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파트 건설비를 아끼고 싶은 주민이라면 논 턴키(Non Turn key) 방식을 택해야 한다. 즉 건설업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말고, 설계부터 자재 구입, 공사에 이르는 모든 일에 관여하는 것이다. 턴키 방식이라면 아파트 건설회사가 배관은 A회사에, 조경은 B회사에, 도배는 C회사에 맡기겠지만, 논 턴키 방식을 택하면 아파트에 입주할 주민이 설계는 A엔지니어링, 배관은 B회사, 조경은 C회사, 도배는 D회사에 맡긴다.
논 턴키로 발주된 고리 3호기
원청업체가 버는 돈과 하도급업체가 받는 금액의 차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논 턴키 방식을 택할 때 절감할 수 있는 비용이 얼마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논 턴키로 나눠 발주하다보면, 이것을 통해 배운 경험을 토대로 직접 아파트를 지을 용기가 생기게 된다. 한국은 자력으로 원자력발전소를 짓겠다는 야망이 있었으므로 3기의 원자력발전소를 착공하고 난 다음에는 논 턴키로 발주했다.
이 일은 한국전력이 주도했다. 한국전력이 전체 프로그램의 매니저(PM)가 돼, 원자로는 A회사, 증기발생기는 B회사, 터빈과 발전기는 C회사, 토목공사는 D회사, 종합설계는 E회사에 발주하는 것이다. 최초의 논 턴키 방식으로 공사에 들어간 원전은 고리 1호기 준공식과 함께 기공식을 가진 고리원전 3·4호기였다. 고리원전 3·4호기는 95만 ㎾급이다.
이런 가운데 ‘운명의 1979년’이 다가왔다. 1970년대 후반 현대양행 사장을 하며 세계를 누비던 황병주씨는 미국에서 나온 소설 ‘Crash 79(1979년의 대충돌)’을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있다. 소설의 주 내용은 팔레비 왕조가 이끄는 이란이 스위스의 도움을 받아 핵무기를 개발해 전세계를 놀라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1979년에는 세계를 놀라게 하는 사건이 많이 벌어졌다.
1979년 1월16일 이란에서는 팔레비 왕가가 쫓겨나고 호메이니가 권력을 잡는 민중혁명이 일어났다. 또 그해 3월28일에는 미국 스리마일 섬 원전 2호기에서 원자로가 과열돼 노심(爐心)이 녹아버리는 사고가 일어났다(용융사고). 이때 박정희 정부는 전남 영광에 영광원전 1·2호기(95만㎾)를 논 턴키로 지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 소식이 알려지자 박정희 정부도 주춤하게 되었다.
이 시기 중화학공업에 대한 거듭된 투자로 한국의 경제 사정은 좋지 않았다. 중화학공업은 투자비를 회수하는 기간이 길기 때문이다. 경제는 어려운데 민주화의 욕구는 강했다. 이미 유신(維新) 정국을 이끌고 있던 박정희 정부는 긴급조치를 발동해 저항 세력을 억눌렀다. 그로 인해 민주화를 갈망하는 욕구는 더욱 강해졌는데 마침내 이 욕구가 마산에서 폭발해 부산으로 확대되었다(부마사태).
이러한 때인 그해 10월29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해 절명케 하고 12월12일에는 신군부가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는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핵 주권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인물이다. 그는 미국의 카터 행정부와 심각하게 충돌하면서 미국의 핵우산 제공 의사를 거듭 확인했다. 핵 주권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박정희가 사라졌으니 대한민국의 핵주권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인 1980년 12월 한국원자력연구소가 한국에너지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새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세력은 비록 원자력연구소의 이름을 바꾸게 했지만 원자력에 대한 집념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전두환 정부는 1981년 2월 두 번째 논 턴키 방식으로 발주한 영광원전 1·2호기 기공식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