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여섯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아낙네는 온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 평양에서 손꼽히는 갑부가 되었다. 과부라고 우습게 보고 덤벼든 강도와 협잡꾼들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평생 자신을 위해서는 한푼도 쓰지 않던 그는, 환갑을 맞은 그날부터 마을 사람들을 위해 돈을 펑펑 쓰기 시작하는데…. 여자에게는 이름이 없던 시절에 태어나 말년의 공덕으로 ‘선행’이라는 이름을 얻고 장안의 조화(弔花) 값을 들썩이게 만들 정도로 세인의 존경을 받기까지, 한 여인이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
백선행의 삶을 다룬 ‘신여성’ 1933년 2월호 기사와 평양공회당 건축계획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7년 3월16일자(왼쪽).
이 조선 최초의 여성 사회장(社會葬)은 오후 1시 정각 ‘백과부집’ ‘백선행기념관’ 등으로 불리는 평양공회당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다. 장례식의 주인공은 사재(私財) 14만6000원(현재가치 146억원)을 쾌척해 백선행기념관을 세운 ‘백 과부’ 백선행이었다. 오전 11시 박구리 자택에서 발인한 그의 영구는 오후 1시 정각 영결식장인 백선행기념관에 도착했다. 오윤선의 집례로 거행된 백선행의 영결식은 이훈구의 애사, 200여 통에 달하는 조전(弔電) 낭독, 각 학교 학생대표의 애도가 합창, 묵념 등의 순으로 한 시간 남짓 이어졌다.
장지인 당상리로 향하는 장의행렬은, 광성보통학교 900여 명, 숭인상업학교 500여 명, 숭현여학교 450여 명, 창덕보통학교 200여 명 등 각 학교대표 2200여 명을 선두로 각 사회단체 대표 등 1만여 명이 참례했다. 300여 개의 화환, 조기, 만장이 늘어선 장의행렬은 길이가 5리에 달했다. 평양시내 중심가에서 보통강 건너편에 이르는 연도에는 10만여 시민이 도열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평양시민 3분의 2가 참석한 ‘백선행 여사 사회장’은 오후 5시30분 남편 안재욱의 묘소에 합장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백선행은 과부생활 70년 만에 오매불망 그리던 남편 품으로 돌아갔다.
과부 2대
1848년 헌종 15년에 백지용의 외동딸로 태어난 ‘백 과부’는 이름이 없었다. 조선시대 여성치고 이름 가진 여성은 흔치 않았다. ‘아가’로 불리길 14년, ‘새댁’으로 불리길 2년, 나머지 70성상을 ‘백 과부’로 불렸다. 환갑이 넘어서야 착한 일을 많이 했다고 ‘선행’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생겼다.
아버지 백지용은 평양 박구리(?九里·현재의 중성동)에 살던 가난한 농민이었다. 그나마 외동딸이 일곱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모친 김씨는 죽은 남편이 남긴 가난과 고독 속에서 하나뿐인 딸을 애지중지 길렀다. 편모 슬하에서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어렵게 성장한 백씨는 열네 살에 가난한 농민 안재욱에게 출가했다.
모친 김씨는 사위에게 모녀의 일생을 의탁하려 했으나 병약한 사위는 결혼 직후 병석에 누웠다. 백씨는 어려운 살림에도 좋다는 약이면 백방으로 구해 써보았지만 남편의 병세는 날마다 악화되었다. 죽음에 임박한 남편을 살리기 위해 왼손 무명지를 칼로 그어 흐르는 피를 입에 떨어뜨려도 보았으나, 남편은 겨우 닷새를 더 버텼다. 안재욱은 아내에게 아이 한 명 안겨주지 못한 채 결혼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열여섯 살이 된 백 과부는 남편을 잃고 다시 과부 어머니를 찾아 친정으로 돌아왔다. 개가하여 팔자를 고치라는 동네 사람의 권유도 있었으나 스무 살 전의 과부는 세 번 남편을 갈지 않으면 불행을 면치 못한다는 미신이 주는 공포와 어머니 과부의 신세를 생각하여 과부 모녀는 죽기까지 떨어지지 않기로 맹세하고 새 생활을 개척했다. 우선 그날그날 먹을 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청대(쪽으로 만든 검푸른 물감) 치기와 간장 장사, 베 짜기 등으로 새 생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고 백선행 여사 일생1’, ‘동아일보’ 1933년 5월10일자) |
백선행이 재산을 모을 당시의 일화를 담은 ‘동광’ 1931년 1월호 ‘철창 속의 백선행’.
구차한 살림살이를 겨우 면하게 된 그 때 모친 김씨가 세상을 떠났다. 봉양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모친을 저세상으로 보내는 것도 서러운 일이지만, 모친의 상여 뒤를 따를 상주 한 사람 없는 게 더 원통한 일이었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찾아온 친척들은 백 과부에게 사후 양자를 들여 상주로 삼으라고 권했다.
장례도 장례지만 제사가 더 문제였다. 모친이 죽은 해는 조선 왕조의 수명이 37년이나 남은 1873년이었다. 딸자식은 상주(喪主)도 제주(祭主)도 될 수 없었다. 생전에 따뜻한 밥 한 공기 배부르게 먹어보지 못한 모친은 제삿밥조차 대접받지 못할 처지였던 것이다. 백 과부는 친척들의 권유에 못 이겨 조카뻘 되는 친척을 모친의 사후 양자로 삼아 장례를 치르게 했다.
양자의 음모
그러나 양자는 장례나 제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장례가 끝나기 무섭게 상속 문제를 들고 나왔다. 사후 양자라도 아들은 아들이었다. 남녀의 구분이 엄격하던 시절, 상속은 아들의 당연한 권리였다. 양자는 모친의 전 재산은 아들인 자신이 상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 과부는 그때서야 속은 것을 알았다. 모친과 함께 10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마련한 150냥짜리 집과 현금 1000냥을 어려운 시절에는 아는 척도 하지 않던 친척들에게 고스란히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백 과부는 끝까지 반항했다. 그러나 양자의 배후에는 유산을 나눠먹기로 약속한 문중 사람들이 있었다. 결국 끝까지 반항한 값으로 소녀 과부로 개가치 않고 어머니를 모시어 임종한 것이 기특하다는 이유로 살고 있는 150냥짜리 집만은 백 과부의 소유로 인정받았다. 현금 1000냥은 문중의 대여섯 사람이 나눠먹었다. 백선행 여사는 지금껏 친척들이 나눠먹은 재산기록을 보관할 만큼 그때 일을 원통하게 여긴다. (‘철창 속의 백선행’, ‘동광’ 1931년 1월호) |
10년 고생 끝에 모은 재산과 모친을 일시에 잃고도 백 과부는 오히려 용감했다. 재산을 빼앗은 양자 일파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집을 떠나자 백 과부는 문간에 콩을 뿌렸다. 악귀를 쫓을 때 하는 평안도 풍속이었다. 여자를 대놓고 무시하는 조선의 인습도, 파렴치한 친척도 악귀처럼 몸서리가 쳐졌다. 스물여섯 젊디젊은 과부 백씨는 흐르는 눈물을 속으로 삼키며 다시 생활전선으로 나섰다.
앞뒤 마당에 봉선화를 심어 꽃을 따고 씨를 받아 닷새에 한 번씩 열리는 장터에 내다팔고, 질동이를 머리에 이고 음식점을 순회하며 잔반을 얻어다가 돼지를 길렀다. 뽕밭을 가꾸어 누에를 치고, 물레와 베틀을 장만해 밤새도록 실을 뽑아 무명과 명주를 짰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20대 한창 나이에도 얼굴에 분 한번 바른 적이 없었고, 자기 손으로 짜는 옷감이건만 화사한 옷 한 벌 지어 입지 않았다. 단오에도 동산에 한 번 올라가지 않고 1년 365일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했다. 모친과 재산을 한꺼번에 잃은 후, 다시 10년을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 살다보니, 50여 석 추수의 땅문서가 생겼다. 그때부터 백 과부의 재산은 기름 부은 불꽃처럼 불어났다. 생활비는 일해서 생긴 돈으로만 충당하고, 땅에서 나오는 수입은 땅을 늘리는 데만 썼다.
1883년 과부생활은 벌써 20년째에 접어들었지만, 백 과부의 나이 이제 겨우 서른여섯이었다. 부모도 자식도 남편도 가까운 친척도 없는 백 과부의 삶은 적막과 고독의 연속이었다. 고집 그만 부리고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 개가하라는 이웃들의 권유는 듣는 자리에서 흘려버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귀를 씻었다. 이제 와서 개가할 것이었다면 20년 전 수절(守節)을 결심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20년 세월이 덧없이 흘러갔어도 사진 한 장 없는 남편 얼굴만은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2년 남짓한 결혼생활이래야 병든 남편 수발이 전부였지만, 서른여섯 해 인생에 그때만큼 행복한 시절도 없었다.
만국기가 펄럭이는 백선행기념관에서 각계 인사 300여 명이 참석해 성황리에 개최된 백선행 여사 찬하회 광경. ‘동아일보’ 1930년 11월10일자에 실린 사진이다.
과부라고 손가락질당할 때마다 남편을 향한 사랑을 한순간도 저버리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고단한 삶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백 과부는 한식과 추석 때면 어김없이 남편의 무덤을 찾았다. 야속하게 떠났어도 그리워할 기억이라도 있는 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결혼생활의 기억은 아름답게 윤색되었고, 남편에 대한 사랑은 커져만 갔다.
백 과부는 키가 크고 몸집이 벌어진 억센 여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억세다 해도 여자는 여자였다. 조선에서 젊은 여자가 남편도 없이 홀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 아침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다름없었다. 백 과부가 돈푼이나 만진다는 소문이 퍼지자 온갖 사내가 재산을 ‘날로’ 집어삼키려고 달려들었다. 사악한 사내들 눈에 혼자 사는 젊은 과부의 돈은 임자 없는 돈이나 마찬가지로 비쳤다.
철창 속의 여인
그해 팽한주가 평양 부윤(府尹)으로 부임했다. 악명 높은 탐관오리였던 팽한주는 박구리에 사는 백 과부가 기백석 추수의 재산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죄 없는 여인을 잡아다 하옥했다. 홀로 사는 여자가 돈을 모은 게 죄였던 것일까. 팽한주는 백 과부에게 갖은 누명을 씌운 후, 재산을 바치면 풀어주겠노라고 회유하고 협박했다.
그러나 20년간 과부로 남 못 당할 곤란과 풍상을 겪은 평안도 여성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남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못하는 짓이 없던 팽한주 부윤으로서도 고집 세고 뻣뻣한 백 과부의 재산만은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백 과부는 옥중에서 10여 일이나 고생하다 그대로 방면되었다. (‘고 백선행 여사 일생2’, ‘동아일보’ 1933년 5월11일자) |
탐관오리만 백 과부의 재산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과부 혼자 사는 집에는 수시로 강도가 침입했다. 백 과부는 강도의 완력 앞에 맨손으로 저항하다가 뒷머리와 앞이마에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때 생긴 얼굴 흉터는 늙어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백 과부는 현금을 벽지 안쪽이나 이불 속 등 집안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 백 과부를 때려눕힌다고 숨겨놓은 돈을 찾을 수는 없었다. 목에 칼을 들이대도 백 과부는 찌르라고만 할 뿐 돈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았다. 백 과부 집에 숱한 강도가 침입했지만, 엽전 한 닢 훔쳐나간 강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위문 간 사람들이 “가지고 계신 돈을 조금 내어주셨으면 이런 곤욕을 보시지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하며 채근하면 백 과부는 항상 이렇게 핀잔을 주었다.
“불쌍한 사람들에게도 다 못 나눠주는 돈을 밤중에 달려들어 사람 때리고 중상 입히는 놈에게 어찌 주겠나? 내 목숨이 없어져도 돈만 남아 있으면 그 돈이 좋은 일에 귀하게 쓰이게 될 것을 아는데, 눈을 뜨고 내 손으로 그런 나쁜 놈에게 내어줄 수야 있나.”
강도의 침입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백 과부는 ‘목숨’과 목숨보다 귀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대문 중문 방문 부엌문 들창 장지 등 집안 곳곳을 굵은 철창살로 에워쌌다. 백 과부는 그 철창살 속에서 돈 궤짝을 부둥켜안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한번 백 과부의 손에 들어간 돈은 좀처럼 세상 구경을 하기 어려웠다. ‘수전노 백 과부’ ‘철창살 속 암사자’라고 험담하고 다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백 과부는 꿈쩍도 하지 않고 가난한 시절과 마찬가지로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 돈을 모았다.
혼자 사는 과부가 나이 들어 험한 꼴 보지 않으려면 돈이라도 악착같이 모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백 과부는 ‘그 돈이 있으면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겠다’는 이웃들의 손가락질에도 아랑곳없이 무서울 정도로 돈에 집착했다. 그러나 백 과부는 그 시절 흔히 보는 수전노들과는 달리 고리든 저리든 단 한 번도 가난한 사람을 상대로 돈놀이를 하지는 않았다. 돈을 벌되 되도록 깨끗이 벌려고 노력했던 것이었다.
환갑에 얻은 이름
북한 주간지 ‘통일신보’ 2006년 7월1일자에 실린 백선행기념관과 백선행 동상.
“에이, 수전노 같으니라고. 그래 물려줄 자식 하나 없으면서 그 많은 재산 쌓아두고 억울해서 어떻게 죽나.”
부잣집 환갑잔치에 가서 오랜만에 고깃국 한 그릇 얻어먹고 목구멍의 거미줄이라도 긁어내려던 이웃들은 백 과부의 인색함에 치를 떨었다. 아무리 돈이 아까워도 그러는 게 아니라고 어르고 달래도, 백 과부는 ‘남편도 자식도 없는 박복한 여자가 잔치는 벌여 무엇 하느냐’며 황소고집을 꺾지 않았다.
‘우주가 한 바퀴를 돌아’ 찾아온 환갑 생일날 아침, 백 과부는 여느 때처럼 보리쌀이 반이나 섞인 거친 밥으로 요기를 했다. 아침식사를 대충 때운 후 장롱 깊숙이 아껴둔 새 옷을 꺼내 입고 오랜만에 곱게 단장을 했다. 주름진 얼굴에는 지난 세월의 풍상이 화석처럼 새겨져 있었지만, 단장하는 백 과부의 가슴은 47년 전 새색시처럼 설다.
이른 아침 곳곳에 철창살이 쳐진 박구리 자택을 서둘러 나선 백 과부는 대동군 객산리 남편의 묘소로 향했다. 다 쓰러져 가는 나무다리를 건너 남편의 묘소에 도착한 백 과부는 여느 때처럼 정성스럽게 벌초를 하고 제를 올렸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객산리 마을에 들러 오랫동안 품어온 계획을 전했다.
“나무다리를 허물고 돌다리를 놓아주겠소.”
객산리 나무다리는 낡아서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었을뿐더러 교각도 몹시 낮아 큰 비라도 내리면 물이 넘쳐 다리 구실을 못하기 일쑤였다. 백 과부는 서울에서 석공기술자를 불러와서 목교가 있던 자리에 넓고 튼튼한 석교를 놓았다. 객산교(客山橋·손메다리)를 준공하기까지 든 3000원 남짓의 비용을 모두 백 과부가 부담했다. 당시 3000원은 떠들썩한 환갑잔치 100번은 벌일 수 있는 돈이었다. 백 과부의 선행을 전해들은 이웃들은 인색하다고 손가락질한 것을 머리 숙여 사과했다.
객산리 사람들은 백 과부의 음덕으로 준공된 다리를 ‘백 과부 다리’라 불렀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과부’란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다. 동네 유지들은 그처럼 착한 일을 한 사람을 ‘백 과부’라 부르기 민망하다 하여 ‘과부’ 대신 ‘선행’이라 부르고, 다리 이름도 ‘백선교’라 고쳐 불렀다. 조선의 윤리와 법도가 아직 굳건하던 헌종 시절 태어난 백 과부는 환갑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름을 얻은 것이었다.
백 과부는 사람을 좀처럼 믿지 않았다. 평생을 과부로 수절하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였다. 그렇듯 허튼 욕심 부리지 않은 백 과부였지만 딱 한 번 교활한 거간에게 속아 낭패를 본 일이 있었다. 백 과부는 돈이 모이면 어김없이 땅을 샀다. 땅이 늘어나다보니 추수도 늘었고, 추수가 늘다보니 더 빨리 땅을 넓힐 수 있었다.
1917년 백 과부는 평양에서 대동강 건너편에 있는 강동군 만달산 부근의 토지가 좋다는 거간의 말만 믿은 채, 평당 7~8원을 주고 수천평의 땅을 샀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땅은 석회질이 많아서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황무지였다. 1~2전을 받고도 팔기 어려운 박토(薄土) 중에 박토였다.
백 과부가 단돈 2전도 하지 못하는 황량한 박토를 어떤 흉악한 중개자에게 속아서 평당 7~8원을 주고 샀다는 소문은 당시 평양에서 일대 화제가 되었다. 백 과부가 밤낮으로 돈만 모으다가 망하게 생겼다고 조소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것이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어찌 꿈엔들 알았으랴. 그 후 한 2~3년이 지나서 일본인이 그 지역에서 시멘트 원료를 발견했다. 일본인은 그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부근 토지를 모조리 평당 3~4원을 주고 매수했다. 백 과부에게도 물론 토지를 팔라고 매매 교섭을 했다. 총명한 백 과부는 그 말을 듣자 즉각적으로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우리들보다 눈 밝은 일본사람들이 부리나케 들어와서 제발 토지를 팔라는 데는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백 과부는 팔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강한 자여! 그대는 여자니라’, ‘신여성’ 1933년 2월호) |
1933년 5월13일 평양에서 거행된 백선행 사회장 광경을 담은 ‘신동아’ 1933년 6월호.
“내 평생 남의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 내 땅을 내가 안 팔겠다는데 누가 말려.”
땅값은 매일같이 치솟았다. 평당 30원. 다른 사람이 판 가격보다 10배나 올랐어도 백 과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오노다는 결국 평양 부윤을 찾아가 사정했다. 평양 부윤이 주선하여 성사된 매매가격은 평당 70원. 백 과부가 속아서 산 가격보다 10배나 비싼 가격이었다. 이 거래 한 건으로 백 과부의 재산은 30만원(현재 가치 300억원)으로 불어났다. 동네 부자에서 평양 굴지의 대재산가로 올라선 순간이었다.
평양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어도 백 과부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집에 온 손님에게 냉면을 대접했다가 찌꺼기를 남기는 이가 있으면 “여보시오! 거 아깝지도 않소?” 하며 따로 보관해두었다가 나중에 먹을 정도로 검소했다. 그러나 학교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천금도 아끼지 않고 지원했다.
평양에서 부인 재산가로 첫손가락을 꼽는 박구리 백선행 여사는 지난 25일 평양사립보통학교 중에서 가장 크고 장족의 세(勢)로 발전해가는 광성학교에 자기의 소유 토지 중 대동군 예포리에 있는 논 1만800여 평과 밭 3000여 평 합계 1만4000여 평(시가 1만3000원가량)을 그 학교의 기본금으로 기증했다. 광성보통학교는 감격하여 그 재산을 기초로 재단법인을 세우기로 했다. 여사의 높은 뜻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교내에 여사의 기념동상을 세울까 혹은 기념비를 세울까를 놓고 목하 교직원들 사이에 의논이 분분한 중이다. (‘80과부의 교육열’, ‘동아일보’ 1925년 2월28일자) |
광성보통학교는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무어(문요한) 박사가 세운 학교였다. 교육령 시행으로 재단법인을 설립해 정식으로 인가를 받지 못하면 졸업생이 상급학교로 진학할 수 없었다. 백 과부는 한평생 학교는커녕 서당 한 번 다녀보지 못했고 한글은커녕 숫자조차 읽고 쓰지 못했다. 굵기가 다른 수수깡에다 손톱으로 표시해 금전의 출납을 기록했는데, 그런 식으로 30만원의 거금을 관리하면서도 한 번도 계산이 틀린 적이 없었다.
글 모르는 교육자
하지만 문자의 도움 없이도 그럭저럭 재산 관리를 할 수 있다고 해서 글 모르고 못 배운 것이 서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 기독교 신자가 된 백 과부는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 바동바동 모은 재산을 기독교계 학교에 아낌없이 기부했다. 이후 백 과부는 광성보통학교에 추가로 13만여 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하여 총독부의 엄격한 심사를 뚫고 재단법인 인가를 받아냈다.
얼마 전 평양 사립 광성보통학교에 1만3000원의 재산을 기부하여 여러 돈 있는 사람을 놀라게 했던 평양부 백선행 여사는 이번에 또다시 평양 장로교회가 경영하는 사립 숭현여학교에 현금 3만원 가치에 상당하는 대동군 추자도에 있는 전답 2만6000여 평을 기부했다. 학교 당국에서는 물론이요 일반 사회에서는 백 여사의 열성에 대하여 칭송이 자자하다더라. (‘백 여사 특지’, ‘동아일보’ 1925년 10월26일자) |
1925년 광성보통학교와 숭현여학교에 거금을 희사한 백 과부는 1927년에는 장로교에서 경영하는 창덕보통학교에 6000원 상당의 토지를, 1930년에는 숭인상업학교에 1만3000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해 재산법인 설립의 기초를 닦았다. 글도 모르고 자식도 없는 백 과부가 학교 경영권에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단지 조선의 젊은이들이 가난해서 못 배우는 설움만큼은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피땀 흘려 모은 18만원 상당의 재산을 조건 없이 기부한 것이었다.
그렇듯 돈을 아낌없이 기부한 덕분에 글 한 자 읽지 못하는 백 과부는 위대한 교육자로 추앙받게 되었다. 입학식이나 졸업식에 축사할 때마다 백 과부는 자신의 인생철학이 담긴 진심 어린 당부를 잊지 않았다.
“너희들은 조선의 아들이요 딸이다. 졸리다고 자지 말고, 놀고 싶다고 놀지 말고, 공부하기 싫다고 책 덮어두지 말고, 언제든지 부지런히 책과 씨름을 해라. 상급학교 올라가서 어려운 공부를 더 잘해야 우리나라가 잘된다.”
하기 싫어도 열심히 일해야 부자가 될 수 있듯, 공부를 잘하려면 싫은 공부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백 과부가 학교에 큰돈을 기부하자 친지들이 그렇게 마구 쓰다간 얼마 못 버틴다고 충고했다. 그때마다 백 과부는 이렇게 말했다.
“돈이란 것은 써야 돈 값을 하지, 쓰지 않으려면 돈은 모아서 뭐하나.”
백선행기념관
1925년 이후 면전에서 백 과부를 백 과부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도 나이거니와 가슴 깊숙이 우러나는 존경심 때문에 차마 과부라고 ‘하대’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여성에게는 이름이 없던 시절에 태어나 이름 없이는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운 시대까지 살다보니, 환갑 때 백선교를 놓고 얻은 이름 아닌 이름 ‘선행’이 어느 순간 정식 이름처럼 통했다.
일흔 살 이후 백선행은 조선을 대표하는 여성 사회사업가로 온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1925년 숭현예배당에서 ‘백선행 여사 교육 열성 찬하회’를 시작으로 백선행의 미거(美擧)를 기리는 찬하회와 기념비 제막식, 동상 제막식 등이 꼬리를 물고 개최됐다. 1928년에는 근우회 평양지회 주최로 ‘백선행 여사 위안 야유회’까지 열렸다. 야유회가 열린 기림리 공설운동장에는 2000여 명의 여성이 운집해, 그때까지 평양에서 가장 많은 여성이 참여한 행사로 기록됐다. 백선행은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은 한 명도 없었지만, 그의 은혜를 입고 그를 어머니, 할머니로 섬기는 사람은 수만, 수십만을 헤아렸다. 1928년 백선행 여사가 타계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떠돌자 평양 시내 장의용 꽃값이 들썩일 정도였다.
최근 수일 전부터 어떠한 방면에서 나온 말인지 백선행 여사가 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풍설이 돌기 시작하여 평양 부내의 사람들은 물론 멀리 사오십 리 밖에서까지 문상 오는 사람이 많아서 그 집안사람은 이 헛물켜는 문상객을 돌려보내느라 정신이 없다. 시세에 눈 밝은 꽃 장사들은 관에 사용되는 꽃은 자기에게 주문하여달라고 간청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풍설의 출처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수일 전에 박 과부란 사람이 죽은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오전된 듯하다더라. (‘근거없는 소문으로 조상객의 헛물켜기’, ‘동아일보’ 1928년 3월21일자) |
1928년까지 평양에는 조선인이 집회를 열 만한 공회당이 없었다. 부립공회당은 사실상 일본인의 전유물이었기에 야외 집회가 아니면 조선인은 정치 집회를 실내에서 개최할 수 없었다. 조만식, 오윤선이 백선행을 찾아가 조선인 중심의 공회당과 도서관을 건축할 뜻을 전하자 백선행은 흔쾌히 현금 4만원을 내주었다. 남편 제사를 모시게 할 생각으로 뒤늦게 들인 양자 안일성이 유산이 줄어들 것을 걱정하자 백선행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지 누가 말려서 하지 않겠느냐. 나는 평생 남의 말이란 들어본 적이 없다.”
공회당은 1927년 3월 기공해 1929년 5월 개관했다. 백선행은 6만5000원의 공사비를 전액 부담했을 뿐만 아니라 재단법인 설립을 위해 추가로 8만5000원의 자본금을 출연했다. 개관식 사회를 맡은 조만식은 백선행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새로 지은 공회당의 공식명칭을 ‘백선행기념관’이라 선포했다.
이후 ‘박희도 사건’ 등 일부 불미스러운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했지만(‘신동아’ 2005년 9월호 500쪽 ‘중앙보육학교 박희도 교장의 여제자 정조유린 사건’ 참조), 백선행기념관은 광복 직전까지 평양 시민의 집회와 문화행사장으로 널리 사랑받았다. 1930년 11월8일 교육계·실업계·학생계 대표 300여 명이 참가한 ‘백선행 여사 찬하회’에서 우기선 윤산온 이기찬 조만식 등의 축사가 끝난 후 백선행은 다음과 같은 답사를 남겼다.
“내가 쓰다 남은 돈이 있어 돌집 한 채 짓고 몇 학교에 돈을 좀 내었기로 그다지 훌륭해서 찬하회를 한다니 세상 사람들은 부질없기도 하오. 사회에 돈을 내는 뜻? 무식한 늙은이에게 뜻 같은 게 있을 리 있나. 자손 없는 백 과부, 돈 남기고 죽어서 친척 녀석들이 재산 싸움한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그런 험한 꼴이 어디 있나. 그러니 내 생전에 세상에 좋다는 사업에 썼으면 좋은 일 아니겠나?” (‘고 백선행 여사 일생3’, ‘동아일보’ 1933년 5월12일자) |
창덕보통학교, 숭현여학교, 광성보통학교 교정에는 백선행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고, 백선행기념관에는 동상이 들어섰다. 백 과부는 환갑에 이르기까지 악착같이 모은 돈을 여생 26년 동안 한푼도 남김없이 쓰고 가려 했다. 그 기간 백선행이 사회에 기부한 금액은 31만6000여 원. 사치를 일삼고 기생집 출입이 잦았던 양자 안일성에게는 여러 필지로 쪼개진 수천원 상당의 땅을 조금 남겼을 뿐이다. 자신이 죽고 난 후 자식이 땅을 팔더라도 한꺼번에 다 팔아서 빨리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한 어머니로서의 마지막 배려였다.
행복한 돈 쓰기
백선행은 언제나 근검절약하고 안락과 사치를 멀리했지만, 딱 한군데만큼은 사치를 부렸다. 바로 남편의 묘소였다. 평양 굴지의 부자가 된 후 백선행은 남편의 묘소 주변 5만여 평의 임야를 사들이고 노송을 옮겨 심어 울창하게 가꿨다. 2만여 평의 묘답(墓畓)을 사고 화려한 기와집을 지어 묘지기가 살면서 지키고 가꾸게 했다. 창덕보통학교 교정에 고궁 정자와도 비슷한 모양의 묘상각(墓上閣)을 지어 봄가을 제향에 참석할 인사들의 휴식처로 제공했다. 남편의 묘역을 왕릉만큼 화려하게 꾸미고 화강암 지대석을 쌓아 남편 봉분을 올리고 바로 옆에 자신이 묻힐 봉분 자리를 마련했다.
백선행은 1933년 5월8일 새벽 여든여섯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조선을 대표하는 여성 사회사업가로 존경받던 백선행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남편과 합장하여달라”는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70년 전 죽은 남편을 평생 그리워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했을까. 2년 남짓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백선행이 한 일이라곤 병든 남편의 병 수발이 전부였다. 백선행이 70년 전 죽은 남편을 사랑은 했겠지만, 그 사랑은 보통 사람들이 배우자에게 느끼는 사랑과는 다른 차원이었을 것이다. 백선행의 70년 수절은 남편을 사랑했을 경우에만 가치를 지닌다. 사랑하지도 않은 남편을 위해 70년 동안 수절했다면 그런 인생이야말로 덧없고 의미 없는 인생일 것이기 때문이다. 70년 전 죽은 남편을 향한 백선행의 사랑은 인생의 의미를 지키기 위한 발버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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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행은 사회만을 위해 돈을 쓰지 않았다.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동안, 백선행은 사회로부터 엄청난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사회적 존경과 찬사 대신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려고 해도 백선행은 자신을 위해 돈 쓰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평생 길들인 입맛이 있는데 매끼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는다고 맛있을 리 없고, 좋은 집에 산다고 마음 편할 리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비싼 음식 비싼 옷이라도 내게 맞지 않으면 비싼 돈 주고 불편을 사는 어리석은 일이다.
백선행은 한평생 악착같이 모은 전 재산을 학교와 사회를 위해 쓰면서 심리적 포만감과 행복을 느끼면서, 사회적 존경과 찬사를 덤으로 받았다. 돈이란 백선행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써야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쓰지는 말아야 한다. 백선행의 행복한 돈 쓰기는 존경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돈은 백선행처럼 써야 돈 값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