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아’ 11월호에 ‘옥새 연구 40년, 서지민 교수의 옥새 이야기’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 후 서 교수의 주장에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는 독자들의 항의가 있었다. 옥새 연구가 김성호씨는 서 교수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글을 보내왔다. 논쟁을 통해 역사적 사실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자는 바람에서 김씨의 글을 게재한다. 김씨는 1999년, 당시 김대중 정부에서 제작한 국새에 금이 가 있다는 사실을 안 뒤, 옥새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현재 독도어울림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며 독도와 옥새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보인부신총수’에 나오는 왕실의 인장과 도장을 찍은 단면.
‘고종 황제가 남긴 진짜 국새’를 둘러싼 사건을 담은 영화 ‘한반도’에는 ‘옥새는 옥으로 만들어서 옥새라 불렀다’는 대목이 나온다. 문화재 도굴꾼인 유식은 이렇게 말한다.
“음! 국새는 나라에서 쓰는 도장이네. 옥새라고 그러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재질이 옥이라서 그렇게 부르는 거고. 대한제국이 생기고 나서 만든 국새들은 순금 재질이니까, 배운 사람들은 옥새가 아니라 국새라고 해야 되는 걸세.”
유식은 제법 유식한 척하지만 그의 설명엔 허점이 한둘이 아니다. 옥으로 만들어서 옥새라 불렀다고 한 것도, 대한제국 후 만들어진 국새가 순금 재질이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조선은 물론 고려시대에도 옥새는 옥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금속 재질로 만들어졌다. 물론 순금 재질이 아니라 금, 아연, 주석, 구리 등 여러 가지 금속의 합금으로 만들어졌다.
흔히 이렇게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서 교수도 ‘옥새는 옥으로 만들었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는 인터뷰에서 “세종대왕은 명나라로부터 받은 옥새를 쓰지 않고 남양옥으로 독자적 옥새를 제작케 했으며, 이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다”고 했다.
서 교수는 여기서 세 가지를 오해하고 있다. 첫째는 세종이 명(明)으로부터 받은 옥새를 쓰지 않았다는 점, 둘째는 남양옥으로 옥새를 만들었다는 점, 셋째는 그것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 점이다.
당초 옥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유에서 옥새로 불렸지만 금속으로 만들어도 황제의 도장은 모두 옥새라 불렀다. 재료개념에서 상징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625∼705) 때 ‘새(璽)’를 ‘보(寶)’로 바꿔 부르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당서여복지(唐書輿服志)’의 기록에 따르면, 측천무후는 ‘새(璽)’와 ‘사(死)’의 음이 비슷한 것에 불만을 갖고 ‘보(寶)’로 바꾸라고 영을 내렸다. 하지만 중종(中宗)이 즉위한 후 원래의 명칭인 ‘새(璽)’로 회복시켰다고 한다. 황제의 인장은 재료에 상관없이 모두 옥새라 불렀던 것이다. ‘새(璽)’는 원래 ‘鉢’로 표시했는데, 글자로도 알 수 있듯이 쇠(金)를 나무(木)로 불을 때 녹여 주물한 옥새나 금·동인이라는 의미이다.
망해버린 명나라에 대한 의리
우리나라에서도 1895년 고종이 반포한 포달 제1호 궁내부관제에 따라 ‘임금과 나라의 도장’을 옥새라 했다. 이때 만들어진 옥새들은 모두 재질이 금속이다. 즉 재질에 관계없이 황제의 도장은 ‘옥새’라 한 것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때 남양옥으로 옥새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없다. 명나라에서 받은 옥새를 쓰지 않았다는 기록도 마찬가지다. 당시엔 남양옥으로 옥새를 만들지 않았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옥새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청나라 몰래 옥새를 만들어 사용한 임금은 숙종이다. 당시 조선은 명을 멸망시키고 새롭게 들어선 청나라를 오랑캐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숭명사대(崇明事大)주의에 젖어 있던 조선의 숙종은 과거 명에서 보낸 옥새의 사본을 토대로 옥새를 만들어 사용했다(숙종 24년).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그랬던 것이다.
다만 나름대로의 자주성을 견지했던 세종은 명나라에서 내려준 인장 가운데 일부를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는 기록은 전한다(세종조차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등의 옥새는 명나라에서 내려준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세종은 집현전 부제학 정창손을 불러 말하기를, “모든 신하를 제수함에는 일찍이 중국에서 내려준 인장을 사용했는데, 그 후에 본국에서 주조한 것으로 고쳐 사용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그것이다(세종 31년 8월25일).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인장을 ‘주조’해서 사용했다는 것이다. 주조했다는 것은 금속을 합금해 옥새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만일 옥으로 옥새를 만들었다면 ‘조각’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옳다.
서지민 교수는 “정조대왕의 옥새를 본떠 제작한 국무총리용 옥새의 손잡이는 용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달할 옥새는 영조대왕이 쓰던 것을 본떴다. 손잡이는 거북 모양이다”라고 밝혔다. 옥새에 대한 양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먼저 정조의 옥새, 영조가 쓰던 옥새를 본떠 만들었다고 하는 부분인데, 영·정조대왕이 쓰던 옥새는 지금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만일 서 교수가 어보(御寶)가 아닌 옥새를 공개한다면 대단한 역사적 자료임에 틀림없다. 반면 서 교수가 견본으로 삼은 영·정조의 옥새 그림 또는 사진을 공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국민은 물론 한 나라의 대통령을 기만하는 행위가 된다.
조선의 옥새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감사원 조사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 사실이다. 2005년 11~12월 감사원에서 문화재청 등 10개 기관을 대상으로 실시한 ‘문화재 지정 및 관리실태 성과감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은 ‘옥새는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감사원은 조선왕조 궁중 인장 816개를 조사하고 50여 종의 문헌을 검토한 결과, 조선왕조 옥새 중 국새 13과(인장을 세는 단위)는 모두 분실됐으며, 일반 행정용 옥새는 26과 중 21과가 분실됐다고 밝혔다. 감사원은 문화재청에서 1971년 11월부터 1985년 9월 사이에 조선왕조 최고의 옥새인 ‘조선국왕지인’ 등 국새 3과와 일반 행정용 옥새 2과, 어보, 궁인 등 여타 인장 25과를 분실한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아마 서 교수는 ‘조선어보’란 책에 실린 사진을 참고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는 영조와 정조의 어보 사진이 실려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옥새가 아니라 어보다. 궁중유물전시관에서 펴낸 이 책은 조선의 어보를 집대성한 책이다. 이 책은 ‘어보란 임금을 비롯한 왕실의 도장, 곧 인장이다. 다시 말해 왕실의 끊임없는 끈을 나타내는 상징인 것이다. 때문에 이는 종묘에 모셨다. (어보는) 나랏일에 쓰는 여러 공무의 관인인 이른바 국새와는 다른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처럼 어보는 의식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옥새와는 차이가 있다. 어보는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생겼거나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뜻에서 예물로 바쳐지는 보존용이다.
어보에는 왕과 비에게 올린, 여러 이름(位號)을 새긴 것에서부터 시호(諡號·왕, 비에게 올리는 행적을 기리는 이름)와 여러 존호(尊號·왕, 비를 칭송하는 이름), 그리고 묘호(廟號·황제, 왕이 죽은 뒤 추증(追贈)된 칭호로 보통 조(祖)·종(宗)을 붙여서 ‘세조(世祖)’ ‘고종(高宗)’ 등과 같이 표현한다), 휘호(徽號·왕비에게 따로 또 올리는 성품을 기리는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용은 황제국, 거북은 제후국
서 교수의 주장 가운데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정조의 옥새 손잡이가 용이라고 한 점이다. 조선 역사상 용을 손잡이로 만들어 사용한 예가 없기 때문이다. 용은 오직 명나라나 청나라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사대관계에 있는 조선에서는 옥새의 손잡이로 쓸 수 없었다. 용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에 비로소 옥새의 손잡이로 등장했다. 용은 황제국의 상징이었고, 거북은 제후국의 상징이었다.
그런데도 서 교수는 용 손잡이로 만든 옥새를 국무총리에게, 거북 손잡이로 만든 옥새를 대통령에게 선사하겠다고 했다. 옥새는 임금과 국가의 상징이며, 이는 엄격한 상징의 격식을 따라야 한다. 용과 거북은 그 상징성에서 상하관계가 명확하다. 용이 거북보다 우위에 있는 상징체계로 볼 때 서 교수는 큰 결례를 범한 것이다.
서 교수는 “왕이 행차할 때 왕이 옥새를 따라가는 거죠. 왕이 일을 볼 때면 꼭 옥새를 앞에 두었어요. 말하자면 옥새의 맑은 기를 받고 나서 일을 시작했다고 할까요”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선의 옥새는 옥으로 만들지 않고 금속으로 주조했기 때문에 옥의 기운을 받고 일을 시작했다는 얘기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옥새는 분업으로 만들지 않아
또한 임금이 행차할 때 배치되는 옥새의 위치도 서 교수의 주장과는 다르다. 조선의 관리들은 왕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는데, 왕이 행차할 때는 반차도(班次圖)를 그려 수많은 사람과 의장물의 자리와 순서를 미리 정했다.
의장 행렬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바로 왕권을 상징하는 옥새와 중국에서 받은 고명(誥命)이었다. 임금 행차의 권위를 한층 더 높이는 것이 바로 옥새였다. 반차도에 따르면 옥새는 8명이 멘 별도의 가마에 따로 옮겨짐으로써 그 존재가치를 평가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차도를 살펴보면, 교룡기 다음의 중앙에는 주작기와 황룡기를 든 사람이 나타나며 이들 기수 좌우에는 홍개(紅蓋)를 든 두 사람과 금을 두드리는 사람, 북을 치는 사람이 1명씩 서 있다. 이어 보마(寶馬) 2필(갈색 1필, 흰색 1필)이 따르고, 상서원(尙瑞院) 관원을 중앙에 두고 내시 2명이 말을 탄 모습으로 좌우에 배치됐다. 상서원 관원은 옥새를 비롯한 궁중의 상징적 물품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보마와 상서원 관원, 내시가 가는 좌우측에는 각종의 깃발행렬이 물결을 이뤘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8명이 멘 가마에 옥새가 실려 상서원 관원과 함께 임금의 가마를 따르고 있다. 옥새가 앞장선 것이 아니라 임금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또한 서 교수는 “남양옥으로 옥새를 만들고, 민홍규(옥새 전각장)씨가 전각하면 세계적인 작품이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옥새의 제작과정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 조각은 자신이, 전각은 민홍규씨가 맡았으면 한다는 것은 분업식 제작으로, 전통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옥으로 만든 어보조차 뉴(?·손잡이) 조각과 전각(篆刻) 조각은 분업으로 제작하지 않았다. 금속으로 주조한 옥새도 마찬가지다. ‘보인소의궤’의 기록에 따르면 옥새는 한 명이 보조 장인을 두고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장인들은 옥새함이나 매듭을 만드는 등의 일을 했다.
1999년 김대중 정부 시절에 만든 ‘봉황국새’에 금이 간 것도 따지고 보면 바로 분업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행정자치부는 손잡이는 김영원 교수의 작품, 전각은 여원구씨, 주물은 최주 박사 에게 분담시켜 제작하다 결국 금이 가는 사태가 빚어지고 말았다.
행자부의 과오
그런데 행자부는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고 있다. 현재 행자부는 전문가 한 명 없는 국새제작자문위원회를 구성한 후 새 국새 제작에 나서고 있으나 지금까지 상황으로 보아 또다시 전철을 밟고 있는 것 같다. 당시 국새제작자문위원장을 맡았던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등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행자부는 여전히 분업방식을 고집하고 있어 향후 값비싼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하고 있다.
행자부는 감사원 감사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행자부는 ‘국새에 균열이 있다’는 감사원 발표 직후 ‘국새의 인뉴(손잡이)와 인문’에 대한 국민제안을 받았다. 국민제안의 내용 가운데 ‘태양새 삼족오(三足烏)’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 뒤를 용과 봉황 등이 이었다.
행자부는 당시 ‘삼족오’를 지지하는 의견이 9건이라고 발표했으나, 500명의 서명을 받아 제출한 한 시민단체의 의견을 1건으로 처리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같은 조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행자부는 ‘새 국새 제작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72%의 국민을 대상으로 또다시 여론조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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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제안을 받아놓고서는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이를 묵살하고, 또다시 예산을 들여 여론조사를 한 이유는 무엇인가. 혹여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 국민제안을 뒤엎은 것은 아닌가. 이 부분은 반드시 짚어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정부기관조차 편법을 동원해서까지 전통과는 거리가 먼 옥새(국새)를 만들다보니 우리 전통문화가 왜곡되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서지민 교수 같은 분이 앞장서서 제대로 된 국새를 만들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것이 이 시대에 필요한 옥새 전문가의 자세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