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호

지금은 ‘사이보그 2.0’ 시대, “텔레파시로 말해봐∼”

  • 이한음 과학평론가 lmgx@naver.com

    입력2006-12-13 13: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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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선통신을 활용해 심장 상태를 점검, 위급할 때 병원에 신호를 보낼 수 있다면? 짝사랑하는 애처로운 심정을 말 없이도 연인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리모컨 찾느라 헤맬 필요 없이 생각만으로 TV를 켤 수 있다면? 뒷자리에 편안히 앉아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면? 당신은 사이보그가 되시겠습니까?
    지금은 ‘사이보그 2.0’ 시대, “텔레파시로 말해봐∼”

    인간과 기계가 결합하면서 인류는 새로운 진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생각의 속도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른다.

    사이보그, 로봇, 안드로이드의 출현이 미칠 영향과 그들이 함께하는 신기한 또는 암울한 미래 세계의 모습은 과학소설을 통해 오래전부터 다뤄져왔다. 그런 소설들은 청소년에게 꿈을 심어줌으로써 로봇공학, 인공지능 등 관련 분야에서 그 꿈을 실현시키려는 세대를 낳았다. 그런 한편으로 과학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의 특성상 과학소설도 그것에 푹 빠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갈라놓았고, 양쪽은 미래에 대한 인식과 기대 수준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그런 차이를 좁히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블록버스터 SF 영화들이다. ‘터미네이터’ ‘쥐라기 공원’ ‘매트릭스’ 같은 영화는 일반 대중의 기대 수준을 한껏 높여놓았다. 반면에 실제 관련 분야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은 오히려 신중한 목소리를 냈다. 아직 그런 미래가 오려면 멀었고, 연구를 진척시키기가 쉽지 않다고 찬물을 끼얹곤 했다.

    하지만 기대 수준과 찬반 논의를 떠나 사이보그, 로봇, 복제인간 등이 미래 사회의 구성원이 될 것이라는 데는 거의 견해가 일치한다(핵전쟁이나 환경재앙으로 문명이 퇴보한다는 예측을 제외한다면). 미국 카네기멜론 대학의 한스 모라벡은 아예 로봇이 인간의 후손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의 뇌에 담긴 정보를 다 컴퓨터로 내려받아 금속으로 된 몸에 넣어 본래의 의식을 고스란히 지닌 채 살아갈 것이라고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 기동대’는 그런 미래상을 인상적으로 보여줬다.

    그런 생각은 몸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지, 의식이란 무엇인지, 어디까지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하는 다양한 의문을 낳았다. 로봇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적어도 지금의 산업용이나 오락용 로봇은 그렇다. 지식의 양과 계산능력에서는 인간을 이미 초월하고 창의적인 문제해결 능력까지 보여줄 정도로 발전한 컴퓨터도 인간의 병렬처리 능력과 감정을 지니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직 인간 흉내를 낼 수 없다. 인공지능, 인공생명, 양자 컴퓨터, 신경망 회로 등 인간의 능력을 모사하거나 초월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컴퓨터 관련 분야의 연구가 계속 이뤄지고 있지만, SF 영화를 현실로 만들려면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반면에 인간을 기계화하는 분야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인간과 기계의 융합체를 흔히 사이보그라고 한다. 대개 뇌를 제외한 신체 부위를 기계로 보강하거나 대체한 형태를 가리킨다. 넓게 보면 이미 인류의 상당수는 사이보그다. 심장 박동기, 의수나 의족, 임플란트 치아 등 몸에 각종 기계 장치와 보철물을 달고 있는 사람들은 일종의 사이보그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후인간(posthuman)으로 보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우선 과학소설이나 SF 영화를 통해 완성된 형태로 접하는 후인간의 모습과 은연중에 일상생활에 배어드는 과학기술의 형태로 접하는 모습은 그 거리감이 다르다. 어느 날 한 벤처기업이 사고를 당해 만신창이가 된 사람을 수술해 뇌만 빼고 전신을 기계장치로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자. 그 로보캅 같은 존재는 첨단 과학기술의 결정체라고 발표될 것이고, 사람들은 대체로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즉 인간이 아닌 과학기술의 산물로 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자기 식구나 친한 친구가 몸이 서서히 썩어가는 불치병에 걸려 있고 급속히 발전하는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아 신체 부위를 조금씩 기계장치로 대체한다고 하면 어떨까. 오늘은 이가 다 빠져서 인공치아를 해 넣고, 한 달 뒤에는 발가락이 못쓰게 되어 인공 발가락을 달았다가 두 달 뒤 무릎까지 의족으로 바꾸고, 며칠 뒤 심장이 멈추는 바람에 서둘러 인공심장으로 대체하는 식으로 진행되다가 결국 뇌를 제외한 몸 전체를 바꾼다면?

    그렇게 서서히 진행되는 변화는 비록 완결된다 해도 당사자가 우리의 가족이나 친구, 더 나아가 온전한 인간이라는 인식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로보캅 같은 육중한 금속 덩어리가 아니라 인공피부 등을 통해 본래의 모습과 흡사하게 바뀌었다면 더욱 더 그럴 것이다. 어느 날 별안간 튀어나온 첨단 과학기술의 결정체와 달리, 우리 친구는 몸이 기계로 대체됐다는 데 좀 충격을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적으로 예전과 별다르지 않은 인간으로 여겨질 것이다.

    ‘1998년 사이보그 1.0’

    지금은 ‘사이보그 2.0’ 시대, “텔레파시로 말해봐∼”

    자신을 직접 사이보그 실험 대상으로 삼은 영국 리딩대 케빈 워릭 인공두뇌학 교수.

    주변의 사이보그를 후인간으로 보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런 인공 보철물을 단순히 신체 기능을 보조하거나 대체하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의수는 그저 손의 대체물이고, 인공심장은 그저 심장의 대체물일 뿐이다. 첨단 컴퓨터 장치가 달려서 격렬한 운동을 하거나 몹시 흥분할 때 몸의 상태에 맞추어 심장 수축을 조절하는 심장 박동기가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그저 보조장치로밖에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장치에 무선통신 기능이 있어서 인터넷을 통해 박동 조절 프로그램이 갱신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래도 그냥 보조장치로 여길 것 같다. 구형 장치를 신형 장치로 바꾸는 것과 다르지 않을 듯하다. 좀더 기능이 향상되어 인터넷으로 심장 상태를 상시 점검하면서 위급할 때 전기충격도 가하고 약물도 주입하며, 병원과 소방서에 자동으로 신호도 보낼 수 있다면? 그래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기능이 더욱 향상되어 심장 상태를 스스로 점검, 뇌에 신호를 보내 흥분을 가라앉히거나 활동을 자제하도록 호르몬을 조절할 수 있다면? 더 나아가 주변 사람들에게 그의 심장 상태를 실시간으로 전달함으로써 그와 언쟁을 벌이던 것을 그치게 할 수 있다면? 혹은 원한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그것을 악용해 그를 자극하거나 심장마비를 유도한다면? 이 정도 상황이 되면 어디까지를 보조장치로 봐야 할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심장 박동기라는 특정한 용도로 쓰이는 하나의 장치를 기준으로 말하고 있으므로, 그런 기능 향상의 의미와 영향을 파악하는 시각도 거기에 맞추어져 협소해진다.

    그렇다면 관점을 바꿔보자. 어떻게 달라질까. 인공 보철물이나 보조장치를 장착한다는 관점이 아니라 사이보그를 만든다는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본다면? 노골적으로 그 관점을 취한 사람이 바로 영국 리딩대 인공두뇌학 교수인 케빈 워릭이다. ‘나는 왜 사이보그가 되었나’라는 책을 쓴 그는 자신이 직접 사이보그가 되겠다는 실험 계획을 세웠다.

    ‘사이보그 1.0’이라는 첫 계획은 1998년 8월24일에 이뤄졌다. 그는 자신의 팔에 실리콘 칩 중계기를 이식했다. 칩은 그가 어디에 있음을 알리는 신호를 내보냈다. 신호는 그의 학과에 설치된 컴퓨터로 전송됐고, 컴퓨터는 그가 문 앞으로 가면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면 전등과 난방기를 켰다. 즉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컴퓨터를 통해 여러 장치를 작동할 수 있었다. 그것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사이보그 실험이었다.

    실험이 성공하자 그는 ‘사이보그 2.0’이라는 두 번째 계획에 착수했다. 2002년 3월14일, 그는 왼팔의 안쪽을 따라 쭉 뻗어 올라가는 큰 신경인 정중신경에 100개의 미세 전극이 꽂힌 장치를 이식했다. 이번 실험의 목적은 자신의 신경계와 컴퓨터 사이에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 실험도 성공적이었다. 그는 손을 움직여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인공 팔을 조종하고 휠체어를 움직일 수 있었다. 신경의 전기신호가 전극으로 전달되면 그 신호가 무선으로 컴퓨터로 전달되고, 컴퓨터가 그 신호에 따라 인공 팔을 움직인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아내인 이레나에게도 칩을 이식했다. 이레나가 손가락을 폈다가 오므리자 신경의 전기신호가 그녀에게 이식된 칩으로 전달됐고, 신호는 인터넷을 통해 그에게 이식된 칩으로 전달됐다. 그 칩은 수신한 신호에 따라 그의 신경계를 자극했다. 그는 아내의 손 움직임을 느꼈다. 인터넷을 통해 두 사람의 신경계가 접속된 것이다.

    사이보그가 돼야 생존한다?

    이 실험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칩을 이식하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령 신용카드번호, 주민등록번호, 혈액형, 진료 기록, 출입증 등 갖가지 신상 기록을 담은 아주 작은 칩을 팔목 같은 곳에 이식할 수 있다. 무선으로 정보를 갱신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런 칩은 지갑에 넣고 다니거나 휴대전화에 부착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신체기능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워릭의 칩은 신경계와 융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것은 미약한 전기신호만 지나다니는 신경계에 외부로부터 온 이질적인 신호를 주입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이 실험은 장애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인위적으로 감각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척추 신경이 끊어져 마비가 온 사람의 다리를 움직일 수도 있다.

    시각장애인의 신경을 자극함으로써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감지하게 할 수도 있다. 또 파킨슨병, 다발성경화증 같은 퇴행성 뇌 질환이나 간질, 정신분열증을 치료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거꾸로 신경계로 전달되는 신호를 약화시킴으로써 즉시 통증을 줄이는 진통제 기능을 할 수도 있다. 침술에도 혁신이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의학적으로 전망이 밝다.

    반대로 신경계의 신호를 외부에 내보낼 수도 있다. 그 신호를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처리하면 다양한 장치들을 쉽게 작동할 수 있다. 굳이 리모컨을 찾느라 헤맬 필요 없이 텔레비전을 볼 수 있고, 마우스와 키보드 없이도 인터넷을 검색할 수 있다. 뒷자리에 편안히 앉아서 자동차를 운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중에는 굳이 워릭처럼 칩을 이식하지 않고서 가능한 것도 있다. 가령 뇌파를 이용해 컴퓨터를 작동하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는 실험들이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워릭의 두 번째 실험이 지닌 진정한 의미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개인 간의 직접적인 의사소통 가능성을 열었다는 데 있다. 그것은 인간관계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내 신경계와 연결된 무선 송수신기로 내 감정과 생각 또는 행동이 일으키는 신경계의 전기 신호를 컴퓨터로 보내 인터넷을 통해 남에게 그대로 전달한다면, 그의 몸에 이식된 칩은 그 신호를 받아 그에게서 똑같은 감정이나 생각 또는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 따라서 멀리 떨어진 친구에게 굳이 전화를 걸어 말할 필요가 없이, 인터넷을 통해 내 생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다. 짝사랑하는 애처로운 심정을 전달할 수도 있고, 내가 아프다는 것을 식구들에게 신속히 알릴 수도 있다.

    그것을 ‘텔레파시’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한 사람의 사고, 말, 행동 따위가 멀리 있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현상이 바로 텔레파시 아닌가. 그러면 의사소통의 수단이 말이나 글이 아니라 생각 자체가 된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좀더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면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큰 변화가 일어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정치인들은 거리 유세나 텔레비전 연설을 할 필요 없이 집 안에 앉아 생각만으로 유권자를 설득할 것이고, 주식시장에서는 생각의 속도로 거래가 일어날 때 빚어지는 대혼란을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되는 타인의 온갖 생각들, 광고, 악감정, 기대, 설득, 강압, 세뇌 등에 대처하느라 뇌의 활동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고, 문학이나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술 활동도 구체적인 작품 없이 이루어질지 모른다. 문학에서는 제임스 조이스류의 ‘의식의 흐름’ 기법이나 초현실주의가 다시 부흥하지 않을까.

    이 기술은 인간의 능력을 강화하는 데에도 쓰일 수 있다. 슈퍼맨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 기억과 정보처리 능력은 증진시킬 수 있다. 뇌가 컴퓨터망에 연결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나 영화 ‘매트릭스’가 현실이 된다고나 할까. 굳이 가상 공간에 접속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꼬챙이를 뒷목에 꽂거나 머리에 장치를 쓸 필요도 없이 말이다. 또 우리가 이용할 수 없었던 새로운 감각들도 쓸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전기뱀장어의 전기, 박쥐의 초음파, 곤충의 적외선이나 자외선을 보는 능력을 활용할 수도 있다.

    케빈 워릭은 우리가 기술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 속에서 새로운 단계로 진화할 시기가 됐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는 점점 더 발전하고 있는 기계들에 맞서려면 인간도 사이보그로 새롭게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사이보그 기술은 인간에게 대안을 하나 더 제공하는 것과 같다. 그냥 순수한 인간으로 남든지, 사이보그가 되어 능력을 강화하든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컴퓨터를 거부한다고 해도 컴퓨터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듯이, 우리가 이미 사이보그가 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시대에 와 있을 수도 있다. 케빈 워릭의 사이보그는 그저 개량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기술적 한계, 그러나…

    워릭의 사이보그가 실용화하려면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기술적으로는 먼저 이식되는 장치에 대한 몸의 거부 반응을 해결해야 한다. 몸은 이물질에 대해 면역반응을 일으킨다. 그의 장치도 나중에 꺼냈을 때 생체조직으로 뒤덮여서 기능을 많이 상실한 상태였다. 또 신경은 아주 미세하고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뇌의 뉴런들이 기억이나 감정을 어떻게 만들고 떠올리는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따라서 손의 움직임 같은 단순한 신호를 전달하는 것과 달리 생각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을지 모른다. 이런 문제점은 나노기술이나 조직공학 분야에서 해결책이 나올지도 모른다.

    뇌가 이질적인 정보에 어떻게 대처할지도 문제이다. 뇌는 그런 정보를 받아들일까, 거부할까. 받아들인다면 어떤 식으로 처리할까. 갑자기 밀려드는 정보의 홍수에 신경이나 뇌가 손상을 입을 수도 있지 않을까.

    게다가 그런 손상을 의도적으로 일으키려는 사람도 나올 수 있다. 원한이 있거나 강도짓을 하려는 사람이 상대방의 신경계와 뇌를 공격할 수도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 전쟁이 벌어졌을 때 컴퓨터를 이용한 대규모 공격도 벌어질 수 있다.

    생각을 통해 의사소통을 한다고 하지만 거기에는 신호를 변환해 전달하고 처리하는 칩과 컴퓨터가 관여한다. 즉 실제로는 인간과 기계, 뇌와 컴퓨터의 의사소통이 개입한다. 인간과 기계의 의사소통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컴퓨터 바이러스가 뇌를 감염시켜 정신착란을 일으키거나 지적 기계가 인간의 뇌를 공격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뇌와 컴퓨터의 융합은 자유의지를 지닌 독립된 존재로서의 개인이라는 개념도 무너뜨릴 가능성이 있다. 컴퓨터와 융합됨으로써 강화된 뇌의 기억, 정보 처리, 자원 활용 능력은 교육에 쓰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학습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교사의 생각을 수월하게 전달하는 방안이 강구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교육은 특정한 사상, 종교를 주입하는 용도로 변질되기가 쉽고, 방화벽을 뚫는 컴퓨터 악성 코드 같은 것을 교육할 때 심어둠으로써 세뇌 효과를 영구히 지속시킬 수도 있다. 혹은 팬덤 현상(특정 인물이나 분야에 빠진 사람 혹은 문화)을 통해 특정한 인물이나 컴퓨터의 의지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면 인간 사회는 여왕 같은 존재를 정점으로 한 꿀벌이나 개미 사회처럼 진화할지 모른다.

    인간과 기계는 한몸으로

    사이보그 연구가 이제 막 시작된 단계이므로 이런 문제는 아직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 당장 깊이 살펴봐야 할 것도 있다. 바로 윤리 문제다. 사이보그, 인간과 기계의 융합은 인간의 본질과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키므로 당연히 윤리 문제를 야기한다. 케빈 워릭이 목표로 하는 것은 그저 보철물을 장착하는 수준의 사이보그가 아니라 인간 이후의 존재, 후인간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자 캐서린 헤일스는 물질보다는 정보를 중시하고, 의식을 부수적 현상으로 여기고, 몸 자체를 보철물이라고 보며, 인간과 지적 기계가 하나로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후인간의 관점이라고 말한다. 케빈 워릭의 사이보그는 그런 후인간을 직접 창조하려는 첫 시도에서 성공을 거둔 사례에 해당한다. 인간의 윤리체계는 인간의 몸과 거기에 담겨 있는 이성과 감정을 전제로 구축된 것이므로, 생물학적 몸과 컴퓨터와 기계가 융합되고 뇌의 정보가 컴퓨터로 옮겨질 수 있는 상황에는 대처하기가 어렵다. 윤리체계는 바뀌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므로 앞을 내다보고 미리 논의할 필요가 있다.

    케빈 워릭의 실험은 많은 후속 연구가 진행되도록 자극했다. 2000년 미국 듀크대의 미구엘 니코렐리스는 원숭이의 뇌에 미세한 전극들을 이식했다. 전극은 원숭이의 움직이려는 의도를 뉴런의 전기 신호를 통해 포착하여 컴퓨터로 보냈고, 컴퓨터는 그 신호에 따라 로봇팔을 움직여서 물건을 쥐는 움직임을 보였다. 니코렐리스는 최근 연구에서 원숭이가 실험을 할수록 뇌-기계 인터페이스에 점점 더 익숙해짐으로써, 나중에는 아예 팔을 움직이지 않은 채 기계를 작동할 정도가 됐다고 했다. 그것은 뇌가 기계와의 융합을 무리 없이 다룰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게다가 그는 뇌에 이식한 칩을 통해 환자의 몸에 이식한 로봇팔을 움직이는 실험에도 성공한 바 있다.

    지금은 ‘사이보그 2.0’ 시대, “텔레파시로 말해봐∼”
    이한음

    1966년 서울 출생

    서울대 식물학과 졸업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과학평론가, 전문번역가

    저서 및 역서 : ‘신이 되고 싶은 컴퓨터’ ‘인간 본성에 대하여’ ‘조상 이야기’ ‘복제양 돌리’ ‘미리 보는 2050년 신세계’ ‘굿바이 프로이트’ ‘해변의 과학자들’ 등


    아직 칩을 뇌에 이식하는 수술은 위험성이 있으므로 연구자들은 뇌파를 이용해 컴퓨터나 장치를 작동하는 쪽으로도 연구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레이너 괴벨은 뇌파 신호를 이용해 탁구 게임을 하는 장치를 개발했으며, 거꾸로 뇌파 게임을 이용해 마인드 컨트롤 장치를 개발하려는 사람도 있다. 특정한 뇌파를 유지할 때 게임이 잘되도록 함으로써 마음을 다스리고 집중력을 높이는 방법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뇌파는 뇌의 전반적인 활동의 산물이므로 신경 신호에 비하면 잡음이 많고 정확하지 못하다. 그리고 칩 이식 실험을 접하고 나니 왠지 뇌파 실험은 그다지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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