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아침이 바쁜 나라, 산업국가로 만든 일등 공신은 원자력이다. 원자력 기술 자립을 위해 우리 연구원들은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 반핵단체의 위협과 선동에 묵묵히 맞서 원자력 기술 개발에 매진해온 원로 원자력인이 피눈물로 써내려간 국민 보고서.
2000년 창립 41주년을 맞아 기념비를 제작한 한국원자력연구소. 비석 오른쪽 첫 번째 사람이 장인순 당시 소장이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20세기 들어 세계사를 선도하는 과학문명에 동승하지 못해, 외세의 침략과 조국분단 그리고 민족상잔이라는 질곡에 빠져 세계에서 유일하게 허리가 잘린 나라로 남게 되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 분단된 남과 북은 1950년대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바쁜 아침의 나라’로
그런데 6·25전쟁이 끝나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의 한반도는 어떤 상황일까? 사진에서 많이 보았듯이 북한의 산하는 벌거벗은 채로 있다. 대부분의 주민이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살아가는 북한은 암울한 나라(dark country)가 되었다.
반면 일찌감치 자유민주 체제와 시장경제를 도입한 대한민국은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해 ‘아침이 바쁜 나라(morning rush country)’가 되었다. 그뿐인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간에 산림녹화에 성공한 나라도 되었다.
경제성장과 산림녹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었던 데는 에너지 자립이 큰 구실을 했다. 한국은 불빛의 40%를 원자력으로 밝히면서 가장 짧은 시간에 원자력 기술 자립을 이룬 원자력 발전 선진국이다.
얼마나 많은 국민이 ‘1948년 5월14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정치적인 이유로 북한이 대한민국에 대한 송전(送電)을 일방적으로 중단한 날이다. 당시는 대부분의 전기를 수력으로 발전할 때였는데 수력발전소는 주로 북한에 있었다. 북한의 단전으로 한국은 하루아침에 전기가 없는(?) 나라로 전락했다.
1950년대라서 기록이 정확하지 않지만, 이때 한국(남한)의 발전 용량은 10만kW 정도였을 것이다. 북한이 단전하자 미국은 발전함인 일렉트라함(6900kW)을 인천항에, 자코나함(2만kW)을 부산항에 보내 전기를 공급했다. 한국의 사정은 그만큼 절박했다.
57년 후인 ‘2005년 3월 16일’ 우리가 북한의 산업시설 가동을 위해 개성공단에 전기를 공급하게 되었다. 단전을 당했던 우리가 북한에 송전하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원자력이 조국 근대화 앞당겼다
오늘날 우리 삶에 있어 ‘전기’는 어떤 존재일까? 새로운 천년기를 앞둔 1999년에 미국공학회(NAE)가 공학자들을 상대로 인류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과학 기술이 무엇이냐고 묻자, 첫 번째로 많이 나온 대답이 전기를 만드는 기술이고, 19번째로 많은 대답이 ‘원자력 기술’이었다.
지금까지 전기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인류 문명이 어떻게 변했을까? 참으로 궁금하다. ‘전기의 발명’은 어쩌면 ‘불의 발견’보다 인류에게 더 큰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전기 없는 산업사회, 전기 없는 정보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오늘날 선진국이 되는 기준과 국민의 행복지수는 양질의 전기를 얼마나 많이 사용하느냐가 가늠한다. 그만큼 전기는 국가와 인간 삶의 중요한 동력인 것이다.
한국원자력연구소에 설치된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적은 연구비로 원자력 기술 자립을 이룩한 나라이다. 이러한 원자력이 조국 근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승만 대통령이 다진 토대 위에 에너지 자립의 중요성을 인식한 박정희 대통령이 웅지를 폈다. 박정희 대통령은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해, 1978년 4월 고리 원자력 1호기를 준공했다. 그 후 한국은 원자력 연구와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거듭해 원자력 발전 선진국에 진입했다.
불과 40년 만에 우리나라의 발전 설비는 140배 증가했다. 1964년 1억달러에 불과하던 우리나라 수출은 1977년 100억달러를 달성했다. 그리고 고리 원전 1호기를 준공한 1978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인 성장에 들어가 2005년 2800억달러를 넘어섰다. 40년 만에 수출은 2800배 증가했다.
그뿐인가, 국민소득은 1960년대 초 80달러에서 2005년에는 200배가 넘는 1만6000달러에 도달함으로써 중진국 반열에 당당히 올랐다. 아침이 바쁜 나라는 동력(動力)이 넘친다. 그 동력의 40%를 원자력이 제공한다.
치욕의 창씨개명
1959년 설립된 원자력연구소는 인력과 예산 부족으로 소형 연구용 원자로를 이용해 매우 기초적인 원자 물리와 방사성 동위원소 관련 연구만 했다.
1978년 고리 1호기가 가동되면서부터는 원자력발전과 연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1979년 10·26사건을 계기로 정치적 혼란에 빠지면서, 원자력연구소는 설 땅을 잃었다. 그동안의 연구 성과에 대한 비판과 함께 연구소를 없애라는 국내외 압력이 거세진 것이다.
그러나 뜻있는 분들은 원자력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 결과 창씨개명을 통해서 문제를 수습할 수 있었다. 한국원자력연구소라는 간판을 내리고 한국에너지연구소라는 간판을 올린 것이다. 실체는 유지했지만 이름을 빼앗긴 비극, 이는 4반세기 전 우리 선조가 당한 창씨개명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이 일을 계기로 국제무대에서는 힘이 곧 선(善)이고 규범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러한 질곡의 역사에서 시작된 것이 바로 핵연료 국산화 사업이다. 여기에 참여했던 연구원들은 뜨거운 조국애를 가지고 냉난방 시설도 갖추지 못한 실험실에서 1주일에 80시간 이상을 연구하며 핵연료 국산화를 추진했다. 그들은 에너지 안보의 꿈을 키워간 것이다.
핵연료를 만드는 데는 핵연료 설계기술과 핵연료 가공기술, 그리고 UO₂(이산화우라늄)을 생산하는 변환 공정이 필요하다. 핵연료 국산화를 수행함에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현장 경험이 있는 전문가가 없다는 점이었다. 핵심 기술을 외국에서 이전받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반핵단체의 압박도 대단했다. 그러나 정녕 우리를 괴롭힌 것은 ‘엽전(?)이 개발한 기술을 어떻게 믿느냐’는 부정적인 시각이었다. 우리 스스로 경멸해서 부르는 엽전…. 그런 부정적인 시각을 극복하려는 오기가 발동해 우리는 더욱 더 열심히 연구했는지도 모른다.
중수로 핵연료 국산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우리가 만든 핵연료를 연구용 원자로에 넣어 성능시험을 치른 후 합격 해야만 쓰겠다’고 한 한국전력측의 최후통첩이었다. 당연한 요구일 수도 있는데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너지연구소에는 연구용 원자로가 있었지만 성능시험을 할 수 없는 소형이었다. 할 수 없이 캐나다AECL(???) 산하 NRU(National Research Universal)의 재료 시험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캐나다는 성능시험비로 300만달러(당시 환율로는 20억원)를 요구했다.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이 트리가 마크-Ⅱ기공식에서 원자력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역사적인 시삽을 하고 있다.(왼쪽) 1979년 한국원자력연구소 안에 세워진 박정희 대통령 휘호 기념비.(오른쪽)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AECL측과의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귀국길에 오르기 위해 몬트리올 공항에 들어섰을 때, AECL 부사장이 공항으로 달려와 “캐나다 정부에서 40만달러에 계약하라고 했다”고 전해줘, 공항 대합실에서 계약이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그날이 1982년 10월5일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완강하던 캐나다가 40만달러에 성능시험을 허락한 것은 한 소장을 비롯한 핵연료 국산화팀의 뜻이 하늘에 전달된 것이라고 믿고 싶다.
이듬해인 1983년 2월에 고(故) 서경수 박사와 김병구 박사가 우리가 만든 핵연료 시제품 3다발을 가지고 캐나다 AECL 산하 초크리버(Chalk river)연구소에 있는 NRU재료 시험로에서 성능시험을 하기 위해 떠났다.
한 소장은 그때를 “귀엽게 키운 맏딸을 시집보내는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서경수 박사는 “성능 시험에 실패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겠다”고 선언했다. 그만큼 기대되고 긴장된 마음이었다.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우리 핵연료는 7개월의 연소시험을 끝내고 1984년 6월 시험 결과를 받았는데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우리의 땀과 열정과 오기와 조국애가 마침내 성공을 불러들인 것이다. 캐나다는 10억달러(당시 가치로 약 6000억원)를 들여 핵연료를 만들었는데 우리는 그것의 30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약 19억원으로 중수로 핵연료를 국산화한 것이다.
위업을 달성한 서경수 박사는 과로로 인한 위암으로 1989년 10월, 51세라는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 뜻을 기려 연구소 내 언덕 위에 서경수 박사의 흉상이 건립되었다. 서 박사는 지금도 열심히 연구하는 후배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동 중인 20기의 원자로 가운데 16기가 경수로이다. 오랫동안 이 경수로에 들어가는 핵연료는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 그리고 프랑스의 코제마(Cogema)사(社)에서 제공했다.
경수로는 농축 우라늄(3~5%)을 사용하기 때문에 중수로(0.72%)에 비해서 연소 기간이 길고 연소도가 대단히 높아, 핵연료 설계가 훨씬 더 복잡하고 규격 조건이 까다롭다.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사업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설계기술이었다.
경수로용 핵연료 설계는 경험이 없는 우리에겐 너무나 어려웠다. 우리가 만들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아 기술을 도입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 와중에 한필순 소장은 UO₂를 생산하는 변환 공정은 자체 기술로 개발하자는 용단을 내렸다.
그때 연구소는 세 가지 전제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첫째, 핵연료 설계는 세계 최초로 ‘공동설계’ 개념으로 하되 우리 과학기술자가 책임지고 한다. 둘째, 외국의 기술선은 우리 과학기술진이 결정한다. 셋째, 모든 건설비를 국내에서 조달한다.
외국 기술선을 선정하는 데 외압이 따랐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기술을 가장 많이 이전해주겠다고 한 독일의 KWU사를 선정했다. 그것이 단시간 내에 기술 자립으로 가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공동설계’라는 신개념을 도입한 덕분에 우리 연구원은 상대 연구원과 일대일 연구를 함으로써 별도 훈련기간 없이 바로 필요한 기술을 전수할 수 있었다. 독일 KWU 연구소는 저녁 8시면 문을 닫지만, 우리 연구원들은 밤늦도록 일했다. 연구소 문이 잠겨 하는 수 없이 담장을 뛰어넘다가 경비원에게 붙들려 곤욕을 치른 적도 많다.
핵연료 국산화를 기념해 세운 전두환 대통령 휘호탑(1989년).
핵연료인 UO₂제조 변환 공정은 우리 스스로 기술을 개발했다. 여러 공정 중에서 반응 제어가 가장 쉬운 AUC (Ammonium Uranyl Carbonate) 변환 공정을 선택해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원들의 애국심
가동 중인 원자로는 고온 고압 상태에 놓이는데 핵연료는 이 상태에서도 형태와 물성(物性)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UO₂분말을 일정한 모양으로 찍은 다음 1700℃ 정도의 고온으로 구워 단단한 고밀도체로 만든다. 제작법이 도자기 굽는 것과 비슷하기에 핵연료는 ‘도자기 연료’라고도 불린다. 이 연료는 일정한 밀도를 가진 미세 구조가 중요하기 때문에 분말의 물성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 분말 물성을 제어하는 기술이 바로 핵연료 제조의 핵심 노하우다.
중수로와 경수로는 우라늄 농축도가 다르기 때문에 핵연료의 물성도 다르다. 중수로용 핵연료는 옐로 케이크(yellow cake)라고 하는 우라늄 정광을 정제해 최종 분말을 만든다. 이에 반해 경수로용 핵연료는 농축된 육불화우라늄(UF6)에서부터 정제 과정 없이 여러 공정을 거쳐 분말을 만든다. 분말을 만드는 데는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 어떤 공정을 선택할 것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방법을 찾아 나가는 길이 참으로 험난했다. 연구원들이 냉·난방 시설이 없는 연구실에 실험설비(pilot plant)를 건설하고, 40일간 연속으로 여러 차례 운전해야 했는데, 인력이 부족해 2조 2교대로 밤을 새워가며 데이터를 얻었다. 깊은 밤에는 연구소 앞에 있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쒀다준 닭죽으로 허기와 졸음을 쫓았다. 이렇게 하길 수년, 용량이 다른 세 종류의 시험 설비를 가동해서 얻은 데이터를 토대로 우리는 경수로용 핵연료 공장을 우리 힘으로 건설해냈다.
이 공정에 필요한 기술을 외국에서 직도입했다면 400억원 이상이 소요됐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연구비를 포함해 120억원으로 변환공장을 건설했다. 이로써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훈련된 인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1979년부터 시작된 우라늄 변환 공정 개발을 위해 우리는 서울 청계천 상가를 수십 차례 방문하며 필요한 부품을 구입했다. 재미있는 것은 청계천 상가에는 어느 나라 것인지는 모르지만 없는 부품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청계천 상가가 조국 근대화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복개됐던 청계천을 복원해냈으니 청계천 상가가 있던 곳에 조국 근대화 공적비(?)를 세우면 어떨까?
1989년에 드디어 한국핵연료주식회사(현 한전원자력연료주식회사)가 세워졌다. 눈물겨운 순간이었다. 당시 박진호 박사는 미국에서 박사후 연수 과정을 밟을 예정이었는데 그는 이를 포기하고 핵연료 개발에 매진했다. 박 박사를 중심으로 한 연구진에게 나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우라늄 농축실험 시비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장 중요한 우라늄 농축기술은 지금도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우라늄 농축기술 국산화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매년 농축 우라늄을 수입하기 위해 수천억원을 지급하고 있다.
나같이 평생 핵물질을 만지고 산 사람에게 소망이 있다면 이 땅에 우라늄 농축기술을 확보하는 것이다. 오직 평화적 목적을 위한 농축기술을….
2000년 원자력연구소에서는 호기심과 학문적 동기 그리고 평화적인 목적으로, 레이저 우라늄 농축실험을 하였다. 그런데 순수한 목적의 이 실험이 왜곡되게 알려져, 2004년 국내외에서 논란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 논란을 지켜보면서 1991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으로 평화적인 목적의 연구 활동마저 묶여버린 현실이 안타까웠다.
나는 그 실험을 하도록 수락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 이 자리를 빌려 나는 국민께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하는 기관장의 고뇌, 과학자들의 호기심과 도전 정신을 이해해달라는 부탁을 드린다. 우라늄 농축시설까지는 아니더라도 평화적인 목적을 위한 우라늄 농축기술만이라도 갖고 싶었다. 이는 나 같은 핵연료 전문가에게는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가까운 장래에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고 국제사회의 신뢰가 쌓여,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모든 연구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지난해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국민이 우리 연구소에 보내주신 뜨거운 성원과 격려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그 와중에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1989년에 우리는 한국원자력연구소란 이름을 되찾아 다시 현판을 걸게 된 것이다.
한국표준형원자로(KSNP) 개발
핵연료 국산화 사업이 진행되고 있을 때, 한필순 소장께서는 우리 힘으로 한국표준형원자로(KSNP)를 개발하자는 의견을 냈다. 그 말을 들은 모든 연구원은 깜짝 놀랐다. 핵연료 국산화 사업에도 인력과 예산이 부족해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원자로(원자로 계통 설계)를 설계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수한 인력이 가장 많고 새로운 도전 의욕을 제기한 우리 연구소가 이를 전담하게 되었다. 핵연료 설계 때도 외압이 거셌지만 원자로 기술을 이전받겠다고 하자 정말 대단한 외압이 들어왔다.
그때까지 한국은 미국 웨스팅하우스사의 경수로를 지어왔다. 하지만 우리는 더 많은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한 미국의 컴버스천 엔지니어링(CE)사를 선정했다. CE사는 자사의 한 모델을 우리가 마음대로 개량해 생산·판매하는 데 동의했는데, 이는 한국표준형 원자로 설계와 제작 그리고 판매를 인정하겠다는 의미였다.
1987년말 이병령 박사팀이 이끄는 44명의 연구진이 미국으로 출발했다. 출발을 앞두고 이들의 장도를 비는 출정식이 연구소에서 열렸다. 그때 한필순 소장께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라를 빼앗기면 식민지가 되듯이, 우리가 원자력 기술 자립을 못하면 밤낮 외국 기술에 의존하는 기술 식민지가 된다. 우리가 기술 독립국이 되기 위해서는 기필코 이번에 원자로 계통 설계기술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만세 삼창을 제안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다. 이곳저곳에서 눈물을 훔치는 연구원이 보였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CE사가 당초 약속했던 핵심기술의 이전을 기피하고 별볼일 없는 일만 맡기는 것이었다. 이에 이병령 박사가 ‘핵심기술을 이전해주지 않으면 철수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그러자 CE는 비로소 필요한 모든 핵심기술을 넘겨주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사람은, 우리 연구원 모두가 박사 학위 소유자로서 이론에 밝다는 점에 크게 놀랐다.
우리는 일대일로 일하면서 노하우(Know-How)가 아닌 노화이(Know-Why)를 집요하게 물었다. 이것이 이론보다는 실전 경험이 풍부한 상대 엔지니어들의 기를 꺾었다. 콧대가 높은 미국 엔지니어들이 우리 연구원들에게 존경과 신뢰의 눈길을 보내게 되었다. 서로 대등한 처지에서 이론과 실전 경험을 조화시켜 ‘공동설계’라는 새로운 개념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이 일을 위해 연구소는 개소 이래 최대인 100명 가까운 연구 인력을 해외에 파견했다. 이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3년 후 한국표준형원자로가 탄생했다. 그런데 뜻밖의 시비가 일어났다.
두뇌에 의존한 에너지 자립
어느 중요한 회의 장소에서 고명한(?) 교수 한 분이 매우 언짢은 표정으로 “장 박사, 한국표준형원자로가 정말 있는 것이요?”라고 물었다. 나는 “서울 시내를 달리는 ‘그랜저’라는 현대차는 국산입니까, 미국산입니까?”라고 반문했다. 그제서야 그는 깜짝 놀라면서 “이제 알겠다”고 했다. 우리 스스로 엽전이라고 비하하는 문화가 새삼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현재 가동되고 있는 20기의 원자로 가운데 6기가 한국표준형원자로이다. 이 원자로의 성능은 세계 최상위에 속한다. 이러한 우수성 때문에 북한은 KEDO사업을 통해 한국표준형원자로를 선택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원유값이 배럴당 60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1980~90년대 연평균 150억달러이던 에너지 수입액이 2005년에는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품인 반도체와 자동차 총 수출액 595억달러보다 많은 667억달러에 이른다면 우리나라의 에너지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땅에는 그 심각성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예상컨대 2010년이 되기 전 원유값은 배럴당 100달러를 넘을 것이다. 필요한 에너지의 97% 이상을 해외에 의존하는 우리나라 경제는 고유가 시대를 어떻게 버틸 것인가. 그리고 언제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를 달성하겠는가.
참으로 답답하다. 에너지 자립에는 자원에 의존하는 것과 두뇌에 의존하는 방법이 있다. 자원에 의존하는 방법은 임시방편일 수밖에 없다. 원자력은 두뇌와 과학기술에 의존하는 에너지원이다. 나는 원자력만이 한국이 에너지 자립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선진7개국(G7) 가입을 이야기할 때 원자력 분야는 이미 G6에 진입했다. 한국은 100만 ㎾를 생산하는 한국표준형원자로를 넘어 140만㎾를 생산하는 APR-1400 원자로를 개발했다. 20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에 핵연료를 국산화하고 연구용 원자로인 ‘하나로’를 건설했다. 첨단 방사선연구원을 건설하고, 양성자 가속기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는 땀에 전 영광을 만들어냈다.
원자력 발전율 70% 이상으로
나는 미래의 에너지 자립 불확실성을 줄이고, 더 나은 환경을 위해서 원자력 발전량을 현재의 40%에서 70%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환경 문제와 에너지 안보의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원자력밖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 석유현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980년 한 해에 3만2639개의 유전이 개발됐는데, 2000년에는 21%에 불과한 6904개가 개발되었다. 유전의 평균 깊이는 1980년 3810피트였는데 2004년엔 5249피트가 됨으로써 기름 채취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전세계가 지출한 연간 석유개발비는 2000년 631억달러였으나, 2004년에는 1174억 달러로 증가했다. 1배럴당 생산비가 4년 만에 4.94달러에서 8.61달러로 두 배 가까이 뛰었다.
석유 수급 전망은 불투명한데 우리의 석유 소비량은 ‘놀랍게도’ 산유국인 영국보다 많아서 세계 7위이다. 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같은 인구(人口) 대국의 빠른 경제성장은 세계의 석유 수급 상황을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다. 에너지 소비는 갈수록 늘고, 에너지원(源) 고갈 속도는 빨라지고 있다. 그러니 가까운 장래에 전세계는 또다시 에너지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원자력 발전 기술을 가진 나라가 세계사를 선도하게 된다.
여러 가지 지표를 검토하건대, 40%대인 지금의 원자력 발전율을 70%대까지 올릴 수만 있다면 우리는 매년 수백억달러를 절약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원자력 발전은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교토 의정서가 발효되면 온실가스를 감축해야 한다. 원자력 발전은 온실가스 감축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감시켜주므로 수십조원을 버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환경도 깨끗해진다. 나는 원자력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원자력이란 최소한의 자원을 사용해서 지속가능한 대량의 에너지를 생산하고 최소한의 폐기물을 발생시킨다.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의 E=mc2이라는 방정식은 원자핵이 쪼개질 때 생기는 에너지의 크기가 근본적인 속도의 한계인 빛의 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자연의 신비를 보여주고 있다. 대자연 혹은 신이, 인간 몰래 원자의 1만분의 1밖에 안 되는 극미의 원자핵에 감추어두었다가 인류를 위한 축복으로 준 청정에너지가 바로 원자력이다. 원자력은 자원 의존형이 아닌 두뇌 의존형의 에너지이다.”
대중이 걱정하는 원자력 안전 문제는 열정과 오기 그리고 에너지 안보를 이루겠다는 정신으로 20년 만에 불모지에서 원자력 선진국을 만든 이 땅의 원자력 과학기술자에게 맡겨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나는 원자력계의 숙원 사업인 원전 수거물 처분장(방폐장)이 주민 투표에 의해서 선정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한국의 원자력 기술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처분장을 건설할 것을 약속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과학기술을 토대로, 최첨단으로 평가받는 ‘해수 담수 원자로(SMART System integrated Modular Advanced Reactor·원자로에서 생산한 전기로 해수를 담수로 만드는 원자로)’를 개발한다. 2020년쯤이면 이 나라에 있는 20% 이상의 자동차가 수소를 연료로 쓰는 ‘수소 생산 고온가스’가 개발될 것이다.
그리고 선진 10개국이 참여하는 제4세대 원자로(Gen Ⅳ·젠포) 개발 등에 참여함으로써 제2의 원자력 르네상스에 대비한다. 이러한 연구에 매진하는 사람들에게는 국민의 따뜻한 격려가 필요하다.
‘엽전은 안 돼’ 하는 우리 기술에 대한 불신과 냉대를 벗어던지자. 우리 원자력인들이 반핵단체의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원자력 기술 자립을 위해 매진해온 것은 우리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연료 | 연료비(원) | 양 |
핵연료 | 4440억 | |
유연탄* | 1조9746억 | 5313만t |
중유* | 7조1746억 | 2억1694만배럴 |
LNG* | 10조693억 | 2319만t |
*원자력발전을 각기 다른 에너지원으로 바꾸었을 때 연 비용 |
나는 1990년대 원전 수거물 사업인 굴업도 방폐장 사업의 책임자였다. 수년 전 위도 방폐장 부지선정위원장도 맡았던 사람이다.
돌이켜보면, 공청회 때마다 반핵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원자력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갖고 일방적인 의견을 마구 토로했다. 우리는 돌팔매질을 당했고 입에 담기도 어려운 욕설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원자력인으로 살아온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원자력과의 만
연도 | CO2 발생량 | |
1980 | 180억t | 세계 |
2003 | 252억t | 세계 |
2005* | 5억t | 한국 |
* 원자력이 1억3000만t의 CO2 감소 * 1955년 기준으로 온실가스를 감축할 경우 전력산업에서 2020년 2조9000만원, 2030년에 7조3000만원 피해 예상 |
2004년 원자력연구소의 우라늄 농축실험이 공개되었을 때 세계 유명 언론들은 정말 집요하게 추궁했다. 특히 일본 기자들이 무례한 질문을 퍼부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자극과 오기가 되어 원자력인으로 살아온 삶에 더욱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누구를 위한 반핵인가
원자력발전을 하기에 가장 나쁜 조건을 가진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은 강진이 자주 일어나는 나라이며, 제2차 세계대전 때에 2개의 핵폭탄을 맞아 원자력에 공포를 느끼는 국민이 대다수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현재 55기의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하고 있다. 처리시설과 농축시설을 모두 가지고 있는 원자력 강국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 국민은 그 이유를 꼭 알아야 할 것이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미국에 패한 원인은 첫째 전쟁에 필요한 석유가 없었고, 둘째 핵무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핏속에는 전쟁에 패한 것을 수치로 여기는 생각이 흐르고 있다. 그러한 한(恨)이 있기에 전후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원자력발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국민과 언론은 뜨거운 격려와 지원을 해주었다. 원자력 강국이 되는 것이 그들의 피 맺힌 한을 푸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고, 원자력 기술을 포기할 때 가장 기뻐할 나라가 어디겠는가? 대한민국에 살면서 반핵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누구를 위해서 반핵 활동을 하는지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그들은 북한이 핵무기 실험을 한 이때에, 평양에 가서 반핵을 외칠 용기는 없는가? 아니면 북한이 핵실험을 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 춤이라도 추었단 말인가? 그것도 아니면 북한이 무서워서 말 한마디도 못하는 비겁자들이란 말인가? 그렇게 지독하게 국민을 호도하고 큰소리로 반핵을 외친 자들이 북한의 핵실험 앞에서는 왜 벙어리가 되었는지 그 이유를 정녕 알지 못하겠다.
먼 훗날 이 땅의 후손들이 국제사회에서 대접받고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려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97% 이상의 에너지를 해외에 의존하는 우리나라는 과감하게 원자력 기술을 도입해 기술 자립을 이룸으로써 원자력발전 기술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값싸고 가장 질 좋은 전기를 공급함으로써 조국을 발전시키고 에너지 안보에 기여해야 한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한 원자력(atoms for the next generation)’을 준비해야 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에 감사
|
끝으로 가난이 상식으로 통하던 시절인 1959년 한국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고 당시로서는 거금을 지원해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TRIGA-Ⅱ, 1963년 완성)를 건설함으로써 원자력 기술 자립의 의지를 확고히 한 고 이승만 대통령, 1970년대 그 어려운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제2의 연구용 원자로(TRIGA-Ⅲ, 1973년 완성)를 건설하고 과감히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한 고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1980년대 핵연료 국산화, 한국표준형원자로 개발, 하나로 연구용 원자로 건설 등 대형 원자력사업에 대해 최대한 지원함으로써 한국을 원자력발전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게 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평생 원자력인으로 살아온 나는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LNG | 양수 | 유류 | 복합 | 수력 | 국내탄 | 석탄 | 원자력 |
162.9 | 117.1 | 91.5 | 86.3 | 71.3 | 54.2 | 43.7 | 39.4 |
미국 | 중국 | 일본 | 독일 | 러시아 | 한국 | 캐나다 | 프랑스 | 멕시코 |
20.5 | 6.68 | 5.29 | 2.63 | 2.57 | 2.28 | 2.20 | 1.98 | 1.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