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호

야구의 추억

  • 허구연 / 일러스트·박진영

    입력2006-12-08 11: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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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의 추억
    야구선수, 해설자, 감독, 코치, 그리고 다시 해설자를 거치면서 43년이 흘렀다. 초등학교 5학년, 처음으로 야구를 시작했을 땐 초등학교 때까지만 하기로 부모님과 약속했더랬다.

    그런데 이제는 그야말로 ‘야구인생’을 살고 있다. 대학교수의 꿈을 접고 야구를 택한 것도 좋아하는 걸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미 고인이 되신 모교 법대학장님이 내게 “왜 대학 강의를 그만두면서까지 야구해설을 하려고 하냐”며 애를 태우시던 기억이 새롭다. 어린 시절엔 하얀 유니폼과 하얀 공이 그리는 포물선을 보면서 막연한 동경을 느꼈고, 선수가 되어서는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는 정직함, 그리고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펼쳐지는 정정당당한 승부에 매료됐다.

    수십년을 야구와 함께했지만 아직도 중계방송을 할 때마다 ‘야구는 어렵다’는 것을 실감한다.

    수많은 중계방송 중 단 한 차례도 만족스러운 방송을 해본 기억이 없을 정도다. ‘중계방송에 퍼펙트란 없다’는 이야기는 방송을 시작할 때부터 들었는데, 나 또한 아직 달성하지 못한 것 같다. 아직 국내 프로야구에서 투수의 퍼펙트게임(점수, 안타, 출루를 한 명도 내주지 않은 경기) 기록이 없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야구 해설을 제대로 하려면 풍부한 배경지식, 선수에 대한 정확한 정보, 경험, 순발력, 적합한 표현, 캐스터와의 호흡 등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야 한다. 금방 벌어진 상황에 대해, 짧은 순간 어느 정도 진실에 근접한 개연성을 두고 설명하느냐가 야구 해설의 요체이다. 모든 상황에서 감독, 코치, 선수의 의도를 그야말로 정확하게 전달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부터 방송 해설을 하면서, 더 정확히 말하면 야구를 시작한 이후 43년간을 헤아려보면서 내가 가장 기분이 좋았던 때는 2006년 3월이다. 드디어 한국야구가 미국, 일본 야구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든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회는 방송 내용의 만족도와는 상관없이 가슴 뿌듯한 때로 기억된다.

    세계 최강의 미국 대표팀을 꺾은 날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의 호텔 로비에서 자정이 넘어 만난 미국팀의 벅 마르티네스 감독은 “한국이 그렇게 야구를 잘하는 줄 몰랐다. 깜짝 놀랐다. 미국의 완패였다. 특히 한국 수비는 완벽했다”고 털어놨다.

    그날 아침 경기 전 “미스터 허, 내일 아침에 커피나 함께하자”던 여유는 오간 데 없는 표정을 봤을 때의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일본팀 오 사다하루 감독 역시 우리가 미국을 꺾은 다음날 아침 로비에서 “아시아를 대표해 꼭 우승하기 바란다”는 덕담을 남긴 채 쓸쓸히 샌디에이고로 먼저 출발했으니….

    결국 이상한 대진 방식과 주최측의 횡포로 일본을 두 차례나 이기고도 결승전에 진출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지난 3월 캘리포니아의 밤은 다시 떠올려보아도 통쾌하기 그지없다.

    물론 단기전 승부에서 미국, 일본을 이겼다고 해서 우리 야구가 그들보다 우위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도 그들이 완패를 자인한 것은 세계 야구계에 우리 야구의 저력을 보여줬다는 얘기다.

    내가 이렇게 흥분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84년 봄, 나는 미국 플로리다 주에 마련된 LA 다저스의 스프링 캠프 ‘베로비치 다저타운’에 피터 오말리 구단주의 초청을 받아 한국 야구인으론 처음으로 한 달가량 머물렀다. 그때 오말리 구단주는 “한국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 나라냐?” “아니, 한국에서도 프로야구를 한다고?” 하며 놀라는 표정을 짓곤 했다. 국내에서는 이미 프로야구 붐이 대단할 때였는데….

    그로부터 22년 후 우리 드림팀이 미국 드림팀을 보기 좋게, 그것도 미국땅에서 보란 듯이 깼으니 “미국 야구팬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고, 우리 동포들에게는 커다란 자긍심을 심어준 쾌거다. 우리가 한 장소에 이렇게 많이 모여 자발적으로 한마음이 되어 열광한 적은 일찍이 없다”던 재미교포들의 감격도 이해할 만하다.

    물론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선동렬의 호투,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 한대화의 극적인 3점 홈런 등을 엮어 숙적 일본을 꺾었을 때의 짜릿함도 빼놓을 수 없다. 다만 당시의 일본 선발은 프로 선수들이 주축이 아니어서 양국간 ‘정면 승부’라고 하기엔 다소 부족한 면이 있다.

    한일 양국의 프로 선수들이 주축이 돼 올스타전 형식으로 붙었던 1991년의 제1회 한일 슈퍼게임의 추억도 스쳐 지나간다.

    한국 프로야구가 10년차를 맞던 당시만 해도 우리는 명실상부 전 구단의 최고 선수들로 팀을 짰던 반면, 일본은 우리를 얕보듯 게임이 거듭될수록 1진급의 수를 줄이고 2진급을 주축으로 선발팀을 짜 거만을 떨었다. 그러니 그야말로 최고의 드림팀끼리 맞붙은 WBC대회에서 거머쥔 승리는 감동 그 자체였다.

    WBC 7개월 후인 10월의 한국시리즈에선 삼성 라이온즈와 한화 이글스가 명승부전을 벌여 팬들을 열광시켰고 또 한 번 야구의 매력을 발산했다.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고, 희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야구가 지닌 가장 큰 매력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한국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세 차례의 연장전 승부 끝에 삼성이 4승1무1패로 우승을 차지했다. 수치상으로는 일방적인 우세 같지만, 실제는 게임마다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최종전인 6차전, 비록 무산되긴 했지만 한화가 만든 9회말 1사 만루의 상황에서 보듯, 야구란 한순간에 역전, 반전이 가능한 스포츠다. 20여 년 전인 1984년, 당시 롯데의 유두열이 역전 3점 홈런으로 거함 삼성을 침몰시키던 장면을 기억하는 팬도 많을 것이다.

    삼성 라이온즈에는 선동렬 감독이 있다. 감독 데뷔 후 2년 연속 우승이란 전무후무한 기록을 수립한 선 감독의 능력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스타플레이어 출신 감독들이 실패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선 감독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는 여느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가족들의 희생이 있다. 감독들이 받는 중압감과 스트레스는 일반인이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야구계엔 프로야구 감독과 코치 자녀들 중 서울의 명문대학에 진학한 경우가 극히 적다는 자조 섞인 우스갯소리가 있다. 가족들이 받는 고충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프로야구 초기의 일화 한 토막. 입시생 아들이 방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 간식을 주려고 방에 들어간 감독 부인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머리 싸매고 공부하는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이어폰을 귀에 꽂고 아버지 팀의 야구중계 방송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적이 부진하면 아버지가 내일 바로 쫓겨날지도 모르는데, 공부가 제대로 되겠냐”는 게 당시 고3 아들의 항변이었다고 한다.

    선동렬 감독은 추석 연휴기간 대구 숙소 주변 식당들이 문을 닫아 하루 세 끼 내내 라면을 직접 끓여 먹었다고 한다. “아니 부인은 뭐했나?”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고교 1년생인 장남이 골프선수 생활을 하고 있어 뒷바라지하느라 한시도 서울을 떠날 수 없는 형편이다.

    WBC 4강 사령탑으로 ‘국민감독’이란 호칭을 얻은 한화 이글스의 김인식 감독은 뇌경색으로 한때 위험한 시기를 보냈다. 한국시리즈 이후 그가 언론 인터뷰에서 “1년에 딱 보름 쉬었다. 그나마 3일 연속 붙여 쉰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한 것을 보면 감독직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어려운 자리인지 짐작케 한다.

    34세 때 지금은 없어진 청보 핀토스 구단의 감독을 맡았다가 능력 부족으로 1년 만에 쫓겨난(?) 필자는 그 후 몇 차례 감독직 제의를 받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감독직에 더는 미련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보다는 해설가로서 야구계에 이바지하는 길이 더 바람직하다고 믿게 됐기 때문이다.

    내가 해설자란 직업으로 방송에 데뷔한 지도 거의 30년이 다 됐다. 1982년 TV 해설을 하기 전, 지금은 없어진 동아방송(DBS)에서 처음 마이크를 잡은 것이 1970년대 후반이었다. 당시에는 원창호, 김인권, 손석기 아나운서와 함께 아마추어 야구를 가끔 라디오로 중계했지만, 직업 해설자로 나서 1982년부터 시작한 TV 중계방송은 특히 30세를 겨우 넘긴 당시 내 나이를 떠올리면 부담도 컸고 어떤 해설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속도 많이 태웠다.

    해설가로 일하면서 가장 보람되게 여기는 것은 1980년대 초 잘못된 일본식 야구용어를 바로잡은 일이다. 당시의 아나운서, PD들과 함께 ‘포볼’을 ‘베이스온 볼스(base on balls)’ ‘워크’ ‘볼넷’으로, ‘데드볼’은 ‘히트 바이 피치드 볼(hit by pitched ball)’ 혹은 ‘몸에 맞는 공’으로, ‘온 더 베이스’는 ‘태그업(tag up)’ 등으로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초기에는 줄곧 사용해오던 야구용어를 왜 굳이 생소한 말로 바꿔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드냐는 질타도 쏟아졌다. 그러나 20여 년이 흘러 이제는 이런 용어들이 방송계와 야구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나 개인으로서는 한국야구가 WBC에서 미국, 일본을 꺾은 것만큼이나 뿌듯하다.

    당시 필자가 야구중계 담당 PD와 아나운서들에게 “언어를 지배당하고 있는 판에 일본이 역사교과서를 왜곡했다고 국민성금 모금운동을 하면 뭣하겠나. 이번 기회에 바로잡지 않으면 영원히 바로잡을 수 없다”고 호소했다. 그때 내 제의를 받아들인 분들이 고맙기만 하다.

    WBC가 성공적으로 끝났고, 한국시리즈의 질적 향상도 거듭되고 있다. 다만 열악한 야구장 기반시설, 특히 돔(dome) 구장 하나 없는 현실은 암담하다.

    프로스포츠 정착의 기본조건이라는 ‘인구 1억명,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이상’을 충족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야구는 물론 축구·농구 등 프로구단들은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프로씨름은 일찌감치 그 문제가 표면화한 바 있다.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과연 언제까지 프로 스포츠구단의 운영이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프로야구의 경우 대개 구단들이 150억∼200억원의 적자를 감수하며 운영을 계속하고 있다. 흔히 기업의 홍보효과를 대체수단으로 제시하지만, 요즘처럼 다변화한 정보의 홍수 속에 기업홍보 기능으로서 프로야구의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령 삼성, LG 같은 대기업이 야구단을 운영하지 않는다고 해서 기업홍보에 커다란 차질이 빚어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러고보면 요기 베라가 남긴 야구계의 명언, “야구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는 국내 야구단 운영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계속 긴장하고 효율적인 운영, 관리가 뒤따라야 한다.

    2006년의 시작에는 WBC 열풍, 말미에는 포스트시즌의 만원 관중을 보면서 그나마 한국 프로야구의 팬층이 두텁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정규리그 시즌 중엔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고 있는 이승엽 선수의 홈런포 활약, 그리고 이미 고정팬을 상당수 확보한 미국 메이저리그 때문에 한국 야구를 즐기는 팬들의 존재감이 크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야구의 추억
    허구연

    1951년 진주 출생

    경남고, 고려대 법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74년 대학야구 MVP, 청보핀토스 감독, 롯데 자이언츠 수석 코치

    미국 토론토 블루제이스 구단 유급 코치

    現 MBC 야구해설위원, 한국야구위원회(KBO) 규칙위원장


    무엇보다 야구인의 숙원이랄 수 있는 돔 구장 건설, 야구장 현대화 등의 여건이 갖춰진다면 한국 프로야구는 또 한 번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이라는, 젊은 층의 구미에 맞는 ‘새로운 놀이터’가 생기고 난 뒤 한국영화 관객 수가 폭증했다는 사실을 새겨보면 구장의 질적 개선은 더없이 시급한 과제라 하겠다.

    2009년 개최 예정인 제2회 WBC 대회, 우리 야구가 세계 정상에 우뚝 서는 순간의 기쁨을 중계석에 앉아 누릴 수 있게 되길 기대해본다. 또 얼마 전 프로야구선수협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듯이, 2012년 열릴 3회 WBC 대회는 한국의 돔 구장에서 개최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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