신 사업가가 후원회장을 맡고 있다. 전현직 언론인 모임, 금융업과 부동산 관련 기업인들, 지역구인 야마구치현 출신 인맥 등도 다양하게 포진해 있다.

    아베 정권 출범 준비는 현재 속속 진행되고 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