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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조선 문인들이 머물고 지나친 그곳 ‘조선의 문화공간’

  • 신병주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shinby@snu.ac.kr

조선 문인들이 머물고 지나친 그곳 ‘조선의 문화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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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인들이 머물고 지나친 그곳 ‘조선의 문화공간’

‘조선의 문화공간’ (전4권) 이종묵 지음, 휴머니스트, 각권 500쪽 내외, 각권 2만2000원

한명회 양성지 조광조 조식 김육 김창협 박지원…. 우리 역사에서 굵직한 행적을 남긴 이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과 업적은 알아도, 조선의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다. 한 인물의 행적에서 공간이 사라져버리면 그 인물의 진면목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나고 자란 환경은 인간의 삶에 중요한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한문학을 전공한 이종묵 교수가 10여 년간의 답사와 그동안 쌓은 탄탄한 지식을 바탕으로 내놓은 4권짜리 ‘조선의 문화공간’은 영화로 치면 블록버스터다. 조선 초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인물 87명이 살아간 흔적을 그들이 지켜낸 삶의 공간을 중심으로 되찾았다. 출생지에서 거주지, 은둔지, 유배지 등 인물이 지나간 주요 공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갔다.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를 망라하면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삶과 사상을 ‘문화공간’이라는 키워드로 읽어냈다.

이제까지 인물의 삶과 사상 연구가 생활공간, 거주지라는 측면을 간과한 데서 오는 한계를 정면 돌파한 것이다. 남아 있는 시와 편지들이 그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고, 인문 분야 전문 사진작가 권태균씨가 찍은, 적재적소에 시원하게 배치된 사진들은 책의 값어치를 더한다.

옛사람의 자취 서린 땅

이 책은 조선시대 문인의 땅과 삶에 대한 문화사다. “글은 사람을, 그리고 과거를 기억하게 한다. 근대라는 괴물의 힘에 밀려 우리의 산하가 많이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그러한 땅에도 옛 사람의 자취가 서려 있다”는 저자의 표현대로, 저자는 손상된 우리의 산하에서 옛사람들이 살아온 자취를 찾아가는 작업을 시도했다. 조선의 문화공간을 인물별로 최대한 살려놓은 저자의 작업은 어쩌면 옛 자취가 파괴될 가능성이 높은 개발의 시대라 더 빛나는지도 모른다.



인왕산 무계정사와 안평대군, 청송당과 성수침, 낙산과 신광한, 통진 대포동과 양성지, 하동 악양정과 정여창 은 조선 초기의 문화공간과 인물이다.면앙정과 송순, 개성의 화담과 서경덕, 독락당과 이언적, 지리산과 조식, 청량산과 이황, 우반동과 허균, 평해와 이산해, 침류대와 유희경, 필운대와 이항복, 청풍계와 김상용, 석실서원과 김상헌, 김포와 신흠, 화양동과 송시열, 곡운구곡과 김수증, 수락산과 박세당은 16~17세기의 문화공간과 그 주인이다. 이외에 자하동과 신위, 청계산 옥경산장과 남공철, 양수리와 정약용, 백탑과 이덕무, 인왕산 옥류동과 위항시인(委巷詩人), 임자도와 조희룡은 18~19세기를 장식한 문화공간과 인물이다.

조선시대 문화공간을 따라가노라면 지금은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한 서울 곳곳에 문화의 현장이 살아 숨쉬었음을 알 수 있다.

천민 유희경이 주인이던 창덕궁 옆의 침류대, 이항복이 살던 필운대, 안동 김씨가 대대로 세거하던 청풍계, 위항시인들이 시를 짓고 즐기던 인왕산 옥류동 일대는 조선시대 문화를 선도한 공간들이다. 이들 ‘문화사랑방’을 중심으로 당대의 명사들이 모이면서, 학문과 문화의 수준은 높아졌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인왕산 자락, 백악산 일대, 그리고 도심 한가운데가 되어버린 백탑 거리까지, 곳곳이 계곡과 산으로 어우러진 서울은 조선의 문화를 살찌우는 곳이었다.

서울은 물론이고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명산대천, 이름 없는 섬에 이르기까지 옛 선조들의 발길이 닿았다. 때로는 관직에서 물러나 풍류를 즐기는 안식처가 되었고, 때로는 유배를 당하면서 정치적 재기를 다짐하는 은둔지가 되었다. 조선의 산하 곳곳에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기거하면서 그곳은 하나 둘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인왕산의 옥류동이나 청풍계, 송석원은 조선 후기 시와 문장을 하는 선비들로 넘쳐나던 공간이지만 그 흔적들이 없어지면서 대부분 기억에서조차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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