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이 핵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뒤 10월20일 평양에서 열린 ‘핵실험 성공 평양시 국민대회’에 참가한 북한군인들.
제2차 북핵위기는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 대통령특사가 평양을 방문해 “북한이 우라늄 농축기술을 이용한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한 데 대해 북한 당국이 이를 시인하면서 표면화되었다. 이후 6자회담을 통한 해결 노력이 있었지만, 2006년 10월9일 북한이 핵실험을 실시하고, 유엔 안보리가 6·25전쟁 이후 가장 강력한 대북 제재 결의안을 채택함으로써,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로 양상이 바뀌었다.

글로벌 시큐러티 사이트가 공개한 북한 영변의 50MW원자로 건설 현장.
북한이 반핵(反核) 입장을 최초로 공식 표명한 것은 19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비핵지대화를 주장한 것은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조선반도의 비핵 평화지대화를 제의하면서부터였다. 이후 북한은 남북한 간의 신뢰구축이나 군축방안을 제의하거나 미국과 협상을 추진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한반도의 비핵지대화’를 항상 의제에 포함시켰다.
대외 선전용 비핵지대화 정책
북한은 조선반도의 비핵지대화를 주장하는 근거로 주한미군이 대북 억제용으로 한국에 배치한 핵무기의 존재를 들었다. 북한의 비핵지대화 주장이 드러난 최초의 공식기록은 1956년 11월 7일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한국 국회와 국민에게 보낸 서한이다. 이 서한에서 북한은 한국이 군사정전협정을 위반했으며 한반도에 핵무기를 반입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도 북한은 핵문제를 간헐적으로 제기했지만 본격적인 반핵 캠페인을 벌인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였다.
1980년 12월 개최된 제6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은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의 구체적 실천조치를 제시하며 한반도의 비핵 평화지대화를 제의했다. 1986년 6월23일에는 한반도의 비핵 평화지대화를 논의하기 위한 남한-북한-미국 3자회담을 제의하기도 했다.
1987년 7월23일에는 ‘1988년부터 1991년까지 3단계에 걸쳐 남북한 군사력을 10만명으로 감축하고 주한미군과 핵무기를 함께 철수하는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남북한 및 미국 외무장관회담을 하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1988년 11월7일 발표된 한반도 군축방안에서 북한은 ‘1989년 말까지 주한미군과 핵무기를 북위 35도30분까지 철수하고 1990년 말까지는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할 것’을 제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