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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취재

‘민주화 20년’ 맞는 고려대 사학과 87학번의 인생 변주곡

“자본이 푼돈 빼앗고 권력이 얕잡아 보면 언제든 다시 거리로 뛰어들 것”

  •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민주화 20년’ 맞는 고려대 사학과 87학번의 인생 변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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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맞는 고려대 사학과 87학번의 인생 변주곡

1987년 1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사망한 박종철군의 노제(오른쪽)와 그해 6월9일 직격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 이한열군.

이날 모임에는 1993년 졸업한 이래 16년간 동기회장 자리를 장기 집권하고 있는 박석훈(대우건설 영업부 차장), 고대 주사파 운동권의 이론가 노릇을 하다 지금은 뉴라이트 운동에 뛰어든 김배균(정치웹진 뉴라이트 폴리젠 조직위원장), 13년째 국사 교사를 하고 있는 고재원(용인외고 교사), 대학 때부터 지금껏 주야장천으로 통일운동에 매진하고 있는 강진구(남북공동선언 실천연대 집행위원장), 중국 유학을 다녀와 최근 동양사 박사학위를 받은 김진우(고대 사학과 시간강사), 20년이 지나도 친구들을 웃기는 이승훈(YTN 국제부 차장), 무슨 일에든 늘 열심인 박희성(크라운베이커리 CN팀장), 12년간의 시민운동가 생활을 청산하고 최근 ‘생활인’으로 변신한 김태수(ING 생명 FC), 쇼핑몰 바이어 자리를 박차고 나와 편의점 사장이 된 정웅(구리 GS마트 대표), 그리고 15년째 신문사 밥을 먹고 있는 기자 등 10명의 동기가 참석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으면서 우리는 20년 전의 공간으로 훌쩍 날아갔다. 20년의 시공을 초월했기에 대학 시절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혹은 누군가로부터 아픔을 당하게 한 정치적 앙금이나 사상적 강요는 더 이상 묻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가슴속에 소중하게 간직한 추억일 뿐이었다.

87학번은 요즘 사교육시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논술고사의 원조 세대다. 전두환 정권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1985년도 대학입시에 논술고사를 도입했다가 1987년에 폐지했다. 그래서 86, 87학번만 논술고사를 본 것이다. 이후 이해찬 교육부 장관 시절이던 97학번 이후 논술이 다시 살아났다. 꼭 10년 만에 논술이 부활한 것. 동기들은 아직도 87년도 고대 논술고사 문제를 기억한다. 당시 시국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주제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평등에 대해 논하라. 부제 : 절대적 불평등을 중심으로’

고교시절 웬만큼 책을 많이 읽었거나 시국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 손도 대기 어려운 정치철학적 주제였다. 친구들은 “그때는 고대 전체가 너무 진지하고 진보적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고대에는 사학과의 강만길·이상신 교수를 위시해 행정학과 이문영 교수, 정외과 최장집, 철학과 김용옥 교수 등 쟁쟁한 진보적 학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군부독재에 항거해 삭발한 교수도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논술이 10년 만에 부활된 것으로 옮겨갔다. 논술 부활이 사교육 광풍의 주범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한 친구가 “그래도 이해찬이 논술 부활해서 운동권 출신들 밥벌이 할 길을 만들어주지 않았냐”고 해서 웃음이 터졌다.

사실이 그렇다. 서울 강남 학원가의 잘 나가는 논술강사나 논술학원장 중에는 운동권 출신이 많다. 현재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는 한국비정규노동센터도 2000년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인 박승흡(르몽드 코리아 대표이사)씨가 5년간 논술강사를 하며 번 돈을 토대로 설립됐다. 비정규노동센터 부소장이 고대 사학과 87학번 김주환인데, 그는 6월항쟁 때 사학과 과대표로서 동기들을 진두지휘했고, 지금도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직업 운동가다. 비정규노동센터 창립 멤버이자 전임 기획국장인 박영삼도 과 동기로, 현재 한국노총 기획조정실장을 맡고 있다.

눈물, 눈물, 눈물

운동권 출신은 논술에 강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경험을 했다. 학생운동권은 대자보와 기관지, 학회지, ‘피(성명서)’로 자신들의 주장을 알렸고, 그러다보니 논객이자 이론가가 됐다. 밤을 새워가며 탐독한 사회과학 서적은 과학적, 논리적 사고력을 길러줬고, 끊임없이 찍어낸 대자보, 성명서, 기관지, 학회지는 문장 서사구조와 기술(記述)의 노하우를 체득케 했다. 뉴라이트운동을 하는 김배균과 더불어 노동운동가 김주환, 박영삼도 비록 학생운동권 내의 정파는 달랐지만 사학과 87학번의 대표적 이론가이자 문필가였다. 박영삼은 진보적 노동계 신문인 ‘매일노동뉴스’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다.

고려대 사학과 87학번의 대학생활은 눈물로 시작했다. 겨우내 대운동장에 쌓여있던 최루탄 가루는 봄이 되면서 사람의 발길이 닿을 때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눈을 자극했다. 입학식 때는 가족들도 함께 울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프레시맨’의 낭만을 즐기던 신입생은 사학과 학회실을 들락거리면서 또 한번 눈물을 쏟아냈다. ‘죽음을 넘어 사선을 넘어’라는 광주학살 화보집을 본 동기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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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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