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이래 최근까지 한국의 대중외교를 대미외교와 연결해 심도 있게 분석한 글을 소개한다. 필자는 박정희 대통령 시기 미국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에 대한 한국의 전략적 접근이 시작됐으며, 이는 정통성 문제에 시달리던 전두환 정부 들어 무역분야로 제한됐다가 노태우 정부에 들어서면서 ‘집착’에 가까운 한중수교 추구로 전환됐다고 분석한다. 이후 1차 북핵위기와 함께 혼돈에 빠진 한중관계는 김대중 정부가 햇볕정책을 위해 전략적 행보를 구사하면서 상대적으로 긴밀해지는 듯 보이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노무현 정부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대미외교의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으로 연결됐다가 ‘동북공정’ 논쟁을 통해 다시 혼돈에 빠졌다는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미국과 중국의 ‘상대적 중요성’을 논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등장한 것이야말로 전략적 외교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 필자는 이제 중국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한중관계를 진지하게 돌아봐야 할 때라고 제안한다. |
근래 들어 부쩍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이 하나 있다. ‘과연 한국은 외교전략을 갖고 있는 나라인가?’가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의문이 꼭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만 적실성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제대로 충분히 풀리지 않고 있는 지금 한국의 대외관계에 대해 많은 이들이 안고 있는 질문이 아닌가 싶다. 한국 정부의 ‘바른 소리’가 왠지 몽니라는 덤까지 붙어 되돌아오는 듯한 미국과의 관계나, 우리가 원하는 바의 정반대로만 가는데도 어쩔 도리가 없어 보이는 일본과의 관계를 보면서 이러한 의문은 증폭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답답한 상황이 지난 3~4년 동안에 그저 뚝딱하고 만들어진 것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 시행된 여러 정책들이 그 촉매로 작동했다는 점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훨씬 이전부터 대(對)미국 및 대(對)일본 관계의 여러 난맥상이 드러나고 있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만일 이와 같은 문제의식이 상당 부분 적실하다면 우리에게는 시급히 점검해야 할 또 하나의 영역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한국과의 협력과 공조가 잘 이루어져온 것으로 평가받는 중국과의 관계이다. 과연 한국에 ‘대(對)중국 전략’은 존재했고 또 존재하고 있는가.
이미 세계의 ‘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한국에는 최대 교역국이자 최대 투자 대상국이며, 경제뿐 아니라 외교관계에서까지 그 영향력이 이미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이다. 중국이 한국에 중요해지면 해질수록 우리는 더욱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치밀한 전략적 사고를 키워야 하며 단순한 ‘경제주의’적 발상을 과감히 벗어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 30여 년의 역사에 녹아들어 있는 한중관계라는 상호인식의 틀 속에서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에 대한 전략적 사고(思考)의 단초를 보여준 박정희 대통령 시기로부터 30여 년의 기간을 자세히 되짚어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외전략의 결정요인
한 국가의 대외관계에 배태된 전략적 사고를 체계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일은 그 나라를 ‘합리적 국가(rational state)’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합리적 국가란, 복수(複數)의 해결책 중에서 정책결정자의 선호에 따른 우선순위에 기반해 최소의 비용으로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조합을 선택하는 능력을 가진 국가를 의미한다. 한국도 합리적 국가의 범주에 속한다는 전제를 수용한다면 이제 우리는 한국의 핵심이익 달성을 위해 소요되는 비용의 범위 및 그 선호의 우위를 규정해야 한다.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핵심이익도 크게 생존(안보), 발전(성장), 그리고 국가의 비전 모색(國格) 등 세 가지 측면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내부적 균형’(즉 자위력의 증대)을 통한 안보의 확보가 관건인 것으로 인식되는 정도에 비례하여 막대한 예산을 국방건설에 투입하는 것은 정당한 선택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경제 성장이 가장 중요한 목표로 인식될 경우 ‘외향적 균형’(즉 타국과의 동맹 결성)을 통해 안보를 확보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인 수단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후자의 경우 타국에 대한 ‘의존 비용’의 증가는 수용 가능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안보 유지와 경제 발전이라는 핵심목표가 상당한 수준으로 달성되면 국가이익을 구성하는 셋째 요소, 즉 국격과 자존이라는 명제가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한 국가가 국격의 제고라는 비전을 추구하는 순간 앞서 논의했던 두 가지 국가이익-특히 동맹의 유지 및 경제 발전-을 위한 정책수단에 주어지는 중요성은 변할 수밖에 없게 된다. 환언하자면 국격과 자존의 추구가 최우선 순위를 차지하게 될 때, 합리적 국가는 대체로 주권의 수호와 독립성의 제고에 보다 높은 가치를 두게 되며 그 결과로 안보 및 경제적 측면에서의 타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는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이는 곧 기존의 대외관계에 큰 변화를 초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선순위의 변화를 가져오는 변수들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한 국가의 전략적 사고를 획기적으로 전환시키는 자극과 충격은 대개 두 가지 요인들로부터 온다. 하나는 외부적 요인들로, 냉전의 종식이나 중국의 ‘부상(浮上)’ 같은 전 지구적 전략 환경의 변화와 일본의 ‘우경화’ 같은 지역적 요인을 모두 포함한다. 다른 하나는 내부적 요인으로, 예컨대 한 국가의 민주체제로의 전이, 정치구도의 변환 및 여론의 획기적 변화와 같은 내적인 변수를 지칭한다.
이상에서 논한 틀을 중심으로 박정희 시기부터 노무현 정부까지의 대(對)중국 전략을 긴 호흡으로 되돌아보자.
▼ 박정희의 대중외교 - 전략적 사고의 ‘파종(播種)’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중국과 한국 간의 전통적 양자관계는 한국(대한민국)과 대만(中華民國), 북한(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과 중국(中華人民共和國) 사이에 형성된 두 쌍의 현대적 양자관계로 재편된다. 곧 이어 발발한 6·25전쟁을 통해 중국은 북한과 소위 ‘혈맹’이라 지칭되는 특별한 관계를 지속했던 반면, 한국과 대만은 각각 미국을 중심축으로 하는 쌍무동맹 체제 안에서 긴밀하고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승만 대통령의 통치하에 있던 1950년대 내내 미중관계, 한중관계, 남북한 사이의 관계는 매우 적대적이었고, 이 때문에 공산치하의 ‘대륙 중국(mainland China)’에 대해 한국이 독자적으로 전략적 사고를 개발할 여지는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남침(南侵)이라는 실재하는 위협에 대한 인식과 전세계를 장악한 냉전체제하에서의 첨예한 이념대립은 한국으로 하여금 미국과의 동맹관계에 대해 재고할 수 있는 여지 자체를 원천봉쇄했던 것이다. 따라서 안보유지와 경제발전이라는 국가이익을 위해 미국에 대한 의존이라는 대가가 당연하게 여겨졌다.
4·19 이후 박정희 정부가 집권한 1960년대에도 한국과 공산 중국 사이에는 내내 적대적인 관계가 지속됐다. 간혹 판문점에서 열린 정전위원회를 통해 한중 간의 대면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1961년 9월, 두 명의 중국 공군조종사가 AN-2 정찰기를 몰고 한국으로 망명해 왔을 때에도 한국 정부는 대륙 정부와 일절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대신 당시 한국이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했던 대만에 조종사뿐 아니라 항공기까지 넘겨주었다.
반면에 중국 또한 자국의 영해(領海)를 침범했다는 이유로 종종 한국 어선과 어부들을 최장 12년까지 억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는 이들의 송환을 위해 중국과 협상할 수 있는 어떠한 외교적 경로나 수단을 갖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간혹 중국과 수교하고 있던 유럽 국가들의 도움을 모색하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초에 들어 국제전략적 환경에 획기적인 변화가 발생하는데, 이는 중국의 유엔 가입과 대미, 대일관계 정상화에서 잘 드러난다. 동아시아에서 점증해가는 중국의 잠재적 영향력을 인식한 박정희 정부는 공산 중국과의 관계개선이 한반도에서의 긴장 완화와 안정의 유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한국의 전략적 사고에서 처음으로 중국이 직접적인 변수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비슷한 시기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미 7사단을 한국에서 철수함에 따라 주한미군 전력의 상당한 감축이 이루어졌던 것도 박정희로 하여금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대해 유연한 사고를 갖도록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공개된 ‘대한민국외교문서’에 따르면 1972년 당시 한국 정부의 내부적 원칙은 중국이 먼저 적대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 한 한국 또한 중국에 대하여 적의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 중국은 한국이 가장 중시하던 경제 발전이라는 지상목표에도 큰 도전을 던지고 있었다. 즉 당시 한국 및 대만과 긴밀한 통상관계를 맺고 있던 일본과 미국 기업에 대해 중국 정부가 차별정책을 취했고, 이러한 추세가 장기적으로 한국 경제에 끼칠 악영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1972년 한국이 대외통상법 제2조를 수정해 북한과 쿠바를 제외한 모든 공산국가와의 교역을 과감히 허용한 것이었다.
건국 60주년이 다 되어가면서 한국이 전략적 성찰의 십자로에 들어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세계화와 민주화가 던지는 불확실성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물과 정파에 관계없이 한국을 이끌어야 할 지도부는 다양한 집단과 사회계층의 이익을 모두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최적의 전략을 선택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것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년 동안 집중해온 한미관계에 대한 돌아보기만큼이나 한중관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한미관계가 잘 된다고 믿고 안이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그 균열의 충격과 상처는 크게 마련이기에, 겉보기에는 잘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중관계에 대한 돌아보기를 지금 시작해야 한다. 중국의 ‘미국화’-패권적 대국으로서 주변 소국에 대해 일방주의를 시행하는 추세-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키 어렵다면 한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만큼 지금부터라도 전략적인 대비를 충실히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이 하나 있다. 과연 중국에 대한 전략적 사고는 독립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이에 대한 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우선 대외관계 전체를 아우르는 전략적 틀이 만들어져야 하고, 안보와 발전, 국격의 세 가지 요소를 어떤 순위와 비율로 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국가 리더십 차원의 정치적 합의와 결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안보와 발전이 여전히 국익의 두 기둥이라면 미국과 중국은 우리에게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연계’의 대상이다. 즉 중국과의 포괄적인 협력으로 발전의 이익을 극대화함과 동시에 미국과의 긴장된 관계로부터 파생된 안보의 비용을 최소화하고 그 긴장을 이완시키고자 하는 이중전략이 채택돼야 한다. 국격은 분명히 중요하지만 ‘말만 앞서기보다는 궁극적으로 행동과 결과로 보여주는’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중한 일관성’
이와 같은 상황은 상당부분 양다리 걸치기(hedging)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중국의 확실한 ‘부상’에 따라 동아시아 전반에서 나타나는 안보와 경제 논리의 양분화로 인해 이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보인다. 세계 대국들 사이에 소재한 중진국으로서의 한국은 미국과 중국 양자 모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선택이 없으며, 이를 위해서는 ‘신중한 일관성(prudent consistency)’이 가장 중시되어야 한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모든 것을 일거에 부정하고 바꿔버리는 모습보다는 신중한 정책검토의 기간을 거쳐 ‘관중’으로서의 주변 국가들을 의식하면서 중장기적으로 한국의 대외관계가 밖에는 어떻게 비춰지고 인식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략적 사고의 창출에는 지도자와 그를 보좌하는 전문가그룹의 생각이 관건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뛰어난 인재를 많이 가진 한국에서 국내 정치적 고려와 모든 현안의 정치화 가능성만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유용한 중장기 전략적 사고의 창출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사족 같지만 자기 임기, 자신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넘어서는 비판적 사고와 담론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외교 문제를 놓고 고함치고 싸우는 여야 의원들의 하나 같은 모습에서 전략적 사고의 단초는 찾을 수 없다. 국격은 아주 조그만 것에서부터 찾는 노력이 시작돼야 한다.
그렇다면 일단 전략적 사고가 만들어지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쉽게 모든 책임을 한 사람, 대통령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전략적 사고의 창출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미시적 관리’이며, 이를 위해서는 외교관련 부서의 장에서부터 일선에서 한국을 위해 뛰는 말단 외교관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소지한 능력과 국익수호에 대한 집착이 또한 중요하다.
흔히들 우리 외교부의 인적규모는 덴마크보다도 작고 미국의 10분의 1 수준도 안 된다고 얘기한다. 이는 분명히 개선될 필요가 있는 사실임에 틀림없지만 한번 뒤집어 생각해보자. 과연 지금보다 인적규모를 늘리고 예산을 늘려 편성하면 한국 외교의 미시적 관리가 반드시 나아질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정말 심각한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학계와 언론계는 전략적 사고의 부재 및 결핍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정책적 연구에 시간을 할애하는 학자들의 상당수는 사실 대부분 끝없는 단기 프로젝트에 얽매여 ‘숲을 보는’ 전략적 사고에 대한 연구를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의 가시성(visibility)은 오히려 더 높은 경우가 많아 학계에 대한 일반화된 평가의 주된 대상이 되곤 한다. 못지않게 심각한 것은 언론인 것 같은데, 불필요하게 미국과 중국을 이분법적 논의의 대상으로 만든다든지 보수나 진보의 실질적인 정책차이를 과장하는 등의 소모적 행태는 재고되고 또 조정되어야만 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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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돌이킬 수 없지만 미래는 창조할 수 있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그저 ‘작은 나라’로 치부하는 타성에서부터 우선 벗어나야 한다.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허장성세(虛張聲勢)도 피해야 하지만 지나친 자기비하도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조적 능력에서는 열세일지라도 행태적 힘의 창출과 발휘에서 더 나은 면을 보여준 사례는 세계외교사에서 적잖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전향적인 자세의 견지가 전제되지 않고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에 대비한 상황별(양자적 및 다자적 상황) 선택과 대응을 준비하기는커녕 기존의 국익조차도 제대로 챙기기 어려운 21세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 바로 이때 전략적 사고의 필요성이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치보다 국가이익
1973년 6월23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이른바 ‘6·23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에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 김용식 외무장관 등 전 국무위원이 배석했다.
당시 한국 정치체제의 성격을 감안할 때 이렇듯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은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의 직접적인 결재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전략적 사고의 핵심은 그동안 견지해왔던 ‘할슈타인 원칙(Hallstein Principles)’을 과감히 포기하고 중국과 소련을 포함한 모든 국가에 문호를 개방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6·23선언에 요약되어 있다.
1973년 3월, 한국 정부는 황해의 대륙붕 경계 확정을 위한 협상에 중국이 참여할 것을 제안하면서 공산 중국을 처음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라 지칭했다. 또 1974년 박 대통령은 대(對)중국 외교를 위한 전초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홍콩 상완(上環)의 고층건물을 구매했고, 이 건물을 한국센터(韓國中心)로 명명해 총영사관 및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사무소 등을 입주케 했다.
1975년 베트남의 적화(赤化)는 한반도에 구축된 미국의 방어망에 대한 한국 정부의 신뢰 저하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워싱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플루토늄 생산을 위해 핵 재처리시설을 건설하는 비밀 프로그램을 진행하지만, 그 노력은 결국 미국에 의해 무산된다. 또한 이 시기 카터 대통령은 1980~81년 안에 한국에 주둔하는 미 지상군병력 전원을 철수할 것이라는 폭탄선언을 한다. 이 시기 한미 간 갈등의 증폭은 박정희로 하여금 중국에 대한 유화적 접근이라는 ‘외교적 보완재’를 고려케 한 것으로 보인다.
1978년 11월1일 당시 대통령 외교안보특보였던 김경원은 홍콩 프레스클럽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정부가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희망하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밝혔다. 같은 해 11월17일 박동진 외무장관도 한국 정부가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은 공산권 국가와의 어떠한 형태의 상업활동도 금지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978년 12월18일 중국의 대외무역부장 리창(李强)은 홍콩에서의 인터뷰를 통해 중국이 한국 및 이스라엘과의 교역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정희 정부 시기 전략적 사고의 핵심에는 내부적 균형보다는 미국과의 동맹관계 강화를 통한 외향적 균형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주된 배경에는 경제 발전에 대한 깊은 염원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측의 인식 및 전략 변화로 인해 이에 대한 불안정성이 높아지자 한국 정부는 중국에 대한 전략의 조정을 감행한 것이다. 당시의 전략적 사고에는 국격이나 자존 같은 가치의 추구보다는 안보의 확보와 민족의 생존이라는 국가이익에 대한 박정희 정부의 치열한 문제의식이 주된 작용을 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비록 중국에 대한 박 대통령 개인의 전략적 사고와 그 구체적인 내용은 상당부분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중국을 향해 보였던 박정희 정부의 제스처 상당부분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난항을 겪고 있던 정권의 마지막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 전두환의 역할 - 적극적 무역외교 시행
여러 정황을 감안할 때 전두환 대통령은 소련뿐 아니라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적잖은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전두환은 특히 중국과의 경제관계를 긴밀하게 발전시키는 데 지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인사에 따르면 전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한 대기업 임원들로부터 중국에 관한 정황보고를 자주 받았다고 한다. 1981년 워싱턴 국빈방문 기간 중 행한 연설에서 전두환은 “중국이 미국의 친구라면 나 또한 그 논리에 부연하여 친구의 친구는 우리에게 덜 위협적이라고 볼 수 있다”고 언급했다. 전두환의 실용적인 사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1983년 5월 춘천의 한 공군기지에 불시착한 중국민항 여객기의 납치범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다.
당시 양국 간의 교류는 경제적 연계 이상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으나 다시 두 건의 비극적 사건-1983년 9월 발생한 KAL기 격추사건과 1984년 10월 일어난 버마 랑군(현 양곤)에서의 폭탄테러 사건-은 역내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던 한국 정부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다. 반면 스포츠 외교는 한국과 중국 사이의 관계 개선에 결정적인 촉매제로 작용한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등을 통해 양국간에는 보다 친밀한 관계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한 자료에 따르면 1985년 8월 전두환은 일본 공명당(公明黨)의 당수였던 다케유리(竹由利)를 중개인으로 덩샤오핑(鄧小平)에게 양국간 교역 증진을 제안하는 서신을 전달했다고 한다. 또한 1985년에는 중국과 소련을 주대상으로 삼은 소위 ‘북방정책추진본부’가 설립되기도 했다. 이러한 단편적인 조치들이 단지 경제발전을 위한 중국과의 통상관계 확대만을 추구한 것인지 아니면 한국의 전반적인 안보이익을 고려한 체계적인 전략적 사고에 기반했던 것인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 시기 최소한 경제관계의 확대는 괄목할 만했으며 이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겠다.
전두환 정부가 비록 능숙하게 민항기 사건과 어뢰정 사건 등을 활용해 중국과의 경제교류 확대에 나서기는 했으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이에는 분명히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전두환 대통령 역시 ‘내부적 균형’보다는 미국과의 전통적인 동맹관계의 강화를 통한 ‘외향적 균형’에 치중했으며 그 배경에는 경제 발전의 지속이라는 명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의 집권이 군부 쿠데타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유혈진압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국으로부터의 정권 승인과 정치적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음을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박정희가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 연구의 산실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초토화한 다음 레이건 대통령 취임 후 첫 국빈 방문을 따냈던 전두환은, 다른 무엇보다도 대미관계를 가장 중시했다. 따라서 전두환 정부에게 있어 중국에 대한 전략적 사고는 기껏해야 탐색을 위주로 한 초보적인 단계일 수밖에 없었고, 실질적으로도 해외시장의 다변화를 추구했던 경제통상적 성격을 주로 띠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 노태우 시기 - ‘북방정책’의 명과 암
1988년 2월 전두환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노태우는 아마도 한국과 중국 사이의 관계 회복과 국교 정상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본인의 임기 안에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달성하는 것을 핵심목표로 상정했고 또 실행했다는 점에서 노태우는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만델라와 상당부분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노태우는 직선제 투표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에 전임자인 전두환처럼 미국으로부터 집권의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크게 구속되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의 미국 편향 외교를 일정부분 조정하고 한국 외교의 외연을 전방위적으로 넓힐 것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취임연설에서 노태우는 자신의 비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새로운 시작으로서 희망의 시대가 이제 열립니다. 한때 동아시아의 주변에 머물렀던 한국이 이제 국제사회에서 그 중심적인 지위를 얻게 될 것입니다…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교류가 없었던 대륙국가들과도 국제협력의 통로를 넓혀야 합니다…북방을 향한 우리의 외교는 남북통일로 가는 길 또한 함께 열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1992년 9월 중국을 방문해 양상쿤 국가주석과 인민대회당에서 정상회담하는 노태우 대통령.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사회주의권 전체에 대한 관계 개선을 목표로 삼았지만, 그 가운데서 중국과의 수교에 대한 노태우의 의지는 거의 ‘집착’에 가까운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7년 말의 대통령 선거기간 내내 노태우는 이미 중공 대신 중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며, 당선 직후인 1987년 12월24일에는 자신의 임기 내에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이루고자 하는 희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노태우의 측근이던 박철언은 회고록에서 대통령 당선 직후 노태우는 덩샤오핑과의 회담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고 적고 있으며, 다른 한 보도에 의하면 노태우가 전 외무부 장관 박동진을 비밀리에 홍콩으로 보내 자신의 취임식 이전에 중국을 방문할 수 있는지 여부를 중국측에 타진하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태우 정부가 추진했던 북방정책도 초기에는 전두환 정부 시기와 그리 다르지 않게 여전히 경제 중심적인 성격이 두드러졌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산둥반도와 랴오둥반도의 대외개방 결정이 이른바 ‘황해 계획’이라 불린 한국의 서해안지역 대규모 개발계획 발표와 맞물리면서 한중관계는 개선의 상승 분위기를 타게 된다. 1988년 초 중국의 부총리 티엔지윈(田紀云)이 당시 중국 고위관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과의 ‘직접’ 교역을 발전시킬 것이라고 언급했으며, “(한국을 향한) 중국의 문은 닫혀는 있으나 잠겨 있지는 않다(關門不鎖上)”는 중국 외교부장 황화(黃華)의 1982년 언급이 뒤늦게 공개되기도 했다.
1988년 여름 서울에서 열린 올림픽은 한국과 중국 간의 경제관계가 더욱 확대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촉매제로 작용했으며, 이를 통해 양국간의 교역액도 1987년 16억7900만달러에서 1988년 30억8700만달러로 무려 배 가까이 증가하게 된다. 교류의 지속적인 확대에 발맞춰 1989년 1월 중국국제무역촉진위원회(CCPIT)는 대한무역진흥공사에 무역사무소의 상호설립에 대해 협의할 것을 제안하고, 이를 통해 외교가에서는 한중 간의 관계 정상화가 임박했다는 추측들이 무성해지게 된다.
서방과는 다른 행보
노태우 정부가 한국의 전통적인 외교노선과는 일정부분 궤를 달리하는 대안적 사고를 추구했음을 보여주는 두 가지 근거가 있다. 하나는 당시 한국과 중국 사이의 관계 개선이 진행되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점에 대해 미국 정부가 수 차례나 한국에 우려를 표명해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88년 12월 주미대사이던 박동진은 공관 전문을 통해 북방정책에 대한 미국의 시각을 한국의 ‘독주’-즉 미국과의 충분한 협의를 결여한 움직임-로 묘사하고 있다.
노태우 정부의 대안적 사고에 대한 또 다른 근거로 들 수 있는 것은 천안문사태 이후 미국과 유럽, 일본이 중국에 대해 인권탄압을 이유로 매우 강경한 제재조치를 취했지만 한국의 반응은 이와 사뭇 달랐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는 유혈진압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을 뿐 아니라 중국과의 경제교류 확대를 보다 적극적으로 추구했기 때문이다. 천안문사태 이후 한국 정부는 1989년의 대중교역 목표를 당초의 4억3000만달러에서 2억5000만달러로 대폭 하향조정했으나 실제 교역량은 조정된 목표를 28%나 초과달성했다. 1989년 한 해에만 2500개 이상의 교역 및 투자 사절단이 중국에 파견됐는데 이는 전년보다 무려 70%나 증가한 수치이며, 미국과 일본의 방중 경제사절단이 50% 이상 감소했던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한국은 또 천안문사태 이후 중국 방문자의 수가 늘어난 몇 안 되는 국가 중의 하나였다. 일본과 미국의 경우에는 천안문사태 이후 중국 방문자가 각각 40%와 29%나 감소했다. 심지어 1989년 6월과 8월에는 한중 간의 페리 노선과 전세기 운항노선이 최초로 개설되기도 했다. 이렇듯 미국 및 서방과는 다른 행보를 보임과 동시에 적극적인 관계 정상화를 추구했던 배경에는 대통령이었던 노태우의 전략적 사고와 결단이 필수불가결했음에 틀림없다.
노태우 정부가 가진 대(對)중국 전략적 사고의 실질적인 집행은 불행히도 노태우 자신이 대통령 재임 기간에 한중 수교를 완수하고자 했던 ‘집착’에 의해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한중 간의 수교는 헝가리나 소련의 경우와는 달리 경제지원(차관) 제공의 조건이 따라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인 관점일 뿐이고, 실제로는 1990년 조속한 관계정상화의 대가로 노태우의 한 측근이 27억달러의 경제지원을 중국에 제안했지만 당시 대통령경제수석이던 김종인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었다.
‘집착’의 한계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대통령 자신이 임기 내에 관계 정상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당위성과 한국의 국가원수로서는 최초로 중국을 방문코자 하는 의지를 분명히 함으로써 교섭현장의 최전선에서 뛰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협상 운용의 여지를 대부분 박탈해버렸다는 점이다. 또한 노태우 대통령이 관계 정상화 일정에 대해 ‘조급’해하고 있으며 수교의 조기 달성을 위해 협상의 상당부분을 양보할 용의가 있음을 당시 중국측에서는 이미 날카롭게 간파하고 있었다. 이는 이미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나온 전 외교부장 치엔치천(錢其琛)의 회고록 ‘외교십기(外交十記)’와 전 주한 중국대사 장팅옌(張庭延)의 회고록 ‘출사한국(出使韓國)’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 양국간 수교협상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협상의 주요 의제를 설정하고 그 속도의 완급을 조절했던 것은 대부분 중국측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측이 세 차례의 예비회담과 한 차례의 본회담에서 중요한 발의를 했거나 가시적이고 실질적인 이익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사실 찾아보기 힘들다. 아마도 중국과의 수교 후 대만과의 관계를 어느 수준으로 유지할 것인가의 명칭 문제-즉 ‘한국-대만 문화협회’ 같은 어설픈 이름이 아니라 대표부라는 명칭의 사용- 정도만이 우리가 얻어낸 가시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측 협상단에게 가장 중요했던 목표는 현직 대통령의 임기 내에 한중 정상회담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조속한 수교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중국측 협상단이 이 사실을 너무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외무부는 내부적으로 1992년을 ‘북방정책 완료’의 해라고 명명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수교 사실이 공표되기도 전인 1992년 7월에 노태우와 장쩌민(江澤民)의 정상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러한 도를 넘은 제의는 중국측에 의해 완곡히 거절됐다.
요약하면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기존의 제한된 대외관계에서 벗어나 보다 독자적이며 전방위적인 외교노선을 추구함으로써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고자 했던 전략적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었음은 틀림없다. 실제로도 노태우 정부가 제시했던 북방정책의 핵심목표 가운데 하나가 ‘지금까지 미국과 일본 같은 국가에만 국한되었던 한국 외교정책의 지평을 확대하는 것’으로 명기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북방정책의 수행을 통해 당시 미국과의 관계가 크게 어그러지는 상황이 발생한 것도 아니었기에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하겠다. 다만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의 세부 과정에서 노정된 미시적 관리(micro-management)의 문제점이 한국 외교에 입힌 중장기적인 손실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적지 않은 연구와 반성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 김영삼의 5년 - 북핵의 그림자
1992년 외교관계 정상화가 이뤄진 후, 김영삼 정부 시기(1993~98년) 동안 한중 간의 경제관계는 급속도로 성장한다. 대부분이 직접무역으로 이뤄진 양국 간의 교역액은 1992년 63억8000만달러에서 1997년 237억달러로 증가했다. 교역과 함께 대(對)중국 투자 또한 한중 경제관계의 또 다른 대들보가 되었는데, 특히 1992년 조인된 한중 투자보장협정의 영향으로 수교 후 그 규모가 급증하는 추세를 보였다. 1993년에 이미 한국은 중국의 10대 투자국이 되었으며 1995년에 이르면 중국은 한국 해외투자의 최대 유입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1996년 통계에 따르면 그해 한국의 해외투자 총액의 46%가 중국으로 유입됐을 정도였다.
앞서도 잠깐 논했듯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한국의 적극적인 노력은 상당부분 미국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국으로 하여금 보다 자율적인 외교관계 수립을 위한 공간을 추구하도록 만들었을까. 김영삼 정부는 이른바 ‘문민정부’라는 슬로건 아래 1980년대 후반 이후 성공적인 민주체제로의 이행과 경제적 성장을 통해 한국이 새로이 갖게 된 능력에 상응하는 지위와 자긍심을 추구하게 된다. 한 미국인 학자는 당시의 이러한 심리상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안보라는 것이 곧 미국과의 관계를 영속시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는 새로운 인식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미국과의 관계는 여전히 핵심적이지만 한국이 최근 새로 찾아낸 외교적 지렛대들(중국과 소련 등)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1994년 3월 중국을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는 황병태 당시 주중대사(오른쪽 세 번째).
이즈음 발생했던 한 사건은 한국 정부 내에 아주 초보적이지만 그 미래적 함의가 적지 않은 전략적 사고의 단초가 있었음을 암시해준다. 1994년 3월29일 저녁 김영삼 대통령의 중국 국빈방문에 관한 언론 브리핑에서 주중대사 황병태는 “북핵 문제에 관한 한중 간의 논의는 과거 한미 간에 협의를 끝낸 뒤 중국에 이를 통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한국이 중국과도 처음부터 논의하고 같이 행동해 나가기로 했다”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이 발언을 접한 외교안보수석의 강력한 요구를 받아들여 채 두 시간도 지나기 전에 황 대사는 다시 기자회견을 열어 이전의 발언을 취소하고 그것은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지체 없이 국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고 얼마간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비록 대부분의 언론은 이 사건을 ‘외교적 실수’ 또는 황 대사 개인의 ‘튀는 모습’으로 특징지었지만, 일부 정책 분석가들은 황 대사의 ‘비전형적인’ 관점에 암묵적 동의를 보내기도 했으며 후에 일부 언론은 이를 ‘의미 있는 사건’으로 규정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98년 9월8일자). 북한 핵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중국이 갖는 핵심적 역할을 고려할 때 이 사건은 단순히 중국이 보다 많은 영향력을 발휘해주길 바라는 한국의 기대를 반영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돌이켜볼 때 이는 한국이 향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일정한 균형을 추구할 수도 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전조였던 것이다.
양국간의 경제관계가 성숙해감과 동시에 이루어진 냉전시대의 종언과 관계 정상화는, 이제껏 미답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전략적 제휴 및 협력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된다. 북핵 문제에 대한 한중 간의 공조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으나 1차 핵위기 기간 내내 중국이 ‘중립적’ 위치를 견지함으로써 그 기대는 충족되지 못했다. 반면 일본과 관련해 미국과 한국, 중국 사이에는 상당한 인식차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1995년과 1997년에 세종연구소에서 시행한 의식조사에 따르면 일본은 한국의 안보이익에 가장 위협이 되는 국가로 인식됐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가장 독특한 존재이자 미국의 파트너로, 한국보다 훨씬 더 우호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중국과 한국은-이 문제에 한해서만은 북한 역시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일본의 ‘우경화’가 지닌 잠재적 위협에 대해 공유된 인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상황에서 반(反)일본 ‘연합전선’이 실제로 형성될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미국과의 안보관계에서 적잖은 국방비 부담을 추가적으로 지더라도 추종 관계가 아닌 협력자로서의 지위를 열망하고 있던 한국으로서는 한중 간의 협력관계에 전략 및 안보 차원의 협력을 더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평가할 때 김영삼 정부의 전략적 사고는 쉽게 하나의 정형으로 재구성하기 어려운 난점을 지녔다. 이는 문민정부 자체가 제대로 정리된 체계적인 전략적 사고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일부 기인하겠으나, 실제로 있었다 하더라도 북핵 문제에 완전히 매몰된 상태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제대로 실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김영삼 정부의 대(對)중국 전략적 사고는 그 실체를 파악하기 매우 어려운 것으로 평가된다.
▼ 김대중 정부 - ‘햇볕정책’과 평화전략
김대중 정부(1998~2003년)는 임기를 채 시작도 하기 전에 김영삼 정부로부터 한국이 경험해본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경제위기를 이어받았다. 국제무역 및 금융체제에 깊숙이 연계되어 있던 한국은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하에서 지속적이고도 안정된 회복을 위해 미국의 도움에 상당부분 의지해야만 했다. 미국 또한 한국과의 군사동맹 및 경제적 관계의 중요성 때문에 한국이 심각한 국가위기로부터 신속히 회복할 수 있도록 적지 않은 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총체적 위기상황을 벗어나 경제안정을 회복할 때까지 김대중 정부가 미국 중심의 대외관계로부터 멀어지거나 벗어나고자 하는 내용의 대안적 전략을 추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 또한 한국에 이렇다 할 구체적인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한국의 대안적 사고를 유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000년 12월 방한해 조성태 국방장관(왼쪽)과 회담을 가진 츠하오톈 중국 국방부장이 전쟁기념관에서 사열하고 있다.
독일의 통일이 소련의 암묵적 용허와 함께 유럽 인접국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인 설득에 의해 가능했던 것처럼 한반도의 통일 또한 주변국의 합의 도출이 핵심전제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변화하는 전략상황은 한국에게는-특히 김대중 정부에게는-큰 우려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미국은 중국이 한반도의 현상유지를 원한다고 믿고 있는 반면 중국은 미국이 한반도의 통일을 가장 원치 않는 국가라고 인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한국에게는 큰 어려움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조적으로 군사동맹의 틀 속에서 미국과 긴밀한 연계를 유지하던 한국으로서는, 중국의 부상은 곧 위협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경우 통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 최악의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미국과의 우호적인 관계와 동맹의 지속을 전제로 한 상황에서 북한에 대해서는 ‘햇볕정책’을, 중국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관여정책(engagement policy)’을 추구했다. ‘햇볕정책’이란 곧 상응하는 대가나 변화 없이도 북한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남북한 간의 긴장완화와 신뢰구축을 도모하는 정책인데, 이를 통해 김대중 정부는 한반도 문제의 해결에 있어 주도적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2000년 3월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성명도 미국이나 일본 등과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나온 결과는 아니었으며 통일에 대한 김대중 정부의 전략적 사고 또한 독자적인 고민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국내 인식의 변화
보다 중요한 것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해 미국보다는 중국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시했다는 점이다. 2000년 6월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또한 한반도에서의 긴장완화를 위한 한국의 능동적인 역할 수행이 워싱턴보다는 베이징의 정책노선과 궤를 더 가까이 한다는 점을 드러냈다. 예컨대 정상회담의 공동성명에서는 그동안 미국이 견지해왔던 ‘평화적 통일’ 원칙보다 한발 더 나아가 중국이 고수해왔던 ‘자주적이며 평화적 통일(自主和平統一)’의 입장을 담아냈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한국 정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한미 관계의 경색이 생길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또 김대중 정부는 대(對)미국 여론이 악화됐던 것과는 달리 중국에 대해서는 긍정적 인식이 형성되고 있는 한국의 국내 현실을 일정부분 활용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문화적 유산의 공유, 지리적 근접성, 급속히 확대되는 양자간의 협력관계로 인해 한국에서의 중국에 대한 인식은 매우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었으며 점진적으로나마 중국은 한미관계에 있어 중요한 매개변수로 변하고 있었다(‘신동아’ 2000년 10월호에 실린 필자의 논문 참조). 2000년에 실시된 다국가조사에 의하면 한국측 응답자들은 북한(54%)과 일본(21%)을 가장 위협적인 두 국가로 인식한 반면 미국인들은 중국(38%)과 러시아(21%)를 선택했다. 이 시기 미국과 한국의 위협인식이 이미 서로 수렴하기보다는 멀어지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전임자들과는 상당히 구별되는 모종의 전략적 사고의 틀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핵심에 미국에 대한 견제-미국으로부터의 자율성 확보-의 수단으로서 또는 한미동맹의 전략적 대안(전략적 대체재)으로서 중국에 초점을 맞췄던 것으로 볼 만한 근거는 찾기 어렵다. 이와 관련해 한중 간의 적극적인 군사교류의 확대-국방장관의 상호 방문 및 해군함의 상호 기항 등-가 이뤄진 것이 1990년대 후반이라는 점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렇지만 한국의 이러한 노력 이면에 한미동맹이 대(對)중국 봉쇄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막기 위한 한국정부의 전략적 사고가 자리잡고 있었는지를 뒷받침해줄 근거는 그리 충분치 않다.
김대중 대통령의 전략적 사고는 오히려 한반도에서의 ‘민족공조’와 통일환경의 조성이라는 측면에 더 큰 중점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한국은 핵의 비확산, 미사일통제, 대량살상무기의 봉쇄 등과 같이 미국이 최우선시했던 현안들보다는 한반도 역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정상회담, 이산가족 상봉, 긴장완화 및 신뢰구축, 대북지원과 경제협력 등에 훨씬 큰 관심을 보였으며, 그 과정에서 미국보다는 중국의 처지에 조금은 더 가깝게 선 것으로 비쳐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노무현 정부 - 평화번영정책과 ‘동북아 전략’
2006년 10월13일 중국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오른쪽)과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노무현 행정부의 시작과 함께 한국의 엘리트 계층의 구성에 적잖은 변화가 밀어닥치게 된다. 가장 변화가 두드러졌던 곳이 2004년 총선을 통해 구성된 국회였는데,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의 3분의 2 이상(68%)과 한나라당 소속의원의 절반 가까이(43%)가 젊은 초선(初選)으로 채워졌다. 2004년 4월 138명의 초선의원을 대상으로 한 ‘동아일보’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들 중 55%가 미국보다는 중국을 더 중요한 외교정책의 대상으로 선택했다. 2002년 미국의 한 정책연구소가 수행한 한국의 신세대 여론주도층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86%의 응답자가 향후 한중 간의 관계가 지금보다 더 심화돼야 한다는 기대를 나타낸 반면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 이와 같은 희망을 표시한 응답자는 14%에 불과했다.
중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은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보다 확연히 드러났다. 2003년 2월 한 일간지의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0% 이상이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전면적인 재조정이 필요하며 중국과의 관계에 더 큰 관심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2004년 5월 ‘동아일보’의 조사에서도 역시 응답자의 61%가 한국외교는 미국보다 중국을 더 중시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미국에 대한 한국의 정책과 방침에 대한 국내여론이 양분되고 그 갈등이 서서히 이념적이고 당파적인 측면을 포괄하면서, 불행히도 한국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상대적인 중요성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다. 그러나 한국에게는 이러한 이분법적 발상이 가장 피해야 할 대상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출발한 노무현 정부는 대외관계에 있어서 지금까지 크게 세 유형의 정책을 채택했다. 첫째, 북한과 관련하여 ‘포용정책’이라는 이름하에 김대중 정부의 정책을 계승했다. 남북 간의 협력과 신뢰구축이 우선시되었으며 북한의 변화나 상응하는 조치 등이 전제되지 않더라도 지원은 계속되었다. 집권 초기 ‘햇볕정책’ 대신 ‘포용정책’의 명칭을 채택하면서 전임자의 정책내용을 그대로 다 이어받지는 않겠다고 천명했으나, 북한의 미사일 발사, 핵실험 등이 이어진 지금의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특히 노무현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은 북한에 대한 위협인식과 관련하여 미국과 한국 사이에 심각한 편차를 노정했으며, 북핵 문제의 해결에 있어 중국이 가장 영향력 있는 행위자이자 중재자로 등장토록 하는 환경을 조성하게 된다.
둘째, 한국의 전통적 우방국인 미국과 일본에 대해 노무현 정부는 ‘국격’과 ‘자존’을 중시하는 외교를 강조했다. 미국에 대한 한국의 변화된 정책-‘할 말은 하고 지나친 의존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세’-으로 인해 한미동맹뿐 아니라 한미관계 전반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2004년 초 이라크 파병의 규모, 주둔지역, 시기와 관련된 격렬한 논쟁은 변화된 양국관계의 실상을 잘 보여준 예였으며, 2006년 벽두를 달구었던 전략적 유연성 및 전작권 환수 관련 논란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자주’ 또는 ‘자존’에 대한 관심과 초점은 대체로 ‘비평형적 동맹(asymmetrical alliance)’의 대상인 미국보다는 줄곧 ‘호혜평등’을 강조해온 중국에 대해 노무현 정부가 조금은 더 가까운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비춰지게 하는 측면이 있다. 노무현 정부가 한미관계에 대해 제기한 문제의식은 국익을 위해 적절한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그 미시적 관리와 운용에 있어서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한미 간의 관계가 필요 이상으로 악화되어 제3국-예컨대 중국-이 ‘어부지리’의 공간을 갖게 될 개연성에 대한 우려도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셋째, 노무현 정부 외교의 공간적 중점지역은 ‘동북아’로 규정되어 있으나 ‘동북아’에 대한 초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향해 있는지는 그리 명확지가 않다. 오히려 한국 외교의 지정학적 범위를 김대중 정부의 ‘동아시아’에 비해 대폭 축소시켰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에서 동북아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해서도 충분한 고려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역 내 경제중심(동북아 허브)을 지향했던 목표와 노력도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했다. 반면에 이 개념의 안보영역 쌍둥이라고 할 수 있는 ‘동북아 균형자’는 미국으로부터 냉담한 비판을 받은 반면 중국에게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주지하듯 ‘동북아 균형자’론도 내부적으로 치밀하게 준비되었거나 대외적으로 긴밀한 협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었음은 크게 아쉽다.
연도 | 중국을 선택한 응답자 | 미국을 선택한 응답자 |
2003 | 48% | 33% |
2004 | 61% | 26% |
2005 | 39% | 54% |
2005 | 29% | 55% |
2006 | 24% | 47% |
*출처 : ‘중앙일보’ 2003년 2월12일자, ‘동아일보’ 2004년 5월4일자, ‘조선일보’ 2005년 1월1일자, ‘동아일보’ 2005년 11월7일자, ‘문화일보’ 2006년 9월16일자. |
2002년 10월 이후의 제2차 북핵위기에 대한 한국의 접근 또한 한미 간에 점점 벌어지고 있는 위협 인식차와 함께 소위 ‘한중 공조’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두드러지게 만들게 된다. 부시 행정부의 제한적이고 소극적인 대북 접촉은 중국의 역할만 극대화하는 결과를 낳았고, 미국이 북한에 대해 군사적 해결방법을 채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과 중국이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을 파생하게 된다. 문제는 이렇게 미국과의 ‘갈등’과 중국과의 ‘친화’가 서로 이분법적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한국의 국익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한국과 중국의 전략적 관계가 과연 서울과 워싱턴 사이에 크게 갈라진 틈을 메울 만큼 실질적으로 향상됐는가라는 질문도 함께 던질 수 있겠다.
2005년 가을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국빈방문 때 한국은 중국의 ‘시장경제 지위’ 인정이라는 큰 선물을 주었으나 한국은 이에 상응하는 선물을 아직까지는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006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의 방중에서도 결국 북핵 문제에 대한 부탁만 하고 돌아온 셈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심지어 한국정부는 2006년 1월 김정일의 중국 방문에 대해 사전에는 물론 심지어 그 기간 동안에도 통보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익과 비용, 수단과 목적의 대조를 통해 볼 때 과연 한국이 중국과 미국에 대해 일관성 있는 전략적 외교를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는 충분한 여지가 있어 보인다.
중국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여러 가지 생각은 2004년 가을 이후 그 운용에 있어 심각한 제한을 받게 된다.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한국 고대사의 상당부분을 중국의 지방정권사(地方政權史)로 편입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한국언론의 집중보도는 이에 대한 한국인들의 주의를 집중시켰으며, 한국의 여론주도층과 지식인들로 하여금 강대해져 가는 중국이 마치 명·청 왕조가 조선에 행했던 것처럼 자신의 시각과 규범을 한국에 강요할 수도 있는 개연성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갖게 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공중증(恐中症·Sinophobia)’은 2004년 중국이 한국의 최대 교역 대상국이자 최대 투자 대상지로 부상하면서 경제적 측면에서의 한국의 대(對) 중국 의존도의 증대에 대한 우려와 맞물려 급속히 확산되게 된다.
표에서 보듯 동북공정으로 인한 고구려사 논쟁의 충격은 여러 여론조사의 결과에서 감지되고 있다. 중국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2004년 여름을 분기점으로 하여 미국을 향한 우호적 정향의 증대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와 유사한 변화의 추세는 엘리트 집단에서도 발견되는데, 2005년 현역 국회의원 187명을 대상으로 한 ‘동아일보’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68%가 한국의 가장 중요한 외교 대상으로 미국을 꼽았다. 2004년 국회의원 138명을 대상으로 한 비슷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55%가 중국을 선택했던 것과 비교하면 고구려사 논쟁의 후폭풍 강도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겠다.
노무현 정부의 중국에 대한 사고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중국 경도(傾倒)적인 경향을 강하게 띠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예컨대 2003년 이래 줄곧 논의됐던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관련하여 주한미군의 자유로운 이동으로 인해 한국이 원하지 않는 (중국과의) 갈등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노력에 대한 미국측의 ‘이해’를 얻어낸 것을 들 수 있겠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의 대(對)중국 사고에는 명확한 ‘선호(選好)’는 있으나 구체적인 전략은 잘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중국에 대한 사고의 기저에도 중국 자체에 대한 한국의 독자적 전략(구체적 이익획득의 청사진 같은)보다는 한미관계에 대한 지렛대로 활용하고자 하는 ‘반응적(reactive)’ 성향이 더 두드러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전략적 사고에 대한 제언
1970년대 초 박정희에 의해 파종된 중국에 대한 전략적 사고의 씨앗은 이후 30여 년 동안 여러 가지 부침(浮沈)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더 구체적인 모습을 띠어갔다고 하겠다. 특히 1992년의 한중 수교는 한국의 대(對)중국 사고의 폭을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단계로 끌어올렸으며, 경제 발전과 성공적인 민주화는 국격을 제고하기 위해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방향으로 작동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종종 중국을 ‘외교적 대체재’나 ‘전략적 보완재’ 또는 한미관계에 대한 전략적 지렛대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어갔다.
한국 정부가 중국을 전략적 대안으로 간주하려는 경향과 중국이 실제로 이러한 가능성을 수용할 용의가 있는지는 서로 매우 다른 문제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1997년 4자회담 참여라는 예상치 못한 결정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서울에 경도(傾倒)되어 평양의 핵심이익을 희생시키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2003년 이래 3자회담과 6자회담을 통한 적극적인 노력의 경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한국의 이익을 위해 북한을 희생시키는 조치를 취한 적이 없으며 오로지 자신의 전략적 이익의 틀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한국 정부도 바로 이러한 전략적 이익의 틀을 발견하려는 독자적 노력을 경주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