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내 호텔, 정치권력과의 유착으로 급성장
- 박정희, 혁명자금 대준 인사에 호텔 지을 땅 내줘
- 일본 최고 호텔 지배인 빼내와 지은 신라호텔
- 김우중, 美 재무장관 설득으로 ‘힐튼’ 상호 써
- 아프리카 대통령 객실로 들여보낸 미모의 탤런트
- 외도한 장관, “벗어둔 속옷 찾아내라”
- 노태우·김대중·김영삼, 호텔 사우나에서 ‘나체 회담’
만주로 가는 열차식당 풍경
한국 최초로 등장한 근대식 호텔은 1889년 인천 서린동에서 개관한 대불호텔이다. 그러나 서양식으로 세워진 호텔은 1902년 서울 정동의 손탁호텔을 효시로 본다. 1909년에는 고종 황제가 프랑스 여성에게 희사한 하남호텔(이화여고 정문 앞)이 개업했다.
나라를 빼앗긴 뒤인 1912년 일제가 부설한 경의선 철도를 중심으로 부산 철도호텔과 신의주 철도호텔이 문을 열었다. 조선호텔은 1914년 개관했다. 북한 지역에서는 1915년 금강산 온정리에 금강호텔, 1918년 내금강에 장안사호텔, 1922년 평양에 유옥호텔이 설립됐다.
일제 강점기의 호텔리어 사이에는 규율과 기강이 대단했다. 당시 신의주 철도호텔은 한국에서 만주로 가는 열차식당을 운영했는데, 이 식당의 캡틴은 강모씨(후에 서울 C호텔 커피숍 지배인 역임)였고, 최모씨(후에 서울 N호텔 총지배인 역임)는 그의 밑에서 일했다. 최씨는 그후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강씨를 만나면 ‘수장님’이라고 깍듯이 호칭했다.
당시 열차식당에서는 햄버거스테이크가 손님들에게 가장 인기였는데, 호텔측은 이를 ‘개떡’이라고 불렀다. 열차식당에서 일하는 일부 호텔 직원들은 고기 대신 밀가루를 규정보다 더 많이 섞는 방식으로, 원래 100개를 만들도록 한 햄버거스테이크를 120개로 늘려 만들었다. 이를 적발하기란 쉽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직원들이 챙기는 수입이 꽤 짭짤했다고 한다. 직원들이 돈을 많이 만지게 되어 만주에 ‘꾸냥(기생)’을 두고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광복이 된 뒤 열차식당은 주로 공무원이 운영하다 1990년대 들어 한화 프라자호텔이 맡았다. 열차식당은 프라자호텔의 효자산업이 됐다.
1936년 반도호텔이 ‘탄생’했다. ‘탄생’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 호텔이 비로소 한국 사회에 호텔산업의 진면목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반도호텔은 정치·경제·사회 지도층이 만나는 공간이 되어갔고, 한국 상용호텔(commercial hotel)의 대표적인 숙박시설로 손색이 없었다.
광복 직후 반도호텔의 룸서비스 웨이터이던 민모씨는 이승만 대통령의 눈에 들었다. 호텔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호텔을 이용하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었다. 자연히 권력과 호텔리어는 가까운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민씨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후원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주미 한국대사관 소속으로 머물게 됐다. 가끔 대통령 부처가 대사관으로 전화해 민씨의 안부를 묻자 대사관에서는 그를 무척 떠받들었다고 한다. 민씨가 귀국한 후 대통령 주변에선 청와대 근무를 권유했으나 그는 이를 사양하고 호텔에 남았다. 뒤에 그는 모 호텔 총지배인이 됐다.
일식당은 제2의 국무회의장
광복과 6·25전쟁을 거친 이후 한국에선 관광호텔의 양적 확대가 진행됐다. 1959년 29명의 민간 호텔업자로 구성된 대한관광호텔업협회가 발족했다. 1961년 박정희 정권이 ‘관광사업진흥법’을 제정한 것은 관광호텔의 획기적 발전을 가져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사회의 다른 부분에서는 외국제품 수입을 철저히 차단하면서도 호텔만큼은 규제를 상당히 완화해줬다. 박 정권의 도움으로 서울에 많은 호텔이 생겨나 호황을 누렸다. 당시 권위주의 정권하에서도 호텔리어들은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사회 분위기 자체가 그랬다. 경찰도 통행금지 단속 때 호텔 직원 신분증을 제시하면 집으로 보내줬다.
호텔산업의 부흥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호텔 소유주 간의 개인적 친분도 적잖이 작용했다. 서울 A호텔은 북한 원산에서 양조장을 하던 거부(巨富) B씨가 월남해 지은 것이다. 호텔업계에선 B씨가 박 전 대통령의 5·16 군사정변 거사자금을 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사에 성공한 이후 박 전 대통령은 B씨를 불러 서울시내 지도를 펼쳐 보이면서 원하는 곳에 표시하라고 했다. B씨가 조그맣게 동그라미를 치자 박 전 대통령은 측량을 하여 그 위치, 그 면적 그대로 땅을 살 수 있게 해줌으로써 B씨가 호텔을 짓게 됐다는 것이다.
C호텔은 원래 서울 차이나타운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박정희 정부는 이곳에 있던 중국인들을 내쫓은 셈이다. K회장은 이 땅을 국가로부터 불하받았다. 당시 일본 미쓰비시는 이 호텔 건설에 1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가 발을 뺐다. 그러나 박 정권은 미쓰비시측을 압박해 예정대로 투자가 이뤄지게 했다. 일본은 이 호텔 건설에 별도로 100억원의 해외차관을 제공했다.
이 호텔 건너편에 있던 조선호텔은 고객을 빼앗길 것 같아 이 호텔 건설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이 호텔이 들어선 뒤 이 일대에 호텔촌이 형성되면서 오히려 조선호텔은 장사가 더 잘됐다.
1962년 국제관광공사(현 한국관광공사)는 워커힐과 반도호텔을 인수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963년 워커힐호텔이 문을 열었다. 부산과 경주 등지에도 많은 호텔이 개관했다. 조선호텔은 육군 공병대가 지었다. 그래서 이 호텔의 사원번호 1번이 공병대 병장으로 알려져 있다.
최덕문씨는 1970년대 한국 호텔업계의 전설적 바텐더였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6·25전쟁 때 통역장교로 참전했다 포탄에 맞아 다리가 불편했다. ‘서서 일하는 직업’을 찾던 그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영어로 대화하며 칵테일을 만들어주는 바텐터 일에 흥미를 느꼈다. 이후 조선호텔이 바 지배인으로 그를 스카우트했다. 최씨는 해외의 칵테일 관련 자료를 죄다 끌어모아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 매달렸다. 한국의 호텔들에 단시간에 칵테일 제조법이 체계적으로 보급된 것은 그의 노력 덕분이다. 웬만한 특급호텔의 음료부장은 모두 최씨의 제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1960~70년대 호텔리어는 수입이 좋아 선망의 직종이었다. 그래서 청와대 직원이 호텔에 취업청탁을 해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호텔이 늘어나면서 호텔 간 경쟁도 치열했다. 오늘은 업계 1위라도 내일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70년대에 뉴코리아호텔은 조선호텔 다음으로 큰 호텔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게 됐다. 이 호텔 직원들은 대부분 서울 하얏트호텔로 옮겨갔다. 당시 벨맨으로 근무하던 직원은 후에 하얏트호텔의 이사가 됐다.
서울 광화문 파이낸스빌딩 자리에 있던 엠파이어호텔은 재일동포가 주인이었다. 과거엔 재일동포 소유의 호텔이 서울시내에 꽤 있었다. 퍼시픽호텔, 아스토리아호텔도 재일동포 소유였다. 퍼시픽호텔의 극장식 레스토랑인 ‘할리데이 인 서울’은 1980년대 중반까지 서울의 유흥 문화를 선도하던 곳이다.
그런데 엠파이어호텔의 주인과 박정희 전 대통령 사이에 핫라인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아무도 이곳을 못 건드렸다. 엠파이어호텔이 운영하는 일식집에는 장관들이 워낙 많이 찾아 국무회의장을 옮겨놓은 듯했다. 지금은 강남·북 할 것 없이 유명 음식점이 많이 생겼지만, 그 무렵만 해도 고위층이 즐겨 찾는 곳은 제한적이었다. 이 일식당은 일본 관광객도 많이 찾아 서울시내에서 장사가 가장 잘되는 집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렇게 잘나가던 호텔도 결국 문을 닫았다. 2년이나 장기 투숙하던 독일인 기술자가 방값을 내지 않고 자살한 사건은 이 호텔의 불운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1975년경 서울시청 앞 서린관광호텔은 ‘정치 1번지’로 통했다. 커피숍의 테이블마다 전화기를 설치해 손님들이 쓸 수 있도록 한 것이 큰 효과를 봤다. 그러나 이 호텔도 이후 무리한 투자 등으로 건물을 매각해야 했다.
1978년, 가정의례준칙에 의거해 호텔 예식이 전면 금지됐다. 그러나 H호텔 등 일부 특급호텔은 문을 걸어 잠그고 고위인사들의 자녀 결혼식을 비밀리에 진행하기도 했다.
현재는 철거되고 없는 서울 반도호텔 전경.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힐튼호텔을 개장할 때도 힐튼호텔 본사와의 협상이 수월하지 않았다. 워낙 비싼 로열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화가 난 김 회장은 힐튼 상호를 쓰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러자 미국 재무장관이 직접 중재에 나섰다는 후문이다. 재무장관은 “대우가 미국에 자동차를 많이 수출하는데, 힐튼 브랜드를 사용하면 대우차를 더 많이 팔 수 있지 않겠냐”며 김 회장을 설득했다는 것.
워커힐호텔은 정부가 운영하다 선경(현 SK)에 싸게 넘어갔다. 이 호텔은 서울 외곽에 있어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그러다 고(故) 전낙원 파라다이스 회장이 외국인 전용 카지노를 열면서 유명해졌다. 전낙원 회장은 당시 카지노의 대부로 통하던 O호텔 Y회장의 수하로, Y회장이 워커힐 카지노 운영을 전 회장에게 맡긴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뒤 전낙원 회장이 카지노업계를 석권했다.
‘기생관광’으로 급성장
1970년대 들어 서울의 호텔은 ‘불륜의 공간’으로 자신을 적극 마케팅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곳이 N호텔이다. 이 호텔은 창문이 나 있지 않은 방(인사이드 룸) 40개가 골칫거리였다. 사장은 궁리 끝에 이들 방의 천장과 벽 전체에 거울을 갖다붙였다. 그러자 객실은 만원을 이뤘다.
대담해진 서울의 일부 호텔들은 성매매에도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른바 ‘기생관광’과 호텔이 긴밀히 연계되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 기생관광’은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한 것으로, 한일 여행사에 의해 널리 알선됐다. 일본인 관광객은 3만엔 정도를 내면 한국인 여성을 하루 종일 데리고 있을 수 있었다. 이 돈은 접대한 여성, 요정, 여행사가 일정 비율로 나눠 가졌다.
일본인 관광객과 한국인 여성이 호텔에 체크인할 때 여성은 벨맨에게 ‘딱지’를 줬다. 호텔측이 이 딱지를 모아 요정에 보여주면 요정에선 현금을 내줬다. 호텔측이 동숙자 명단을 허위 기재해 경찰의 성매매 단속을 피하도록 해주는 대가였다. 기생관광은 약 20년간 존속했다. 일본인들이 이렇게 뿌려댄 엔화가 서울 호텔들이 급성장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어떤 여성들은 여행사나 요정에 뜯기는 돈이 아까워 호텔과 직접 거래했다. 일본인 관광객이 호텔을 정해 숙박하면 이 호텔이 일본인에게 여성을 붙여주는 식이었다. 일본인 관광객도 비용을 3만엔에서 2만엔으로 줄일 수 있어 이익이었다. 지금은 유명 특급호텔이 된 서울의 한 호텔은 이런 성매매 직거래로 엄청난 수입을 올렸다.
주한미군은 1980년대 서울시내 호텔의 성장에 큰 도움을 준 또 하나의 주역이었다. 미군은 대규모 훈련을 하게 되면 서울시내 전체 호텔 객실의 20% 이상을 채워줬다. 장교는 특급호텔, 사병은 일반호텔에 배정됐다. 하룻밤에 무려 2000실을 사용한 적도 있다. 미군은 훈련 때 미국에 있는 병사의 가족을 서울로 데려와 호텔에 묵게 하기도 했다. 지금은 홀리데이 인 서울 호텔이 된 마포 가든호텔 같은 곳은 미군이 3년 단위로 객실을 임차해 썼다.
그 무렵 서울의 호텔에선 1만5000원짜리 음식이 가장 비싼 메뉴였는데 미군측은 “2만원짜리 식사를 만들어내라”고 요구했다. 일부 호텔은 음식 내용을 별로 바꾸지 않고 가격만 2만원으로 올리기도 했다. 주한미군의 훈련 계획은 보통 1년 전에 확정되니, 서울 시내 호텔들로서는 가만히 앉아서 꼬박꼬박 목돈을 만지게 해주는 미군이 더 없이 고마운 존재였다.
미 8군 소속 A상사는 미군 장교와 사병을 서울 시내 각 호텔 객실에 배정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A상사는 서울의 호텔업계에선 제왕이나 다름없었다. 내로라하는 호텔의 경영진이 A상사 앞에선 머리를 숙였다. 특히 각 호텔 판촉이사들은 그야말로 쩔쩔맸다. A상사는 호텔 관계자들을 불러내 포커게임을 즐겼다. 호텔 관계자들은 일부러 돈을 잃어줬다. 물론 문제가 될 만큼 큰돈은 아니었지만. 필자도 A상사와 포커게임을 한 적이 있는데, 그만 돈을 따버리고 말았다. 호텔에 돌아가서 상관에게 엄청나게 혼이 났다. 후에 A상사는 다른 비위 사실이 적발되어 미 헌병대에 체포되고 말았다.
‘호텔의 대통령’ 청와대 검식관
정부도 호텔의 주요 고객이었다. 특급호텔들은 ‘청와대 행사’를 얼마나 따내느냐를 놓고 경쟁을 벌였다. 청와대는 일본 자본으로 세워진 호텔은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청와대는 행사가 열리는 날엔 호텔 종업원 전체의 신원을 조회해 전과자 등은 그날 아예 출근을 못하게 했다. 청와대 검식관은 대통령이 호텔에서 먹을 음식을 미리 검식하는 일을 했는데, 이모씨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청와대 하급 관리에 불과했지만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다. 그는 서울의 호텔가에서 ‘호텔의 대통령’으로 통했다. 늘 권총을 차고 다녔는데, 어지간한 호텔 사장이나 지배인 중에 이 권총으로 머리를 맞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이씨는 호텔 주방에서 요리하는 과정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일일이 지시를 내렸다. 예를 들어 전두환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청와대 행사에 나오는 갈비탕 속 갈비는 반드시 군대 사열에서처럼 일정한 크기와 각을 유지해야 했다. 조리사들은 가위로 갈비를 일일이 잘라 맞췄다.
필자도 어찌나 군기가 바짝 들었던지, 손에 화상을 입기도 했다. 영부인 이순자 여사에게 된장 뚝배기를 올려야 했는데, 감히 집게로 뚝배기를 내리지 못해 손으로 직접 잡아 내렸다. 손이 타들어갔지만 뚝배기를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이순자 여사가 깜짝 놀라 내 손을 잡아줬다. 그는 나중에 “치료비로 쓰라”며 100만원을 내게 보내왔다.
행사가 끝나면 청와대는 모든 호텔 종업원에게 똑같은 금액의 팁을 줬는데, 돈을 007가방에 담아 호텔측에 건넸다. 청와대는 이 돈을 똑같이 나눠줬는지를 내사했으며, 간부가 더 많이 가져간 것이 발각난 호텔은 혼쭐이 났다.
강남 개발이 본 궤도에 오른 뒤 강남에서도 리츠칼튼, 라마다르네상스, 인터콘티넨탈, 아미가, 강남팰리스, 리버사이드, 영동리베라 등 호텔 건축이 잇따랐다. 88올림픽, 2002월드컵, 부산 아셈대회 등 대규모 국제행사는 호텔의 신축과 질적 성장에 기여했다. 스위스그랜드호텔(현 그랜드힐튼호텔), 라마다르네상스호텔, 롯데월드호텔은 88올림픽을 계기로 신설됐다.
삼성, SK, 롯데, 대우, LG 같은 대기업은 서울에서 특급호텔을 직접 운영하거나 호텔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는 서울에 호텔을 갖고 있지 않다. 경주, 북한 금강산 등지에만 현대호텔이 있을 뿐이다. 고(故) 정주영 회장은 서울에 호텔을 짓기 위해 무척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토종 호텔이 로열티를 주고 해외 유명 호텔 브랜드로 간판을 바꿔 다는 일도 본격화됐다. 노보텔엠베서더호텔(옛 금수장), 리츠칼튼호텔(옛 남서울호텔) 등이 그런 경우다.
사우나의 거물들
호텔은 정계, 관계, 재계 고위층이 회동해 밀담을 나누는 대표적인 장소다. 호텔리어는 근접한 거리에서 이들의 사적 관계를 지켜보게 된다.
역대 대통령들이 지방에 내려가면 그 고장의 호텔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 현안을 들은 뒤 하룻밤을 묵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호텔 오너뿐 아니라 지방의 경제인들에게 큰 힘이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지방순시를 한 뒤 충남 도고의 온천관광단지에 자주 묵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대통령의 지방순시나 지방호텔 투숙은 거의 없어진 듯하다.
전직 대통령인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씨가 대선후보이던 시절 이들은 언론에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비쳤지만, 세 사람은 서울 시내 한 호텔 사우나에 같이 들어가 한두 시간씩 환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럴 때면 호텔측은 예우 차원에서 사우나에 다른 손님을 들이지 않았다.
1999년 중국의 탕자쉬안 외교부장도 경기도 이천 미란다호텔 온천탕에서 한국 외무장관과 회담을 했다. 주중 한국대사의 주선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두 장관은 소탈해서 호텔측에 “사우나 손님들을 그대로 받으라”고 했다.
그러나 상당수 관료는 호텔에 권위적인 태도를 취했다. 한 장관은 부인에게 “국정(國政)이 바빠 밤샘을 해야 한다”고 둘러댄 뒤 한 특급호텔 객실에서 젊은 여성과 동침했다. 그런데 그는 다음날 그만 내의를 객실에 벗어둔 채 출근했다. 부인이 의심할 것을 염려한 그는 호텔측에 “내의를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이미 객실 청소가 끝난 뒤여서 내의는 손님이 버린 것으로 알고 호텔 쓰레기장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쓰레기장에는 350개 객실과 레스토랑에서 나온 쓰레기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호텔 전 직원이 쓰레기장에 들어가 몇 시간 동안 뒤진 끝에 겨우 내의를 찾아냈다.
호텔리어에게 고객 정보의 보호는 생명과 같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다보니 가끔씩 사고가 터졌다. 노태우 정부 시절 P호텔 스탠드바에서 노 대통령의 처남인 김복동씨와 미국의 특사가 밀담을 나눴다. 이 얘기를 스탠드바 지배인이 듣게 되어 무심코 다른 호텔 종사자에게 전했는데, 잡지에 고스란히 실렸다. 이후 이 지배인은 “남산(안기부)에 끌려가 죽다 살아났다”고 말했다.
서울시청 앞 프라자호텔 부근에는 호텔리어들 사이에서 ‘참새방앗간’으로 통하는 술집이 있었다. 주요 특급호텔 관계자들의 단골집이었다. 호텔리어들이 맥주를 마시면서 자기들이 겪은 갖가지 에피소드를 주고받으며 스트레스를 풀고는 했다. 1980년대 아프리카 모 국가의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가 머물던 모 호텔 객실로 우리 정부측에서 미모의 여성 탤런트를 보낸 얘기도 이곳을 통해 유통됐다. 이 얘기의 발설자도 나중에 크게 곤욕을 치렀다. 참새방앗간이 고위층의 고급 정보가 모이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안기부 요원들도 이곳에서 상주하게 됐다.
한국 호텔은 ‘총체적 위기’
지금 한국의 호텔은 특급호텔이나 중소형 호텔, 지방호텔 할 것 없이 적자경영으로 총체적 위기에 빠져 있다. 정부는 관광산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한다. 관광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먹고 자는 곳, 즉 호텔의 경쟁력 강화가 필수다.
호텔이 이런 위기를 맞은 것은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정부는 ‘88올림픽을 치르려면 서울에 2만5000개의 객실이 필요하다’고 추산했다. 그러나 당시 서울엔 1만5000개의 객실밖에 없었다. 단기간에 호텔을 늘리기 위해 정부는 호텔을 지으면 사행성 오락실을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자 전국에 호텔 오락실이 우후죽순 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터키탕 영업’도 중소형 호텔에서 크게 유행했다. 호텔 오너들은 본연의 호텔사업보다는 이런 부수적 사업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현금 수입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호텔은 단지 부수적 사업을 운영하기 위한 모양새 갖추기로 전락했다.
1950~70년대 호텔리어에겐 자긍심이 있었다. 이런 자긍심에서 품위 있는 서비스가 나왔다. 버스보이(Bus boy·견습생)로 출발해 주니어 웨이터, 시니어 웨이터, 어시스턴트 매니저, 디렉터, 제너럴 매니저, 프레지던트(대표)로 이어지는 호텔리어의 진급 코스를 차근차근 밟아 나가는 것은 큰 보람이었다.
그러나 오락실과 터키탕 등장 이후 호텔리어의 자긍심도 무너져갔다. 현재 한국보다 국민소득 수준이 훨씬 낮은 태국이나 인도네시아만 하더라도 개인 풀(pool)을 갖춘 별장형 고급 리조트가 널려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의 호텔은 너무나 일률적이고 낭만이 없다. 호텔에 대한 철학, 열정, 사회적 지원이 실종된 탓이다.
호텔 봉사료(팁)를 요금에 무조건 포함시키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밖에 없다. 봉사료는 호텔 직원이 성심성의껏 서비스해준 데 대해 고객이 감사를 표하는 정표이다. 그러나 한국 호텔에서 봉사료의 의미는 완전히 퇴색했다. 고객은 식사 가격에 봉사료와 세금이 붙는 호텔에서 식사하는 것을 꺼리게 됐다. 고객이 직접 봉사료를 챙겨주던 시절에는 호텔 직원들이 그야말로 고객을 왕으로 모셨다. 호텔 웨이터는 단순히 짐을 옮겨주는 사람이 아니라 고객의 대화 상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직원을 찾아보기 어렵다.
특급호텔 하나를 지으면 투자금을 회수하는 데 30년이 걸린다. 그나마 적자 신세를 모면했을 때의 얘기다. 반면 골프장을 지으면 투자금을 뽑는 데 2년밖에 안 걸린다. 특급호텔을 운영하는 재벌은 체면 때문에 계속 끌고가는 측면도 없지 않다. 팔려고 내놔도 잘 팔리지 않는다.
재벌, 체면 때문에 끌고간다
서울 특1급 호텔의 하루 객실료는 40만원이다. 비싸도 너무 비싸다. 외국 관광객이 서울을 찾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럼에도 대다수 호텔은 적자다. 호텔리어들의 수입은 1970년대엔 비슷한 경력 대기업 직원 월급의 130%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60~70%대로 떨어졌다. 동시에 직원들의 비정규직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이다. 서비스의 질이 떨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서울 중심가의 모 호텔은 과거엔 50개의 레스토랑을 운영했지만 지금은 25개로 줄였다. 객실 대부분을 사무실로 임대하는 호텔도 많다.
나는 권력자의 양면성을 많이 보아왔다. 당연히 권위주의 정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한국의 호텔이 호황을 누리며 성장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호텔은 사치품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만연해 있던 시절, 박 전 대통령은 관광 및 호텔산업이 커다란 부가가치를 낳는다는 사실을 꿰뚫어봤다. 정부의 측면 지원 아래 호텔들은 외화 획득의 유용한 창구가 되었으며 많은 청년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했다. 정경유착의 폐해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박정희 정권은 온 힘을 다해 호텔산업을 육성했고 경쟁력을 키워줬다. 전두환 정권도 규제보다는 육성 쪽에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호텔은 생존의 기로에 내몰려 엄청난 위기를 맞고 있다. 불과 7년여 만에 이렇게 상황이 나빠진 것이다. 호텔업계 내부의 반성도 필요하지만 이렇게 된 데는 정부의 무능, 정책적 실패가 원인으로 지목된다. ‘호텔은 가진 자들만 이용하는 곳이니 세금 왕창 매기고 규제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호텔이 망하면 관광산업도 망한다. 정부는 한국 호텔의 세계적 경쟁력 확보에 관심을 갖고 특단의 정책 변화를 추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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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료 제도의 폐지, 호텔직원 자격증 제도의 부활(전문성 향상에 도움), 중과세의 완화, 외국 관광객에 대한 세제혜택, 규제철폐 및 행정지원 활성화, 대규모 국제행사 유치가 정책적 수단이 될 수 있다.
호텔측도 세계적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숙박시설, 비전문적 경영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 전국의 여러 대학에 관광학과가 설치돼 있다. 그런데 지방호텔의 몰락과 직원의 비정규직화로 인해 관광학을 전공한 학생들은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고 있다. 물론 공무원은 안정되고 좋은 직종이다. 그러나 수많은 젊은이가 공무원으로 몰리는 사회는 한마디로 미래가 없는 사회다. 이래서는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관광학과 학생들의 고민과 좌절을 보면서 선배 호텔리어로서 가슴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