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호

‘오래된 웃음의 숲을 노닐다’

조선시대 사회, 문화를 웃음으로 꿰뚫다

  • 오세정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와놀이 연구소 연구교수 osj@aks.ac.kr

    입력2006-12-13 13: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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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웃음의 숲을 노닐다’

    ‘오래된 웃음의 숲을 노닐다’ 류정월 지음/샘터/335쪽/1만5000원

    몇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서울에서 고향인 부산까지 강의를 다녔다. 그러다보니 신혼임에도 일주일에 이틀은 아내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역에 마중을 나온 아내는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부터 고문을 시작했다. “재미있는 일 없었어? 웃기는 얘기 좀 해봐.” 나는 수첩을 꺼내 메모해둔 것을 보며 사건을 재구성해야 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대학원 전 과정까지 함께한 동기가 있다. 그 친구는 공부하다가 지겨워지면 큰 머리를 뒤로 한껏 젖히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한다. “뭐 좀 재미있고 상큼한 이야기 없냐?”

    오늘 아침 1교시 강의실, 졸음에 겨운 학생들은 선하고 맑은 눈으로 아내와 단짝 친구가 내게 강요했던 그 고문을 또 강요한다.

    웃기는 인간, 웃고 있는 인간

    “유머 전성기이다. 웃기는 연예인이 뜨고, 웃기는 정치가가 표를 모으며, 웃기는 직원이 상사의 사랑을 받고, 웃기는 남자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다.”



    저자의 현실 진단에 공감한다. 웃겨야 성공한다.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런데 조금 삐딱하게 보면, ‘성공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웃겨라, 웃기는 재주를 길러라, 인기를 끌려거든 웃겨라’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웃기는 것은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는 순수하지 않은 행위로 비쳐진다. 극으로 가면 웃기는 인간, 즉 실없고 진지하지 못한 인간이 탄생한다.

    하지만 조금 더 물러서서 보자. 웃기는 사람이 아니라 웃고 있는 사람을 보면 생각이 바뀐다. 웃고 있는 인간, 아름답다. 웃고 싶어하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진정으로 순수하고 솔직한 인간의 욕망이다.

    조선시대에도 웃기는 인간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웃기려고 의도하고 웃기는 현자도 있고, 가르침을 주기 위해 웃기는 스승도 있고, 의도하지 않고 웃기는 바보도 있었다. 그들이 오늘날의 연예인, 정치가, 인기 있는 남자 친구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우스개가 오늘날의 그것과 같지 않더라도, 그때도 지금도 웃고 있는 인간은 모두 동일하다. 웃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진 순수하고 솔직한 ‘우리’들이다.

    웃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쉽게 답하기 어렵다. 원래 철학의 본질, 인생의 본질, 사랑의 본질과 같은 것은 고민해왔지만, 웃음과 우스개의 본질은 애써 묻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웃음에 관해, 우스개에 대해 해설하고 싶다고 역설한다.

    이 책은 저자가 쓴 박사논문의 연장이라고 한다. 여기저기 초학자의 노고가 배어 있다. 저자는 조선시대 우스개를 이야기하기 위해 조선시대에서 근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꽤나 긴 시간대를 아우르는 각종 문헌과 자료를 뒤졌다.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우스개는 대부분 한자로 씌어진 것이다. 그 우스개를 해설하는 데 서구의 이론을 인용·적용하고 있다. 저자는 웃음의 본질, 웃음을 통한 메시지, 그리고 그것을 읽어내는 독법에 대해서까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웃음, 너무나 인간적인

    하지만 책 서두에 보면, 저자는 웃음, 우스개의 본질이 관심사가 아니라 웃음이라는 코드를 통해 그 시대, 문화를 보고 싶다고 밝힌다. 오늘날 각종 문화사(cultural history)가 유행하고 있다. 대문자 History에 식상한 사람들은 ‘옛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의문에 답하는 다양한 일상사(소문자 history)에 흥미를 느낀다. ‘음식의 역사’는 아주 점잖은 편이다. ‘흡연의 문화사’ ‘화장실의 역사’, 심지어 ‘오빠’의 탄생과 그 역사를 다룬 책도 있다. 이제 저자는 웃음의 사회·문화사, 웃음의 백과사전, 웃음의 에스노그라피(ethnography·민족지학)를 우리에게 선보였다. 왜 굳이 웃음을 통해서 조선시대의 사회·문화를 보려는 걸까.

    웃음은 늘 우리와 함께한다. 죽을 것 같이 힘들어도, 아니 누군가 죽어서 나를 죽도록 힘들게 해도 결국 우리는 웃으면서 살아난다. 외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죽을 것같이 서럽게 우시던 어머니와 이모님들…. 하지만 초상집에서도 간간이 웃음은 피어난다. 슬퍼할 힘을 재충전하기 위해서이다. 제대로 슬퍼하기 위해서이다. 프로이트가 대칭으로 놓았던 ‘삶’과 ‘죽음’이 ‘웃음’과 ‘눈물’로 환치되어도 기본 논리는 통하지 않을까? 어쩌면 웃음은 ‘삶’ ‘죽음’과 같은 거창한 테마의 자격을 갖추었는데 그동안 우리가 외면해왔는지 모른다.

    웃음은 인간과 너무 닮았다. 야비하고, 색스럽고, 변태적이다. 우스개 하면 음담패설이 빠지지 않고, 성기에 대한 은유와 환유는 그 범위를 짐작하기 어렵다. 저자는 이러한 웃음의 본색을 놓치지 않는다. 첫날밤 성행위를 치른 신부가 신랑에게 투정을 부린다. 기교가 뛰어난 걸 보니 첫경험이 아니라고 확신해서다. 과부가 개와 관계를 맺으려는 것을 아들들이 야단치자 윗구멍(上口)말고 아랫구멍(下口)도 중요하고 더 크다고 일침을 놓는다. 술, 돈, 종이를 의인화한 가전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기를 의인화한 가전체도 있다. 또한 남성에 의해 성적 대상이 되어버린 여성은 왜곡당하고 수모를 겪는다. 단적인 예로 우스개 속에서, 강간을 당하던 여성이 성행위 후에 즐거워하며, 간통을 하고서도 여성만 벌 받기 일쑤다. 이 같은 이야기들을 저자는 음담패설을 통한 남성들의 관음증적 시선과 욕망으로 해설하고 있다.

    웃음은 점잖고 유식하다. 심지어 모른 척 딴전을 편다. 에둘러 와서 실제 말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전달한다. 백사(白沙) 이항복이나 현곡(玄谷) 조위한 같은 당대의 문장가들은 우스개의 달인이었다. 이항복은 어전회의 때 원수 권율을 속여 임금 앞에 맨발을 내어놓게 해 웃음거리로 만든다. 더군다나 권율은 이항복의 장인이다. 이 상황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명품 우스개꾼의 재치와 거기에 걸맞은 명품 해설이다.

    “권율은 임진왜란 도원수로 육전을 총지휘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 카리스마 넘치는 원수가 사위에게 속아 왕과 신하들 앞에서 맨발을 드러낸다. 장인에게 장난을 친 사위가 그렇다고 철부지도 아니다. 그는 병조판서, 이조판서, 좌의정, 영의정을 두루 지낸 역사적 인물 이항복이다. 우리가 사극에서 보는 조정, 특히 선조대의 조정은 국가와 백성의 운명을 결정하는 엄숙한 곳인데, 그런 장소에서 이런 해프닝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면 재미있다. 이항복은 더운 여름 소낙비처럼, 경직된 조정에 활력을 불어넣는 인물이다.”

    오래된 웃음의 가치

    웃음은 역설적이다. 역설적이라는 말은 쉽게 정의 내리기 힘든 용어다. 하지만 우리는 역설적이라는 말에 익숙하다. 독사(doxa), 즉 집단적 교리에 반하는(para) 것이 바로 역설, 패러독스(paradox)이다. 웃음을 통해 우리가 아는 일상적 상식, 교리, 진실이 뒤집힘을 경험하고 반전을 목도한다. 웃음의 역전(펀치 라인· Punch line)은 바로 그 찰나에서 나온다. 문학의 시적 표현 중 힘있게 감동을 주는 표현법으로 나는 역설이나 반어를 으뜸으로 꼽는다. 소월은 ‘그리워하다 잊었노라’고 노래하고, 만해는 ‘님은 갔지만 보내지 않았다’고 노래한다.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아니 전혀 해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이 노래의 절절함과 진실함을 안다. 극과 극은 통한다 했던가.

    웃음 또한 극과 극 사이에서 생성된다. 웃음은 뒤집는 것이다. 뒤집어놓은 것이 윤리적으로 타당하고 시대적으로 온당한지 따지기 이전에 웃음의 역설적 힘을 자각해야 한다. 웃음은 가벼운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가벼움이, 순간, 일상에서 느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벗어나게 하는 에너지가 된다. 책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그 에너지를 숲 속에서 찾으라고 주문한다. 웃음의 숲에서 놀고 나온 사람들, 즉 자신의 독자들이 그 숲의 꽃과 바람, 햇살을 만끽했으니 이제 그것들과 닮아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옛날 우리 선조들의 우스개에는 진지한 사고도 있고 음담패설도 있지만 모두가 소중하다. 왜냐하면 이 우스개 때문에 우리는 기생의 말을 기억하고, 근엄한 척하는 양반들이 성적 환상을 지녔음을 눈치채고, 구제불능의 공처가라는 비밀을 알게 된다. 이 같은 웃음의 사회·문화사는 비단 조선시대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옛사람들의 웃음을 통해 그들의 삶의 흔적들, 그들의 문화를 알게 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오래된 웃음의 숲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아니 웃음을 통해 그 숲은 지금 나의 삶터가 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저자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평소 농담도 이해 못하던 사람이 어떻게 웃기는 책을 썼냐는 놀림에, 저자는 조선시대 우스개꾼 현자 같은 답을 했다. 자신처럼 “웃음과 가깝지 않은 사람이 역설적으로 더 웃음을 원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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