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호

北 정권의‘미사일 파워게임’

김정일-군부 상호견제 구도, ‘김정철 후계’ 둘러싸고 폭발

  • 차두현 한국국방연구원 국방현안팀장 lancer@kida.re.kr

    입력2006-09-13 14: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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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권력은 과연 절대적인가. 북한학자들 대부분이 공유하는 이러한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도발적인 분석을 소개한다. 7월5일 미사일 발사에 얽힌 평양 내부의 정책 결정과정 징후에서 출발한 이 글은, ‘先軍정치’로 위상을 강화한 군부가 김 위원장과 서로 세력을 견제하는 구도를 형성한 것 같다고 분석한다. 이들이 대외정책의 ‘선명성 경쟁’을 벌인 것이 아니라면 미사일 발사의 배경을 해석할 수 없다는 것. 특히 이러한 구도는 3대 세습과 ‘섭정’을 통해 권력을 더욱 강화하려는 군부의‘김정철 후계 추진’과 이를 경계하는 김 위원장 사이의 긴장 고조로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는 추론이다.
    北 정권의‘미사일 파워게임’
    북한이 지난 수십년간 매우 높은 수준의 폐쇄성을 유지해왔고, 이 때문에 북한의 특정한 움직임의 이면에 담긴 동기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작업이다. 미국기업연구소(AEI)의 니컬러스 에버스타트 연구원은 “북한이 지속적으로 ‘전술적 기만’을 행해왔다”고 주장할 정도다. 그러나 외부의 시선에는 지극히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행위에도 나름의 일관성과 합리성은 늘 존재했던 게 사실이다.

    북한의 정책결정자들은 미·일·중·러 4대 강국의 역학관계와 분단체제라는 환경 속에서 북한이 지니는 전략적 가치를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최대한 유리하게 활용하고자 이른바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해왔다. 7월5일의 미사일 발사를 두고도 그 연장선에서 다양한 분석이 쏟아져 나온 바 있다. 미사일 발사 강행에 담긴 북한의 의도에 대해 현재까지 나온 분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2005년 2월의 핵 보유 선언 이후 다시 한번 고강도 조치를 취함으로써 미국과 일본의 양보를 얻어내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대포동 2호와 노동 및 스커드 계열의 미사일을 함께 발사한 것은 강경대응 가능성에 대비한 일종의 무력시위라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반면 북한이 경제난 타개를 목적으로 미사일 수출선을 확대해 경화(硬貨)를 획득하고자 발사를 강행했다는 해석도 있다. 이번 실험에 이란이 기술자들로 구성된 참관단을 파견했다는 일부 외신보도가 그 근거로 제시됐다. 끝으로 북한이 미국과의 극한 대립을 피하면서도 당초의 명분을 살리고 동시에 미사일 개발과 관련된 기술을 축적한다는 제한적인 목적을 위해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분석도 있다. 대포동 2호의 실패가 의도적이었다는 전제를 달고 있는 분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나름의 타당성을 지니지만 어느 것도 상황을 완벽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북한이 벼랑 끝 전술의 연장선상에서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첫 번째 해석의 경우, 왜 하필이면 중국이 북한의 낯을 살려주기 위해 외교적 중재 노력을 시작한 6월말~7월초에 미사일 발사를 강행했는지 설명할 수 없다. 또한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결의안 채택을 둘러싸고 미·일·중·러가 격론을 벌이는 상황에서 중국이 우다웨이 외교부 부부장을 통해 설득작업을 벌였음에도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답하기 힘들다. 전통적으로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은 일단 미일에 대해 일정한 수위의 강경조치를 취한 후 중국이 외교적인 절충에 나서면 대화에 임하는 순서를 밟아왔기 때문이다.

    미사일 발사가 대외수출을 위한 포석이라고만 생각하면, 대포동 2호의 발사는 한마디로 바보짓이다. 수출을 위해서라면 이미 성능이 입증된 스커드와 노동 계열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대포동 미사일 발사는 미국과 일본의 강력한 견제는 물론 미사일 수출길을 아예 막아버릴 수 있는 확산방지구상(PSI) 대응조치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은 카드였다. 수출 때문이라면 굳이 대포동 미사일을 함께 발사해야 할 이유가 없다.



    세 번째 해석의 경우 ‘의도된 실패’라고 볼 만한 근거가 극히 불투명할뿐더러, 과연 기술축적을 위해 그 정도 모험을 강행할 만큼 북한의 정책결정자들이 전략적 사고가 부족한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정상궤도 벗어난 정책결정과정

    이렇듯 대외적 요인만으로 미사일 발사를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발사 이후 국제사회의 반응을 고려할 때 북한은 앞서 살펴본 세 가지 목표 중 어느 것도 달성하지 못했을뿐더러, 도리어 고립무원 상태에 몰렸다. 이번 미사일 발사로 가장 큰 ‘정책적 실패’를 맛본 것은, 세간의 논란과는 달리 한국도 미국도 아닌 북한인 셈이다. 이는 현재 북한의 고위 정책 결정 체제가 어딘가 정상적인 궤도에서 벗어났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평양의 정책 결정과정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대외적 요인으로 설명이 안 된다면 평양 내부의 상황으로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평양이 이번에 보여준 ‘정책적 실패’의 원인을 북한 내부에서 찾으려는 시도 또한 크게 세 가지로 나눠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고위 정책결정자들이 관성과 매너리즘에 빠져 판단착오를 일으켰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대외정책 당국자들의 재임 기간이 짧은 서구 민주주의 체제와 달리 북한의 대남·대외정책 전문가들은 능력만 입증되면 매우 오랫동안 자리를 유지한다. 미국통이라는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나 이근 외무성 미국국장은 모두 10년 이상 종사해왔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북한이 그간 미일 및 주요국을 상대로 노련한 협상수완을 발휘한 것도 사실이다.

    일부 분석가들은 이러한 속성이 엘리트들의 매너리즘을 불러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벼랑 끝 전술을 펼친 끝에 대화와 타협을 얻어낸 클린턴 행정부 시절처럼 이번에도 같은 효과를 기대했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을 근본적으로 불신해 ‘정권 변환(regime transformation)’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부시 행정부의 정책을 평양이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도 한계는 있다. 미사일 발사를 앞두고 중국이 두 차례나 외교적 절충을 시도했을 때 과거와 달리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모호하다. 또 애당초 발사 징후가 주요 쟁점으로 등장한 6월에 단숨에 미사일을 발사함으로써 대외적 과시효과를 극대화하지 않고 한 달이나 지체한 이유도 설명할 수 없다.

    여기서 나온 게 두 번째 가능성이다.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지고 김정일 위원장 본인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됨으로써, 예전처럼 자신의 의지대로 강온(强穩) 양면의 대외정책을 구사하는 탄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즉 ‘선군정치(先軍政治)’를 통해 군부를 자기 권력의 최대 지지세력으로 제도화한 김정일 위원장이 최근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군부에 심리적으로 종속되는 상태가 됐고, 이로 인해 군부가 선호하지 않는 유화적 대외정책을 택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이 해석을 따르면 올해 들어 북한이 보인 일련의 강경노선을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은 지난 5월 4차 남북 고위급 군사회담(장성급 회담) 당시 서해상의 새로운 해상경계선 설정이라는 ‘근본 문제’의 해결을 주장하며 대화를 결렬시킨 바 있다. 또한 5월말로 예정돼 있던 남북 도로철도 연결 시범사업을 일방적으로 연기하기도 했다.

    김정일과 군부의 ‘강경노선 경쟁’?

    그러나 이러한 설명도 완전한 타당성을 지니지는 못한다. 군부가 정책 결정과정을 완전히 장악했다면 4차 6자회담을 통해 9·19공동성명을 도출하는 데 동의했는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또 첫 번째 설명과 마찬가지로 왜 북한이 대담하게 조기 발사를 강행하지 못했는지도 설명할 수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러한 모든 상황을 음미해보면, 결론은 한 가지 추론을 향해 달린다. 김정일 위원장과 북한 군부가 동상이몽(同床異夢)의 관계 속에 강경노선의 선명성 경쟁을 벌인 것 아니냐는 세 번째 추론이 그것이다. 김 위원장으로서는 자신에 대한 잠재적 도전세력을 제거하고 권력계승 문제를 포함한 제반 현안에 있어 전략적 선택의 폭을 넓히려면, 10년간의 선군정치를 통해 불가피하게 확장된 군부의 정치적 위상과 영향력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단기적 차원에서는 오히려 군부의 의도보다 더욱 강경한 정책노선으로 나타났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김 위원장이 개혁개방을 선택함으로써 군부를 견제하는 것은 불가능했을까. 개혁개방을 밀어붙일 경우 군부의 직접적인 반발이나 저항에 직면해 오히려 정치적 위기를 촉발할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김 위원장은 핵 카드와 미사일 발사라는 강경노선을 통해 미일의 양보와 러시아 및 중국의 후원을 얻어냄으로써 국제사회에 자신만이 유일한 협상대상이라는 점을 부각하고자 계산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창출된 대외관계의 업적은 군부를 통제하는 원동력이 되고, 특히 중국과 러시아가 김정일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강화할 경우 군부 또한 이에 반발하기가 어려워진다.

    北 정권의‘미사일 파워게임’

    김정일 위원장의 차남 김정철(왼쪽)이 연인으로 보이는 여성과 함께 6월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에릭 클랩턴의 라이브 공연을 보러 들어가다 일본 후지TV 카메라에 잡혔다. 사진은 MBC TV가 방영한 후지TV 보도 장면.

    북한의 외교분야나 당 엘리트들은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반면, 군부는 오히려 친(親)러 성향을 띠면 띠었지 특별히 중국에 경도될 이유는 없다. 북중 간의 50년 협력관계 속에서 북한이 중국의 무기체계를 도입했거나 북한군 장교를 중국 군사교육기관에 보내 교육시킨 사례는 드물다. 이렇게 보면 최근 중국이 시도한 외교적 절충은 북한 군부 인사들에게는 오히려 ‘외교적 압력’으로 느껴졌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여전히 군부를 무시할 수 없는 김 위원장으로서는, 중국의 외교적 절충을 받아들여 미사일 발사 자체를 철회하거나 미사일 발사 이후 빠른 시일 내에 양보로 비칠 만한 조치를 취할 경우 군부의 강력한 반발이나 저항에 맞닥뜨려야 한다는 부담을 고려했을 것이다. 발사 강행으로 예상되는 외교적 압력의 강도가 아무리 높아도 이를 철회함으로써 초래될 국내 정치적 위기보다는 덜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또 국내 정치의 부담을 근본적으로 타개할 만한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위험부담이 있다 해도 또 한 번의 벼랑 끝 전술을 통해 미일의 정책전환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실현 가능성은 낮지만 성공할 경우의 효과는 매우 클 것이기 때문이다.

    선군정치와 준(準)남미형 체제

    반면 군부도 김 위원장의 이러한 선택으로 크게 손해 볼 것이 없다. 김 위원장이 대량살상무기와 관련해 강성노선을 펴는 동안 군부는 그들이 선호하는 재래식 군비 경쟁(이는 전통적으로 군부의 영향력이 강한 국가에서 군의 ‘조합적 이익’을 실현하는 도구로 쓰였다)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을 지속시키는 한편 교류협력으로 인한 사상적 이완을 저지하는 정책도 구사할 수 있다. 만에 하나 김 위원장이 대외정책의 실패로 그 입지가 심각하게 축소될 경우, 군부는 ‘혁명 수뇌부’의 주요 구성요소로서 ‘위대한 지도자’를 부정하지 않고도 그 자리를 대체할 계기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미사일 발사는 현재 북한의 고위 정책결정체제가 김정일과 군부 어느 쪽도 확실한 단독 집권능력을 보유하지 못한 상태임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상대방을 통제하거나 대체하기 위한 계기를 축적해 나가는 과정에서 경쟁적으로 강경노선을 추구하는 구도가 형성되고 있으며, 그 결과가 미사일 발사강행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렇듯 기형적인 권력구도와 정책결정체제는 김 위원장이 10여 년간 추구해온 선군정치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 선군정치는 김 위원장으로 하여금 권력을 강화해 ‘김정일 시대’를 본격적으로 여는 기반을 제공했지만, 과도하게 진행되면서 부작용을 피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과 당, 최고지도자가 공생관계를 형성하는 사례는 공산권 국가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피델 카스트로 치하의 쿠바가 북한과 매우 유사한 특성을 보인 바 있고, 중국 공산당도 인민해방군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어왔다. 물론 쿠바의 경우 군부의 입지는 절대권력에 대한 충성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확보됐고, 군부가 자신들의 이익을 카스트로 형제에게 강청하거나 관철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중국도 군부가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과 위상을 지속적으로 보장받기는 했지만 그 대전제는 어디까지나 당의 가치를 충실히 내면화하는 것이었다.

    반면 김정일 위원장이 군부와 공생하기 위해 택한 선군정치 전략은 중국 모델과는 정반대였다. 군부가 최고지도자나 당의 가치에 순종하는 공생이 아니라, 최고지도자가 스스로의 위상과 역할을 군부의 수뇌로 변경하고 군부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방법이었다. 외형상으로는 유사해 보이지만 중국과는 본질상 분명한 차이가 있다.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지닌 공식 지위의 무게중심은 조선노동당 서열 2위 비서보다는 1991년 획득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직과 1992년에 오른 국방위원장 직에 있었다. 김 주석이 사망한 이후에도 김 위원장은 주석 직을 계승하지 않은 채 국방위원장이라는 군부 최고수뇌부의 직위로 북한을 통치했다. 또한 1998년에는 헌법 개정을 통해 국방위원회를 과거의 주석을 대체하는 ‘최고주권기구’로 격상함으로써 선군정치를 제도화했다.

    이렇게 볼 때 국방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북한 정치체제는 국내 정치에 빈번하게, 그것도 제도적으로 개입했던 남미 군부가 즐겨 채택한 ‘군사평의회(Junta)’ 체제와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현재 북한의 당군관계가 중국형과 남미형의 경계선상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불안정한 후계체제 논의

    그동안의 권력 공고화 과정에서 김정일 위원장 또한 이러한 문제를 고려해온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군부 인력에 대한 ‘분할통치’ 기법이다.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던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김 위원장은, 1980년대 중후반에 진행된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 약화작업으로 소외된 오극렬(현 조선노동당 작전부장) 등 전형적인 ‘혁명 2세대’ 군부인사들의 정치적 입지를 일부 회복시켰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이들을 국가 및 군사정책의 최고결정기관이라 할 국방위원회에 복귀시키지는 않았다. 즉 ‘혁명 2세대’와 그보다 앞선 세대인 국방위원회 위원들 사이의 세력경쟁을 통해 군부의 조직적 반발 가능성을 차단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이미 세상을 떠난 ‘빨치산 세대(혁명 1세대)’나 현재의 군 최고 원로인 6·25전쟁 세대에 비해 ‘혁명 2세대’ 군부 장교단의 성향이 군대의 전문성과 고유이익을 보다 중요시하는 편이고, 따라서 이전 세대처럼 오로지 이념을 바탕으로 완벽한 충성을 보장받기 어렵다는 계산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권력 상층부를 차지한 6·25전쟁 세대의 은퇴가 불가피한 시점이 가까워지면서 김 위원장은 군부를 통제하기 위한 작업을 다시 시작해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 국방위원회 내의 6·25전쟁 세대 군부 장교단의 은퇴 후 공백을 ‘혁명 2세대’로 메우기보다는, 당료나 전문관료로 대체하거나 헌법 개정을 통해 국방위원회의 권력구도 내 위상을 재조정해야 하는 시점에 온 것이다.

    김 위원장이 선군정치를 지속적으로 강조하면서도 2003년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통해 권력 엘리트의 평균연령을 낮추려고 시도한 것이나, 2002년 이후 국정 운영에서 내각의 역할을 강조한 것은 이러한 변화의 시작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미 제도적으로 권력기반을 상당 부분 장악한 군부가 이 같은 변화에 순순히 따를지는 매우 불투명한 것이 현실이다.

    결국 이 같은 상황은 향후 북한 체제의 운명을 가름할 핵심변수인 후계자 문제로 연결된다. 북한의 계승체제 역시 김정일과 군의 관계, 나아가 당군 관계를 가늠케 하는 주요변수가 될 것이다. 국방정보국(DIA) 등 미국의 주요 정보기관은 수 차례에 걸쳐 김정일 위원장 이후의 후계자로 군부인사가 등장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반면 일본이나 한국의 일부 분석가들은 김 위원장이 둘째아들인 김정철 혹은 셋째아들 김정운을 후계자로 하는 3세대 계승체제를 준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최근의 북한 관련 정보들은 김정일 위원장이 이들을 후계자로 지목했을지 모른다는 추론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후계자 수업으로 인해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 위원장이 자신에 비해 경력이 일천한 김정철을 후계자로 선뜻 지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정철은 아버지와는 달리 현 시점까지 당과 군에서 아무런 경력을 쌓지 못했다. 김 위원장이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이라고 전제한다면, 또한 김일성 주석이 이미 50대에 권력승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 위원장으로서는 김정철을 후계자로 선택하기에는 시간이 짧고 여건의 부담이 너무나 크다고 볼 수 있다.

    김정철 후계설은 군부 작품일 수도

    이러한 점에서 김정철에 대한 권력 승계설은 그동안 북한 분석에서 여러 차례 관측된 오류가 또 한 번 나타난 것일 수 있다. 단편적인 정보를 확대해석하다보니 나타난 결과일 수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즉 김정철의 후계자 옹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주체가 김정일 위원장이 아니라 군부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개인숭배의 전통이 누적되면서, 군부의 그 누구도 그에 필적하는 카리스마를 보유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군부 처지에서 보면 김정철은 ‘혁명 가계’의 일원인 동시에 경험이 일천하다는 특성이 매우 매력적일 수 있다. 그를 후계자로 내세울 경우 군부로서는 자신들의 부족한 카리스마를 보충하면서도 사실상 섭정(攝政)이 가능한 명목상의 지도자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김정철 후계설이 급부상한 강력한 계기였던 ‘고영희 숭배문건’의 발간 주체가 군부였음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2002년 8월 발간된 ‘존경하는 어머님은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께 끝없는 충직한 충신 중의 충신이다’라는 제목의 강연자료에서 ‘어머님’은 김정철과 김정운의 생모인 고영희를 의미하므로, 이는 본격적인 권력승계 준비작업이라는 분석이 쏟아져 나온 바 있다. 문제의 강연자료는 조선인민군출판사가 간행해 전방 부대원의 교양교육을 위해 배포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김 위원장이 “3대 세습은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며 후계문제를 일절 거론하지 말라고 측근들에게 지시했다는 2005년 12월의 보도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간부들과 사회에서 ‘자제분이요’ ‘후계자요’ 하는 따위의 소리를 하지 못하게 엄격히 단속하라”고 지시하면서, 고영희를 지칭하던 ‘평양 어머니’라는 표현도 금지하고, 일부 군부 실세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고영희 우상화 작업도 일절 중단하라고 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관련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을 색출하고 심할 경우 종신형을 내리라는 지시가 노동당 10호실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소식은 앞서 제시한 ‘군부의 김정철 후계 추진’ 가설이 사실일 경우 김 위원장의 권력강화 의지와 정반대가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는 군부와 김정일 사이의 잠재적 긴장이 수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좀더 극적으로 말하자면, 김 위원장과 군부 사이에 형성된 현재 구도에 균열이 생긴다면 바로 이 지점, 권력 승계를 둘러싼 논의에서 시작될 것으로 예측해볼 수 있다. 권력교체가 가시화하면 현재의 권력을 둘러싼 연대는 깨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북한 급변, ‘가능성’ 아닌 ‘개연성’

    대규모 숙청이나 당정 중심의 권력구도 재편을 통해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할 것인가, 혹은 지금과 같은 왜곡된 권력구도를 지속하면서 군부와 적절히 타협할 것인가. 이미 60대 중반이 된 김 위원장으로서는 어느 쪽도 하기 쉬운 선택이 아니다. 양쪽 모두 모험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미사일 발사로 인해 선택의 폭은 더욱 좁아졌다는 사실이다.

    북한이 과거와 같이 벼랑 끝 전술로 소득을 얻으려면, 북한의 극단적 선택을 두려워한 미국이나 일본이 일정한 시점에 중국의 중재를 계기로 마지못해 대화에 복귀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러한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 7월15일 유엔 안보리를 통과한 대북결의안을 보면 내용이 함축적이고 그 구속력에 대해서도 여러 해석이 엇갈리지만, 기본적으로는 미국이 추진해온 확산방지구상과 매우 유사한 골격을 갖고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결의안은 미사일 발사에 대한 비난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는 한편, 앞으로 미사일 관련 무기체계 및 기술이 북한으로 유입되거나 제3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회원국들이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北 정권의‘미사일 파워게임’
    차두현

    1962년 경남 진해 출생

    연세대 정외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

    총리실 주한미군대책기획단 자문위원

    국방부 자문위원, SPI 정책연구위원

    한국국방연구원(KIDA) 연구위원, 국방현안팀장

    논문 및 저서 : ‘북한 당·군 관계의 변화과정’ ‘북한 권력구조와 권력엘리트’ ‘북한의 내부 및 대외관계 변화 전망’ 외 다수


    이는 2005년 하반기 이후 미국이 취해온 정책, 즉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보유를 저지하기 위해 구사하는 마약·위폐 단속 및 자금줄 차단조치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미국은 2005년 마카오 소재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 내 북한 은폐 계좌의 동결로 기대하지 않은 효과를 보았고, 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 해법을 발견했다고 판단한 듯하다. BDA 계좌 동결에 대해 북한이 보여준 반응이 이례적으로 격렬하고 신경질적이었음을 감안하면, 미국으로서는 굳이 부담이 큰 군사적 조치의 실현 대신 외곽으로부터의 ‘강압 외교(coercive diplomacy)’ 강화를 통해 북한 정권을 충분히 ‘변환’할 수 있다고 계산할 만하다.

    전례 없이 가혹한 대내외 환경에 놓인 김정일 위원장으로서는, 군부의 반발을 감내하면서 미일에 대한 굴욕적인 양보를 하거나 혹은 먼저 위험을 무릅쓰고 군부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한 이후 미일을 상대하는 정책을 선택할 것이다. 한국은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막연한 ‘가능성(possibility)’ 차원에서만 논의되던 단기간 내 북한 급변 시나리오가 ‘개연성(probability)’ 수준으로 격상될 때를 대비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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