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은 1955년에 원자 및 핵물리학연구소를 세웠고, 1962년에 원자력연구소를 만들었다. 남한도 비슷한 시기에 원자력 관련 기관을 설립했다. 1958년에 원자력법이 공포됐고 원자력원이 발족했다. 이듬해 3월1일, 원자력원(原子力院) 소속 기관으로 원자력연구소가 탄생했다. 당시 원자력연구소는 3부 11과 체제로 구성되었다. 시작이 반이었을까? 한국원자력연구소의 탄생은 폐허 위에 뿌려진 작은 씨앗이었다.
이렇게 남과 북이 원자력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의 국제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자력연구소 설립의 법적 근거가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국제정세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1953년 겨울, 미국은 유엔 총회에서 원자력의 평화적인 이용을 제창했다. 그리고 이듬해 겨울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결의안을 유엔에 제출해 통과시켰다. 이후 미국은 여러 나라와 원자력에 관한 협력협정을 체결해 나갔다. 한국과는 1956년 2월3일 협정을 체결했다.
1950년대 후반은 한국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Ⅱ’의 건립으로 원자력원이 분주한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독자적인 원자력 기술이 없던 우리는 미국의 도움으로 트리가 마크-Ⅱ를 마련했다. 1962년 11월, 원자력원은 원자력발전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외국의 원자력발전 기술개발 현황을 조사하고, 원자력발전소를 건립하기 위한 예비조사에 착수했다.
원자력연구소법을 갖고 있는 연구소
1967년 3월30일, 과학기술처가 발족하고 김기형 박사가 초대 과학기술처 장관을 맡았다. 원자력원은 과학기술처 외청인 원자력청으로 개편됐다. 1971년 3월19일 한국전력은 미국의 웨스팅하우스(WH)와 고리원자력발전소 제1호기(고리 1호기) 건설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때 원자력청은 제안서를 평가하는 등 기술적인 부분의 지원을 맡는다.
1973년 1월15일, 한국원자력연구소법이 제정 공포됐다. 이에 따라 원자력청 산하 3개 연구소인 원자력연구소·방사선의학연구소·방사선농학연구소가 통합되면서 한국원자력연구소가 발족한다. 이때 한국원자력연구소가 민영화됐는데, 이유는 여러 가지 행정적인 제약을 뛰어넘기 위해서였다. 운영의 자율성, 안정성 및 융통성의 확보와 연구 여건을 개선할 수 있는 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했던 것이다. 1966년 법인체 형태로 설립된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효율적인 운영을 해서 본보기가 된 것이 자극제가 되었다.
이후 한국원자력연구소법은 1996년까지 모두 6차례 개정됐다. 이 법은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위상과 연구비 출연, 연구 방향, 연구자 양성 등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는데 사업계획과 예산안은 과학기술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명시돼 있었다.
한국원자력연구소법이 제정된 데는 최형섭 과기처 장관의 공이 컸다. 1959년 8월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한국원자력연구소법을 제정하는 데 힘을 쏟고, 1962년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한국원자력연구소는 꾸준히 발전해왔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원자력 개발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원자력연구소는 1975년 10월 한국전력기술(주)을 자회사로 설립하고 1976년 12월1일엔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1980년의 마지막 날인 12월31일,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을 흡수 통합하면서 한국에너지연구소로 명칭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