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로 일어나 5·16으로 무너진 제2공화국은 한국인이 오랫동안 꿈꿔온 민주주의 구현의 출발점이었다. 제2공화국에 씌워진 부정적 이미지는 5·16군사정변 세력과 그 뒤를 이은 독재정권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왜곡·선전한 결과다. 제2공화국의 붕괴는 미국의 對한반도 정책과도 관련된 것이었다. 장면 정부가 추진한 ‘10만 감군’과 남북화해 정책 등은 한반도를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미국의 세계전략이나 입맛에 맞지 않았다.
제2공화국의 정치인들. 장면 총리(왼쪽에서 세 번째), 곽상훈 민의원의장(오른쪽에서 세번째), 박순천 의원(오른쪽에서 네번째).
제2공화국에 대한 평가는 호오(好惡)가 합치하지 않는 평행선을 달린다. 심지어 동일한 인물의 제2공화국에 대한 기억도 극과 극을 달린다. 1961년 쿠데타 직후와 1966년 장면 총리가 서거한 뒤 당대의 논객 양호민이 내린 양극단의 평가가 대표적 사례다.
첫째, 민주당 내각에는 소극적으로나마 민족해방운동의 투사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당시 아(시아)·아(프리카) 신생국의 지도층은 대개 반(反) 제국주의적 독립운동에서 혁혁한 경력을 쌓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집권당으로서의 민주당이 대중의 마음으로부터 존경받을 만한 정신적 권위를 가지지 못했음은 당연했다. 둘째, 민주당은 보수 정당으로서 자체의 이상과 경륜을 가지지 못하고 정치는 현실이라는 구실을 내세우며 잔재주로 눈가림을 해 이권을 찾기에만 바빴다. 경륜도 식견도 이상주의도 없는 퇴폐한 집단으로부터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릴 에너지는 나올 수 없다. 셋째, 민주당은 훈련과 기율과 정신적 통합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그 지도체제는 극도로 문란했으며 사색당쟁의 양상을 방불케 하는 당내의 복잡한 파쟁이 속출해도 이것을 통제하고 내부적 단결을 회복할 지도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말기의 민주당은 오합지중으로 타락하고 말았다.(양호민, ‘민주주의와 지도세력’, ‘사상계’ 1961년 11월호) |
이러한 비극은 우리 국민이 현명치 못했던 때문도, 당시의 집권층이 반드시 무위무능(無爲無能)했기 때문도 아니다. 일부의 논자는 4·19이후 시민의 자유가 지나치게 허용된 나머지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조성됐다고 하지만 장면 시대의 자유는 민주주의라는 척도에서는 당연히 인정돼야 할 정도의 것이지 그 자체는 결코 과잉도 방종도 아니었다.
…장면 정권 말기에는 국민이 이미 데모에도 염증을 느끼고 가두행렬과 성토가 점점 퇴조하고 안정과 질서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움직이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이다. 장면 정권이 강경정책을 쓰지 못했다는 비난을 흔히 듣지만 민권투쟁의 금자탑으로 찬양되던 4·19의거 이후의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민주주의를 자처하는 어떠한 정권도 민권을 탄압하는 수법으로는 국민을 옳게 지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일 장면시대가 더 오래 존속해 경륜과 계획을 구체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면 획기적인 치적을 쌓을 수 있었을 가능성을 지금에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극히 단명했던 이 시대는 뜻하지 않은 정변에 의해 비극적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시대는 수십 세기를 시달려온 이 나라 국민에게는 민권과 자유의 황금시대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깨끗하고 온유했던 민주주의적 지도자를 보내면서 솔직하게 피력한 필자의 소회가 고인의 과거를 욕되게 하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양호민, ‘장면시대 그 의의와 평가’, 조선일보 1966년 6월12일자) |
독재정권의 왜곡선전
그간 이 비운의 공화국과 그 지도자들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부정 일변도였다. 박정희 정권하에 이루어진 산업화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헌정질서를 무너뜨린 쿠데타 세력을 감싸기 위해 제2공화국을 쿠데타가 없었어도 붕괴하고 말았을 취약한 정권으로 보려 했으며, 이에 맞서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오길 꿈꾼 이들에게도 제2공화국은 4·19혁명의 성과를 지키지 못한 무능한 정권으로 비쳤을 뿐이었다.
1960년 10월18일, 장면 총리가 서울시내 대학생 대표 60여 명을 필동 ‘코리아하우스’에 초대해 의견을 듣고 있다.
오늘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는지는 내일 우리의 삶이 어떨지와 직결된다. 제2공화국에 대한 기억은 우리의 미래를 비추는 등대다. 제2공화국은 정치적으로 국민참정권 보장과 다원적 민주사회 확립을 도모했으며, 최초로 관료의 공채제도를 시행함으로써 관료의 전문화와 효율화를 꾀한 바 있다. 또한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해 장기적인 경제개발 계획을 입안·실천함으로써 국민소득의 증대와 국부(國富)의 증강을 도모하되, 이를 관 주도형이 아닌 민간 자율의 방식으로 실천하려 했다.
사회적으로는 자유당 독재체제하에서 위축돼 있던 이익집단과 사회단체들의 분출하는 이익 추구 욕구에 접해 이를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억누르지 않고 대화와 협력을 통한 자율적 해결을 종용하는 정책을 구사한 바 있다. 이 밖에도 제2공화국은 이승만 체제하의 반공주의적 무력통일론을 넘어서는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을 통한 통일 기반 조성과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자유선거를 통한 통일방식을 제기하는 등 합리적이면서도 국제적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분단 해소 노력을 전개함으로써 진정한 국민국가 수립을 모색했다. 나아가 제2공화국은 이승만 정권 때 왜곡된 한일관계 정상화를 시도하는 등 대화와 협력을 통해 외교관계를 재정립하려 했다.
이와 같이 제2공화국의 치세는 다원화된 시민사회의 확립, 민간 주도형 경제건설, 관용과 대화의 정신, 합리적 통일방향의 제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제고 등을 보편적인 방향과 원칙하에서 실천하려 한 이상적·선각적 시대였다. 그러나 제2공화국의 이상과 꿈은 군부쿠데타에 의해 좌절됨으로써 이후 제2공화국에 대한 평가는 부패·무능한 정권으로 왜곡·선전됐다. 사실 제2공화국에 씌워진 부정적 이미지는 5·16군사정변 세력과 그 뒤를 이은 독재정권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왜곡·선전한 결과다.
김대중 정권조차 연속성 부정
그렇다면 미처 실천되기도 전에 그 싹이 꺾인 제2공화국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평가는 그 척도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 오늘날 한국의 지향점이 진정한 의미의 근대 국민국가 수립에 있다면, 그 잣대는 정치적으로는 다원적 민주사회의 확립과 효율적 관료제도의 정착을,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 체제에 입각한 민간 자율의 경제 발전을 통한 국민소득의 증대를, 사회적으로는 평등주의적 사회체제의 확립과 대화와 관용의 정신 보급을, 문화적으로는 합리주의나 실용주의와 같은 가치관의 보편화를 지향했는지 여부에 두어야 한다. 또한 근대 국민국가는 민족 단위로 형성되는 것이 이상적이며, 나아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 속에서 다른 국민국가들과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국제적 지위를 확보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제2공화국을 이끌어낸 정당으로서 민주당의 치적과 정책이 한국의 근대 국민국가 수립과정에, 나아가 그 지향점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가 평가의 핵심이 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군부독재가 30여 년이나 계속되면서 5·16군사정변 세력과 그 뒤를 이은 신군부 정권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왜곡·조작한 탓에 제2공화국은 ‘무능한 정권’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만이 우리의 뇌리 깊숙이 각인됐다. 심지어 정치적 인맥이나 정책면에서 장면 정권의 후계로 볼 수 있는 김대중 정권조차 ‘제2의 건국’을 표방하며 그 연속성을 간과할 만큼 부정적 이미지가 더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제2공화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형성된 이면에는 두 개의 신화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산업화가 결여되고 시민사회가 성숙하지 않은 후진국에서는 경제 발전단계를 뛰어넘는 민주주의 성장은 불가능하며 개발독재에 의한 경제의 도약(take-off), 즉 산업화 이후에야 민주주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다른 하나는, 이승만 정권의 문민독재와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의 군사독재를 넘어 민주화와 다원적 시민사회를 이룬 동력이 민중의 힘에 의한 것이라는 신념이다.
장면 정부가 과연 경제발전을 이끌 능력이 있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이 정부가 추진한 주요 경제정책은 경제개발계획과 국토개발계획이었다. …이 정부는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했으면서도, 그것을 주도적으로 이끌 제도형성을 6개월 동안 이루지 못했다. 이것은 군부에 시간을 도난당해서라기보다 이 정부의 결단력과 추진력 부족 탓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군부는 장면 정부로부터 권력만 앗아간 것이 아니라 정책의 내용과 시간까지 절취했다는 것이 장면 정부에 우호적인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군부는 분명 민간정부로부터 권력을 찬탈했다. 그리고 이 정부가 세운 계획의 핵심 아이디어가 군부에 의해 실행에 옮겨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시간을 절취당한 것을 탓하기 전에 장면 정부의 능력부족을 탓해야 했다.(김일영, ‘건국과 부국’) |
4·19운동으로 이승만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학생층과 일반 민중, 그리고 언론까지도 급격한 정치·사회·경제면의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끊임없는 파쟁에 몰린 보수정권으로서 장면 정권은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민의의 효과적인 수합에도 성공하지 못해 정치적 혼란은 거듭됐다. …이승만 독재정권 아래서 쌓였던 국민의 불만이 함께 폭발한 뒤에 심한 정쟁이 겹쳐 혼란을 거듭하던 장면 정권도 1961년에 접어들면서 정권 내부에서는 다소 안정을 얻었으나 혁신계 정치세력과 학생층이 앞장선 민족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미처 적절한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대신 데모규제법과 반공법을 제정해 이에 대처하려 했다. 그것이 오히려 데모를 더 격화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결국 5·16군사정변이 일어남으로써 장면 정권은 불과 9개월 만에 붕괴됐다. (강만길, ‘한국현대사’) |
산업화 우선론의 허구
이 두 관점을 요즘 정치지형에 비추어 살펴보면, 전자는 뉴라이트(New Light) 진영의, 후자는 참여정부의 역사의식을 대변하는 민족·민중진영(Old Left)의 제2공화국관(觀)을 대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서로 충돌하는 두 견해는 장면 총리의 지도력과 민주당의 정책 수행 능력을 부정한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군사정부가 최대 업적으로 자랑하는 경제개발(산업화)이 사실은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도용한 것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산업화를 이끌 만한 지도력이 장면과 민주당 정권에 없었음을 강조하며, 후자는 민주당 정권도 군사정권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수정당에 불과하기에 민중의 진보적 요구에 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힘주어 말한다는 것이다.
제2공화국 당시 경제개발계획의 실무 핵심을 맡았던 김입삼은 군사정권이 훔친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을 제대로 수행치 못해 제1차 경제개발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얼마 전 우리 경제를 강타한 IMF의 근본원인도 군사정부에 있다고 증언한다.
그들은 장면 정부의 계획을 그대로 가져갔다. 방법론은 물론이고 세부항목까지 거의 같은데 달라진 부분은 성장목표를 연 6.1%에서 7.1%로 높인 것뿐이다. …경제는 정치와 달리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정확히 움직이는데 군사정권은 장기개발 계획의 필수전제 요소인 경제안정 개념을 전혀 갖지 못했다. 군사정권의 무모한 계획 추진에 외화는 고갈되고 인플레까지 겹쳐 결과적으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한국 경제는 도약의 호기를 맞았는데 군사정권이 실패하는 바람에 경제성장이 3∼4년 늦어졌다. 오늘날 IMF의 간섭까지 받게 된 원인은 이미 이때에 잉태됐다.(이용원, ‘제2공화국과 장면’) |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을 연구한 김기승의 분석은 더욱 충격적이다. 성장목표를 연 6.1%에서 7.1%로 높인 것은 군사정변으로 인해 1961년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기 때문에 짜낸 고식책(姑息策)에 불과했으며, 그것도 “국민소득의 감소, 저임금, 고담세율이라는 국민 희생을 전제로 한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국민소득과 임금부문에서 군사정권의 계획은 제2공화국 안(案)보다 절대적으로 낮게 책정돼 있었다. 두 계획에서 목표한 국민소득과 임금 격차는 해가 갈수록 벌어지도록 설계돼 있었다. 담세율 또한 군사정권이 제2공화국 안보다 훨씬 높게 책정돼 있었다. 군사정권은 국민의 극단적인 내핍생활을 바탕으로 고도성장을 실현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따라서 국민소득에 대한 관심은 군사정권의 계획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제2공화국 안에는 경제성장의 궁극적 목적이 국민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설정돼 있었다. 결국 군사정권에서는 7·1%의 고도 성장을 계획했지만, 목표를 달성한 상태의 국민총생산과 실업률은 제2공화국에서 추구한 목표치와 동일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5·16군사정변으로 1961년의 경제성장이 마이너스 0.1%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민주당 정권에서는 1961년의 경제성장률을 6.8%로 낙관하고 있었다. 군사정권의 7.%라는 고도성장 목표는 1961년 군사정변으로 생긴 격차를 만회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김기승, ‘민주당정권의 경제정책에 관한 연구’-‘장면 총리와 제2공화국’) |
산업화를 군사정부만이 달성할 수 있었던 업적으로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실 군사정부가 추진한 산업화는 우리의 미래를 가불한 것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제2공화국 정부의 붕괴 필연론을 주장하는 견해들은 시민사회의 미성숙과 산업화의 미비, 그리고 지도력의 결여와 같은 내부적 요인을 중시한다.
그러나 최근 5·16군사정변과 관련된 미국측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제2공화국 붕괴의 원인을 내부요인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비롯된 쿠데타 지지에서 찾는 외인론적 시각이 이완범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그는 장면 정권이 한반도를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미국의 세계전략이나 입맛에 맞는 정권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통성이 있는 장면 정부를 버리고 정통성 없는 군부쿠데타를 확실히 지지”한 미국의 한반도 정책, 즉 외인론적 요인이 제2공화국 붕괴의 주된 원인이라고 보았다.
미국의 한반도 개입의 제1차적 목적은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 구축이었으며 민주화는 다음 우선순위로 밀리는 부차적 목적이었다. …미국은 장면 정부를 계속 유지할 때 공산화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정통성이 있는 장면 정부를 버리고 정통성 없는 군부쿠데타를 확실히 지지했으며 미국의 ‘반공전략’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사들은 민주주의적 민간정부를 버리고 불법적 군부를 지지한 미국의 행태를 의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이완범, ‘장면과 정권교체: 미국의 대안고려와 그 포기 과정을 중심으로’-‘한국민족운동사연구’) |
통념과 달리 1957년 이후 미국이 생각한 이승만 이후 집권자는 부통령 장면이 아니라 자유당 온건파를 대변하는 이기붕과 민주당 구파 조병옥의 연합이었음이 최근 미국측 기밀문서로 밝혀졌다. 또한 장면 정부가 추진한 ‘10만 감군’과 남북화해 정책 등은 한반도를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미국의 세계전략이나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 결과 제2공화국 시대에 시도된 다원화된 시민사회의 정착과 대외적 자주의 꿈은 내부적으로는 보수 ·반동세력인 군부의 5·16군사정변과 민주당 구파의 야합에 의해, 대외적으로는 한국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의 쿠데타세력 지지로 붕괴되고 말았다.
1960년 3월18일자 ‘동아일보’는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전개한 ‘선거 무효선언’과 침묵시위에 대해 “국회 민주당 소속의원 50여 명은 18일 상오 국회에서 3·15 정·부통령선거의 무효를 선언하고 총퇴장해 10시18분부터 10시28분까지 약 10분간 의사당 앞에서 서린동에 있는 민주당 의원부 연락처에 이르는 400m 거리를 도보로 행진하면서 무언의 데모를 행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4월6일자 ‘동아일보’는 민주당 민권수호 공명선거 추진위가 주동이 돼 전개한 당일의 데모에 대해 “3·15 선거의 불법과 무효를 외치며 마산사건 원흉의 처단 및 재선거를 호소하는 데모가 6일 상오 서울에서 감행됐다. 민주당 민권수호 공명선거 추진위 등이 주동을 이룬 이날 데모는 경찰당국이 적극적인 방해를 회피했던 까닭에 연도에 늘어선 수십만 서울 시민의 소극적인 지지를 얻어 계획한 코스를 따라 큰 사고의 발생 없이 강행진이 단행됐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러한 민주당의 부정선거에 대한 조직적인 항의 데모는 4·19혁명 발발의 중요한 도화선이 된 것으로 보인다.
4·19에 무임승차하지 않아
이어 4월11일자 ‘동아일보’ 호외는 3·15시위 당시 행방불명된 김주열군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11일 밤 6시부터 마산시에는 미증유의 중대사태가 발생, 11시 현재 확대일로에 있다”는 급보를 전했다. 분노한 민심은 4월18일 고려대생 시위 이후 4·19혁명으로 폭발했다. 장면은 항변한다. 마산 궐기에서 4·19혁명에 이르는 과정에서 민주당은 무임승차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역사적으로 그 전례가 없는 주권 박탈의 부정선거가 실시된 그날 저녁,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민의 데모가 발생해 경찰서를 습격하는 사태까지 빚어냈다. 이는 자연적인 폭발이요, 민심이라는 급류가 굽이친 한 표현이다. 그러나 민주당이라는 야당 세력이 줄기차게 부정과 독재에 싸웠기 때문에 민심이 이에 호응해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19 학생혁명도 민주당의 대여(對與) 투쟁이 길을 닦아놓은 기반 위에 이룩된 위대한 의거였던 것이다. …국민은 민주당의 이러한 투쟁사를 옳게 인식해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민주당이 정권욕에만 급급했고 4·19 혁명을 맞아 노고 없이 정권을 쥐게 됐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고 본다. 4·19 학생의거가 직접적으로 독재를 무너뜨린 것은 사실이다. 이 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피를 뿌리며 헌신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4·19 학생혁명이었다. 그러나 학생들로 하여금 부정과 싸우는 의거의 바탕을 마련해준, 여러 해에 걸친 민주당의 공로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장면, ‘인생 회고록-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
한마디로 장면은 부통령 재임 시절 부통령이기 이전에 야당 지도자로서 독재와의 투쟁을 선두에서 지휘했으며, 이러한 ‘민주주의의 상징’으로서 그가 전개한 투쟁의 성과가 4·19혁명에 이르는 민주주의 회복의 도정에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바꿔 말하면 제2공화국은 4·19혁명에 ‘무임승차’해 탄생한 게 아니었다.
‘초대받은 손님’
그가 이끈 민주당 정권, 정확히 말하면 신파정권은 3·15 부정선거로 정권 교체의 가능성을 막아버린 자유당 정권의 불의에 항거해 4·19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최전선에서 독재의 부당함에 온몸으로 항거함으로써 민주주의 실현의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유일한 정치세력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민주당 정권은 4·19혁명의 이상을 실현할 책무를 자임할 의무와 권리가 있었다고 본다.
제2공화국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 중 공통적인 것이 장면의 지도력에 대한 평가다. 장면에 대한 부정적 인식 형성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한승주의 연구(‘제2공화국과 한국의 민주주의’)에 따르면, 그는 어떠한 정치활동의 경험도 없이 “가톨릭적 배경과 영어실력” 덕택에 피동적으로 정계에 진출한, 그리고 “강한 결단력과 즉각적 행동이 필요한 상황에서 상당히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행동을 취한 “형식적 지도자”로서 민중의 힘에 의해 일어난 4·19혁명에 편승해 내각 수반에 오른 “항상 수동적이고 자기 패배적인 행동 경로”를 취한 무능한 지도자에 지나지 않는다. 과연 부정적 평자의 지적대로 장면은 “정계의 영원한 초대받은 손님”에 지나지 않는 나약한 지도자였을까.
단독 정부 수립을 선포한 대한민국이 고립을 면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승인이 필요했다. 또한 장면이 주미대사로 재직 중 발발한 6·25전쟁도 남북한군의 전력상 격차가 심했기에 국제적 지원이 없었다면 그 결과는 명약관화했다. 즉,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과 6·25전쟁시의 유엔군 파병은 국가의 존립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문제였고, 이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데 장면 개인의 역량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는 정치가로서뿐 아니라 외교관으로서도 초심자였지만,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를 훌륭히 해결함으로써 차후 한국을 이끌어갈 지도자로 부상한 것이다. 이러한 성가를 배경으로 그는 이승만 정부에서 제2대 국무총리와 민주당 최고위원이 됐으며, 1952년 미국이 세운 이승만 제거 계획인 ‘에버레디 계획(Plan Everready)’에 잘 드러나 있듯 미국조차 이승만을 대체할 한국의 차기 지도자로 그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장면에 대한 부정적 선입관을 근거로 한 연구들이 장면이 정치가로서 성장한 요인을 ‘그를 필요로 하는 정치세력에게 충분한 이용가치가 있는 경력의 소유자이면서도 그들이 마음대로 이용하기 쉬운 꼭두각시형의 형식적 지도자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장면은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이나 6·25전쟁 당시 유엔군 파병 등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상황 타개에 괄목할 만한 업적을 쌓음으로써, 그리고 반독재 투쟁을 통해 성망(聲望)을 높임으로써 성장한 인물로, 경쟁 상대들에 비해 출중한 자질을 갖춘 대표적 정치가로서 합헌적 절차를 거쳐 집권한 정치가였기 때문이다.
“장면은 나약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또한 지도자로서 그의 자질 부족을 문제 삼는 주된 논거는 5·16 당시 장면 박사가 수녀원에 은신해 두문불출했기 때문에 쿠데타를 진압할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주장이다. 1961년 5월16일 새벽 4시 쿠데타군은 장면 총리의 임시숙소인 반도호텔로 들이닥쳤는데, 불과 10분 전에 장면은 숙소를 나선 터였다. 당시 장면이 쿠데타에 대응조치를 취할 수 있던 최상의 은신처는 미국대사관이었다.
그러나 장면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길 건너 미 대사관으로 가보려 했으나 문이 절벽으로 잠겨 있었다. 무교동 골목으로 빠져 청진동으로 달려가, 한국일보사 맞은편 미대사관 사택의 문을 두드렸다. 어떤 엄명이 내렸는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겁에 질려 수녀원에 숨는 바람에 쿠데타 진압 기회를 놓쳤다며 그를 무능한 인물이라고 혹평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다르다.
“잠시 피신해 정세를 보기 위해서 혜화동의 수도원으로 갔다. …겁에 질려 숨어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거기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장면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사실 장면 총리는 자신의 독실한 신앙 때문에 유혈사태가 초래될 가능성이 큰 쿠데타 진압을 기도하지 않았던 것으로도 보인다. 물론 개인의 신앙을 지키느라 많은 국민을 군사독재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면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요즘 새로 공개된 미국측 기밀문서를 보면 장면은 국가수반의 책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장 총리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다만 세월이 진실을 말해줄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시간이 지나고 사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미국은 장면 정권으로는 북쪽과 대치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민주당을 끌어내리려는 일련의 계획을 추진했다. 5·16혁명이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미국의 이런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
이 말은 당시 쿠데타의 주역이던 김종필이 최근 한 말이다. 게다가 장면 총리가 미국측과 연락을 유지하면서 계속 쿠데타 진압을 요청했다는 것도 미국측 기밀문서에 기록돼 있다. 당시 미국은 쿠데타를 진압할 생각이 없었고, 윤보선 대통령과 장도영 참모총장도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김녕의 견해가 주목을 끈다.
최근 공개된 이러한 미국 정부 문서에 따르면, 장면은 매일 2~3번씩 미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안전상의 이유로 소재를 밝히지 않은 채, 주한미군사령관(유엔군사령관)이 책임지고 사태를 처리해달라고 요청했으며, 매그루더가 본국에 계속 전문을 보내 미국의 대처 방안을 문의한 결과, 어떤 경우에라도 장면을 대신해 유엔군사령관이 사태 수습에 나서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얻게 됐다. 즉, 장면 스스로가 나타나지 않기에 미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불개입의 이유를 장면에게 전가한 것이었다. 장면으로서는 자신을 찾으러 쿠데타 부대들이 혈안이 돼 있는 상황에서 앞에 나와서 쿠데타 진압을 공개적으로 명령하거나 요청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5월17일 아침에 장면은 다시 한 번 미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미국의 불개입정책이 확정됐음을 확인하게 됐고 미국의 지지 없이 상황을 돌이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가르멜 수녀원에서 나와 곧 내각 총사퇴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면 정부에 대해 우려와 실망을 느끼던 미국 정부는 그 후 쿠테타를 용인했다. 이렇게 보면, 장면이 쿠데타를 진압하지 못한 것은 미국 정부가 장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기 때문이기도 하다.(김녕, ‘장면과 가톨릭교회, 그리고 시민사회’-‘장면 총리와 제2공화국’) |
그렇다면 장면이 피신했기 때문에 쿠데타가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게 아닐까. 오히려 장면은 당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던 인물 중 유일하게 쿠데타를 진압하려 했던 인물로 보인다. 쿠데타가 성공한 이유는,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정부보다는 반공의 첨병 노릇을 잘할 것 같은 세력이 집권하기를 바란 미국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설명이다.
그러니 쿠데타가 성공해 제2공화국이 붕괴된 책임이 장면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쿠데타 세력은 집권 후인 1962년 8월 장면을 군사정부를 전복하려 한 이주당 사건의 주범으로 몰아 ‘혁명과업수행 방해 및 반국가 단체 구성’이라는 죄명으로 육국본부 보통군법재판에 기소해 무기징역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후일 형 집형이 면제되었으나 이처럼 쿠데타 세력이 장면을 반혁명사건 주범으로 몰아 구금한 것에서도, 그가 유약한 정치가가 아니라 군사정권이 가장 부담을 느낀 존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제2공화국의 치세와 장면의 삶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9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장면이 이끈 제2공화국이 우리에게 맛보여준 자유민주주의와 자율에 기반을 둔 시민사회의 경험은, 어둡고 긴 군사독재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동안 우리나라에 민주화 운동이 맥을 잇게 한 희망의 기억이었다. 장면 정권은 4·19혁명 이후 방종에 가까운 시민의 자유 구가로 사회적 혼란이 빚어지는 상황에서도 물리적인 질서유지보다 시민에게 자율적 각성의 시간을 주려고 했다.
물리적 질서유지보다 자율적 각성 중시
연일 계속되는 데모로 사회가 혼란에 빠졌지만, 민주당이 집권한 후 집권 전의 공약을 위배할 수 없었다. 내각책임제를 실시하면서 국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독재적인 수법으로 정권을 유지한다면, 이는 국민을 배신하는 것밖에 다른 변명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혼란기라 해서 국민을 배신할 수 없었다. 정권을 잡은 우리로서 무슨 핑계로든지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총검에 의한 외형적 질서’보다도 ‘자유 바탕 위의 질서’가 진정한 민주적 질서라고 믿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자유당 정권하에 억눌렸던 국민이 자유가 허락된 이때에 쌓이고 쌓였던 울분을 한번은 마음껏 발산하고 나서야 가라앉을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뻔한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은인자중한 것이다. ‘국민이 열망하던 자유를 한 번 주어보자’는 것이 민주당 정부의 이념이었다. 갈수록 혼란을 더해가는 사회상황 속에서 우리는 철권(鐵拳)으로 억압하는 대신 시간으로 다스리고자 했다. …귀와 입으로 배운 자유를 몸으로 배우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론과 학설로 배운 자유는 혼란을 일으키지만 경험으로 체득한 자유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단단한 초석이 되는 것이다. 자유가 베푼 혼란과 부작용에 스스로 혐오를 느낄 때 진실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장면, ‘인생 회고록-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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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민의 자각에 기반을 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구현이라는 장면의 선각적 정치사상은 5·16 군사정변으로 좌절됐지만, 한국의 민주주의 발달과정에서 항상 꺼지지 않고 빛을 발하며 좌표가 되어준 등대였다. 한마디로 장면은 시대를 앞서간 선각적 정치인이었다. 그가 남긴 “민주주의는 한 사람의 총리나 각료들의 헌신적인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뼈에 새겼다. 아무래도 전 국민이 합심해서 이끌어야 하는 하나의 수레와 같은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협력할 때 수레바퀴는 잘 구른다”는 경구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발전에 여전히 유효한 처방이라고 본다.
장면의 삶은 우리 시민의식의 정화를 촉구하는 지표가 아닌가 한다. 비록 실패했지만 자신에게 충실했던 그의 삶과 이상은 오늘날 우리 자신을 비춰볼 거울이자 영원히 우리 기억 속에 간직해야 할 귀중한 유산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