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호

파리에는 95번 버스가 있다

  • 박미애

    입력2006-12-08 14: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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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에는 95번   버스가   있다
    파리에는 95번 버스가 있다. 95번 버스는 파리 15구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방브를 출발해 209m의 길쭉한 얼굴로 파리 시내를 굽어보는 몽파르나스 타워, 북적거리는 렌 쇼핑 거리를 지나, 헤밍웨이의 향수를 품어내는 카페 레 두 마고, 검게 바랜 얼굴빛으로 근엄하게 서 있는 파리 최고령 무슈인 생 제르망 데 프레 교회, 한 시대의 미술사를 격렬하고도 화려하게 장식한 국립 보자르학교, 골동품 가게들의 낡은 체취를 싣고 센 강을 건너, 루브르 박물관 안마당을 살짝 돌아 가르니에 오페라와 한바탕 춤을 추고, 생 라자르 역을 따라 하인리히 하이네와 프랑수아 트뤼포가 잠들어 있는 몽마르트르 언덕까지 달려가는 버스다.

    여행객에게는 가이드가 필요 없는 이상적인 관광버스였지만, 나에게는 오페라 거리에 자리잡은 어학원으로 데려다주는 통학버스일 뿐이었다.

    파리의 버스는 유난히도 많은 할아버지들, 할머니들, 아이들을 실어 날랐다.

    그날은 사랑스러운 햇살과 달콤한 정적이 사분의 삼박자로 고요한 리듬을 타고 있었다. 갑자기 파란 눈에 살구색 볼을 가진 젖먹이가 울기 시작했다. 버스는 한동안 록 버전의 아이 울음소리만 가득 태웠다. 그런데도 아이의 아빠는 울음소리에 전혀 동요하지 않는, 오히려 침착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묻는 것이었다.



    “우리 아가, 왜 화가 난 거야? 아빠한테 말해봐.”

    아이 아빠의 이성적이고 차분한 질문에 젖먹이가 울음을 그친다는 것은 센 강에서 고래를 만나는 것과도 같은 일이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은 안타깝다는 듯 아이와 아이 아빠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나 신경을 자극하는 거친 울음소리 속에서도 아빠는 여전히 같은 질문뿐이었다. 결국, 아빠는 아이가 우는 이유를 찾아냈다.

    “그래서 울었구나, 미셸. 담요를 달라고? 아빠가 몰라서 미안해.”

    잠잘 때면 습관적으로 덮고 자는 자신의 초록색 줄무늬 담요를 잡아쥔 아이. 버스는 이내 조용해졌다.

    파리의 퇴근길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신생아를 혼자 재우고, 잘못을 저지르면 아이의 뺨에 손을 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부모들이 사는 곳, 혹시 다칠까 노심초사 아이들을 쫓아다니며 함께 놀아주기는커녕 놀이터 모래밭에 장난감과 아이들만 덩그러니 남겨두고는 벤치에서 엄마들끼리 수다를 떠는 곳, 가정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열다섯 살 무렵부터는 이성 친구를 부모 집에 데려와 한방에서 잘 수 있는 곳, 나쁜 것들은 학교에서 아이들끼리 배운다며 아이가 원한다면 중학교까지만 국립학교로 보내고 나머지는 집에서 개인교육을 하겠다는 아빠가 있는 곳, 미혼모가 얼굴 들고 당당히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곳, 해외로 입양되는 아이가 없는 곳, 결혼 전 동거가 너무나도 당연시되는 곳, 임신부와 아이들을 동반한 엄마는 슈퍼마켓 앞에 길게 늘어선 줄에서도 열외인 곳, 프랑스. 나는 그 곳에 서 있었다.

    사람들의 삶은 제각기 너무나도 다르고 동시에 너무나도 똑같았다.

    저녁 7시 무렵, 서울의 퇴근 시간처럼 파리의 귀가 길도 만만치 않았다. 조금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붐비는 버스 안, 운이 좋게도 빈자리 하나가 내 몫이 되었다. 피곤에 지쳐 앉으려는 순간, 바로 옆에 서 있던 금발머리 여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리를 양보하려는데 그 여자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기절한 여자를 보고 놀란 사람들은 버스 기사에게 환자가 있다고 소리를 질렀다. 주위에 있던 두 사람이 그녀를 부축해 버스에서 내렸다. 나도 그 여자의 짐을 들고 총총히 따라 내렸다.

    마침 버스 정류장 앞이었다. 정류장의 긴 의자에 몸을 누인 그녀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병이라며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버스로 다시 돌아가라고 권유했지만, 버스 기사는 이미 응급차를 불렀고, 모든 승객에게 하차를 요구했다. 이유인즉, 응급차가 올 때까지 그녀를 위해 버스를 세우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닭장 같은 버스 안에 갇혀 있던 수많은 사람이 한마디 불평도 없이 버스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어느새 하늘은 짙은 코발트빛으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조지 바상 공원

    파리는 모두 20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파리 중심부인 1구 루브르 박물관을 시작으로 오른쪽으로 달팽이집 모양의 원형을 그려 나가면, 3구인 마레 지역에 닿고, 5구 팡테옹과 대학가를 거쳐 서북쪽의 8구 샹젤리제 거리, 다시 동쪽으로 11구 바스티유 광장과 12구 나숑 광장까지 돌아서면 정남쪽의 13구, 다시 남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전형적인 주택가 14구에서 16구까지 돌아, 정북쪽의 몽마르트르 언덕을 올라가 예술가가 많이 모여 산다는 동쪽의 20구에서 마무리하게 된다.

    나는 파리의 젊은 중산층이 가장 많이 모여 산다는 15구에 살았는데, 지금도 집 앞 95번 버스 정류장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늘 버스 창문을 통해 조지 바상 공원을 확인하고 내렸기 때문이다.

    95번 버스는 폭트 몽마르트르에서 몽파르나스까지만 가는 단기운행 버스와 방브까지 가는 장기운행 버스, 두 가지가 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면, 방브까지 운행하는 버스를 타야 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것도 모르고 몽파르나스 역에서 하차해 헤맨 적이 있다. 다행히 보르도에서 남편을 보기 위해 파리에 왔다가 95번 버스를 탄 아주머니 덕택에 무사히 집을 찾을 수가 있었다. 버스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몽파르나스의 광활한 사거리에서 다른 편의 정류장을 찾아 다시 방브까지 운행하는 95번 버스를 탔는데, 그때도 어디에서 내리냐는 아주머니의 질문에 모르겠다고 대답해버렸다. 모르는 게 사실이었으나, 대답하고 나서 나 자신이 사는 집도 모르는 바보처럼 느껴졌다.

    파리에는 파리 근교 북서쪽의 블로뉴 숲과 남동쪽의 방센 숲을 비롯해 동네마다 스쿠아라고 하는 아이들의 작은 놀이터에서부터 각기 다른 얼굴과 몸통을 가진 분수들과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찬 큰 공원까지 아름다운 공원이 많다. 그야말로 자연친화적인 환경이 파리의 얼굴이었다. 물론 거리마다 쉽게 눈에 띄는 강아지들의 분비물 때문에 원시적인 자연친화라고도 할 수 있지만 말이다.

    15구의 콩벙셩 지하철 역에서 가까운 조지 바상 공원은 원형 분수를 중심으로 아이들을 위한 인형극이 열리는 기뇰 극장, 6월 음악축제 때면 어김없이 부드럽고 발랄한 선율을 내뿜는 실외 공연장, 갖가지 꽃이며 나무들이 가지런히 각자의 이름표를 들고 서 있는 작은 식물원, 파리에서는 몽마르트르에서나 만나볼 수 있다는 조그마한 포도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빵 굽는 냄새, 아주머니의 미소

    손녀에게 선물로 줄 핑크빛 털 스웨터를 뜨는 동네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던 곳, 브리를 비롯해 이름도 외우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치즈로 찌운 살을 빼기 위해 열심히 뛰었던 곳, 정원 오른쪽의 빨래방에서 빨래를 돌려놓고는 강아지들과 아이들을 구경하던 곳, 열다섯 살에 읽은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레마르크의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서른이 되어서 다시 한 번 읽었던 곳이다.

    딸기 케이크 위의 하얀 슈크림처럼 달콤한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날이면, 분수 위 잔디 쪽에는 자리가 통 나질 않았다. 아이들과 나들이 나온 가족들,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남녀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파리지앵은 햇살을 포도주와 카망베르 치즈만큼이나 사랑했다. 하지만 우울증 환자 제조기라 부르는 파리의 겨울은 우기인데다 몹시 길었다. 5월 말이나 되어야 겨울옷을 정리했으니, 실상 여름이라는 단어를 붙여볼 수 있는 건 6월에서 8월뿐이었다. 파리는 따뜻한 나라에 대한 노스탤지어로 가득했다. 그래서 그 많은 아프리카 식민지가 필요했던 것일까.

    공원 뒷문 쪽에는 아름드리 체리 나무가 있었다. 해마다 검붉고 탐스러운 체리가 먹음직스럽게 열렸는데, 한국식으로 몰래 따먹으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애를 써봤지만 훌쭉한 그 키를 넘지 못하고 번번이 아쉬운 실패만 맛봐야 했다. 한국 같았으면 벌써 누군가 수확해갔을지도 모르지만 며칠이고 검붉은 향기는 그대로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저녁 갑자기, 공원 관리인으로 말미암아 그 시리도록 붉은 열매가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6월, 파리에서 먹는 검붉은 체리의 쌉쌀하면서 달콤한 그 맛은 평생 잊지 못할 첫사랑과의 첫 키스와도 같았다.

    95번 버스 정류장쪽 공원 담 바로 밖에서는 토요일과 일요일마다 고서적 시장이 열렸다. 그곳에 가면 동화책에서부터 전문서적까지 다양한 고서적을 싼 값에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샤갈이며 고흐의 그림책을 많이 산 곳이다. 흥정이란 어느 나라에나 있는 좋은 관습이었다.

    고서적 시장 건너편에는 맛있는 빵집이 하나 있다. 막 포알란이라는 커다란 빵을 만들어내는 집으로 유명했지만, 잠봉과 치즈를 넣어 만든 퍼이잠봉이 특히 나를 유혹했다. 퍼이는 얇은 층의 빵이 나뭇잎처럼 겹겹이 싸여 있는 걸 말한다. 처음에는 발음이 잘 되지 않아서 주문할 때마다 어정쩡하게 입을 떼고는 했는데, 푸근하고 넉넉한 외모의 주인아주머니는 친절하게도 발음까지 교정해주곤 했다. 빵 굽는 냄새가 은근하게 풍기는 시간이 되면, 친절한 그 아주머니의 둥근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모든 프랑스 사람이 다 아주머니의 착한 미소를 닮은 건 아니었다.

    프랑스의 사회복지 제도

    불어 선생님으로 만나게 된 나탈리는 알리스라는 세 살짜리 딸과 루이라는 네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혼자 사는 서른여덟 살의 파리지엔이었다. 직업은 어학원 선생이지만, 1960∼70년대 음악 그룹의 여성 리드 보컬이었다.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하는 비주류 음악인이지만 이미 앨범도 몇 장 냈고, 프랑스 각 지방을 비롯해 근교 유럽 지역까지 일년에 한두 번씩 공연을 다녔다. 자유를 사랑하고 반정부적인 사상의 소유자인 그녀는 완전한 좌파로, 광고의 무차별적인 횡포에 반대해 광고 반대 캠페인 스티커를 지하철에 붙이고 다니기도 했다.

    그녀의 집은 파리 20구로,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에 가면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동네 아줌마들의 아지트인 포아송 블루카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8층 건물의 꼭대기에 위치한 아파트는 입구 왼쪽으로 아담한 부엌이, 오른쪽으로 시사 잡지와 아이들의 장난감 몇 개가 널브러져 있는 화장실이 있었다. 짧은 복도를 지나면 넉넉한 거실이 나오는데, 그녀의 취향을 대변하듯 1960∼70년대 음반과 영화비디오, 책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1960∼70년대 스타일의 옷을 주로 입었는데, 그녀의 아이들과 그녀의 거실도 그녀처럼 그 시절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새로운 것이 발명되고 새로운 것이 쏟아져 나오던 1960∼70년대의 독실한 신봉자였다. 그녀가 말하길, 지금은 그 시절만큼 새로운 것도 없고, 그때 만들어진 물건만큼 튼튼한 것도 드물다고 했다.

    이 집에는 또 다른 짧은 복도를 끼고 아이들과 그녀를 위한 두 개의 방이 있었고, 방 건너편에는 부엌 크기만한 욕실이 있었다. 나탈리 집의 하이라이트는 거실부터 두 개의 방 길이를 합친 정도의 넓은 베란다가 있다는 것이다. 화초 기르기를 좋아하는 그녀 덕에 갖가지 희귀한 꽃과 식물들을 구경할 수 있는 전망 좋은 테라스였다. 그녀는 그녀의 집만큼 유쾌하고 솔직하고 열린 생각을 가진 예쁜 웃음이 돋보이는 여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유방암 선고를 받았고, 수술과 치료를 위해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루 두 번의 불어 수업으로 받는 700유로가 조금 넘는 돈이 수입의 전부였는데, 아픈 몸 때문에 그 일조차 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사실, 한국 돈 90만원 정도의 월급으로 큰 아파트에서 혼자 두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한국에서도 상상하기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생활의 바탕이 되는 최소한의 경제활동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은 눈앞이 깜깜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녀는 정부의 의료보조금으로 수술을 받았고, 치료 후 다시 어학원 선생님으로 복직했다. 프랑스의 사회복지제도 덕이다. 한 달 벌어 한 달 겨우 살아가는 그녀는 이미 암 선고 전부터 정부의 집 보조금과 아이들 보조금으로 그녀만의 여유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고, 암 선고 후에도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미식가의 행복

    프랑스의 사회복지제도는 자국민뿐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적용된다. 기본적으로 모든 학생은 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알로카시옹’이라는 20만원 상당의 집 보조금을 받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새벽에 갑자기 가슴이 너무 아파 응급실에 간 적이 있는데, 너무 정신없이 달려가느라 지갑이고 신분증이고 하나도 챙기질 못했다. 그럼에도 20만원이 넘는 각종 검사를 밤새 받았고, 그 치료비를 1년이 넘어서야 낸 기억이 있다.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동생이 다쳐 새벽에 응급실을 간 적이 있다. 응급실에 도착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했던 일은 응급실 접수비를 내는 것이었다. 그러한 기억의 조각들이 겹쳐지는 파리에서 진정 인간을 위한 인간의 제도는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자칭 미식가인 나는 음식문화에도 관심이 많다. 그 나라의 음식을 먹어보지 않고 그 나라를 이해할 수는 없다.

    프랑스식 아침식사는 보통 빵에 버터와 잼을 발라 먹는다. 빵 종류도 다양한데, 얇고 초승달 모양인 페이스트리 종류의 크루아상, 딱딱한 바게트, 속에 초콜릿을 넣고 둘둘 말아 버터를 바른 빵 오 쇼콜라, 그리고 달걀을 많이 넣은 둥글둥글한 모양의 브리오슈가 있다. 카페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때울 때는 보통 오렌지 주스나 우유, 커피 등에 버터와 잼, 크루아상을 주로 먹는다. 아침에 마시는 우유나 차, 커피는 주둥이가 큰 컵이나 움푹한 그릇에 넣는데, 크루아상 같은 빵을 찍어 먹기 위함이었다.

    식사는 보통 세 가지 코스를 거치는데, 먼저 앙트레라고 하는 전채요리로 수프, 샐러드나 소시지, 햄을 얇게 썬 샤르퀴트리 등을 먹는다. 주 코스로는 소스를 얹은 생선이나 고기 요리가 나오고 감자나 밥, 파스타, 채소를 곁들여 먹는다. 다음으로 치즈를 먹고, 아이스크림이나 과일 파이, 과자, 케이크 종류를 후식으로 먹는다.

    프랑스 요리는 너무나 다양하고 레스토랑마다 맛도 다르기 때문에 추천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나 전채요리로는 허브와 올리브로 요리한 달팽이를 다시 그 껍데기에 담아 내놓는 에스카르고 아라 부르기뇬, 거위의 간으로 만든 푸아그라와 샐러드, 연어가 일반적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프랑스 요리로는 수탉에 적포도주, 채소, 마늘, 양파, 양송이버섯을 넣고 찐 코코뱅, 갈빗대 모양의 쇠고기 스테이크 앙트르코트, 부드러운 양고기를 버터에 구운 다음 버섯, 채소, 마늘 등 여러 가지 고명을 얹는 누와제트 다뇨가 있는데, 주 요리로 시도해볼 만한 음식이다.

    오페라 뒷골목의 ‘진주’

    파리는 프랑스 음식뿐 아니라, 그야말로 전세계 음식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는 도시다. 우선 오페라 거리 주위에는 일본인의 거리라는 애칭답게 일본 음식점이 즐비하다. 하지만 일본인 주방장이 직접 요리하는 식당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일본 음식을 좋아하는 프랑스 고객 덕분에 중국 사람들이 일본 식당을 운영하는 사례가 늘어났고, 이제는 한국 음식점에까지 중국인이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히구마라는 라면 전문점은 어느 관광책자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유명한 일본 식당이지만, 오페라의 히구마는 이제 더는 일본 음식점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중국 스타일로 변했다.

    그런 와중에도 일본인 주방장 두 명이 직접 운영하는 오사카식 일본 식당이 피라미드 역에서 5분 거리에 있다. 이곳에서는 셀프 서비스이지만 공짜로 무제한의 차를 마실 수 있었고, 점심에는 우동과 유부초밥 두 개를 8유로에 먹을 수 있는 저렴한 메뉴도 있다.

    레 알 근처에는 각종 수프와 샐러드 등을 뷔페식으로 먹을 수 있는 저렴한 식당과 각종 꿀과 잼, 빵으로 아침식사를 즐길 수 있는 식당이 있다. 샤틀레 근처에는 모음의 노래라는 프랑스 식당을 추천할 만하고, 생 미셸 식당 거리에서는 아랍·터키·스위스·프랑스·인도 음식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마레 지구에서는 케밥에서부터 전통 유대인 요리까지 맛볼 수 있는 집을 쉽게 찾을 수 있고, 9구 주위에서는 다양한 퓨전 음식을, 13구에서는 베트남·태국·중국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대만 친구가 소개한 파리 유일의 대만 식당이라는 진주는 오페라 뒷골목에 있다. 대만의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운영하는 이 식당에서는 직접 만든 녹차 디저트와 찹쌀로 만든 새알심이 든 대만 차를 음미할 수 있다.

    파리뿐 아니라, 교외로 조금만 나가도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좋은 프랑스 음식을 맛볼 수 있다. 파리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진 곳에는 밀레의 그림 ‘만종’의 배경이 된 마을, 바르비종이 있다. 이곳에는 호텔 옆에 붙어 있는 레스토랑이 많은데, 식사 서비스나 음식의 맛이 가격에 비해 결코 나무랄 것이 없다.

    파리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도빌은 영화 ‘남과 여’의 촬영지로 미국인의 휴양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바로 옆 마을 트루빌과 도빌은 모두 휴양 도시여서 콘도나 호텔 시설이 좋다. 바다를 끼고 있는 노르망디의 마을이라 대합, 바다가재, 새우, 대하 등 싱싱한 해산물 요리를 값싸게 맛볼 수도 있다.

    파리에서 서쪽으로 360km 떨어진 곳에는 가톨릭 성지로 유명한 몽 생 미셸이 있다. 이곳은 오믈렛과 양고기가 유명한데, 이 지역의 사과로 만든 술인 칼바도스와 1510년 한 수도사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약초 술인 베네딕틴도 맛볼 만하다.

    햇살 담은 피크닉

    프랑스 북동부에 위치한 알자스 로렌 지방에서는 소금에 절인 양배추에 저장해놓은 돼지 허릿살·무릎살, 신선한 훈제 소시지, 돼지 내장, 베이컨, 햄, 삶은 감자 등을 곁들인 슈크루트 가르니가 유명하다. 이 요리는 차가운 알자스 포도주 한 잔을 곁들여야 제 맛이다.

    리옹과 디종 등 프랑스 중부 지역에서는 매우 유명한 고전적 스튜 요리로 쇠고기에 부르고뉴산이나 보졸레산 포도주를 넣고 부드러워질 때까지 쪄서 베이컨과 양파, 버섯 등을 넣고 익히는 뵈프 부르기농을 맛봐야 한다.

    앙리 4세가 훌륭한 요리와 훌륭한 포도주가 있는 천국이라고 부른 프랑스 남서부 지방은 아르카송과 굴, 섭조개가 풍부한 마렌 해안선,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지는 보르도 주변이다. 이 지역에서는 여러 종류의 소시지와 고기를 알맞은 크기로 썰어 강낭콩과 함께 볶은 카술레가 유명하다.

    니스, 칸, 마르세유 등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서는 숭어, 도미, 쏨뱅이, 뱀장어 같은 바다 생선에 토마토와 사프란, 올리브유 등으로 향을 낸 생선 수프인 부야베스를 빼놓을 수 없다. 프로방스에서는 음식에 분홍 마늘과 다채로운 후추, 토마토, 가지, 호박, 아스파라거스 등을 많이 사용하는데, 각종 버섯과 올리브 등으로 만끽하는 프로방스의 냄새는 잊을 수가 없다.

    사람은 음식을 만들고, 음식은 다양한 색깔의 추억을 빚어낸다.

    일본에서 공동 전시회를 열기 위해 친구들과 모임을 자주 갖곤 했다. 겨우내 친구들의 집을 돌아가며 모이다가, 드디어 햇볕이 본격적으로 내리쬐자,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우리가 모인 곳은 시테 유니버시테 옆에 있는 몽수리 공원. 각자 한 가지씩 들고 온 것을 내놓으니, 슈퍼마켓에서 샀을 때 그대로인 랩 속의 방울토마토, 2.5유로짜리 가격표가 붙은 잠봉, 냉장고에 있던 치즈 조각들, 빵가게에서 바로 산 바게트, 비닐봉지 속의 바나나, 1ℓ짜리 물통이었다. 피크닉이라고 하면, 나무로 짠 커다란 피크닉 가방에 유리로 된 포도주 잔과 접시, 포크, 나이프를 챙겨서 푸짐한 음식을 꺼내놓아야 제격이겠지만, 햇살만 웃어준다면 어느 잔디 위에서나 금방 행복한 식탁을 차려내는 것이 진정한 피크닉이 아닐까.

    파리지앵들은 피크닉을 좋아했다. 햇살이 비치는 어디라도 음식을 싸들고 밖으로 나간다. 파리에서 피크닉을 할 수 있는 달이 1년 중 두세 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길고 지루한 겨울이 있음으로 해서 햇살의 소중함과 행복은 두 배가 된다.

    햇살 담은 피크닉으로 바캉스 예행연습을 하다가, 본격적인 여름이 되면, 파리지앵들은 남부로, 남부로, 더 달콤한 행복, 더 강한 햇살을 찾아 휴가를 떠났다.

    프랑스 친구들

    프랑스는 연말 연초의 휴가, 스키 바캉스, 수많은 공휴일, 4주나 되는 여름휴가까지 쉴 수 있는 시간이 많다. 언제 공부하고 언제 일하느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1차에서 3차산업까지 골고루 세계 선두를 달리고 있는 걸 보면 참으로 혜택 받은 나라가 아닌가 싶다. 넓은 토지에 때마다 적절한 햇살과 적당한 비가 내리니 식량이 풍부하고, 조상이 물려준 훌륭한 유물로 많은 돈을 벌어들이며 관광대국을 이끌어 나가고, 문화와 예술을 노래할 여유가 있으니 첨단과학에 눈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 사람은 여름 바캉스만 바라보고 한 해를 사는 사람들 같다. 돈이 많은 사람이든 돈이 없는 사람이든 여름엔 모두 떠난다. 부자는 고급 자동차와 스포츠카를 타고, 가난한 사람은 바캉스 대출을 받아 차를 빌려서 떠난다. 떠난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았다.

    떠난 사람들은 모두 바닷가에 모였다. 수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일광욕을 하기 위해서였다. 태양을 덮고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다가 돌아오는 것이 떠난 사람들의 권리이며 의무인 듯했다. 떠난 사람들의 자리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나 방학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이 차지했다. 그리고 9월이 되면, 파리는 다시 옛 주인들을 맞이하기 위해 갈색이며 노란색 잎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파리에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었고,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귈 수 있었다. 어학원에 다닐 때 만난 율과 항의 엄마, 아빠는 결혼에 대한 좋은 생각을 품게 해준 향기 나는 사람들이다.

    율의 아빠는 프랑스에 1년 동안 연수하러 온 검사였다.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 공무원의 사명을 가지고 주관 있게 사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의 아내는 파리에서 난방비를 아끼려다가 동상에 걸렸다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할 정도로 소박하고 검소한 분이다. 나는 일찍이 검사 부부의 생활이 그렇게 검소한지 알지 못했다.

    어느 유학생의 일기

    학교에서 만난 프랑스 친구들은 파리 유학 생활에 활력소와 힘이 되어주었다. 학교에서 내게 처음 말을 건넨 친구는 시리아에서 두 살 때 프랑스로 이사 온 ‘린’ 이다. 학교 졸업 후, 나의 불어 실력 향상을 자진해서 도와준 친구인데, 어린 나이답지 않게 진지한 눈으로 삶을 바라보는 그녀와 나누는 대화는 즐겁기만 했다. 언어 장벽은 그야말로 하나의 장벽일 뿐이다. 감정의 공유와 생각의 일치는 마음을 연결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윌리는 프랑스령인 구알루프 태생인데, 영화 공부를 하기 위해 돈을 모아 학교에 들어온 노력파다. 1학년을 마치고 만화영화 특수효과를 공부하기 위해 툴루즈로 떠났지만, 감독이 되겠다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졸업 후 바로 취직해서 밤낮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친구다.

    스테파니는 알자스 로렌 태생이다. 영화배우가 꿈이었지만 결국 감독 학위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 지방 방송국에서 비디오저널리스트로 일했다. 알자스 로렌 지방은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그들만의 특별한 문화가 있는 곳이다. 독일과의 특별한 역사 때문에 외부 사람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만의 전통을 유지하려는 의지와 분위기가 강하다.

    하지만 스테파니의 친구로 방문해서 그랬는지, 친절하고 순수한 시골 사람들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스테파니의 집에서 맛본 알자스 맥주와 포도주, 치즈의 독특한 맛은 파리에서 온 동양 여자를 신기하고도 부러운 듯 쳐다보던 동네 소년의 얼굴만큼이나 쉽게 잊히지 않았다.

    베트렁, 티에리, 기욤, 와파, 안톤, 알란, 라우리, 샤를, 루돌빅, 아델, 안토니, 오렐리, 브노와, 엘리즈, 레난, 소피안, 소피, 다비드, 알렉산드르, 꼬린, 스테판, 프레드 등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본다. 비록 처음에는 한번에 외우고 발음하기 힘든 낯선 이름들이었지만, 함께 나눈 시간과 마음을 생각하니 이제는 국경 없는 한가족의 이름처럼 느껴진다.

    파리에서는 8년 이상 박사 과정만 하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사회 경험 없이 공부만 하다가 나이가 들어버린 사람은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프랑스와 한국 사이에서 우울하게 서성였다. 친구도 별로 없이 골방에서 우울한 스케치를 하고 있는 경우도 가끔 있는데, 그 암담함이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리라. 외화까지 써가며 유학을 온 이유를 곱씹는 이유는 남보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공부해서 원하는 삶을 누리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누구에게나 그런 선물을 안겨주지 않는다.

    빨리 공부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사회에 적응해 일자리를 구하기가 쉬운데, 그 떠날 시간을 놓친 사람들은 어정쩡하니 파리에 남게 된다. 결국, 파리에는 두 가지의 불법 직업이 공공연히 생겨났다. 하나는 공항 픽업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여행 가이드로 남는 수많은 석·박사 출신의 무리이고, 또 다른 하나는 유학 중 생긴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남았다가 경제활동을 위해 민박집을 경영하는 부류다. 경제적으로 조금 영유가 있으면 차를 사서 가이드로 나서거나, 집을 빌려서 민박집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학생의 모습이다.

    퐁네프의 연인들

    인터넷과 지면으로 열심히 광고해도 고객이 없으면 공항으로 직접 달려가 손님을 찾아야 했고, 30∼40명의 배낭객과 한두 개밖에 되지 않는 화장실을 갖고 실랑이를 해야 했지만 그들에게도 신나는 꿈 하나가 있다. 부모 세대에서 이루지 못한 성공의 꿈을 프랑스에서 태어난 자식에게 고스란히 물려주는 것이다. 그들은 그 꿈의 실현을 위해 파리 5구에 있는 집을 구해 이사를 가는데, 수많은 유명 정치인과 인재를 배출한 학교, 그랑제콜에 가장 많은 학생을 보낸다는 앙리 4세 중·고등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기 위해서다. 가슴 안에 잿빛 하늘과 붉은빛 태양을 동시에 담고 사는 그들의 삶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시 서서 마시는 쓴 에스프레소 한 잔과 같다.

    집에서 지하철 7호선을 타고 시내 방향으로 나가다가 샤틀레 전 역인 퐁네프 역에서 내릴 때가 많았다. 지하철 퐁네프 역은 퐁네프 다리와 바로 연결되어 있다. 퐁네프는 1980년대 누벨 이마주의 선두주자로 불리며 천재적인 영상파 감독으로 각광받던 레오 카라의 1991년 작품인 ‘퐁네프의 연인들’ 덕택에 유명해진 다리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되새기며 걷기를 즐겼다.

    ‘새로운 다리’라는 뜻의 퐁네프는 16세기 말에는 최신 다리로 지어졌지만 현재는 센 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퐁네프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는데, 퐁네프에서 만난 연인들은 사랑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레오 카라 감독도 이 전설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줄리엣 비노시가 누워 있던 반원형 모양의 센 강쪽으로 돌출된 돌 의자에 앉아 있다 보면, 어느새 프랑스 혁명 200주년 축제가 펼쳐지던 그날 밤처럼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알렉스와 미셸이 재잘거리며 춤을 추는 듯했다. 그들이 3년 만에 재회한 크리스마스 밤, 다리 난간 위에 서 있던 두 주인공이 센 강으로 떨어지고, 바둥거리던 두 사람을 마지막으로 운행하는 모래 운반선의 노부부가 구해주고, 사랑을 위해 파리를 떠나는 장면은 사랑이 이뤄진다는 퐁네프의 전설을 현실화하고 있었다.

    카라 감독은 파리 중심가인 퐁네프 다리에서 촬영하기 위해 파리 시에 교통 통제를 해달라고 신청했으나, 결과는 불허였다. 이어지는 프랑스 예술인들의 촬영 허가 진정서에 당시 파리 시장이던 자크 시라크는 3주 동안의 촬영을 허가했다. 3주 동안 촬영한 것은 겨우 영화 5분 정도의 분량이었으니, 나머지 촬영은 2만여 인원이 동원되고 유명한 건축가 크리스티앙 마지를 비롯해 설계사, 조각가, 무대 디자이너 등이 함께 참여해 1년7개월 만에 제작된 실제 다리와 동일한 세트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인도에서 얻은 사랑의 씨앗

    퐁네프의 전설처럼, 퐁네프가 있는 파리에서 만난 연인들도 사랑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파리에 온 지 6개월쯤 됐을 때, 문화원에서 처음 만난 미현 언니도 그 주인공 중 한 명이었다. 언니는 8세 연하의 피에르와 파리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만난 지 한 달 만에 언니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후 혼자 남은 피에르는 막을 수 없는 지독한 사랑 때문에 힘들어하다가, 애지중지하던 재산 1호 오토바이를 팔아 한국행 비행기표를 샀다. 그리고 한국으로 날아가 미현 언니를 데리고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지금 두 사람은 사랑의 결실인 아들 막심과 딸 리자와 함께 소중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파리는 초콜릿처럼 달콤하고 영화처럼 낭만적인 사랑을 꿈꿀 수 있는 곳이었다.

    “인도에 가면 많은 것을 느낄 수가 있어요.”

    스위스 루체른의 작은 호텔 이층 침대에서 만난 스물한 살짜리 여자애한테 들은 얘기다. 그녀는 인도에서 3개월 동안 살았는데, 갠지스 강물로 밥을 해먹고, 동시에 강물에 시체를 띄우는 인도 사람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고 했다. 인생을 생각할 수 있다는 인도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고, 함께 프랑스로 날아와 알프스 산속에 보금자리를 꾸린 남녀가 있었다.

    우연히 친구의 소개로 파리에서 만난 그 주인공, 경희 언니는 옷차림부터 심상치 않았다. 개량 한복을 시원하게 차려입은 경희 언니는 프랑스 말이 서툴렀다. 그 다음해, 나는 사촌 동생과 함께 알프스 자락으로 언니를 찾아갔다.

    니스에서 알프스 산맥을 순회하는 산악열차를 타고 1시간 정도 가면 프제트니라는 작은 마을을 만난다. 그곳에서 다시 산 위로 운행하는 한국의 승합차 ‘봉고’ 모양의 마을버스를 타고 산속 작은 동네에 하차해서야 마중 나온 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언니의 지프를 타고 흔들거리는 산길을 따라 10분 정도 더 올라가 그녀의 연인, 질을 만났다.

    아기 눈물처럼 맑은 옹달샘

    질은 언니보다 열 살이나 많았지만,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소위 파리 부르주아의 출신이었지만, 젊은 시절부터 배 수리공으로 세상을 방랑한 자유주의자였다. 결국 인도에서 만난 사랑하는 그녀와 고향인 프랑스에 정착할 결심을 했고, 독특한 두 사람만큼이나 자유롭고 평화로운 해발 1200m에 버려진 집을 사들여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질은 프제트니와 산골 마을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마을버스 운전사다. 언니는 전공을 살려 몇 안 되는 학생을 가르치는 피아노 선생님이다. 언니는 집 주위의 땅을 개간해 토마토며 고추, 감자, 호박 등을 심었고, 질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서 집을 수리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아주 오래 전 양들의 침실이던 1층 공간은 공사 중임을 알리는 돌이며 흙, 각종 자재들이 가득했다. 언니와 질이 머무는 2층 공간만 겨우 공사를 마친 상태였다. 언니와 질을 위한 공간은 크게 방과 부엌을 겸한 거실이 전부였고, 그 중간에 욕실과 화장실이 연결돼 있다. 방 안에는 커다란 침대와 작은 탁자가 가구의 전부였고, 창 밖으로는 나무 한 그루가 집을 지켜주는 듯 버티고 서 있었다.

    허브를 넣은 닭 요리가 오븐에서 구수한 냄새를 피우고 있는 사이, 식탁 위에선 접시와 컵이 제자리를 찾아갔고, 영어와 불어, 한국어가 뒤섞인 다국적 대화가 시작되었다. 언니와 질은 영어로 얘기했는데, 인도에서 만난 그들은 불어보다 영어가 더 편하다고 했다.

    점심식사 후 집에 물을 제공해준다는 산속 작은 옹달샘을 구경하러 나섰다. 지프로 숲과 울퉁불퉁한 길을 헤치고 몇 분 만에 집에서 더 높은 곳에 다다랐다.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산맥을 바라보면서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인간이란 자연 앞에 너무나도 작은 존재일 뿐이다. 질을 따라 몇 걸음 옮기니 옹달샘을 만날 수 있었다. 소중한 보물이라도 대하듯 질이 조심스럽게 쌓아놓은 보호막 안에서 깊은 산골 옹달샘은 아가의 눈물처럼 맑고 솜털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집 앞뒤가 모두 산과 절벽이고, 집 자체도 비스듬한 산비탈에 걸쳐 있었다. 이웃이라고는 10분 정도 차를 타고 내려가야 찾을 수 있는, 그야말로 산중의 산이었다. 가장 가까운 곳의 이웃은 전직 대학 교수였다는 부부가 자연을 찾아 아이들과 낙향해 유기농사를 짓고 있다는 집이었다. 마당에는 학교에 가고 없는 아이들을 대신해 말 뼈다귀 두 개가 장난감과 흙 사이에서 뒹굴고 있었고, 현관 입구에는 갈색 머리의 젊은 여자가 다리에 깁스를 하고 의자에 앉아 바구니 속의 씨알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는 워킹 홀리데이로 몇 달 전에 영국에서 이 집에 일하러 왔는데, 자전거를 타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불어가 익숙하지 않은 언니에게는 영어로 말이 통하는 좋은 친구였다.

    침묵의 순간

    공동체로 형성된 이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유기농사를 짓고 태양열을 이용해 에너지를 공급받으며 자연주의자로 살아간다. 일주일에 한 번씩 공급받는 빵도 이웃 주민이 유기농으로 만들어서 제공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곡식이 혼합된 짙은 갈색 빵인데 보기와는 다르게 입에 넣으면 꽤 부드럽게 넘어갔다.

    저녁에는 유기농 빵과 함께 언니가 직접 씨를 뿌리고 수확한 각종 채소를 넣고 만든 향긋한 수프를 먹었다. 집에는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을 켜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불빛이 은은하니 운치가 좋다고 내뱉은 말은 갑자기 비명으로 바뀌었다. 다름 아니라, 불빛을 보고 창문으로 날아든 아기 손바닥만한 검은색 박쥐 때문이었다. 자연과 함께 자연 속에서 산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혜택이었지만, 어느 정도의 불편함은 웃음으로 넘겨버릴 줄 아는 여유와 너그러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도에서 얻은, 작지만 커다란 사랑의 씨앗은 프랑스의 알프스 산골짜기에 소중하게 뿌려졌고, 그들만의 삶의 철학으로 맑은 물을 붓고 따뜻한 햇볕을 주어 그렇게 조금씩 익어가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다양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생전의 친할아버지와 팔십이 넘으신 할머니, 고모네 가족들은 모두 성당을 다니는 가톨릭 신자이고, 큰아버지 식구들과 남동생, 올케는 교회를 다니는 개신교도이다. 부모님은 특별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 어머니를 따라 나 스스로 선택한 종교는 가톨릭이다.

    가톨릭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영세를 받아야 했고, 그 영세를 받기 위해서는 6개월 동안 신부님과 함께 성경 공부를 해야 했는데, 프랑스에선 영세 준비 기간이 2년이나 되었다. 왜 2년의 시간이 필요한지를 묻는 질문에 대모님과 수녀님은 “각자 스스로에게 주는 질문의 시간”이라고 대답했다. 과연, 진정 내 마음으로부터 원하는 것인지 생각해보라는 시간이다.

    그런데 2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수녀님과의 일대일 성경 공부, 한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전체 성경 공부, 학교 수업이며 과제·촬영·시험 등을 함께 해나가다보니 정신없이 한순간에 지나간 느낌이었다.

    파리의 한인성당 대신 프랑스 성당을 선택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실, 외국인으로 외국에 살다보면, 교민교회나 성당에서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처음 유학 가서 집을 구하는 문제부터 각종 행정문제 등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얻고,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 의지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과하다보면, 많은 간섭과 쓸데없는 말들을 나누게 되고, 외국 친구보다 한국 친구들하고만 어울리게 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새로 태어난 어린 식물’

    프랑스 성당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종교에만 몰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불어가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된 후의 일이었다. 그러한 열정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영세 준비는 그리 좋은 성적이 아니었다. 한순간도 마음 놓고 쉴 수 없는 빽빽한 학사 일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막을 헤매고 다니는 것처럼 수많은 장애물이 나를 가로막았다. 급기야, 영세를 받기 전에 포기하려는 순간도 있었지만 대모님과 수녀님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대모님은 평생 혼자 살아오신 프랑스 할머니셨다. 젊어서는 프랑스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일했고, 퇴직 후 독실한 종교인으로 성당의 많은 일을 앞장서서 이끌어 나가는 분이셨다. 남을 위해서 봉사하며 산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만 연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임을 그분을 통해 배웠다.

    영세를 받기 위한 의식은 1월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각자 대모와 대부를 정했고, 영세를 받는 동기와 결심을 쓴 편지를 사인과 함께 프랑스 추기경 다음 서열이자 파리 전체 성당의 책임자인 몽 세녀 방 투와에게 보냈다. 3월4일에는 파리 전체 성당의 영세 준비자들과 각자의 대모·대부님들, 각 성당의 신부님들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몽 세녀 방 투와는 300명이 넘는 영세 지망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축복의 말과 함께 양 볼에 하는 뽀뽀인 비즈를 해주셨고, 우리는 영세받을 준비를 한다는 의미의 보라색 스카프를 목에 둘렀다.

    드디어, 영세를 받는 2006년 5월15일 밤. 다니던 파리 14구 알레지아 생 피에르 몽후즈 성당에서 이 날을 위해 준비해온 사람은 총 17명이었다. 보라색 스카프를 두르고 성당의 모든 신부님과 함께 성당 밖에서 불을 피우며 초를 들고 서 있었다. 이미 성당 안의 불은 꺼졌고, 신부님의 뒤를 따라 성당 안으로 들어섰을 때, 초를 들고 기다리고 있던 모든 신자들은 하나 둘씩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이 날의 주인공인 우리가 하나의 불빛으로 해석되는 순간이었다.

    열일곱 명 중에서 첫 번째로 영세를 받는 나는 예행연습을 했는데도 많이 긴장했다. 긴장된 마음에 떨기도 했지만 감격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드디어 성당의 큰신부님이 머리 위에 성수를 뿌리며 축복을 내려주셨고, 영세를 받았다는 상징인 하얀색 스카프를 어깨에 둘러주셨다. 우리는 프랑스어로 ‘새로 태어난 어린 식물’로 불렸다.

    장장 3시간에 걸친 의식이 끝나고, 벅찬 가슴을 안고 집에 돌아온 나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영세를 받고 일주일 후인 일요일 오후, 각자의 성당에서 영세를 받은 새 신자들이 생 미셸에 있는 생 세르방 성당에 모두 모였다. 그리고 저녁 6시30분 노트르담에서 올리는 특별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생 미셸에서부터 시테 섬까지 걸어가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예상치 못한 소나기라 우산 없이 고스란히 비를 맞고 행진해야 했고, 빗속에 하얀색 스카프와 흰 옷을 걸친 우리들은 흥미로워하는 관광객들의 눈길을 한몸에 받았다.

    수녀들과의 점심식사

    3월 초와 마찬가지로 몽 세녀 방 투와가 주관한 노트르담 특별 미사는 새 신자들을 위해서 이미 자리가 예약된 상태였고, 그날의 인파는 뜨거운 기도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었다.

    기도는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며, 침묵 속에 조용히 문을 닫고 남모르게 마음으로 소통하는 것이며, 감사하고 용서를 구하고 소원하는 것이었다.

    2년 동안 함께 영세를 준비한 성당 사람들 중에 꼬린이라는 친구가 있다. 프랑스인 어머니와 세네갈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꼬린은 영세를 받기 오래 전 대모님을 미리 정해놨었는데, 바로 그녀의 아버지와 쌍둥이 형제인 고모, 다미안이었다. 다미안은 열네 살에 수녀가 된 이후로 세네갈에서 많은 봉사를 해왔다. 그 결과 손가락과 손목에 마비가 왔다. 그래서 수술 후 푸조에 있는 작은 수녀원에서 요양 중이셨다.

    휴가 없이 6개월 계약제로 일하고 있던 꼬린은 사랑니를 빼고 받은 일주일 병가 휴가를 이용해 다미안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리고 나에게 동행을 제안했다. 푸조는 파리에서 TGV로 2시간30분 정도 걸리는 아비뇽에서 7km 더 차를 타고 들어가면 닿는 인구 4000명의 작은 마을이었다. 프랑스 남부의 전형적인 마을로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었다. 바다도 멀지 않아서 눈을 감고 살며시 느껴보면 바다 향기가 실려 오는 것 같았다.

    푸조에는 언덕이 많은데, 그 언덕 위에 그대로 집을 지어서 지하는 정원과 이어지고, 지상 2층의 현관은 길 밖으로 이어지는 형태가 많았다. 언덕과 더불어 산도 많은데, 멀리 보이는 해발 2000m나 되는 산봉우리에 깔려 있는 하얀 모래가 마치 눈처럼 빛나고 있었다. 언덕이나 산에 깔려 있는 돌과 흙은 해변가 모래처럼 고운 하얀색이거나 산호처럼 붉은빛이 돌았는데, 먼 옛날에는 그곳이 바다였다고 한다.

    작은 수녀원의 3층 본채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고, 역시 내리막길의 비스듬한 언덕 위로 정원이 이어져 있었다. 정원 중간에는 작은 성당이 있었고, 그 정원 끝에는 방 두 개짜리 작은 독채가 있어서 꼬린과 내가 지내게 되었다.

    수녀원에는 다섯 분의 수녀님이 있다. 수녀원의 책임자이신 마리 조셉 수녀님은 덩치가 크고 큰 목소리에 활달한 성격이었다. 꼬린의 대모이신 다미안은 농담을 잘하고 음식 솜씨가 뛰어났는데 포근한 엄마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리 오딜이라는 수녀님은 푸조에서 떨어진 오랑쥐라는 마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인데 목에 무리가 와 말씀을 크게 할 수 없었다. 자상하고 너그러운 표정,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수녀님으로 꼽게 되었다. 안 마리라는 수녀님은 차분하시고 말도 별로 없었지만, 말할 때면 반드시 강한 남부 사투리를 써 이해하는 데 애를 먹었다. 다섯 번째 수녀님은 아쉽게도 이름조차 익힐 시간도 없이 한 번의 저녁식사 후 다른 수녀원으로 가셨다.

    세네갈식 닭요리

    푸조에서 보낸 하루는 단조롭지만 평화로웠다. 파리에서의 긴장된 생활과 약간의 몸살 기운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침의 자유를 허락하신 수녀님들 덕분에 우리는 일찍 잠자리에 들고 아침 늦게까지 밀린 잠을 잤다.

    오전 11시 미사에 참석하고, 점심을 먹은 후 짧은 낮잠을 자면서 휴식을 취하고 각자 스케줄대로 오후를 보냈다. 저녁 7시엔 정원 중간에 있는 작은 성당에서 기도를 했고, 저녁을 먹고 식탁을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세 끼의 식사는 모두 프랑스식으로 준비됐다. 특별 메뉴는 다미안의 세네갈식 닭요리였다. 저녁은 샐러드를 중심으로 오믈렛이나 탁트라는 파이류를 먹었고, 점심에는 입맛을 돋우는 음료로 시작해 채소류의 전식과 생선이나 고기류가 어우러진 푸짐한 본식, 과일 디저트와 치즈, 아이스크림, 커피까지 푸짐하게 먹었다. 사랑니를 뺀 꼬린은 가엾게도 진수성찬 앞에서 믹서로 간 음식을 아이처럼 떠먹어야 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작은 수녀원을 자신들의 집처럼 편하게 드나들었는데, 한 아주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정원에 들어와 피크닉 음식들을 먹었고, 동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수녀님들과 한가로이 차를 마셨다.

    마리 조셉 수녀님은 정원에서 포도며 토마토, 호박, 허브 등을 키우셨는데, 감기에 좋다며 직접 따주신 티열이라는 허브 잎과 그 잎으로 만든 40도가 넘는 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먹을 샌드위치, 요구르트, 살구까지 챙겨주셨다.

    푸조의 수녀원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내가 외국인임을 잊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과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은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이해하며, 보살피고, 보듬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다발을 만들어주신 꽃가게 아저씨, “떨이요, 떨이”를 외치며 사람들을 유혹하시던 과일가게 아저씨, 그 많은 인파 속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정한 미소를 보내시던 화장품가게 아저씨, 볼 때마다 예쁘다며 칭찬하시던 복덕방 아줌마, 등교길에 수줍은 봉주르를 매일 던져주시던 채소가게 아저씨, 좋은 저녁이 되라며 바게트를 안겨주시던 빵가게 아줌마, 빵가게 옆에 앉아 있던 거지 아저씨, 반갑게 웃음으로 맞아주시던 중국 반찬가게 아줌마, 한국말 인사를 익혔다가 말해주시던 15구 우체국 아저씨, 유모차 안에서 윙크로 나를 유혹하던 세 살짜리 남자아이, 안톤 집에 모여 떡을 나눠 먹으며 재잘대던 학교 친구들, 잃어버린 지갑을 주워 경찰서에 맡겨주신 노부부, 거친 숨결로 뛰어오는 나를 보고는 출발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문을 열어주시던 95번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 지하철 문 사이에 낀 몸을 함께 문을 열어 빼주고는 한바탕 웃던 사람들, 지루한 승객들을 위해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불러주던 지하철 운전기사 아저씨, 뒷사람을 위해 잠시 멈춰 서서 문을 잡아주던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 아파트 경비실 앞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감시하던 집채만한 털북숭이 강아지까지 파리에는 생각나는 얼굴이 참으로 많다.

    봉주르 파리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파리에서 따뜻한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었으므로. 하지만 인생이란 대로를 걷다보면, 어떤 날은 좋은 친구를 만나 콧노래를 부르며 향긋한 포도밭 길을 걷기도 하고, 어떤 날은 어둠이 가득한 뒷골목에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기도 하는 것이다. 남은 인생, 그 어느 골목길에서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좋은 인연이든 나쁜 인연이든 우리의 모든 이야기는 추억의 상자 속에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들어앉게 될 것이다. 그리고 햇살이 아름답게 쏟아지는 어느 날, 아름드리나무 옆 긴 벤치에 하얗게 앉아 가벼운 마음과 그윽한 눈빛으로 지나간 추억을 이야기할 것이다.

    당선소감



    산다는 것이 이렇게 매일매일 새로울 수가 있을까. 집을 나서면 새로운 사람들과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비록 일상의 자그마한 발견일지라도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나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어제와 다른 것들을 경험하고, 느끼고, 받아들이고, 변해가는 것. 하지만 새로운 것은 처음이고 익숙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몫이 아닌 듯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늘의 당선처럼 말이다.

    글을 쓰는 동안, 개인적으로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만 5년 동안의 이국 생활을 되돌아보고,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던 시간 말이다. 타지 생활은 다양한 색깔의 느낌과 사고, 감정들을 고스란히 담아주었다. 짧은 글에 그 많은 이야기들을 다 엮어낼 수 없어 아쉬웠다. 하지만 그 아쉬움은 그저 그 순간의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계속해서 글을 쓸 테니까. 글을 쓴다는 것이 마음에 존재한 벽을 하나 둘 허물어버리는 것이라면, 이번 당선은 그 마음에 향긋한 바람을 불어넣어준 것이다. 마음은 그 바람을 타고 콧노래를 부르며 흘러나올 것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흘러서 쏟아 부어낼 솔직하고 순수한 영혼이 살아 숨쉴 때까지만 글을 쓸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하겠다.

    아직 채워져야 할 것이 많은 글을 격려의 박수로 선택해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와,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 것인지 알게 해준 가족과 친구들에게 봄날 같은 마음을 전한다.



    파리에는 95번   버스가   있다
    박미애

    1972년 서울 출생

    한남대 국문과, 프랑스 파리 ESEC 영화편집과정 졸업

    방송작가, 취재기자

    일본 오키나와 Maejima 아트센터 갤러리 비디오 전시회

    영화 기획·제작·배급자



    여행으로 잠깐 외국을 다녀왔을 때, 외국인은 모두 친절한 줄만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관광객을 대하는 서비스업자들은 당연히 그러해야 하지 않은가. 어느 곳이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는 부드러운 말투를 쓰는 사람, 신경질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 쌀쌀맞게 대답하는 사람, 미안할 정도로 친절한 사람 등 이런저런 타입의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걸 살아가면서 알게 되었다. 한국처럼 말이다.

    지금은 한국도 많이 달라졌지만, 예전에는 주말이 보통 하루 반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만족하고 살았나 모르겠다. 간사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항상 최근 환경에 더 익숙해지게 마련이고, 끝없는 욕심에 아쉬움을 품고 산다. 금요일 저녁부터 주말이 시작되는 프랑스, 그럼에도 월요일 아침이면 왜 그렇게 주말이 짧게 느껴지는지, 또 다음 일주일을 기다리게 마련이었다.

    지하철 습격 사건

    그날도 그런 아쉬움으로 시작한 월요일 아침이었다. 늦게 일어난 탓에 버스를 타지 못하고 앵발리드 역에서 갈아탈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감기 기운 때문인지 몸에 열도 있었고, 급기야 두꺼운 겨울 외투까지 벗어서 오른쪽 가방 끈 사이에 걸쳤다. 그날 따라 플랫폼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단지, 열 살 또래 남자아이 둘과 여자아이 둘이 나를 향해 걸어와 옆에 섰다.

    ‘이 시간에 아이들만 여기서 뭘 하는 걸까.’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전동차가 도착해 문이 열렸다. 차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옆에 서 있던 남자아이가 내 외투 사이로 자신의 손을 가리고 가방 지퍼를 열려고 했다.

    ‘무슨 아이들이….’

    그 순간, 아이들이니까 그냥 피해버리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몇 초도 되지 않아, 나의 단순한 생각은 아주 어리석고 위험했음을 깨달았다. 전동차에 타지 않으려고 뒤돌아서자, 아이들도 나를 따라 내리는 것이었다. 설명 못할 두려움이 기습했다. 전동차가 떠나가면 나와 아이들만 플랫폼에 남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산산이 부서진 생각의 조각들을 맞추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내 몸이 공중으로 뜨면서 전동차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리고 아이들은 모두 전동차 밖으로 내몰아지고, 전동차 문이 닫혔다. 이 모든 일은 마치 리허설이라도 한 것처럼 한 컷, 한 컷 제대로 돌아갔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를 찰나가 지난 후, 정신을 차려보니 프랑스 아저씨가 나를 구한 것이었다. 아저씨는 내 몸을 들어 전동차 안으로 옮겨놓고는 아이들을 모두 전동차 문 밖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그 순간 운이 좋게도 전동차 문이 닫혔고, 아이들은 계획이 실패하자 그 아저씨에게 욕설을 해대며 침을 뱉었다.

    커다란 키의 건장한 백인 아저씨도 긴장했는지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남의 일에 간섭하기 싫어하는 게 프랑스 사람들의 생리인데, 나는 그저 “메르시 보쿠”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 시절 나는 몇 마디 인사말밖에 할 줄 모르는 어학원의 초보학생이었다. 만일, 파리의 지하철에서 이런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면, 한국말로라도 큰소리를 쳐보라. 도망간다. 보디랭귀지와 감정이 실린 말은 어떤 형태의 언어와도 통하는 법이다.

    그 후로 긴 시간이 지나고, 한번은 지하철에서 외투 주머니에 들어 있던 휴대용 전화기를 가져간 도둑을 잡았다. 출퇴근 시간의 파리 지하철도 한국의 지하철처럼 전쟁터이긴 마찬가지다. 푸시맨은 없지만 말이다. 인파에 밀려 겨우 전동차를 타기는 했지만 출입문 앞 유리에 얼굴을 비비며 겨우 서 있어야 했다. 다음 역에 도착한 후, 하차하는 사람들을 위해 잠시 내렸다가 다시 타려는데, 주머니가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외투 주머니 속의 휴대용 전화기가 없어진 것이다.

    로마의 집시, 마드리드의 도둑

    그러고보니 주머니 안으로 무언가 지나간 듯했는데, 비과학적이지만 매우 정확한 여자의 직감으로 추적한 결과, 옆에 서 있던 남자의 손이었던 것 같았다. 검증도 해보지 않고, 그 남자를 무조건 쫓아가 전화기를 달라고 했다. 그 남자는 시치미를 떼고 어떤 남자가 저쪽으로 달려갔다고 했으나, 나는 물증 없이 당찬 확신으로 그를 추궁했다. 결국, 아저씨는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왼쪽 손 안의 전화기를 돌려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무지하게 용감했다. 그 남자가 초보였기에 망정이지, 보통은 그런 식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랑이굴에서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 수 있다는 속담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유럽 여행에서 늘 주의해야 할 것은 도둑이다. 주인과 가방을 사이에 두고 웃으면서 실랑이를 한다는 로마의 집시들, 물건을 일부러 떨어뜨리고 시선을 돌리게 한 다음 가방을 가져간다는 파리 지하철의 동유럽권 아이들, 어느 나라 사람인지 먼저 물어보고 그 나라 말로 쓰인 ‘복대 풀러’라고 준비된 종이를 꺼내 보이며 강도짓을 한다는 마드리드의 도둑들.

    현지인처럼 차리고 다니는 게 덜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리 감추려 해도 여행객은 여행객처럼 보인다. 게다가 이제는 현지인도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도둑에게 노출되어 있는 건 마찬가지다. 여권은 되도록 복사본을 소지하고, 관광객이 많이 타는 1호선 지하철 안에서는 더 조심해야 한다. 특히 파리 북쪽으로는 치안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늦은 시각에 몽마르트르 언덕을 혼자 오르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다.

    파리에는 폭트 클리냥크르와 폭트 몽러이에 커다란 벼룩시장이 있는데, 벼룩시장에 갈 때는 항상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했다. 생 드니에 있는 벼룩시장에 갔던 한 여학생이 소매치기에게 가방을 뺏기지 않으려고 가방에 매달려 10여 분을 땅바닥에서 질질 끌려 다닌 일이 있었다. 결국 지친 손이 가방을 놓아서 더 험한 봉변은 면했지만,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었어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사실, 현지에 사는 한국남자 한 사람도 샹젤리제 뒷골목에서 총을 든 흑인 강도를 만나 시계를 빼앗긴 적이 있다고 들었다. 이렇게 따지면 안전지대라는 건 없다. 주의라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할 것이다.

    파리는 여름에 조금만 추워도 밍크코트를 걸치고 나오는 금발머리 할머니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며, 변화무쌍한 날씨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식민지 통치 이후부터 이주해온 아프리카 흑인들, 학교에서 타통(아랍 여성이 머리에 둘러쓰는 천) 착용이 문제가 될 정도로 많은 수를 차지하는 아랍인, ‘보트 피플’인 베트남과 캄보디아 사람들, 패션과 영화·예술을 찾아온 동양인이 어울려 사는 파리의 문화는 다국적 문화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했다.

    그러다보니, 진정한 파리지앵의 혈통은 찾기가 힘들다. 아니, 순수한 프랑스인을 찾아보기 힘들어진 것이다. 민족주의적 이민정책을 펼치고 있는 내무장관 니콜라 사코지조차 폴란드인의 피가 섞인 인물이다. 이제는 다른 지역에서, 다른 나라에서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파리로 찾아온 사람들이 파리지앵이다. 하긴 파리에서 사는 남자를 파리지앵, 여자를 파리지엔이라 부르는 것을. 나도 그렇게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노란색 피부의 파리지엔으로 살게 되었다.

    파리지앵

    산다는 것은 사는 것일 뿐이다. 센 강을 지나 학교에 가고 에펠탑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온다는 메일의 한 구절은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나 동경의 대상일 뿐이지, 런던보다 비싼 월세를 자랑하는 파리에서 산다는 것은 일종의 투쟁이며, 살아남기 위한 거친 몸부림이었다.

    파리지엔 초기 시절, 친한 언니와 동생이 놀러와 일주일을 머물렀다. 얼마나 사람이 그리웠던지 가슴 뛰도록 신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즐거움은 우울함으로 바뀌었던 것을 잊을 수가 없다.

    한 달 받는 송금액이 뻔하고, 한 달 들어가야 하는 돈이 뻔한 생활이라 그들에게 밥 한 끼 사줄 여유가 없었다. 화려한 명품상가 앞에서는 윈도쇼핑만으로 쇼핑백을 가득 채워야 했다. 그것이 보통 유학생들의 현주소다.

    누군가 유학생은 거지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너무 아끼려다보니 남에게 얻어먹고만 다닌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과하게 받은 돈으로 열심히 쓰고만 다니는 사람도 간혹 있다. 어떤 것이든 너무 한쪽으로만 기울면 남들의 눈총을 받기 쉬운 법이다.

    프랑스는 이민이 쉬운 나라가 아니다. 쉽게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프랑스인과 결혼하는 것뿐이다. 결국, 프랑스는 관공서나 회사의 주재원들과 사업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공부하고 떠나가는 사회, 한마디로 유학생 사회였다. 그런데 영국이나 미국처럼 아르바이트 자리도 많지 않다.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식당 서빙과 공항 픽업뿐이다. 작은 차라도 한 대 있는 남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공항 픽업 아르바이트에 나섰다. 1년에 한 번씩 체류증을 걱정해야 하고, 멈출 줄 모르고 오르는 월세로 한숨지어야 했다. 파리에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파리에는 낭만과 열정이 있었다. 맥주 한 캔을 들고 예술의 다리에 앉아 센 강으로 스며드는 붉은 저녁 노을을 안주 삼아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주말마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파리를 누비며, 커피 한 잔을 주문해놓고 몇 시간을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었고, 각종 전시회, 음악회, 연극, 영화 등 문화생활에 심취할 수 있었으며, 상쾌한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다가 여유롭게 잔디에 누워 파리의 뭉게구름은 몇 개일까 세어볼 수도 있었다. 낭만과 열정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햇살이 찾아오면 표정부터 밝아지고, 지나가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먼저 “봉주르” 할 수 있는, 타인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사랑을 나누는 단순한 행복의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개는 주인을 닮는다’

    파리에는 95번   버스가   있다
    파리는 여러모로 두 얼굴을 가졌다. 파리의 밤거리를 산책하는 것은 깊은 커피 향에 사랑스러운 크림을 음미하는 비엔노아즈와 같았다. 하지만 언제나 의외는 있는 법.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프랑스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나 장 뤽 고다르 영화 속 주인공처럼 거리를 활보하다가도 각양각색의 개 분비물을 보게 되면, 쾨쾨한 냄새가 나는 100년 넘은 지하철이 클로즈업되어 또 다른 파리의 얼굴에 인상을 찌푸리게 되었다. 특히, 잘못하면 미끄러질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마도 파리의 개들은 변비에 걸려 있을 것이다. 주인이 집에 돌아와야만 밖에 나가 볼일을 해결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선지 새벽에도 거리에서는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주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거리는 가관이었다. 해결책으로 개의 주인이 분비물을 직접 치워야 한다는 법안이 통과되기도 했지만, 비닐봉지를 가지고 나와 개 분비물을 담아가는 광경은 사실 1년에 몇 번 보기도 힘들었다. 파리는 그렇게 사람과 개가 함께 사는 곳이었다.

    그러나 파리의 개들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어린 강아지에게조차 손 한 번 내밀지 못하고 무서워하던 내가 이제는 강아지 한 마리를 길러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프랑스가 나에게 준 변화 중의 하나다.

    하루는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는데, 할아버지 한 분과 강아지 한 마리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런데 이 강아지가 나를 보더니 할아버지 다리 뒤로 숨는 것이었다. 조금 지나서는 할아버지의 다리를 기둥처럼 이용해, 머리를 내밀어 힐끗 나를 한 번 보고 다시 다리 뒤로 숨기를 반복했는데, 마치 할아버지의 손녀 같았다. 프랑스에는 ‘개는 주인을 닮는다’는 말이 있다. 개가 아니라 가족으로 함께 살아서 그런지 성격은 물론이고 외모까지 주인을 닮는 것이었다. 학교 옆 카페의 무뚝뚝한 주인아저씨처럼 양쪽 볼살이 축 늘어진 그의 짙은 얼룩무늬 강아지를 잊을 수가 없다.

    형용할 수 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개를 어떻게 먹을 수 있냐며 화를 내는 사람도 많았지만,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한 프랑스인은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어봤고, 맛있어서 다음에 또 먹고 싶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중국인 여성과 결혼한 캐나다 남자는 과연 아내가 못 먹는 게 뭔지 모르겠다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말하자면, 중국에는 요리가 매우 다양하고 많다는 이야기였다. 음식도 취향이고 문화인데 나라마다 다른 문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희귀한 음식을 먹는다는 것만으로 무식한 미개인 취급을 하는 것은 참기 힘들었다.

    지하철 7호선

    파리의 지하철은 루브르 박물관과 샹젤리제 등 주요 관광지를 순회하는 1호선부터 생 미셸, 소르본 대학가를 가르는 4호선과 10호선, 파리 남쪽 지구를 향해 시원하게 얼굴을 내밀고 지상으로 달려가는 6호선, 파리 외곽으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는 생 라자르 역부터 미테랑 도서관까지 한 번에 연결해주는 무인운전차량인 14호선까지, 총 14개 노선이 있다.

    호선마다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1호선은 관광객과 라데펑스로 일하러 가는 넥타이족들로 가득했고, 남북으로 지나가는 7호선은 중국인을 많이 볼 수 있는 노선이었다.

    15구 조지 바상 공원 옆에 살다가 대만 사람들이 운영하는 복덕방을 통해 13구에 집을 구하게 된 이후로 나는 지하철 7호선의 식구가 되었다.

    13구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보트 피플들이 처음 모여 산 곳으로, 올림피아드라는 고층 아파트 단지가 세워지면서 난민들이 프랑스에 정착할 수 있게 된 지구였다. 단지를 중심으로 중국 슈퍼마켓과 식당이 여러 곳 생겼고, 그로 인해 차이나타운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다른 나라의 차이나타운과는 의미가 사뭇 달랐다. 편리한 교통과 안전하고 실용적인 주위환경으로 해마다 집값이 올라가는 부촌이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올라가는 비싼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다른 곳으로 이사하려 했지만, 파리에서 집을 찾는다는 것은 전기밥통의 전원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스스로 집을 찾을 능력이 되는 사람은 파리 유학생활의 반은 성공한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파리에는 한국처럼 전세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다. 집을 사는 것이 아니면, 사글셋집을 찾아야 한다. 사글셋집을 구하려면 두 달치 보증금과 한 달치 집세 선불, 그리고 주인이나 복덕방이 원하는 대로 집세의 몇 배에 해당하는 월급을 받는 보증인 두 명이 필요했다. 경우에 따라 그 보증인은 파리에 거주하는 자, 혹은 프랑스 사람으로 제한되기도 했다. 외국인에게는 보증인 대신 쿠숑 벙케라고 하여 집세 1년치의 목돈을 은행에 묶어두는 형태를 요구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더불어 서류의 나라인 만큼, 각종 서류를 준비해야 하는데 이것도 꽤 신경 쓰이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었다.

    좋은 집은 당연히 가격이 비쌌다. 반면에 싼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게 마련이었고, 바퀴벌레나 쥐가 들어올 가능성이 있는 한국식 1층집이거나 7·8층 꼭대기층의 공동 화장실, ‘스머프’들을 위한 낮은 천장, 한 사람이 겨우 살 만한 아주 작은 공간의 방이었다. 집을 찾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이 많이 필요했으며, 인내심과 끈기가 동반되는 어렵고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싸구려 포도주, 누더기 옷

    이사를 한다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파리에서 일 드 프랑스까지 이사 간 일본인 친구는 돈을 아껴보자는 마음에, 나를 포함해 주위 친구들을 모두 동원했다. 말하자면, 손으로 짐을 하나씩 들고 끌면서 지하철과 기차로 날라 이사를 했다. 그녀가 그렇게 이사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동원된 친구들은 매일 달랐고 한 명에서 4명까지 다양했다.

    나는 운이 좋게도 파리에서 넓은 원룸을 구할 수 있었는데,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7호선, 톨비악이었다. 집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소요됐지만, 중국 식당들과 다양한 가게들의 진열장을 구경하며 발길을 옮기다보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는 거리였다.

    33층까지 허리를 꼿꼿이 세운 고층 아파트는 전세계 민족이 다 함께 모여 사는 초미니 국가와도 같았다. 한 층에는 10가구 정도가 살았고, 바로 옆집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모로코 가족이 살고 있었다. 평범한 회사원 아저씨와 베이비시터를 업으로 하는 아주머니는 비누 향기 나는 예쁜 딸 하나, 진한 눈썹에 자존심 강하게 생긴 아들 하나를 데리고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몇 해가 지나는 동안, 아이들은 소년에서 남자로, 소녀에서 숙녀로 성장했고, 아주머니에게 맡겨지는 아가들의 국적도 프랑스에서 아랍, 이탈리아, 급기야 한국까지 여러 번 바뀌었다. 프랑스에서는 베이비시터도 세금을 내야 하며, 퇴직 후에는 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유직이다. 아주머니는 늘 유모차를 끌고 다녔고, 계절마다 바뀌는 아가들의 해맑은 얼굴을 보며 인사하는 것이 나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집 주위에는 중국 슈퍼마켓이 즐비했는데, 아주머니는 100대 부자에 속한다는 탕 형제네 가게에서 장보기를 좋아했다. 집 앞에 빅스토어라는 중국 슈퍼마켓이 있지만, 비싼 가격 때문에 슈퍼마켓이 아니라 약국이라며 나에게도 가지 말라고 당부하곤 했다.

    13구에서 유명한 음식은 똥끼누와라고 하는 베트남 쌀국수이다. 한국에도 이미 체인점이 들어와 많이 알려진 음식이지만, 똥끼누와는 우리의 쇠머리국밥과 같은 베트남 음식이다. 쇠고기 국물에 담겨 있는 쌀국수에 레몬을 짜서 넣고, 박하 잎과 베트남산의 길고 얇은 잎사귀와 숙주를 넣은 후, 매운 고추 소스를 듬뿍 뿌려 먹으면, 한국의 뜨겁고 매운 음식이 생각나 참을 수 없을 때 충분한 만족감을 준다. 자연스레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는 똥끼누와 마니아층이 두텁게 형성돼 있다.

    가지각색의 동양 식료품을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곳, 똥끼누와로 한 끼를 배부르게 해결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나는 제2의 파리 생활을 시작했다. 세월의 찌든 냄새를 담은 파리 지하철 7호선에도 언제나 싸구려 포도주병을 들고 누더기 옷을 입은 걸인과 노상 방뇨를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

    “여러분, 거듭 죄송합니다”

    그날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톨비악 바로 전 역인 플라스 이탈리 역에서 승객을 태운 전동차가 문을 열어놓은 채 도대체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때,

    “죄송합니다. 지금 한 남자분이 선로에서 소변을 보고 있습니다.”

    “아, 거의 끝나가는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될 듯합니다. 승객 여러분, 깊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방송을 들은 지하철 안의 승객들은 한바탕 웃고 나서 아무 불평 없이 열차가 다시 달리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잠시 후, 아예 지하철 안의 실내등까지 꺼졌다.

    “이런, 이 일을 어쩌지요. 볼일을 다 보신 남자 분이 선로에서 올라올 생각을 아예 하지 않으시네요. 도움을 요청할 테니, 잠시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신사 숙녀 여러분, 거듭 죄송합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여자 운전사의 안내방송은 유쾌하고 침착했으며 여유로웠다. 피곤에 지쳐 있던 퇴근길 승객들은 한차례 웃음으로 청량제를 들이마시고는 옆에 앉아 있는 낯선 사람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몇 분 후, 현장 상황은 종결되고 전동차는 다시 달렸다.

    파리의 지하철은 100년을 훌쩍 넘긴 육중한 고철 덩어리 속에 쾨쾨한 냄새를 싣고 달리지만, 관광객들이 담아오는 여행의 기대와 행복감으로 신선한 공기를 만들고, 지하철 운전자의 밝은 목소리로 웃음을 빚어서, 악사들의 선율에 리듬을 달아 달리고 있었다.

    나는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에 왔고, 영화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불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불어의 불자도 모르던 내가 파리에서 처음 알파벳부터 배우기 시작할 즈음, 불어는 내게 마치 다른 행성에 사는 ET들의 언어와도 같았다. 당시 나에게 영어는 유일한 외국어였기에, 활자화된 불어를 영어식으로 발음하곤 했다. 물론 집을 찾기 위해 복덕방에 전화를 걸 때도 당연히 영어가 대화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영어를 못하는 복덕방 관계자들 때문에 마음 상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당신의 말은 알아듣지 못하겠다며 화를 내고 끊어버리는 신경질적인 프랑스 여자들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 눈물을 찔끔거린 일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동네 복덕방 아줌마, 아저씨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잘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로마에 가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하듯, 프랑스에서는 불어로 말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불어 콤플렉스

    불어는 정말 어려웠다. 왜 그렇게 발음하기가 어려운지, 눈물로 배운 불어로 학교에 들어갔고, 혹시나 잘못 알아듣지는 않았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에 숙제나 중요한 공지사항 등은 프랑스 친구들에게 거듭 확인해야 했다.

    불어를 배우기 위해 내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방법은 텔레비전과 친해지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벗 하나를 얻은 셈이었다. 집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불을 켜고, 텔레비전과 만났다. 잠잘 때도 텔레비전은 켜놓았다. 소리가 나는 무엇인가는 확실히 외로움을 달래는 데 효과가 있다. 가끔은 어느 소설 주인공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썼다는 방법처럼, 물을 끓여 끓는 물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학교에 들어가서 가장 큰 문제점은 받아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전문 용어에 빠른 말투, 교수마다 색다른 유머가 섞인 수업은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받아쓰기는 포기한 채, 나름대로 집중해서 듣는 방법을 택했는데, 그런 사정도 모르고 옆에 앉아 있던 프랑스 친구는 왜 노트 필기를 안 하냐며 의아하게 쳐다보기도 했다. 그 결과, 시험 때마다 친구의 노트를 빌려서 알아보기 쉽게 정확한 노트를 작성해야 했고, 그 작업이 끝나고 나서야 작성한 노트로 다시 반복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론만을 배우는 대학이 아니고 실기 작업이 중심인 사립학교였기 때문에 그룹별로 작업하는 일이 중요했다. 처음 학교에 들어갔을 때, 한국 사람이 나 하나였기 때문에 힘든 점도 많았지만, 그 덕분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프랑스 친구들하고만 어울려야 했고, 자연스레 그들의 문화를 습득하고 이해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친절하나 마음으로 진정한 친구 사이가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어제는 친한 것 같았는데, 오늘은 안 친한 것 같기도 한 느낌이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것 또한 그들의 문화였다.

    머릿속에서 안다는 것과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아주 다른 일이었다. 불어로 유창하게 내 의견을, 내 생각을 표현하기가 어려웠고, 쉬는 시간에 커피잔을 들고 친구들의 말만 듣고 있어야 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면서 불어에 대한 콤플렉스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겨낼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 주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나만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에게 먼저 ‘봉주르’라는 말을 건네는 동양 여자가 되었다. 프랑스 친구들은 상상외로 내성적이고 수줍은 아이들이었다.

    바게트 사듯 데모

    파리에서 보낸 시간에서 영화를 본 시간을 빼놓는다면, 아마 할 얘기가 줄어들 것이다. 파리는 그야말로 영화의 중심지였다. 매주 수요일이면 각 나라의 새로운 영화가 개봉됐고, 한 해에 200여 편이 넘는 프랑스 영화가 극장에 걸렸다가 내려왔다. 벡시에 새로 단장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크고 작은 극장들, 다양한 영화제, 셀 수 없이 많은 감독 지망생, 비평가, 제작자들이 살을 맞대고 살아가고 있었다.

    프랑스 사람은 영화를 사랑한다. 영화에 대한 꼿꼿한 자존심으로 높은 성벽을 쌓아올려 성 밖의 사람들은 함부로 넘어올 수 없게 만들어놓았다. 나 또한 그 성을 사이에 두고 작은 나무사다리 한쪽만 살짝 걸쳐놓는 모양으로 프랑스 영화인과 만났다.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으로부터 상처 받은 시간을 보내고, 이제는 한국 영화를 생각한다. 한국 영화 속에는 또 얼마만큼의 크고 작은 성이 숨겨져 있을까.

    프랑스에서 영화를 하는 것은 한국에서 영화를 하는 것보다 더 큰 열정과 더 큰 시련을 요구했다.

    프랑스는 좌파와 우파가 존재하는 민주공화국이다. 사회당과 민주당이 공존하며 나라 살림을 잘 꾸려 나가는 단편적인 모습에 정치 선진국이라는 부러움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은 바뀌어도 자리는 바뀌지 않는 법, 어느 나라든지 정치에 대한 국민의 생각은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그런데 프랑스에는 한국과 같지만 사뭇 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는 듯했다. 국회에서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정치인들의 행로를 바꾸자는 거리 시위 행렬 속에 말이다.

    극우파인 장 마리 르 펭이 2차 대통령선거의 후보자로 남았던 해, 선거권이 없는 중·고등학생들이 반대 시위를 벌이며 파리 거리를 가득 메웠다. 그 결과, 횡령 때문에 재당선이 불확실했던 자크 시라크가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리고 2006년 26세 미만의 젊은 노동계층을 겨냥한 새로운 노동법인 CPE에 반대한 학생·노동자들의 대규모 데모로 파리는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다. 결과는 학생과 노동자의 승리였다. 뉴스에 나오지 않은 학생들과 정경들의 희생이 꽤 많았지만, 그들의 뜻은 관철되었다.

    대규모 시위가 있었던 그날도 나는 평상시처럼 돌아다녔다. 사야 할 물건이 있어 플라스 이탈리 대형 상가에 들어섰는데, 경찰들이 상가의 문은 다 닫혔다고 했다. 나는 믿을 수 없어 직접 들어가 마지막 상가까지 꼼꼼히 확인해봤는데 경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경찰은 몇 시간 전부터 상점의 문을 닫게 하고, 차도를 통제해 차들을 우회시키면서 시위 행렬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파리에서의 데모는 빵집에서 바게트를 사듯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나만의 산책 코스

    시위 행렬 때문에 지하철과 버스, 기차가 다니지 않아 불편해도 시민들은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다. 대규모 시위가 예고된 날, 파리 근교까지는 자동차로 들어와서, 아내가 타고 갈 자전거를 트렁크에서 꺼내주는 광경은 동네 슈퍼마켓이 저녁 7시에 문을 닫는 것처럼 파리에서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아 걸어가던 고등학생이 태워달라고 쓰인 종이를 내미는 곳, 버스 운전자들의 데모로 다른 버스정류장에 승객을 내려놓아도 괜찮다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사는 곳, 그곳이 파리였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찾아와 파리 관광을 시켜줘야 할 경우나, 오페라에서 친구들을 만나 밥을 먹고 행복한 기분을 안겨주는 초여름의 살랑 바람을 따라 저녁 산책을 나설 때면, 즐겨 찾는 나만의 코스가 있다.

    황금빛 야경을 입은 가르니에 오페라를 등에 지고 걸어가다보면, 약국과 빵집을 끼고 식료품에서 의류까지, 모든 생필품을 한곳에서 살 수 있는 커다란 슈퍼마켓인 모노프리에서 가까운 피라미드 지하철역을 만나게 된다. 다시 지하철역에서 상가를 구경하며 걷다가 분수대를 만나면, 정면에 중세 옷을 입은 문지기 귀신이 나와 있는 루브르 호텔이 보인다. 호텔 오른편으로 버스가 다니는 작은 성문 길을 따라 들어가면, 루브르 박물관 안마당에 들어서게 된다.

    루브르 안마당에는 구경할 유물이 흩어져 있는데, 튈르리 정원 쪽의 카루젤 개선문을 먼저 감상했다. 카루젤 개선문은 샹젤리제에 있는 개선문보다 앞서 완공된 것으로, 1805년 나폴레옹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카루젤 개선문을 지나 펼쳐진 튈르리 정원은 루이 14세의 왕실 조경가 앙드레 르 노트르가 설계한 것으로, 중앙에 커다란 연못을 중심으로 밤나무와 라임나무가 늘어서 있다. 여름이면, 원형의 커다란 연못에서 길다란 나무 막대기로 작은 배를 저으며 노는 아이들과 함께 일광욕을 즐기러 나온 부모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저녁의 짧은 산책이었기 때문에 카루젤 개선문을 넘어 정원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단지 멀리 보이는 유물들을 어렴풋이 훑어본 후, 바로 돌아서서 유리 피라미드가 있는 루브르 박물관 건물을 감상했다.

    루브르는 원래 1190년 필리프 오귀스트가 바이킹의 침략으로부터 파리를 방어하기 위해 건설한 성채였는데, 프랑수아 1세가 위압적인 분위기의 성채와 토굴 감옥을 르네상스 양식으로 새롭게 개조한 것이다. 그 후 프랑스 왕과 황제들은 4세기에 걸쳐 건물을 확장, 개량했다. 현재 모든 전시실로 연결되는 유리 피라미드는 건축가 IM 페이가 1989년에 만든 것이다.

    맥주 캔 들고 예술의 다리에 앉아

    파리에는 95번   버스가   있다
    피라미드 밑에서 바라보면 부드러운 자연광이 찾아들고, 유리 사이사이로 반사되는 조각 하늘이 시시각각 다른 빛깔로 신비스러움을 자아낸다. 영화 ‘다빈치 코드’ 마지막 장면에 성체가 모셔졌다고 묘사되는 바람에 오늘도 많은 관광객이 호기심을 갖고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유리 피라미드를 지나 카레의 뜰로 들어서면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는다. 10시가 넘기 전에 카레의 뜰에서 오른편의 센 강 쪽으로 난 문을 향해 걸어가야 했다. 다름이 아니라, 10시에는 문을 닫기 때문이다. 문을 빠져나가면, 드디어 저녁 산책의 목적지인 예술의 다리에 다다른다.

    예술의 다리는 차가 다니지 않는 인도교다. 바닥이 나무로 돼 있다. 여름에는 많은 사람과 어울려 하얗게 밤을 지새웠는데, 치즈며 샐러드, 바게트를 싸들고 피크닉을 나온 가족에서부터 맥주며 포도주 잔을 기울이는 젊은이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지나가다가 바닥에 덜렁 주저앉은 여행객들, 연주회를 여는 동네 합창단, 안전을 위해 서성이는 경찰들까지 다양한 색깔의 자유가 붉게 내리는 노을 속에서 꿈틀거리는 곳이다.

    몇 해를 파리지엔으로 지내는 동안, 나의 작은 꿈 하나는 예술의 다리에 앉아 맥주를 마셔보는 것이었다. 작은 소원인데도 불구하고 몇 해 동안 이루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렇다. 마음 맞는 친한 언니와 함께 찾아갔을 때는 겨울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다리 위에 썰렁하니 둘만 서 있었기 때문이고, 날씨 좋은 여름에는 방학이라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향긋한 꽃향기가 가벼운 살랑 바람에 실려 코끝을 간질이던 5월 어느 날 저녁, 드디어 그 작은 소원이 이루어졌다. 빵과 케이크를 만드는 파티셰인 일본 친구와 둘이서 피라미드 역 근처 모노프리에서 산 맥주 두 캔을 들고 예술의 다리에 도착했다.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다움으로 남는 법이라지만, 검푸른 물감을 뿌려 굵은 붓으로 휘저은 듯한 하늘 아래 사람들의 살아 있는 행복한 웃음소리, 달덩이 같은 불빛을 안고 다리 밑을 지나가던 유람선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프랑스 혁명 기념일

    해마다 7월 초가 되면, 샹젤리제 초입부터 콩코르드 광장까지 이어진 계단 위에는 플라스틱 의자들이 새색시처럼 다소곳이 나와 앉아 있다. 1789년 7월14일의 프랑스 대혁명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정치인들과 초청된 인사들이 앉을 자리였다. 이 날의 행사는 마치 한국의 국군의 날 행사와도 같다.

    육군, 해군, 공군이 개선문을 출발해 대통령과 장군들, 초청 인사들이 기다리는 콩코르드 광장까지 퍼레이드를 했다. 샹젤리제를 거쳐 광장까지 행진하는 동안, 가장 큰 박수를 받는 군인들은 프랑스 말로 ‘폼피에’라고 하는 소방대원들이었다.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달려가는 그들이야말로 가장 환영받는 얼굴이고 자랑이었다.

    개선문과 콩코르드 광장은 프랑스 역사상 의미가 깊은 장소다. 개선문은 1805년 오스터리츠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이 병사들에게 “너희들은 개선문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면서 만들기 시작했는데, 나폴레옹 집권 당시 완공하지 못하고 실각 후 1836년에야 완공됐다. 수많은 전투에서 전사한 장군들과 군인들의 이름으로 장식된 50m 높이의 개선문은 각종 국경일, 군인 행사의 중심이다.

    개선문은 나폴레옹 3세 때 도시계획을 담당한 오스망 남작에 의해 건설된 12개의 대로 중앙에 위치해 지금도 12개의 대로 사이에서 나오고 들어가는 차들로 혼잡한 곳이다. 이 혼잡한 중앙에 버티고, 매일 저녁 6시30분이면 어김없이 하얀 연기를 피워내는데, 제1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무명 병사들을 위한 점화식에서 나는 연기이다.

    유럽에서 가장 크고 유서가 깊다는 콩코르드 광장은 원래 루이 15세의 동상을 세우기 위해 만들어져 이름도 루이 15세 광장이다. 18세기 중반에 자크 앙주 가브리엘이 북쪽에만 주택이 있는 팔각형 모양의 광장을 설계했는데 당시 형태 그대로다. 그 후 프랑스 혁명 때 혁명광장으로 이름이 바뀐 뒤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혁명군 지도자 당통 등 1000여 명이 이곳 단두대에서 처형됐으나, 결국 화합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콩코르드’를 붙여 콩코르드 광장으로 불리게 됐다.

    지금은 광장 중앙에 3200년 된 뤽서 오벨리스크와 두 개의 분수대, 리옹, 마르세유, 릴 등 프랑스의 각 도시를 표상하는 8개의 여신상이 세워져 있다. 특히, 이 오벨리스크와 샹젤리제의 개선문, 라데펑스의 신개선문, 루브르 박물관의 카루젤 개선문, 유리 피라미드가 일직선상에 있는데, 매년 혁명 기념일인 7월14일에는 프랑스 대통령, 군대 행렬과 맞물려 장관을 이룬다.

    해마다 기념일이 되면, 각처에서 몰려든 관광객들과 파리를 떠나지 못한 소수의 파리지앵이 한자리에 모여 프랑스 역사의 노래를 불렀다.

    예술의 도시

    망아지는 제주도로 보내고 예술가는 파리로 보내라 했던가. 파리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적인 예술가가 왔고, 살았고, 돌아갔다.

    파리의 가을 풍경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파리는 그렇게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예술적 기운을 불어넣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미술학교에서 진한 물감 냄새를 맡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오르세 미술관을 비롯해 그야말로 거대한 역사가 살아 숨쉬는 루브르 박물관, 하얀 키스의 감동으로 쉽게 발길을 돌릴 수 없었던 로댕 미술관, 천재 화가의 숨결을 엿보며 흥분했던 피카소 미술관, 예술은 100년을 앞서간다는 말을 절감했던 퐁피두 현대미술관을 비롯해 각종 갤러리, 전시관이 하루도 나를 그냥 집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전시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열렸던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그의 아들-영화의 존재를 위대하게 만들어줬다고 평가받는 감독-장 르누아르의 공동 전시회였다. 아버지의 그림과 아들의 영화는 하나의 선상에서 해석됐는데, 아버지는 그림으로, 아들은 동영상으로 자연광과 시선의 이동, 공간의 깊이, 피사체의 심도 등을 표현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그림을 움직이는 동영상으로 바꿔놓았고, 그렇게 나란히 전시된 그림과 동영상은 감동을 안겨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파리는 누구에게나 예술가가 되는 길을 열어주는 문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프로를 위한 전문 갤러리 전시뿐 아니라, 가난한 예술가와 아마추어를 위해 카페와 레스토랑에서도 매일 전시회가 이어지고, 영상물이 상영됐다. 파리는 밤늦게 포도주 저장고를 개조한 카페 지하에서 상영되는 단편영화를 감상하기 위해 모인 사람과 그림을 그려 판 수입으로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겠다고 아프리카행 비행기를 탄 화가를 만날 수 있는 곳,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을 지켜낼 줄 아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 정신과 영혼은 하나로 통하고 사진이나 영화, 그림 등 각기 다른 매체를 통해 표출되는 것이었다. 나도 이러한 예술철학에 물들어 레스토랑에서 사진 전시를 감행했다. 영화를 공부했지만, 폭발적인 감정을 실을 수 있는 사진 한 장의 매력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감정을 표현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첫 번째 전시회였는데, 결과는 예상외였다.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람과 감정을 나누고 의견을 교환하며 소통한다는 것은 예술의 도시, 파리에 산다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었다.

    지구 반대편의 나라

    프랑스에는 칸과 도빌을 비롯해 파리, 그레노블, 클레망 페랑, 리옹 등의 크고 작은 영화제들을 비롯해 아비뇽의 연극축제, 아를의 사진축제, 앙굴렘의 만화축제 등 다양한 축제들이 달마다 해마다 우리를 기다렸다.

    특히 6월의 음악축제는 파리를 온통 리듬의 물결로 몰아넣었다. 프로에서 아마추어까지 모든 음악인이 거리로 뛰쳐나와 음악을 연주했는데, 맨발로 신들린 듯 춤추며 연주하는 아프리카 음악에서부터 재즈, 클래식, 팝, 아시아의 음악까지 다양했다. 프랑스 친구를 따라 아프리카 음악 콘서트가 열리는 클럽에 갔더랬다. 리드 보컬인 아프리카 여인은 175cm 정도의 훌쭉한 키에 앙상하게 마른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여성스러우면서도 섹시한 작은 얼굴의 그녀는 노래를 부르다가, 급기야 신발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춤을 추면서 깊은 호흡 속에 상상할 수 없는 파워의 목소리를 토해냈다. 빽빽하게 모여 있는 좁은 공간에서도 관객들은 흥겨운 리듬으로 몸을 움직였고, 열정의 도가니 속에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아프리카 음악은 영혼과 육체가 뒤얽혀 살아 움직이는 강한 감동 자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치 한 장르처럼 굳어진 말이지만, ‘샹송’이라는 단어는 프랑스어로 노래라는 뜻이다. 나는 ‘샹송 프랑세즈’, 즉 프랑스 노래를 좋아해서 라디오의 다이얼은 샹트 에프라는, 하루 종일 샹송 프랑세즈만 틀어주는 전파에 고정했다.

    자연스럽게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음악이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TF1의 ‘스타 아카데미’는 스타 탄생이라는 주제로 몰래 카메라를 쓰는 오락 프로그램이다. 스타 아카데미는 예선을 거쳐 본선에 진출한 스타 후보자들이 파리 근교의 성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매주 탈락 여부를 결정짓는 노래 경연을 치르고 최후 승리자를 가리는 내용으로 꾸며진다. 내가 파리에 온 첫 해에 첫 번째 우승자가 탄생했고, 그 주인공은 현재 명실상부 최고의 스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수 중의 하나, 제니퍼다. 프랑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지켜보면서, 제니퍼의 스타 생활을 지켜보면서 나는 다시 한국을 생각했다.

    제니퍼가 처음 스타 아카데미에 출연했을 때, 그녀는 통통한 얼굴에 뚱뚱한 몸매 콤플렉스 때문에 시청자에게 눈물을 보이던 작은 소녀였다. 하지만 시청자와 전문가가 최종 선택한 사람은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그녀였다. 개성 있는 맑은 목소리를 가졌으나 볼품없는 그녀가 외모를 가꾸면서 대스타로 길러지는 모습은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활동한 지 1년쯤 되었을 무렵 그녀의 나이 스무 살에 미혼모로 아이를 낳겠다는 이야기는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얼마 후, 행복해하는 그녀와 아이의 사진이 잡지의 표지를 장식했고,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다시 스타의 자리로 돌아와 음악앨범을 발표했다. 한국과는 참으로 다른 행보였다. 만일 그녀가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녀는 스타로서의 생명을 잃고 잠시 미디어에서 사라져야 했을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사회적 시선 차이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참으로 엄청나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작지만 커다란 일들은 갖가지 새로운 색깔의 렌즈를 눈에 넣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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