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도 연 6000명 배출, 가정법회 1100여 개
- 4개 말사(末寺), 3개 해외 지원 거느려
- 기자 출신 스님의 쉬운 설법이 이끈 ‘포교 기적’
- “기복(祈福) 불교를 고등 종교로 끌어올렸다”
- 원장스님 월급 250만원…투명한 회계가 신뢰 높여
- 매주 수천명 자원봉사자가 발휘하는 자치행정의 힘
그러나 실상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강남구 삼성동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은 봉은사는 1200년 역사를 지닌 고찰(古刹)이자 조선시대 불교를 중흥시킨 대규모 사찰이다. 그래서 ‘강남의 절’이라고 하면 유일하게 떠오르는 것이 봉은사이다.
그런데 10여 년 전 봉은사에 버금가는 대형 사찰이 강남에 입성했다. 포이동 산자락에 터를 잡은 능인선원이다. 한눈에 봐도 그 규모가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든다. 예술조형물을 연상시키는 초록빛 건물은 축구장만하다. 언뜻 보면 사찰같지 않지만 내부는 불교 관련 시설물로 가득하다. 지하 5층, 지상 3층의 건물 입구에 들어서면 안내 데스크가 나오고, 직원들이 복잡하게 얽힌 건물의 내부를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지하 2층에 있는 대법당은 3000여 명의 신도가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다. 뒷산과 맞닿은 건물 상층부엔 큰 불상들이 늘어서 있고 그 아래에는 능인선원 불사(佛事)에 참여한 신도들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이 상징 조형물과 함께 자리잡고 있다. 능인선원 포이동 법당의 공사기간은 무려 7년. 1988년 불사를 시작해 1995년 8월에야 공사를 마감했다.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겠지만 불교에서도 그 위세를 결정하는 요소는 건물의 규모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신도를 확보하고 있는가이다. 그런 점에서 능인선원은 단연 돋보인다. 능인선원은 조계종을 제외하면 불교의 한 종단과 맞먹는 수의 신도를 품고 있다. 무려 25만여 명에 이른다. 매일 새벽과 일요일, 능인선원 일대는 끝없는 자동차 행렬로 북적인다.
‘불자 사관학교’
연간 6000여 명의 불자가 이곳에서 탄생하고, 지역별로 1100여 개의 모임(가정법회)이 조직돼 있으며, 4개월 과정의 불교대학에서는 기수마다 30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지역이나 사찰에서 불교대학을 운영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으나 줄곧 3000명이 넘는 수강생이 적(籍)을 두고 있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능인선원이 불교계에서 ‘포교 사관학교’ ‘신도 사관학교’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이다.
‘선원(仙院)’이라는 명칭에서 보듯 능인선원은 포이동 법당을 사찰이나 절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능인선원은 일반적으로 거대 고찰이나 교구본사가 거느리는 말사(末寺) 개념의 지원을 4곳이나 두고 있다. 북한산 의상봉 아래에 있는 국녕사, 서울 관악구의 등룡사, 경기도 고양시의 석룡사,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용장사가 그것이다.
사찰이 아닌 일개 법당이 수도권 인근에서만 4개의 지원 사찰을 운영하고 있는 것. 그뿐만 아니라 중국 톈진을 비롯, 태국, 미국 뉴욕 등 해외에도 지원을 두고 있다. 포이동 법당과 가까운 삼성서울병원 안에도 환자들과 보호자를 위한 법당이 만들어져 능인선원 포교의 주축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능인선원은 대한불교 조계종 능인선원과 종교법인인 재단법인 능인불교선양원, 사회복지법인인 능인선원, 사회복지법인이 운영하는 능인종합사회복지관으로 구성된다.
건물 내에는 이곳으로 들어오는 보시금과 신도들의 저축과 대출을 관리하는 능인신협이 있는데, 2004년 현재 조합원수는 2800여 명, 자산은 300억원 규모다. 신도들은 이곳에서 ‘푸른나라 생활협동조합’을 만들어 유기농 먹을거리를 공동구매한다.
능인선원을 설립한 지광 원장스님.
최근 능인선원은 부산의 지역 일간지인 국제신문의 최대주주가 됐다. 그러나 능인선원 원장인 지광스님(56)은 10월26일 이사회에서 송석주 전 동국대 총장을 대표이사로 추천하고 자신은 명목상의 회장직만 유지하기로 했다. 지광스님은 “불교계 일각에서 일간지를 하나 해보자고 부탁해 도움을 드렸는데 뜻하지 않게 최대주주가 됐다. 신문사를 직접 경영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시간도 없다”고 밝혔다.
수배 피해 지리산 암자 들어가
능인선원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적’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능인선원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985년. 지광스님은 서울 서초동 삼익상가의 28평 사무실을 보증금 500만원, 월세 15만원에 빌려 ‘능인선원’ 간판을 내걸었다. 당시 신도수는 10명 남짓. 그로부터 21년 만에 신도수가 2만5000배로 불어난 셈이고, 선원의 규모는 전국의 사찰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급성장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신도들은 원장인 지광스님의 ‘원력(願力)과 말씀’, 그리고 선원 행정조직의 유기적 시스템을 가장 큰 요인으로 꼽는다. 능인선원의 신도 배출 창구라 할 불교대학과 가정법회를 만들었고, 22년이 지난 지금도 법회와 교육을 직접 주관하는 만큼 능인선원이 기적 같은 성장세를 이룬 가장 큰 동력을 원장스님에게서 찾는 것이다. 신도들에게 비친 지광스님은 경이원지(敬而遠之)하게 되는 고고한 법사라기보다 부처님 말씀을 자상하게 가르치는 교사이자 인생 카운슬러에 가깝다.
그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서울고와 서울대를 졸업한 지광스님은 한국일보 기자로 근무하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해직됐다. 당시 광주 민주화운동 현장을 취재하던 그는 일상사처럼 이뤄지는 언론 검열에 항거하다 해직을 당하고 수배자 신세로 쫓기게 된다. 추적의 눈을 피해 숨어든 곳은 지리산 화엄사 인근의 한 토굴 암자.
그는 그곳에서 수련하는 스님들을 만나 불교에 매료됐고 마침내 승려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지광스님은 지난해 신군부 치하의 민주화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민주화 유공자로 선정됐다. 도피할 당시 그에게는 아내와 네 살배기 아이가 있었지만 그때의 이별이 결국 속세에서의 마지막 인연이 됐다.
불교에 입문하기 전 지광스님은 가톨릭 신자였다.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받고 성당 주일학교 교장을 맡을 만큼 열성이었다. 지광스님의 이런 이력은 후일 능인선원의 도심 포교 ‘태풍’을 일으키는 자양분으로 작용한다.
지광스님은 그 연배의 스님으로는 드물게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하버드대 초청으로 미국에서 두 번이나 한국 불교 강연회를 연 것도 그 덕분이다. 그는 기자 시절 한국일보 외신부와 ‘코리아타임스’에서 근무한 적도 있다.
그가 출가한 후 한 최초의 ‘포교활동’도 영어와 무관하지 않다. 1984년 말 스님은 지리산에서 내려와 서울 서초동에 있는 신도의 집에 기거하게 된다. 선방과 토굴의 고된 수행으로 상한 몸을 추스르기 위해서였다.
과외가 금지된 당시 스님은 그 신도의 자녀들에게 영어로 불경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명문대 출신의 인텔리 스님이 영어로 불교경전을 강독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다른 학생들은 물론 어른들도 모여들었다. 영어를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시키겠다는 속셈이었다.
스님의 예상은 적중했다. 부처님이 어떤 인물인지, 불교가 어떤 종교인지 모르고 그저 복을 달라고 빌던 신자들이 종교의 진정한 의미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스님은 지리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초동 상가를 빌려 능인선원을 개원한다. 그는 선방에서 참선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가야 할 길은 포교와 전법(傳法)임을 깨닫게 된다.
‘비유식 설법’의 효과
그렇다면 신도들이 말하는 지광스님의 ‘원력과 말씀’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 답은 스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 그래서 스님에게 지난 9월 초부터 여러 차례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때마다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았다. “언론에 나가기 싫습니다.” 두 달 동안 거절로 일관하던 스님을 막무가내로 설득해 어렵사리 자리를 함께할 수 있었다.
▼ 기자 출신이면서 왜 그렇게 언론을 기피합니까.
“스님은 자신이 깨달은 바를 대중에게 이야기하면 그로 족합니다. 그런데 언론에 이야기하면 제 뜻이 왜곡될 수 있고, 종교의 본령이나 본질을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이름을 얻을수록 시기의 대상이 됩니다. 알려지는 것 자체가 두려운 게 아니라 시기하는 사람들의 적개심이 문제입니다.”
▼ 그런 적개심이 행동으로 표출된 적이 있습니까.
“능인선원이 처음 문을 열 무렵 ‘왜 중이 산에 있지 않고 도시로 내려오느냐’며 몰려와 시위를 했습니다. 문에다 십자가를 그려놓는가 하면 유리창도 많이 깨졌지요.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어요. 최근에는 방화까지 해서 경찰이 조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극소수의 사람이 그런 일을 저지르지만 극렬합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경쟁의 본질은 남과 싸우고 깔아뭉개는 게 아니라 내가 한 차원 높아지고 스스로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인데….”
▼ 불교에서 말하는 원력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미래의 비전을 성취하기 위한 강한 추진력과 의지를 가리킵니다.”
능인선원 신도들은 스님의 원력이 “좀더 많은 대중에게 제대로 된 불교와 부처님의 말씀을 알리는 것”이라고 했다. 스님은 늘 이웃과 함께하는 불교, 대중과 함께하는 불교, 배우는 불교를 강조해왔다. 특히 지광스님의 설법은 쉬우면서도 현실 속의 비유로 가득 차 누구나 불교 경전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면 이렇다.
“부처님 말씀에 ‘위법망구(爲法忘軀)’란 게 있는데 진리를 위해서 몸을 던진다는 뜻이지요. 우리는 모두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는 수행자로서 강한 원력과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사회가 격심한 변동으로 흔들리는 요즘이야말로 남다른 용기가 필요합니다. 달마대사의 제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팔을 자른 혜가와 진리를 얻기 위해 구도여행을 마다 않은 선재동자의 용기를 본받아야 합니다. 용기를 가지려면 모든 욕망을 넘어서야 합니다. 나 자신을 극복해야 합니다. 기중기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지만 전기가 꺼지면 깃털 하나도 들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전기의 구실을 하는 것이 원력과 용기입니다.”
불교대학에 20년째 기수마다 3000명씩 몰리는 것도 그의 쉬우면서도 적확한 비유가 가미된 설법 방식 때문이다. 스님은 자신의 설법을 책으로 묶어 출간해왔는데, 벌써 10권이 넘었다.
‘대학원 모범생’
그래서 불교 개혁 진영 일각에서는 지광스님을 독일의 종교 개혁가인 마르틴 루터에 비견하기도 한다. 루터는 가톨릭 사제들의 전유물이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성서의 해석 권한을 모든 크리스천이 공유하게 한 인물이다.
▼ ‘기복(祈福)신앙 차원의 불교를 고등 종교로 승격시켰다’는 평을 듣는데요.
“과분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이 곧 삶인데 삶의 현장을 버리고 천당, 지옥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부처님, 예수님 같은 위대한 인물들을 보십시오. 말할 때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통찰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궁금해하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바로 알아내고 거기에 맞는 비유를 동원해 적절한 해답을 줍니다.
청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일방적으로 얘기하면 그것은 나의 주장일 뿐, 그 사람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지만 현재의 불교도 사회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종교가 자기 이야기만 하면 뜬구름 잡는 말만 하는 것으로 오해받는 것은 물론, 그 종교는 특정 종교인의 전유물이 됩니다. 20세기 이후 종교가 종교 직업인의 전유물이 되다시피하면서 세속의 일반인과 괴리가 생긴 것도 이 때문입니다.”
각종 법회와 불교대학 강의가 이루어지는 능인선원의 대법당(위). 아래는 능인선원 뒤편에 자리잡은 야외 불상.
“도움이 됐다면 됐겠죠. 기자라는 직업의 특성은 정곡을 찌른다는 것입니다. 기자는 상황 판단이 빠르고, 팩트를 기반으로 취재를 하다보니 육하원칙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독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동물적으로 파악해야 하거든요. 또 기자가 쓰는 기사는 만연체가 아니라 단문입니다. 저의 설법 스타일도 비슷합니다. 신자들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를 먼저 짚어내죠. 절대 길게 말하지 않습니다. 요점만 찍어서 짧은 비유를 섞어 말합니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직업인들의 세계를 겪어본 것도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서울대 종교학과 윤원철 교수는 “능인선원의 폭발적 성장세는 서울 강남의 인텔리들에게 잠재된 종교적 욕구를 해소해준 지광스님의 설법 방식 때문에 가능했다. 한마디로 양측의 ‘코드’가 딱 들어맞았다”고 분석한다. 지광스님은 서울대 종교학과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윤 교수는 “워낙 큰 사찰의 주지가 대학원생으로 들어온다고 해서 처음엔 반대했는데, 일단 대학원에 들어오고 나서는 그 바쁜 중에도 사전에 양해를 구하지 못하면 하루도 수업에 빠지지 않는 모범학생이고 과제물도 놀라울 정도로 빨리, 그리고 많이 제출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신도들이 능인선원의 두 번째 성공 이유로 꼽는 것은 ‘구린 데 없이 투명한 사찰 경영방식’이다. 능인선원의 행정조직은 정부조직을 방불케 한다. 선원 내 모든 업무를 관장하는 총간사장 아래에 기획실을 비롯한 50여 개의 본부조직이 있고 각각의 본부, 실에는 본부장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부원이 있다.
“어항 속 금붕어처럼 살고 있다”
또한 본부는 전체 행정을 관할하는 행정조직과 신도를 담당하는 지역조직으로 나뉜다. 행정조직은 기획실을 중심으로 교유, 법회, 기도, 불사, 판매, 구매 등으로 세분돼 있고, 지역조직은 1100여 개에 달하는 가정법회를 지원, 관리한다. 5∼10명이 모이는 지역법회는 ‘능인등’이라고 부르는데 3∼10개의 능인등이 모이면 ‘능인장’이 된다. 가정법회 전체를 관리하는 신도는 ‘정법사’, 능인장 전체를 관리하는 신도는 ‘현법사’라 부른다.
능인선원 직원은 300여 명에 이르지만, 경비직과 용역직원 10여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보수 자원봉사자다. 주부와 직장인이 대부분인데 교수, 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도 여럿 있다. 이들은 요일을 정해 자기 형편이 맞는 시간에 와서 일한다. 이 때문에 본부장이 여러 명이다. 가령 홍보본부장도 2명이 번갈아가면서 한다. 기자는 처음에 이런 구조를 모르고 전화를 걸었다 낭패를 봤다. 같은 사람으로 알고 한참을 이야기하다보니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중요한 행정사안과 지역업무는 매주 두 차례 모든 책임자가 모이는 전체회의에서 논의되고 결론을 낸다. 중요치 않은 업무의 자율권은 조직 책임자에게 주어지고 원장스님은 최종 결재만 한다. 행정조직의 수반인 총간사장은 원장스님이 정하는 게 아니라 이미 총간사장을 지낸 사람들과 본부장단에서 공동으로 추천하면 원장스님이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정해진다. 총간사장을 마치면 다시 평신도와 일개 부원으로 일한다.
능인신협과 생협도 모두 자체적으로 움직여가고 모든 회계는 외부 회계법인에서 감사해 공개한다. 외부 회계감사를 받는 사찰은 전국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렵다. 능인선원의 행정조직은 스님들의 연봉을 정하고 월급을 지급한다. 원장인 지광스님도 이곳에서 월급을 받는다. 불교계와 학계에서 능인선원이 ‘불자에 의한, 불자를 위한, 불자의 사찰’이라고 불리는 까닭을 짐작케 한다. 이 대목에서 ‘속물근성’이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큰 사찰의 주인인 원장스님은 월급을 얼마나 받을까. 스님에게 직접 물어봤다.
“월급은 사회복지법인에서 이사장 자격으로 받는데…그걸 꼭 알아야 하나요? 출장비 빼고 판공비 포함해 250만원쯤 받습니다(총간사장은 ‘월급만 200만원 정도’라고 답했다) 상좌스님들은 연조에 따라 150만원 받는 분, 200만원 받는 분이 있는데 그것도 행정조직에서 정합니다. 여기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니까 절대 부족한 돈은 아닙니다.”
▼ 능인선원의 촘촘한 조직은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사람이 많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자원봉사 조직입니다. 사실 ‘조직’이라기보다는 ‘울타리’ 같은 것이지요. 신도들의 필요 때문에 생긴 자생적 조직이라고 할까요. 막스 베버도 현대사회는 시스템 사회라고 하지 않았나요. 제가 간섭하는 부분도 없고 간섭할 일도 아닙니다. 저는 누가 어느 조직에 있는지 다 알지도 못합니다.”
▼ 회계가 투명한 것으로 유명하더군요.
“외부 공인회계사로부터 결산 감사를 받고 그 결과를 공개합니다. 최소한의 양식이 있다면 치부(致富)를 할 수는 없지요. 중이 재산을 가져 뭣합니까, 물려줄 것도 아닌데. 정말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살고 있습니다. 취재해서 알겠지만 신협도 그렇고 모든 조직이 크로스 체크가 됩니다. 회계도 컴퓨터 프로그램이 알아서 하고요. 전체가 공동책임을 지는 것이지요. 신자들도 명예가 있으니까 알아서들 잘할 겁니다.”
연꽃은 탁한 연못에서 핀다
능인선원 포이동 법당은 1995년 완공 당시 재단법인 능인선원과 사회복지법인 능인선원으로 등록한 까닭에 대한불교 조계종 소유의 사찰이 아니다. 또 이곳의 불교대학을 졸업해도 조계종에서 인정하는 각종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능인선원은 조계종단과 낯을 붉힌 일도 있다. 조계종단은 능인선원 포이동 법당을 조계종 재산으로 환수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계종 총무원의 한 관계자는 “능인선원은 조계종 소유로 돼 있지는 않지만 원장스님이 조계종 스님이라 현재의 상태를 말하기가 애매하다”고 했다. 대신 능인선원은 공터에 이름만 남아 있던 북한산 국녕사를 100여억원을 들여 복원한 후 조계종에 헌납했다. 따라서 국녕사는 능인선원의 지원이지만 조계종에 분담금을 내는 공식적인 조계종 사찰인 셈이다.
▼ 포이당 법당의 조계종 복속을 놓고 말이 많았지요.
“포이동 선원은 불자의 출연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불교의 재산이자 신도들의 재산입니다. 모든 인간이 자연을 공유하듯, 능인선원도 모든 불자의 것이지요. 법당을 조계종 재산으로 옮기려 해도 현재는 법적으로 불가능하게 돼 있습니다. 포이동 선원은 조계종의 종헌, 종법에 따라 재단의 이사장은 반드시 조계종 스님이 하고 이사의 절반도 조계종 스님이 맡도록 되어 있습니다. 얼마 후 상좌스님이 많이 나오면 이사의 정족수를 채울 것이고 제가 세상을 떠나면 조계종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것입니다.”
능인선원과 지광스님은 참선을 수행의 기본으로 하는 기존 불교의 관점에서 다소 벗어나 포교와 전법 중심으로 수행을 하다보니 불교계 일각으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지광스님은 “부처가 되는 길에는 참선이라는 한 가지 수행법만 있는 게 아니다”고 잘라 말한다. 스님은 1994년 서의현 조계종 총무원장 체제가 무너질 당시 종단개혁 세력으로 동참한 바 있다.
▼ 지나치게 신도 교육과 포교에만 열중한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저도 산중에서 몇 년을 살았지만 참선은 수행을 위한 방편이자 수단일 뿐입니다. 수행에는 참선뿐 아니라 염불도 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요. 그런데 요즘 참선이 목적시되다보니 그것만 최고로 여기는 풍토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삶 자체가 선(禪)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의 경지라는 것은 불의의 경계, 나와 남이 하나가 되는 경계, 화두를 타파하는 경계, 번뇌와 망상을 깨는 경계를 가리키는데 이는 삶 자체가 선적인 삶이 아니면 오를 수 없는 경지입니다. 어디 진리가 산중에만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연꽃은 탁한 연못에서 핀다’고 하셨습니다. 연꽃이 어디 산에만 피는 것입니까. 불교도 이제 종교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대지(大志)는 대지(大地) 위에 있다’
서울대 윤원철 교수는 “능인선원은 스님과 신자의 수직적 관계를 수평적으로 바꿨을 뿐 아니라 전통 사찰에서 고집하는 참선 일변도의 수행에서 한걸음 나아가 전법과 포교 중심으로 사찰을 운영함으로써 불교의 도심화, 대중화에 성공했다”며 “개신교, 가톨릭 교회의 운영방식 중 좋은 점만을 벤치마킹함으로써 도심의 불자들이 불교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능인선원의 일요법회와 가정법회, 새벽법회는 교회나 성당의 그것과 닮았다. 능인선원의 이런 포교 모델은 불교 내에서뿐만 아니라 종교학 차원에서도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능인선원을 대상으로 해 쓴 논문도 여러 편 나와 있다.
▼ 도심 포교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제가 종교계에서 어떤 모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능인선원을 만들 당시 서울 시내에 포교당이라는 형태가 거의 없었죠. 교회나 성당만 많고. 우리는 도시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대지(大志)는 대지(大地) 위에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큰 뜻은 많은 사람과 더불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한 ‘중생제도(衆生濟度)’는 중생 속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부처님이 자비행을 하라고 했는데, 이웃이 가까이에 없으면 어떻게 자비를 베풀겠습니까.
스님들이 북적이는 도심 속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가다듬어 맑은 마음으로 맑은 말을 토해내면 도심 신도의 마음은 저절로 맑아집니다. 부처님은 ‘일심(一心)이 정하면 다심(多心)이 정하다’고 했습니다. ‘너의 한마음 깨끗해지면 많은 사람의 마음이 깨끗해지고, 많은 사람의 마음이 맑아지면 국토, 나라, 나아가 우주 법계가 맑아진다’고 했습니다. (개혁이라고 하면 다 싫어하는데)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부처님도 당시에는 개혁가였지요. 카스트의 신분사회를 반대하고 태생부터 신분이 갈리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원효대사는 당시의 왕족, 귀족 불교를 타파하기 위해 거사 복장을 하고 꽹과리를 치면서 서민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법당 안의 불교’를 거리로 내놓은 분입니다.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지만 종교는 대중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특정집단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 능인선원의 가정법회는 기독교의 가정예배와 비슷한 것 같더군요.
“꼭 교회를 벤치마킹했다기보다는 그저 신도가 많아지니까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할 목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일종의 점조직인 셈이지요. 모여서 경전도 토론하고 서로 도울 수 있는 것은 돕고 하는 재가(在家) 모임입니다. 굳이 제가 만들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요즘 교회 한두 번 안 다녀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경험이 자연스럽게 가정법회를 만들어낸 것이죠.”
불교는 가르쳐야 살아남는다
능인선원의 신도를 배출하는 중추기관은 능인불교대학이다. 1986년 서초동 시절 불교학교로 시작해 지난 20년 동안 41기수(1기 3개월 과정, 1년에 2회)에 걸쳐 12만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불교의 기초교리, 근본불교, 비교종교학, 불교의식에 대해 공부하며 사찰에서 지켜야 할 기본예절도 배운다. 능인선원의 행정조직 자원봉사자 대부분이 불교대학 출신이다.
능인불교대학의 인기는 매주 두 번씩 열리는 불교대학 수업에 들어가보면 바로 실감할 수 있다. ‘입추의 여지가 없다’는 말 그대로 많은 사람이 빽빽하게 모여앉아 원장스님의 강의를 경청한다. 3000명이 들어가는 대법당으로도 모자라 일반 법당에서 CCTV로 강의를 듣는 사람도 많다. 강의가 끝나도 몇몇 신도는 자리를 뜨지 않고 그날 배운 것을 복습한다. 강의 전후 법당 정리와 청소, 안내는 기수 선배들이 나와서 해주고, 이런저런 어려움도 선배들이 해결해준다.
▼ 불교대학은 어떤 계기로 시작했습니까.
“처음엔 이렇게 클 줄 몰랐습니다.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불교에 대한, 또 배움에 대한 도심 신도들의 갈증이 그만큼 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그 무렵엔 스님들이 교육에 너무 인색했어요. 내용도 부실했고. 불교를 체계적으로 가르칠 필요를 절감한 후 동국대에서 도강(盜講)을 하며 불교 교육의 문제점을 파악했습니다.
능인선원 개원 당시 두 가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커리큘럼을 짰습니다. ‘가르쳐야 불교가 산다’ ‘이웃 없는 자비 없다’가 그것입니다. 한 학기, 두 학기가 지나면서 자리가 잡혔지요. 주위에선 저러다 말겠지 했지만 계속 이어지다보니 신도들에게 신뢰를 주게 된 겁니다.”
지광스님이 22년간 변함없이 하고 있는 게 또 있다. 매일 새벽 3시30분에 어김없이 시작되는 새벽기도이다. 포이동 인근이 새벽에 차량들로 붐비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외국 출장을 다녀와 밤늦게 법당에 도착해도 새벽기도는 절대 빠뜨리지 않는다. 스님은 “모든 수행자가 다 마찬가지지만 한번 약속을 어기면 신도와의 신뢰가 무너진다”고 했다.
‘마지막 원력’
지광스님은 자신의 마지막 남은 원력을 경기도 화성에 있는 능인불교대학원대학과 미국 뉴욕주 턱시도시(市)에 불교대학을 세우는 데 쏟아 붓고 있다. 화성 동탄 신도시와 15분 거리 위치에 건립되고 있는 불교대학원대학은 몇 년 안에 문을 열 예정이다. 1988년부터 화성시의 논밭을 한두 평씩 사모았는데, 법적으로 수도권에 대학을 세울 수 없자 전문 불교인을 양성하는 대학원부터 만들기로 했다.
또한 스님은 최근 미국 대학총장협의회로부터 한국의 4년제 대학 2학년을 마치고 영어자격시험에 합격하면 미국 유수 대학의 3학년에 편입할 수 있는 ‘2+2 시스템’ 승인을 얻어냈다. 미국 뉴욕에 세워질 이 대학은 미국에 있는 한국 대학이 아니라 한국인이 세운 미국의 불교대학이 될 예정이다. 스님은 “미국은 국민 10명 중 6명이 불교에 우호적이라는 설문조사가 나올 만큼 잠재적 불교 신자가 많고, 경전 공부에 열심인 사람도 많다. 티베트와 일본, 대만 불교가 미국의 불교를 석권하고 있는 현실에서 왜 한국의 불교는 세계로 뻗어나가려 하지 않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스님은 한국 불교에 대해 할 말이 아주 많은 듯 보였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을 전하면 이렇다.
“불교는 다시 한번 깨어야 한다. 할 일은 하고 모를 일은 몰라야 한다. 지금의 불교는 할 일을 하지 않고, 몰라야 할 일은 나서서 욕을 먹는 경우가 많다. 대중이 요구하는 종교가 되도록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 진정 이 시대가 불교에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골수에 사무치도록 고민하고, 그래서 끝내 시대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