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에 대한 미련, 분노 버리려 전국 도보 종주
- 나의 敵은 주변의 男軍과 ‘문서 쪼가리’
- 여군을 남자와 똑같은 군인으로 봐달라
- 군사령관, 한밤중 여군 호출해 술시중에 블루스까지
- 여 부사관 술 먹인 후 장군과 앉혀놓고 사라진 여군 장교
- 여군 50년…아직 일반병과 출신 장군 배출 못해
육군 중령 피우진(皮宇鎭·50). 한국 최초의 여군 헬기조종사인 그는 ‘더 이상 군복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전역 판정을 받고 이에 불복해 국방부에 인사소청을 한 상태다. 그리고 자신이 건강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려는 듯 도보로 전국 종주를 하고 있다.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땅끝마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 언제 종주를 시작했습니까.
“10월31일 땅끝마을에서 출발해 하루 40km 정도씩 걷고 있습니다. 23박24일 일정으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걸어갈 예정인데, 좀 무리하겠다 싶지만 아직까지는 컨디션이 괜찮습니다.”
▼ 하루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대개 오전 6시30분 출발해서 해 지기 전까지 다음 지점에 도착하려고 합니다. 밤에는 걷지 않으려 해요. 비상용 손전등을 준비하긴 했지만 차들이 마구 내달리는 밤에 국도를 걷는 건 여간 위험하지 않더군요. 밥 먹고 쉬는 시간 빼고 하루 평균 10시간 정도 걸어요.
힘들지만 재미있어요. 제가 군대라는 조직에 너무 오래 갇혀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다른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어 좋아요. 여자 혼자 모텔이나 여관 들어가는 게 좀 뭣해서 돈도 아낄 겸 찜질방에서 자곤 하는데, 그곳에서 만난 분들이 뜨겁게 응원해주세요. 그런 분들을 만나면 피로가 확 풀립니다. 경찰들도 친절하고요.”
▼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합니까.
“걷다보면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들어와요. 어제는 순창 오는 길에 세 살쯤 된 아이를 업은 젊은 여성과 그 어머니로 보이는 제 나이 또래의 여성이 걸어오더군요. 너무나 행복하고 맑은 웃음을 머금고. 정말 가족끼리만 나눌 수 있는 웃음을 오랜만에 본 것 같았습니다. 저는 결혼을 안 했어요. 병사들을 아들로 여겼죠. 하지만 병사들과 저렇게 맑고 행복한 웃음을 주고받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결혼도 안 하고 제 모든 걸 군에 바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여성의 상징인 유방을 절제할 때도 아무렇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제 그 사람들을 보면서 ‘아, 내겐 가족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해졌어요.”
▼ 군에서 완전군장 하고 행군하신 적도 많겠지만, 20여 일 동안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는 게 보통 일은 아닐 텐데요.
“여행가 한비야씨가 쓴 책을 보니까 ‘배낭의 무게는 최대한 줄여라, 최대 10kg을 넘기지 마라’고 했더군요. 짐을 줄이고 줄였는데도 10kg이 조금 넘었어요. 처음에 메봤을 때는 느낌이 딱 좋았는데 사나흘 걸으니까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속옷도 한 달치 넣었던 것을 빨아가며 입을 생각하고 최소한으로 줄이고, 찜질방에서 잠을 자면 잠옷도 필요 없을 것 같아 한 벌만 남겨뒀어요. 심지어 칫솔도 무겁게 느껴져 두 개 중에 한 개는 버렸습니다(웃음). 그러고 보면 여행은 정말 버리기 위해 하는 것 같아요. 출발하면서 고생 좀 해보자고 마음먹었어요. 나하고의 싸움을 치열하게 해보자, 그래서 내가 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버리자고 생각했습니다. 미련, 한(恨), 분노, 이런 것들을 버리기 위해 길을 떠난 거죠.”
군을 짝사랑한 여자
▼ 군 생활을 정리한다는 생각 같군요.
“그렇죠. 오랫동안 군 생활을 했으니 그 생리를 잘 알잖아요. 저의 복귀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에도 나름의 근거가 있으니까 인정해야죠. 군인은 규정과 명령에 따라 움직이잖아요.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복직을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울 테지만 최악의 경우에도 대비는 해야죠.”
1979년 27기 여군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한 그는 올해로 28년째 군 생활을 하고 있다. 2002년 10월 유방암 1기 판정을 받고 유방 절제수술을 했다. 이때 그는 암에 걸리지 않은 쪽 유방도 함께 절제했다. 군인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후 3년 동안 별문제 없이 육군항공단에서 군 생활을 계속했다. 암은 재발하지 않았고 후유증도 없었다. 1년에 한 번씩 있는 체력검정도 가뿐하게 통과했다. 그런데 지난해 9월 상부에서 갑자기 그의 병력(病歷)을 문제 삼았다. 군 규정상 암에 걸리면 군복을 벗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법이 만들어질 무렵만 해도 ‘암=죽음’이란 인식이 강했다. 결국 군은 이 규정을 들어 그의 항공조종사 자격을 박탈했고 곧이어 전역심사에 회부했다.
올해 초, 그의 딱한 사연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언론과 시민단체 등은 관련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몇몇 국회의원까지 관심을 갖자 군은 관련법 개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전역심사위원회도 그를 구제하기 위해 심사를 보류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이뤄질 것 같던 법 개정은 진척이 없었다. 결국 지난 9월 전역심사위원회가 열려 전역 판정이 내려졌고, 그는 이에 불복해 인사소청을 했다.
관련법 개정 전에 인사소청이 기각되면 나중에 법이 개정되어도 소급 적용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그는 정년까지 3년여 남은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전역해야 한다. 육군 헬기조종사 시절 그의 항공호출명은 ‘피닉스(불사조)’였다. 남자 동료들이 붙여준 것인데, 불사조도 군의 낡은 규정을 뚫고 날아오르지는 못할 모양이다.
▼ 인사소청이 기각되면 어떻게 할 건가요.
“저를 도와주시는 변호사 말씀이 법원에 행정소송을 내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합니다. 행정소송에서 이기면 복직의 길이 열리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 군에서 ‘왜 자꾸 문제를 크게 만드냐’는 힐난은 없었나요.
“그런 말도 들었죠. 하지만 저를 옭죈 법조항이 시대에 맞지 않다는 걸 많은 군인이 공감하고 있고, 또한 제가 얼마나 건강한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먼저 인사소청을 하라고 조언했을 정도예요. 법 개정이 미뤄지는 게 ‘암은 완치가 안 된다’는 주장 때문인데, 중요한 것은 ‘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이지 암 완치 여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 군인입니다. 근무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아프다면 당연히 명예롭게 전역해야겠지만, 지난 3년간 아무 문제없이 생활했는데 이미 치료가 끝난 병을 뒤늦게 문제 삼아 전역조치를 내린다는 건 이해가 안 돼요.”
그의 머릿속엔 전역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과 반평생을 바친 군에 대한 애착이 교차하는 듯하다.
“지금도 군대 생각만 하면 가슴이 짠해져요. 후배들은 군에 대한 저 혼자만의 짝사랑이라고 하지만(웃음). 군은 전쟁을 목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가장 인간적인 집단이어야 합니다. 전우를 대신해서, 상관을 대신해서 내가 죽을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만큼 서로 믿고 따를 수 있는 신뢰가 있어야 하는데, 더러 상관들은 부하를 사람 취급하지 않고 도구로만 대하는 것 같아 서글픔마저 느낍니다.”
‘마지막 아마조네스’
피우진 중령은 자신의 전역 문제에 대한 분노도 크지만 여군의 인권 현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고 했다. 28년을 군에서 보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군 헬기조종사로서의 자부심보다는 성희롱, 성차별 등 여군에 대한 지휘관들의 비뚤어진 언행에 마음 상할 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전역한 한 여군 장교는 피 중령에 대해 “군이라는 정글 속에서 밀림을 헤치고 끊임없이 남성이라는 적(敵)과 치열하게 싸워온 이 시대 마지막 여전사, 아마조네스”라고 했다. 피 중령 역시 “나의 군인정신으로는 나라를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죽을 수 있지만, 나의 적은 북쪽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주변의 남군(男軍)이고 문서 쪼가리들이었다”고 토로했다.
“남성 중심의 문화가 가장 강한 곳이 군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군들은 여군이 유별나게 굴지 않고 남자와 똑같이 생활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귀엽고 우아한 여성성을 갖추기를 원해요. 그런 게 남성의 일반적인 심리인지는 몰라도 저로서는 지금껏 적응도, 이해도 되지 않는 이중성이에요.”
교사로 근무하던 그는 우연히 여군 장교 모집공고를 보고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아버지가 군에 있었기 때문인지 군이 낯설지 않았다. ‘군화를 발에 맞추는 게 아니라 발을 군화에 맞추는 게 군대’라는 건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가 보고 겪은 게 진정한 ‘군인의 길’이라면 처음부터 걷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군대는 계급사회니까 남녀차별이 없을 거라는 건 저 혼자만의 순진한 생각이었죠. 제도적으로 이미 여군은 남군의 보조역으로만 정해져 있었어요. 여군 후보생은 면접 때부터 단정함 이상의 미모를 주요 조건으로 따졌죠.”
여성 사관후보생에 지원해 학과시험에 합격한 후 면접을 치를 때였다. 면접 때는 스커트 정장 차림을 해야 하는데 그는 스커트 정장이 없어서 그냥 바지를 입고 갔다. 면접관 장교들이 바지를 입은 그를 보더니 “왜 스커트를 입지 않았냐”고 나무라며 바지를 걷어 올려보라고 했다. 흉터는 없는지, 각선미는 어떤지를 본 것이다. 군인을 뽑는다면서 왜 외모를 따지는가 하는 반발심이 들면서 그때 처음 군 문화에 실망했다고 한다.
“훈련소 시절엔 아직 보직이나 진급에 신경 쓸 때가 아니므로 큰 차별은 느끼지 못했지만, 여군에 대한 이중적인 시선은 그때부터 실감할 수 있었어요. 국방부 안에 담으로 둘러쳐져 있는 여군훈련소에 입소할 때부터 여군들은 두 개의 문을 차례로 들어서야 합니다. 군대라는 첫 번째 문과 여군이라는 두 번째 문이었죠. 군인이 되고자 스스로 지원했지만 지내오면서 언제나 더 힘들었던 것은 군인으로서 지켜야 할 규칙이나 훈련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인식을 뛰어넘는 일이었어요.”
그는 “그렇다고 내가 페미니스트는 아니다”고 했다. “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여성해방이란 말을 써본 적도 없고 그런 운동에 관심도 없으며 썩 공감하지도 않았다”는 것. 다만 남자와 똑같은 군인으로 봐주기를 바랄 뿐이었다는 것.
“1989년까지만 해도 무조건 부사관생도는 단발머리, 장교후보생은 파마를 해야 했어요. 여군 후보생들은 일과교육 때도 하의가 스커트인 정복을 입게 했고 내무반 밖에서는 꼭 화장을 하고 다니게 했어요. 마치 미스코리아를 길러내듯 우아함을 요구하는 게 전반적인 분위기였죠. 늘 시간에 쫓기던 우리는 화장하는 게 귀찮았지만 위에서 자꾸 지시가 내려오니 빈 캐비닛에 립스틱 하나를 넣어두고는 아침마다 돌아가며 발랐어요. 생각해보세요. 맨얼굴에 다른 화장은 하나도 안 하고 똑같은 색깔의 립스틱을 칠한 채 교육받는 모습을. 우리가 봐도 코미디였죠.”
술시중도 여군 임무?
그가 들려준 여군 성희롱 실태는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부대 회식을 하면 여군은 무조건 최상급자 옆에 앉히려 했다. 마치 접대부를 붙여주는 듯한 그런 일을 중간 간부들이 알아서 했다. 그래서 그는 회식이 있으면 늘 가장 먼저 가서 아랫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술자리 내내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렇게 제 태도를 분명히 해도 곁으로 불러올리려는 간부들의 요청을 매번 물리치는 게 얼마나 곤혹스러운지 몰라요. 술 마신 상사가 저를 숙소까지 데려다주겠다면서 차 안에서 슬그머니 손을 잡는 경우도 많았죠. 그때마다 손을 뿌리치면서 정색해야 하는 것도 못할 짓이고….”
육군항공단 소속으로 헬기를 조종할 때의 피우진 중령. 그는 군대 내 여성차별과 여성인권 침해에 맞서 온몸으로 싸워왔다.
그가 모 부대에 근무할 때였다. 일요일 오후에 상관이 “내무검사를 해야겠다”며 불쑥 들어섰다. ‘냉장고 하나가 전부인 개인 숙소에 내무검사라니…’ 하고 의아해하는데, 상관은 손에 들고 있던 피자를 내밀며 함께 먹자고 했다. 거절하면 무안해할까봐 “감사하다”고 하고는 냉장고로 가서 마실 것을 꺼내려는데 상관이 뒤에서 그를 껴안았다.
“놀라 가슴이 뛰면서 저도 모르게 주먹이 올라가는 걸 겨우 참았어요. ‘왜 이러십니까’ 하고 화를 내니까 민망한 표정으로 ‘아니, 냉장고에 뭐가 있나 보려고’ 하고는 슬며시 돌아가더라고요. 그 장교는 그나마 얌전한 편이었어요. 군에서는 각종 테스트가 많아요. 그럼 그걸 도와주겠다, 시험 문제를 알려줄 테니 내 방에서 공부하라며 접근하는 상관들도 있어요.”
1988년, 대위이던 그는 여군 부사관을 술자리에 내보내지 않아 사령관의 노여움을 샀다. 일직을 서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사령관이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있으니 그리로 오라고 하는 것을 거절했다. 며칠 후에는 여군 일직 사관이 전화를 걸어 사령관이 어느 여군을 보내라고 명령했다며 외출승인을 요청했다. 사령관이 다른 사람들과 술을 마시면서 분위기를 띄워줄 여군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미 여군 부사관들로부터 그 사령관이 툭하면 술자리에 여군을 불러들인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어느 여군을 지목해서 보내라고 할 때도 있고 그냥 알아서 몇 명 보내라고 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불러서는 옆에 앉히고 술시중을 들게 하면서 같이 노래를 부르거나 블루스를 추게 한다고 했다. 접대부가 따로 없었다. 게다가 올 때는 꼭 예쁜 사복을 입고 오라고 했다.
그는 그 여군이 아프다고 둘러대고는 외출승인을 내주지 않았다. 그러자 사령관 참모가 전화를 걸어 “빨리 보내라”며 욕을 해댔다. 고민 끝에 그 여군에게 전투복을 입혀 내보냈다. 덕분에 여군은 곧바로 부대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는 이 일로 꼬투리가 잡혀 보직해임을 당했다.
▼ 그 무렵엔 여군들이 술자리에 불려가는 게 일반적이었던 모양이죠?
“그랬어요. 저는 지휘관 생활을 오래 해서 여군학교, 특전사, 88사격단, 육군항공학교, 군사령부, 여군단, 국방부 등 여러 곳을 돌아다녔어요. 거기서 부대원을 관리하는 직책에 있다보니까 종종 부사관들이 제 방문을 노크하는데, 고민을 들어보면 남자 상관들이 자기네들을 어떻게 한다, 막아달라는 얘기가 빠지지 않았어요.”
사단장의 여군 성희롱 사건
피우진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건 2001년 발생한 사단장 성희롱 사건 때였다. 당시 그는 국방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모 부대에서 사단장이 여군 장교를 성희롱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단장은 결국 군복을 벗었지만 처음엔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피해자인 여군 장교가 징계를 받기까지 했다. 그를 도우려면 현역 여군이 당당히 나서야 했는데 상명하복이 절대적인데다 상관에게 찍히면 어떻게 될지 뻔한 군조직의 특성상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 적극 나선 사람이 피우진 중령이다.
“그 여군은 정말 큰 용기를 내서 얘기를 한 건데, 처음에는 다들 그 친구가 행실을 잘못해서 그런 상황에 이르렀다는 식으로 몰아갔어요. 가해자들이 계급이 높고 권력을 쥐고 있으니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그렇게 몰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죠. ‘여자가 조심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정말 몰라서 하는 이야기예요.”
당시 사건을 정리하면 이렇다.
소위로 갓 임관한 여군 장교가 모 사단 부관부에 배속됐다. 사단장은 업무보고를 하고 나가는 여군 장교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시작은 그렇게 단순했다. 그 자체만 보면 사단장이 딸 같은 여군 장교를 대견하게 여겨 격의 없이 친밀한 행동을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얼마 후 송년모임이 있었다. 여군 소위는 행사가 끝날 때까지 비상대기 상태였다. 행사가 시작되고 30분쯤 지나 ‘모든 여군은 회식에 참석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다른 여군들은 이미 퇴근한 상태라 그만 유일하게 참석하게 됐다. 사회를 보던 참모가 그를 사단장 옆에 앉혔다.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는 건 생각지도 못했던 그는 사단장 옆에서 다소곳이 술을 따랐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단장의 손이 허벅지와 엉덩이에 닿았지만 하늘 같은 상관들이 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수는 없었다. 사단장은 “회식 후 공관에 들러 차나 한잔 하고 가라”고 했다. 명령이나 진배없었다.
회식이 끝나자 사단장이 직접 차를 보내 그를 데리러 왔다. 소위는 참모에게 보고하고 차를 타고 갔다. 사단장은 거실에서 직접 차를 내주고 자신의 군 생활 얘기를 들려주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슴없이 찾아와 상의하라”고 격려도 했다. 그러다 “거실에선 당번병들이 일을 해야 하니 내실로 옮기자”며 먼저 일어섰다. 소위는 엉거주춤 따라 들어갔다. 침실이 보이는 내실에서 차를 마시는데, 사단장이 갑자기 소위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는 입을 맞췄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한번 객관적으로 판단해보세요. 그 여군이 회식자리에 불려갈 때부터 성추행을 당할 때까지 거부의사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상황이 한번이라도 있었나요?”
여군 장교는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고 한다. 대인기피증과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것. 풋풋한 20대 초반의 처녀가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그는 결국 1년 정도 치료를 받다가 전역했다. 피 중령은 그 후 그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는데, 지금도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고 한다.
여흥자리의 ‘기쁨조’
“더 기가 막힌 건 일부 여군 장교들의 그릇된 처신이에요. 같은 여자로서 특히 후배들을 지켜주고 여군 지위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할 선배 장교가 오히려 자신의 영달을 위해 후배 여군들을 남군 간부들의 여흥자리에 기쁨조로 데려가는 일도 있었어요.”
한 여군 장교가 자신의 당번 부사관인 여군 하사를 서울 강남의 한 일식집으로 데려가 장군과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 자리에서 양주 두 병이 비워졌는데, 장군과 장교의 강권으로 하사가 가장 많이 마시게 됐다. 세 사람은 2차로 단란주점엘 갔고 거기서도 술병이 여럿 비워졌다.
한참 후 장군이 지갑을 건네며 계산을 하라고 하자 여군 장교는 지갑을 받아들고 룸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장군이 룸의 문을 잠갔다. 그리고…. 여군 장교가 계산을 하고 곧바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면 장군은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군은 이미 장교가 룸으로 일찍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다행히 하사가 “장군님, 따님을 생각하십시오”라며 당차게 저항해 그 자리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뒤늦게 돌아온 여군 장교는 부대로 복귀할 때도 하사를 장군의 차에 동석시켰다. 하사는 차에서 장군의 집요한 접근에 시달리다 중간에 도망치듯 내렸다.
“저는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하라고 충고했지만 하사는 결국 그러지 못했어요. 군 생활을 거기서 끝낼 것이 아니라면 상관과 정면 대립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으니까요.”
▼ 지금도 고급 장교들이 여군들을 불러내 술 따르게 하는 행태가 남아 있습니까.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술을 강권하거나 술을 따르게 하는 관행은 없어졌다고 봐야죠. 그래도 그런 문화의 흔적은 남아 있어요. 가령 같이 근무하면서, 또는 대화하면서 은근히 하는 거죠. 군대는 상하관계잖아요. 그래서 ‘왜 그러세요’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라고 말하기가 힘든 경우가 많아요. 저는 계급이 높고 나이가 있는데도 회의하기 전에 참모들이 모이면 제 얼굴부터 살펴봐요. 제가 웃음을 짓고 있으면 금세 음담패설이 오가죠. 그래서 일부러 얼굴을 굳히고 들어가요. 가벼운 음담패설이야 그냥 받아줄 수도 있지만 한두 번 받아넘기면 끝이 없어요. 후배들 중에는 그런 게 싫어서 아예 머리를 빡빡 깎고 다니는 아이도 있었어요.”
▼ 요즘도 성희롱 같은 걸로 하소연하는 여군들이 있나요.
“그런 피해를 당한 여군이 없진 않을 텐데, 이제 저한테는 얘기를 안 하죠. 제가 그런 위치에 있지 않으니까. 국방부에 여성발전팀이라는 게 있어요. 여군과 군내 여성인력을 담당하는 부서인데, 거기서 이런 문제도 함께 다루고 있겠죠. 그런데 어떤 사건들이 올라왔는지, 어떻게 처리했는지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습니다.”
“힘든데 야근할 수 있겠어?”
피 중령은 “여군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군을 여성이 아니라 군인으로만 봐야 한다는 것.
“1980년대에 저와 함께 헬기 조종사가 된 여군들은 모두 정조종사가 되지 못하고 육군항공단을 떠났어요. 출산 때문이죠. 당시만 해도 여군은 결혼은 할 수 있지만 아이를 낳으면 전역을 하게 돼 있었어요. 참 우스운 제도였죠. 결혼하면 아이를 낳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러니 결국 결혼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나 다를 게 없죠. 그건 비합리적인 게 아니라 비인간적인 제도예요. 그나마 장교는 나은 편이었어요. 부사관은 아예 결혼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여군 부사관은 자격 규정 자체가 ‘미혼’으로 돼 있었어요.”
그가 처음 육군항공단에 근무하던 무렵 남군 조종사는 경륜이 쌓이면서 조종등급이 올라가는데 여군은 늘 그대로였다. 실질적으로 같은 항공병과에 속해 있는데도 여군이라는 이유로 비공식 파견요원으로 관리됐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늦게 조종을 배우고 계급도 낮은 남군이 정조종사가 됐는데 자기는 그 밑에서 부조종사를 한다는 건 그저 불편한 정도를 넘어 수치심까지 느끼게 했다.
과거에 여군에는 특정 병과가 없었다. 오직 ‘여군’ 병과만 있었다. 그러다 1989년 군 인사제도가 개편되어 여군단이 해체되면서 여군이라는 병과가 사라졌다. 이와 함께 결혼 금지, 출산 금지 등 말도 안 되는 규정들도 사라졌다. 지금은 남녀 구별 없이 능력만 있으면 어떤 병과, 어떤 보직에서도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가 못한 모양이다. 여군은 여전히 남군의 보조직에 머물고 있다는 게 피 중령의 주장이다. 제도를 운영하는 지휘관들이 여군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급은 보직과 연결돼 있습니다. 그래서 진급하기 유리한 핵심보직이라는 게 있을 수밖에 없죠. 그런 자리에 여군이 가는 건 하늘에 별따기예요.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그 자리를 여군에게 안 주는 거죠. ‘힘든데 야근할 수 있겠어?’ ‘아기도 있고 가정도 있는데 할 수 있겠어?’ 하는 겁니다. ‘그건 본인이 감수하고 극복해야 하는 부분이니까 일단 줘보라, 잘할 수 있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먹혀들지 않아요. 여군들은 보직에서 밀리니까 진급에서도 밀릴 수밖에요.
현재 3군을 통틀어 여성 장군이 딱 한 분입니다. 그나마도 간호병과 출신이죠. 일반 병과에서는 아직 한 명도 배출되지 못했습니다. 물론 진급 자격을 갖춘 대상자가 많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남군들과 경쟁할 수 없게 보직을 주고서 경력이 안 돼 별을 달 수 없다고 하니까 수긍하기 힘들죠. 더구나 진급이란 게 지금까지 무엇을 했느냐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장군으로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도 가늠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현재 여성 장군 후보로 꼽히는 인물은 민경자 대령과 추순삼 대령이다. 두 사람은 지난 10월 인사에서도 물망에 올랐지만 별을 달지는 못했다.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제가 바라는 건 제 후배들만큼은 남군과 공평하게 군인의 길을 갈 수 있는,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지 않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겁니다. 군은 자유와 정의의 수호자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저는 군을 군답게 하고, 여군이라는 이유로 한 사람의 후배도 차별받지 않을 때까지 계속 싸워 나갈 겁니다.”
그는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이란 말을 남기고 다시 길을 떠났다. ‘내가 남긴 발자욱이 다음 사람에게 길이 되길 바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군 생활 역정을 담은 에세이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를 곧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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