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은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해서 얻은 플루토늄을 원자력 발전의 연료로 다시 사용하는 ‘핵연료 리사이클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또 독자적인 재처리 기술을 개발하고 고속증식로를 이용하는 계획을 오랫동안 추진해왔다.
일본이 추진하는 고속증식로(FBR·Fast Breeder Reactor)는 사용후핵연료에서 추출한 플루토늄을 원자력발전의 연료로 사용해, 사용한 연료보다 더 많은 연료를 생산하는 원자로이다. 원자력 선진국인 미국과 유럽 몇 나라는 안전성과 경제성 등을 이유로 고속증식로 개발과 재처리에 의한 플루토늄 이용 정책을 폐기하거나 유보하고 있으나, 유독 일본만이 고속증식로 이용노선을 고수하고 있다.
세계 유일의 피폭(被爆) 국가인 일본이 세계 제3위의 원자력 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걸린 시간은 50년밖에 되지 않는다. 50년 사이 어떠한 발전 과정을 겪었기에 일본은 국제사회로부터 신뢰받는 원자력 대국이 될 수 있었는가? 원자력발전의 급속한 성장과 더불어 안전성까지 확보한 일본의 원자력 정책과 원자력 산업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미일 협력으로 재처리공장 지은 일본
2006년 3월, 일본 아오모리(靑森)현 로카쇼무라(六ヶ所村)에 위치한 재처리시설이 가동에 들어갔다. 재처리시설은 사용후핵연료에서 재사용이 가능한 우라늄-235와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시설인데, 핵무기 보유국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일본이 이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핵 비확산 노력이 펼쳐졌는데 일본은 어떻게 재처리시설을 갖게 되었는가.
그 답을 찾으려면 원자력을 둘러싼 미일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국제사회를 향해 원자력 발전을 권유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비롯해 운용에 필수적인 기술과 원료인 우라늄, 원자로 등의 자재를 제공했다. 1977년 가동에 들어간 도카이무라(東海村)의 재처리시설과 올해 시험 가동에 들어간 로카쇼무라의 재처리시설은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력으로 실현된 것이다.
나카소네의 소신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동안 미국과 영국, 독일에서는 핵분열에 대한 연구가 이뤄졌다. 1939년 ‘네이처(Nature)’ 등 과학잡지에 핵분열에 대한 논문이 여러 편 게재되면서 일본에서도 육군의 요청을 받은 ‘이화학(理化學)연구소’가 원자핵실험실을 운영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뤄진 이 연구는 이론 계산과 기초실험 단계에 그쳐,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1940년대 일본에서는 부분적으로 우라늄 농축실험이 행해졌지만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1945년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미군)은 일본의 원자력 연구를 전면 금지했다.
1952년 미 군정이 끝나고 독립을 회복한 일본은 1954년부터 원자력 개발과 관련한 예산을 편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정계와 전력업계에서는 피폭의 경험으로 원자력 에너지를 이용하는 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훗날 총리가 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등 보수 3당의 몇몇 의원은 예산 수정안에 원자력 관련 예산을 추가함으로써 전후 처음으로 일본 정부 예산에 원자력 부문이 들어가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