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호

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4부

한반도 核 게임! 南 140만㎾급 원자로 vs 北 조악한 원자폭탄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06-12-14 15:1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비핵화 선언 직후 한국은 재처리를 하기 위한 기반 조성에 들어갔다. 그런데 IMF 외환위기가 시작되면서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이 노력을 단절시켰다. 한국은 재처리를 제외한 원자력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에 올라섰다. 박정희와 김일성 사이의 치열했던 핵 게임은 한국의 승리로 귀결된 것이다.
    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4부
    고리원전 1·2호기와 월성원전 1호기는 턴키 방식으로 발주한 것이다. 턴키란 받은 열쇠를 꽂아 돌리기만 하면(turn key) 시설이 가동되는 방식을 의미한다. 요즘 짓는 아파트가 턴키 방식으로 발주된 것이다. 아파트 입주민은 비용만 대고 공사 감독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사가 끝나면 아파트 열쇠를 받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살면 되는 것이 턴키 방식이다.

    아파트 건설비를 아끼고 싶은 주민이라면 논 턴키(Non Turn key) 방식을 택해야 한다. 즉 건설업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말고, 설계부터 자재 구입, 공사에 이르는 모든 일에 관여하는 것이다. 턴키 방식이라면 아파트 건설회사가 배관은 A회사에, 조경은 B회사에, 도배는 C회사에 맡기겠지만, 논 턴키 방식을 택하면 아파트에 입주할 주민이 설계는 A엔지니어링, 배관은 B회사, 조경은 C회사, 도배는 D회사에 맡긴다.

    논 턴키로 발주된 고리 3호기

    원청업체가 버는 돈과 하도급업체가 받는 금액의 차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논 턴키 방식을 택할 때 절감할 수 있는 비용이 얼마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논 턴키로 나눠 발주하다보면, 이것을 통해 배운 경험을 토대로 직접 아파트를 지을 용기가 생기게 된다. 한국은 자력으로 원자력발전소를 짓겠다는 야망이 있었으므로 3기의 원자력발전소를 착공하고 난 다음에는 논 턴키로 발주했다.

    이 일은 한국전력이 주도했다. 한국전력이 전체 프로그램의 매니저(PM)가 돼, 원자로는 A회사, 증기발생기는 B회사, 터빈과 발전기는 C회사, 토목공사는 D회사, 종합설계는 E회사에 발주하는 것이다. 최초의 논 턴키 방식으로 공사에 들어간 원전은 고리 1호기 준공식과 함께 기공식을 가진 고리원전 3·4호기였다. 고리원전 3·4호기는 95만 ㎾급이다.



    이런 가운데 ‘운명의 1979년’이 다가왔다. 1970년대 후반 현대양행 사장을 하며 세계를 누비던 황병주씨는 미국에서 나온 소설 ‘Crash 79(1979년의 대충돌)’을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있다. 소설의 주 내용은 팔레비 왕조가 이끄는 이란이 스위스의 도움을 받아 핵무기를 개발해 전세계를 놀라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1979년에는 세계를 놀라게 하는 사건이 많이 벌어졌다.

    1979년 1월16일 이란에서는 팔레비 왕가가 쫓겨나고 호메이니가 권력을 잡는 민중혁명이 일어났다. 또 그해 3월28일에는 미국 스리마일 섬 원전 2호기에서 원자로가 과열돼 노심(爐心)이 녹아버리는 사고가 일어났다(용융사고). 이때 박정희 정부는 전남 영광에 영광원전 1·2호기(95만㎾)를 논 턴키로 지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 소식이 알려지자 박정희 정부도 주춤하게 되었다.

    이 시기 중화학공업에 대한 거듭된 투자로 한국의 경제 사정은 좋지 않았다. 중화학공업은 투자비를 회수하는 기간이 길기 때문이다. 경제는 어려운데 민주화의 욕구는 강했다. 이미 유신(維新) 정국을 이끌고 있던 박정희 정부는 긴급조치를 발동해 저항 세력을 억눌렀다. 그로 인해 민주화를 갈망하는 욕구는 더욱 강해졌는데 마침내 이 욕구가 마산에서 폭발해 부산으로 확대되었다(부마사태).

    이러한 때인 그해 10월29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해 절명케 하고 12월12일에는 신군부가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는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핵 주권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인물이다. 그는 미국의 카터 행정부와 심각하게 충돌하면서 미국의 핵우산 제공 의사를 거듭 확인했다. 핵 주권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박정희가 사라졌으니 대한민국의 핵주권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인 1980년 12월 한국원자력연구소가 한국에너지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새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세력은 비록 원자력연구소의 이름을 바꾸게 했지만 원자력에 대한 집념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전두환 정부는 1981년 2월 두 번째 논 턴키 방식으로 발주한 영광원전 1·2호기 기공식을 열었다.

    웨스팅하우스로의 기술 종속 우려

    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4부

    APR-1400 원자로 그래픽.

    고리 1·2·3·4호기와 영광 1·2호기는 모두 미국 웨스팅하우스사(社)의 경수로로 만들어졌다. 월성 1호기만 캐나다 AECL사의 것이고 나머지는 미국, 그 가운데에서 웨스팅하우스라는 한 회사 제품으로 깔리게 됐으니, 웨스팅하우스사에 대한 기술 종속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탈(脫)웨스팅하우스를 위한 시도는 울진원전 1·2호기를 준비하면서 본격화했다. 계기는 쉽게 찾아왔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절인 1975년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가 유럽을 순방하며 프랑스를 방문한 적이 있다. 박정희 정부는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프랑스에 많은 부탁을 했으므로 그에 대한 답례를 해야 할 처지였다. 그 무렵 프랑스의 원자로 제작사인 프라마톰(Framatome, 지금은 AREVA)사는 독자적인 원자로를 개발해놓고 있었다.

    과거 프라마톰사는 영국이 주도한 가스 냉각로 제작에 참여했는데, 가스냉각로 사업이 실패하자 미국 웨스팅하우스사 기술을 도입해 원자로를 제작했다. 처음에는 기술을 도입해 생산했는데 프랑스 정부측은 프라마톰사가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동일한 원자로를 계속 발주했다. 덕분에 프라마톰사는 충분한 기술을 익혀 독자 모델의 원자로를 내놓게 되었다.

    프랑스는 원자력을 독점하지 않았다. 원자로를 프라마톰에서 만들면 터빈과 발전기는 이탈리아나 벨기에 회사가 제작케 했으므로, 유럽 국가들도 프랑스와 프라마톰 사를 지원했다. 프라마톰사는 한국에서 발주한 원전 공사 입찰에 응했으나 번번이 웨스팅하우스에 밀려 탈락했다.

    이러한 때 김종필 총리가 유럽 방문에 나섰으니, 그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무언의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프랑스가 중심이 된 유럽 여러 나라가 생산한 민항기 ‘에어버스’나 원자로를 사줘야 할 처지였다. 프랑스 요인을 만난 김 총리는 프랑스 원자로를 사겠다는 언질을 주었다. 그리하여 1975년 11월 주한 유럽상공회의소 주관으로 한국 조사단이 유럽을 방문했다.

    중수로 도입을 주도했던 원자력연구소의 현경호 박사가 단장이었다. 프랑스와 벨기에 등을 방문한 이들은 유럽 국가들이 한국에 원자로를 제공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프랑스제 원자로를 도입하는 토대가 되었다.

    1980년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친미(親美) 정책으로만 흐르지 않았다. ‘웨스팅하우스가 너무 오만하다’ ‘프랑스제 원자로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올라오자 전두환 정부는 울진원전 1·2호기를 프라마톰사에 주도록 했다.

    프라마톰에 선물을 주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반격이 들어왔다. 10·26사건 이후 경제 사정이 나빠졌기에 한국의 전기 사정은 여유가 있었다. 그로 인해 국회에서 “전기가 풍족한데 왜 원자력발전소를 짓느냐”란 반론이 제기된 것. 이에 대해 이종훈 당시 한전 원자력건설처장은 “10년 후에는 전기 소비량이 2배로 늘어난다. 원전을 지어 가동에 들어가는 데는 10여 년의 세월이 걸리니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프라마톰사는 세계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었으므로 울진 1·2호기를 비교적 싼 값에 제공했다. 당시 한국은 울진에 최대 10개의 원전을 짓는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으므로, 프라마톰사는 울진원전 단지 전체에 자사 제품을 설치하겠다는 생각이 있어 비교적 싼 값에 응찰했던 것이다. 울진 1·2호기를 프라마톰이 가져갔을 때만 해도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사는 큰 위기를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웨스팅하우스의 방심(放心)이 엄청난 결과를 몰고왔다.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웨스팅하우스사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으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웨스팅하우스측은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한국이 프라마톰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도 이들은 불만을 표시했다. 이러한 불만이 원자력연구소와 한전 내부에서 ‘웨스팅하우스는 안 돼’라는 여론을 일으켰다. 이때쯤 논 턴키 방식으로 기술을 익혀온 한국은 원전 기술 자립을 꿈꾸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 한국은 영광 3·4호기 건설을 준비하며, 공동제작을 통한 기술 자립을 계획했다. 영광 3·4호기 제작에 도전할 외국업체는 한국과 공동으로 원자로를 설계함으로써 설계 기술을 한국에 제공해야 한다는 단서를 붙인 것이다. 이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TMI 사고로 다가온 행운

    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4부

    2006년 10월20일 웨스팅하우스를 일본 도시바에 합친다고 선언한 웨스팅하우스의 CEO 스티브씨(왼쪽)와 도시바의 아스투토시 니시다 회장.

    1979년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 이후 미국은 신규 원전 건설을 중단했다. 미국에서는 웨스팅하우스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CE) 그리고 B·W(Bob Cocks and Will Cocks)사가 경수로를 제작했는데, 스리마일 섬 원전은 B·W사가 만든 것이었다. 이 사고로 인해 B·W사의 원자력 부문은 문을 닫았다.

    웨스팅하우스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도 일감이 없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 고통은 2위 업체인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에 더 가중되었다. 두 회사 모두 해외 수출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 때문인지 세계적으로도 원전을 지으려는 움직임이 줄어들었다.

    이 시기 프랑스와 일본은 원전을 계속 지었지만, 프랑스에는 프라마톰, 일본에는 히타치와 도시바, 미쓰비시 등 그 나라의 원자력 회사가 있으니, 웨스팅하우스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이 진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때 한국이 원전을 계속 짓겠다는 의지를 보이자 두 회사는 한국시장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국은 기술 제공을 전제로 영광원전 3·4호기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이 선수를 치고 나왔다. 미 에너지부 차관을 지내고 이 회사 수석부사장이 된 셀비 브로어(Shelby Brewer)씨가 이창건 박사 등 원자력연구소 관계자들을 만나 “모든 기술을 넘겨줄 테니 우리 회사와 계약하자”고 제의했다. 웨스팅하우스의 오만에 지쳐 있던 원자력연구소 관계자들에게는 눈이 확 뜨이는 제의였다. 아시아 시장 진출을 노리던 프라마톰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만큼 분명한 제의를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영광 3·4호기 공사는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에 돌아갔다.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에게 영광 3·4호기를 맡기면서 한국은 “이후 새로 짓는 원자로는 프랑스처럼 동일하게 하자. 같은 형을 반복해서 건설하면 기술도 습득되고 비용도 내려간다. 원자력발전소 전체 설계는 한국전력기술이, 원자로 설계는 한국원자력연구소가, 원자로와 터빈발전기 제작은 한국중공업이 맡아 전문화하자”는 중요한 결정도 내렸다.

    CE 기술로 만들어진 한국형 원전

    그후 원자력연구소에서 수십명의 연구원이 코네티컷 주 윈저에 있는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로 날아가 이 회사가 만든 100만㎾급 시스템 80 원자로를 토대로 한 한국표준형원자로를 공동설계하게 되었다. 시스템 80이 100만㎾였으므로 한국표준형원자로도 100만㎾가 되었다.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는 이때 ‘소스 코드’로 통칭되는 원자로 설계 핵심 기술을 한국에 건네주었다.

    한국은 프랑스와 똑같은 길을 걸었다. 울진 3·4호기, 영광 5·6호기, 울진 5·6호기, 신고리 1·2호기, 신월성 1·2호기 등 도합 12기를 영광 3·4호기와 똑같이 지은 것이다. 이 가운데 8기는 이미 완공돼 발전 중이고 신고리 1, 2호기와 신월성 1, 2호기 4기는 공사 중에 있다.(신월성은 경수로로 건설된다.)

    영광 3·4호기는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이 중심이 돼 설계한 것이라 국제적으로는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의 시스템 80 원자로로 불린다. 그러나 울진 3·4호기부터 신월성 1·2호기까지의 10기는 한국에서 설계된 것이라 한국표준형원자로라는 뜻의 KSNP로 불린다.

    기술을 익히려면 6기 정도만 복제하면 되는데 한국은 12기나 제작했으니 기술 자립도는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건설 단가는 크게 낮아졌다. 그 덕분에 최근 한국은 원자로 수출을 검토할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한국은 전두환 정부 말기인 1987년 컴버스천 엔지니어링과 영광 3·4호기 계약을 체결했다. 영광 3·4호기부터는 논 턴키보다 훨씬 발전해 국내 업체가 주계약자가 되고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은 지원 역할을 맡았다. 한국은 영광 3·4호기가 준공되는 1995년 말 95%의 기술을 자립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로써 한국에 6기의 원전을 세운 웨스팅하우스사는 한국시장을 영원히 잃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웨스팅하우스 한국지사장은 한국계 미국인인 Y씨였다. 1987년 정국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6월사태와 6·29선언을 거쳐 연말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여당 후보인 노태우(盧泰愚)씨가 당선되었다.

    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4부

    경수로에 들어갈 MOX연료. 1996년 한국은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해 MOX 연료를 만들려고 준비하다가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포기한 바 있다.

    그런데 1988년 4월 치러진 총선에서 여당이 과반 의석 획득에 실패함으로써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펼쳐졌다. 그해 가을 서울올림픽이 끝나자 야당은 과거 청산을 요구하며 5공비리 청문회와 광주 청문회 등을 열었다.

    이때 국회에는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을 주고 영광 3·4호기를 수주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영광 3·4호기를 계약할 때 한전 사장은 박정기(朴正基)씨였다. 박 사장은 대구공고와 육사 13기 출신인데 윤필용 사건 연루 혐의로 중령에서 예편했다. 그리고 종근당에서 일하다 전두환 정부 출범 후 정우개발 사장과 한국중공업 사장을 거쳐 한전 사장이 되었다.

    웨스팅하우스의 반격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육사) 후배인 박 사장을 “정기야”라고 부르고, 대통령 전용헬기에 동승시킬 정도로 가까이 대했다. 한전은 박 사장이 재임할 때인 1986년 9월 한국형 원자로 제공회사로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을 결정했으니, 반대세력은 박 사장이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리베이트를 받고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에 사업권을 주었다고 의심했다. 때마침 국회에는 이러한 의심을 갖게 하는 갖가지 자료가 나돌았으므로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의 원자로 도입 건은 5공 비리 청문회의 대상이 되었다.

    이어 검찰이 영광 3·4호기 도입건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으나 혐의점을 찾지 못하고 사건을 종결지었다. 검찰의 조사를 받았지만 박정기 사장은 한국표준형원자로 도입이라는 큰 결정을 내렸다. 이런 까닭에 그는 인도의 핵실험으로 위기에 처한 월성의 중수로 도입을 결정한 김영준 사장과 더불어 한국의 원자력산업을 발전시키는 물줄기를 터준 사람으로 기억된다.

    1990년대가 열리자 갑작스럽게 북한 핵문제가 등장했다. ‘조선반도 비핵지대화’를 주장해온 북한이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국가가 무너지자 핵무기 개발에 매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반도 비핵화 논의가 시작되었다. 1992년 초 남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선언에 합의했는데 이로써 한국은 평화적인 목적으로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하는 길이 막히게 되었다.

    한국 원자력인들의 오랜 꿈은 우라늄을 농축해 핵연료를 만들고, 이 핵연료를 원자로에 태워 꺼낸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해 플루토늄을 얻고, 그 플루토늄으로 다시 핵연료를 만드는 ‘핵주기의 완성’이었다. 이러한 핵주기는 핵무기를 만드는 핵주기와 완연히 구분된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과 맺은 원자력협정 때문에 핵연료를 만드는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를 할 수 없었다.

    핵 확산금지조약(NPT)은 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가진 미·러·중·영·불 다섯 나라에 대해서만 핵무기 보유를 인정한다. NPT는 여러 나라가 가입한 다자조약이므로 이 조약 가입국인 한국은 이를 어기며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보유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NPT는 원자력발전을 위한 핵주기 완성은 인정한다. 따라서 양자 조약인 한미 원자력협정만 고치면 한국은 발전(發電)을 위한 핵주기 완성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노태우 정부가 북핵 문제를 풀어보겠다며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하는 바람에 이 꿈이 좌절되었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핵위기는 계속되었다. 북한은 1993년 동해로 노동미사일을 쏘고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며 위협했다. 미국은 군사적인 제재를 준비했는데, 이에 김영삼 대통령이 반대하고 카터 전 대통령이 김일성을 만남으로써, 갑작스럽게 미-북 양자 대화 국면이 만들어졌다. 북핵위기를 통해 북한은 미국과 담판을 벌이는 양자회담 마련에 성공한 것인데, 갈루치 미 국무부 차관보와 강석주 북한 외무성 부부장은 이 회담을 통해 제네바합의를 도출했다(1994년 10월).

    너무 쉽게 결정된 KEDO 원전 2기

    제네바합의는 북한이 핵 개발을 중지하는 대신 미국은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를 만들어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다. 갈루치-강석주 회담이 이 결론에 도달한 데는 한국의 ‘준비되지 못한 오판’이 작용을 했다.

    앞에서 설명했듯 당시 한국은 신나게 한국표준형원자로를 짓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은 북한이 조만간 붕괴할 것으로 보고 북한에 한국표준형원자로를 제공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미국측에 제시했던 것이다.

    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4부

    함경남도 신포시 금호지구에 건설되다 중단된 KEDO 경수로. 이 원자로는 한국표준형 원전이다.

    이 아이디어는 원자력연구소의 이창건 박사가 내놓았다. 이 박사는 ‘제네바합의가 이뤄졌으니 조만간 북한과 일본 사이에 외교를 정상화하는 논의가 있을 것이고, 이 자리에서는 북한에 대한 일본의 청구권 액수가 논의될 것이다. 청구권 금액이 결정되면 일본은 청구권 자금을 주는 대신 일본 기업체의 북한 진출을 요구할 것이므로, 북한 개발은 일본이 주도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가장 먼저 건설될 북한의 전력체계는 우리와 다른 일본형이 된다. 따라서 북한에는 한국표준형원자로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 박사의 판단은 매우 일리 있는 것이었다. 개화기 때 일본은 구미 열강의 자본으로 사회간접자본을 갖추게 되었다. 이 시기의 일본은 지금과 달리 어리숙했으므로, 일본은 구미 열강의 수에 놀아났다. 전력체계를 예로 들어 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일본은 나고야(名古屋)를 경계로 그 동쪽은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한 간토(關東)지방, 그 서쪽은 오사카(大阪)가 중심이 된 간사이(關西)지방으로 구분한다. 개화기 때 간토 지방에 들어온 서구의 전력회사는 이곳의 전기 주파수를 50사이클로 만들었다. 그런데 간사이 지역에 들어온 서구의 전력회사는 지금의 한국과 같은 60사이클의 전기를 제공했다. 그로 인해 지금도 일본은 간토에서는 50사이클, 간사이에서는 60사이클의 전기를 쓰고 있다.

    주파수가 다르면 전기제품도 달라야 한다. 따라서 도쿄에서 살다 오사카로 이사 가면 못쓰게 되는 전기제품이 적지 않다. 이 박사는 일본이 북한에 청구권 자금을 제공하면서 일본 회사를 진출시킨다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간토 지방의 전력회사가 북한에 진출할 것으로 보았다. 간토의 전력회사가 북한에 들어가면 북한의 전기 주파수는 한국과 다른 50사이클이 된다.

    이 박사는 일본의 원자력계가 둘로 나눠져 있는 것도 고려했다. 간토 지방에서 활동하는 히타치와 도시바사는 미국 GE사의 기술을 도입해 독자적인 원자로를 만들었다. GE는 비등수로(BWR)를 제작한 회사이므로 도시바와 히타치는 비등수로를 제조했다. 반면 간사이에서 활동해온 미쓰비시사는 웨스팅하우스의 기술로 일어섰으므로 미쓰비시는 경수로(PWR)를 제작했다.

    이 박사는 간토 지방의 원자력 회사가 북한에 진출하면 북한에는 50사이클의 전기를 생산하는 비등수로가 건설되는데, 한국은 비등수로를 운영해본 경험이 없으므로 북한의 전력체계가 ‘한국과 통일’되지 않을 것을 염려했다.

    이렇게 되면 향후 북한 지역의 원전은 일본이 독점하게 된다. 이 박사는 주파수 차이로 인한 불편함과 북한시장을 일본 원전 업계가 선점하는 것을 막으려면 한국이 신나게 짓고 있는 한국표준형원자로를 공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북한에 원전 2기 제공’은 무모한 발상

    이 박사는 ‘KEDO 투자의 50% 이상을 한국이 담당하니 북한에는 한국표준형원자로를 공급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에 한전의 이종훈(李宗勳) 사장이 동의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생각에는 차이가 있었다. 이 박사는 통일 후 북한의 전력 공급을 위한 선(先) 투자 개념으로 100만㎾짜리 2기(基)를 지어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 사장은 1기만 제공하자고 주장했다.

    이 박사는 김덕(金悳) 안기부장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는데 이에 김 부장이 동의했다. 이 안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되면서 한국은 경수로 2기를 제공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것이 미국에 알려지자 갈루치 차관보는 ‘경수로 2기를 제공할 테니 북한은 핵 개발을 중단하라’고 요구해 마침내 제네바합의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결국 제네바합의는 함경남도 신포에 2기의 경수로를 제공하는 것으로 타결되었다.

    그러나 이 박사의 애초 생각은 1기는 신포에 짓고 또 1기는 남북 화해를 상징하는 뜻에서 비무장 지대에 짓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막판 협상 과정에서 신포에 2기를 모두 지어주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렇게 시작된 대북 경수로 지원은 2002년 10월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폭탄을 만들 계획이 있다고 밝히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 진전에 대해 이창건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4부

    박정기 전 한전 사장.(왼쪽) 이종훈 전 한전 사장.(오른쪽)

    “그때 우리는 북한이 곧 붕괴될 것으로 보았다. 많은 사람이 ‘북한을 연착륙시킬 것이냐’ ‘경착륙하게 놔둘 것이냐’를 논의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로서는 북한에 미리 손을 넣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는 우리의 판단은 어긋났다. 그리고 2기의 원자로를 제공하겠다고 한 것도 북한 전기 사정을 고려하면 옳은 결정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북한이 가동하는 전기시설은 200만㎾인 것으로 추정됐다. 이러한 나라에 100만㎾짜리 원자로 2기를 지어준다면, 북한의 전기 소비량은 금방 400만 ㎾로 늘어난다. 북한 경제가 400만㎾ 체제에 맞춰져 있을 때 갑자기 경수로 1기나 2기가 고장 등으로 멈춰 선다면 북한의 전기 생산량은 순식간에 300만 내지는 200만㎾로 떨어지게 된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면 북한은 순간적으로 전기 부족 사태가 벌어져 모든 전기가 나가버리는 블랙아웃 상황을 맞는다.

    북한처럼 전기 소비가 적은 나라에는 큰 발전소를 지어주면 안 된다. 우리는 북한이 조만간 붕괴할 것이라는 성급한 예측으로 여러 가지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재처리를 위한 도전

    제네바합의 직후 이종훈 한전 사장은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해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던 올브라이트 여사는 싱크탱크인 CNP(Center for National Policy)의 이사장 출신이다. CNP의 대표인 마이클 번즈씨는 ‘호건 앤드 하트슨’이라는 법률회사를 이끌고 있었다. 그는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인 힐러리 여사와도 가까웠다.

    1996년 4월 이 사장은 호건 앤드 하트슨 사에 100만달러를 주고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할 수 있도록 로비해달라는 계약을 맺었다. 이 사장이 이러한 움직임에 들어간 것은 일본이 미일원자력협정을 개정해 1년 전인 1995년 로카쇼무라에 재처리공장을 짓는 공사에 착수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일찌감치 ‘비핵 3원칙’을 선언한 나라인데도 미일원자력협정을 개정해 사용후핵연료 재처리공장을 짓게 됐으니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한 한국도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해 재처리를 할 수 있게 하자고 이 사장은 생각한 것이다.

    이 사장은 라이트 주한 영국대사와도 접촉했다. 영국에서는 BNFL이라는 회사가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하고 있다. 이 사장은 한미원자력협정이 개정되면 영국의 BNFL사에 재처리공장 공사를 맡길 수 있다는 언질을 주었다.

    DJ 시절 재처리 추진 포기

    이 사장은 영국이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하는 쪽으로 미국을 움직일 수 있다고 보고 라이트 대사와 접촉한 것이다. 그로 인해 영국 정부도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하기 위해 움직이게 되었다.

    이러한 때인 1997년 말 한국이 갑작스럽게 IMF 외환위기에 빠지고 김대중 정부가 출범했다. 김대중 정부는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던 장영식(張榮植)씨를 한전 사장에 임명했는데, 장 사장은 취임 직후 호건 앤드 하트슨사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재처리 불가’를 결정했다.

    이후 김대중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에 올인했으므로 한전은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하겠다는 계획을 입 밖에도 내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한국전력은 5개 발전회사로 쪼개졌다. 원자력 부문은 수력 부문과 함께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으로 독립했다. 재처리의 꿈을 접은 한수원은 한국표준형원자로 건설에만 매진했다. 1차 북핵위기를 거쳐 2차 북핵위기에 이르는 시기 한국은 12기의 원자로를 복제 건립하면서 꽤 높은 수준의 기술 자립을 이루었다. 덕분에 지금은 원전 해외 수출을 꿈꾸게 되었다.

    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4부

    프랑스의 아레바사가 프랑스 플라망빌에 짓기로 한 1600EPR 개념도. 이 원전은 한국이 개발한 APR-1400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다.

    이렇게 되자 한국표준형원자로를 뜻하는 KSNP란 브랜드가 걸림돌이 되었다. 한국이 아닌, 세계에도 통하려면 한국을 떼내야 하므로 이 원자로는 OPR-1000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OPR은 ‘개량 경수로’란 뜻의 영문 Optimized Power Reactor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1000은 1000MW를 뜻하는데 1000MW는 100만㎾이다.

    2001년 한전의 발전부문이 5개의 발전 자(子)회사로 떨어져나가면서 초대 한수원 사장이 된 최양우 사장은 방폐장을 호남 지역에 설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광주일고 출신인 그는 ▲원자력은 안전하다. 그런데 방폐장은 더 안전하다. ▲영남에는 고리, 월성, 울진에 원자력 단지가 있지만 호남엔 영광 하나뿐이다. 따라서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서라도 방폐장은 호남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호남지역의 많은 언론인과 여론주도층을 만났다. 그의 노력으로 부안과 군산이 방폐장 유치에 관심을 기울이다 부안이 먼저 신청을 했다. 그런데 갑작스레 반핵단체들이 몰려들어 시위를 하는 바람에 부안 방폐장 설치는 좌절되고 말았다(2003년). 그리고 2년 후 한국은 골치 아픈 문제이던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부지를 경주로 확정하는 쾌거를 이루었다(2005년). 사용후핵연료의 처리는 결정하지 못한 반쪽짜리 결정이었지만 20년을 끌어온 난제를 해결한 것이다.

    APR-1400 원자로 개발

    그러는 사이 세계 원자력계는 큰 변화를 겪었다. 한국에 기술을 제공한 미국의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가 유럽의 ABB사에 합병돼 ABB-CE가 되었다가, 웨스팅하우스사로 흡수되었다. 그러나 웨스팅하우스도 버티지 못하고 경영권을 일본의 도시바사로 넘겼다.

    도시바는 미국 GE의 기술을 토대로 비등수로를 제작하는 회사인데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함으로써 경수로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도시바는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도 사들인 셈이 되었으므로 한국표준형원자로의 원천 기술을 가진 회사가 되었다.

    한국이 만든 OPR-1000에는 아직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에서 개발한 기술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물론이고 일본의 도시바사가 동의하지 않는 한 한국은 OPR-1000을 수출하기 어렵다.

    멀리 프랑스에서도 우리를 위협하는 소식이 전해왔다. 프랑스 원자력을 이끈 프라마톰사가 유럽 전체로 시장을 확대할 목적으로 독일의 지멘스 등 유럽 여러 나라의 원자력 부문을 합병해 ‘아레바(AREVA)’라는 통합 법인으로 바뀐 것이다.

    아레바사는 유럽형 원자로인 1600 EPR을 내놓았다. 1600은 1600MW, 즉 160만㎾를 뜻하고, EPR은 유럽형 원자로인 European Power Reactor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아레바는 160만㎾라는 초대형 원자로를 개발해 유럽 전체를 석권하고 이어 세계시장에 진출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다.

    일본 원자력 산업계는 아직 해외 수출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컴버스천 엔지니어링과 웨스팅하우스를 사들인 만큼 일본이 해외 진출을 시도한다면 한국은 뚫고 들어갈 시장이 없어진다.

    이 때문에 OPR-1000보다 용량이 큰 APR(Advanced Power Reactor)-1400 개발에 도전하게 되었다. APR-1400은 140만㎾급인지라 1600 EPR과 견줄 만하다. 또 APR-1400은 독자 기술로 설계하는 것이라 미국과 일본의 특허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국은 신고리 3·4호기부터 APR-1400을 건설한다. 그리고 신울진 1·2호기를 APR-1400으로 건설한 후 해외 진출을 본격적으로 모색할 예정이다. 이러한 때 터져 나온 것이 북한의 핵실험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기 전 한국에서도 깜짝 놀랄 사건이 일어났다.

    1990년대 초 한국원자력연구소는 분광학팀을 만들어 원전 제어에 필요한 가돌리늄을 레이저로 분리하는 연구를 했다. 1998년 한국원자력연구소는 가돌리늄 레이저 분리시설을 완성하고 2000년 초 가돌리늄을 농축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보다 먼저 가돌리늄 농축을 연구하던 프랑스가 이 연구를 포기했다. 그리고 한국원자력연구소도 경제성이 없다고 판단해 이 시설을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시설을 폐기하기 전 한국원자력연구소는 레이저로 우라늄 분리가 가능한지 시험을 해보자고 판단해 0.2g의 우라늄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설을 폐기했다.

    0.2g의 우라늄에서 우라늄-235의 비율은 10%에 불과했다. 핵무기는 우라늄-235의 비율이 90%이고, 경수로용 핵연료는 3%이다. 따라서 핵무기 수준은 아니고 핵연료보다 약간 더 농축한 것인데 핵무기가 되려면 90% 농축된 우라늄-235가 15㎏ 정도 있어야 한다. 10% 농축도에 02.g으로는 도저히 핵무기를 만들 수 없다.

    우라늄 농축 사건 파장

    2004년 한국은, 장인순 박사가 원자력연구소 소장을 할 때 이 사실을 국제원자력기구에 자진 신고해 사찰을 받았다. 북한이 2차 북핵위기를 일으킨 와중에 터져나온 이 사건은 국내외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국제원자력기구 사찰 결과 자진 신고한 내용과 사실이 일치하는 것으로 판정나 더는 확대되지 않았다.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이 사전을 계기로 국민은 한국도 우라늄을 농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간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진력했다. 북한은 2차 북핵위기를 고농축 우라늄탄을 개발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결국 플루토늄탄을 개발했다. 2005년 핵무기 보유 선언을 한 북한은 2006년 10월9일 핵실험을 강행함으로써 한반도를 사상 초유의 핵위기로 몰아넣었다.

    지난 50여 년간 남북한은 치열한 핵 게임을 벌였다. 한국은 물론 핵무기 개발 유혹을 느꼈지만 원전 개발에 전력을 기울여 세계 6위의 원자력 대국으로 일어섰다. 반면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진력해 조악한 단계의 핵무기를 개발했다.

    치열했던 남북한 핵 게임의 진정한 승자는 누구일까. 둘 중 세계 무대에도 당당히 설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일까. 현재로서는 한국이 정답인 것 같다. 한국은 잠재적인 핵 무장 능력을 가진 상태에서 미국으로부터 핵우산을 제공받고 APR-1400까지 개발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에서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독재 정권 시절 한국은 이러한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노태우·김영삼·김대중을 거쳐 노무현 대통령에 이른 지금까지 안으로는 그 혜택을 누리면서 밖으로는 북한에 끌려가는 형국을 보이고 있다.

    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4부

    원자력 발전소 위치도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