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호

박진 한나라당 의원의 영어 정복기

“영어공부에 왕도(王道)는 있다”

  • 조인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ij1999@donga.com

    입력2007-02-07 11: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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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방-숙달-응용 3단계로 끝낸다
    • 암기는 머리가 아니라 턱과 입근육으로 한다
    • 독해는 영자신문, 청취는 시각물 없는 라디오 뉴스가 기본
    • 요즘도 미국 드라마 ‘24’ 시청…자막 없애고 대본은 나중에 본다
    • ‘토종 영어’로도 “영국 장관보다 영어 잘한다” 찬사 들어
    영어 유치원, 영어 마을, 원어민 과외에다 캐나다로 뉴질랜드로 몇 년씩 유학도 보내보지만 ‘결국 시험점수는 비슷하더라’는 부모가 많습니다. 논술은 또 어떤가요. 학부모도 모르겠고, 학교 선생님도 잘 모르겠다 하고, 학원강사들은 좀 안다고 하지만, 그들에게 배운 학생들이 써낸 답안에 채점교수들은 싸늘한 반응을 보입니다. 교육 혼돈의 시대, ‘신동아’가 공부에 관한 한 자타공인하는 검증된 명사들을 통해 생생한 대안을 찾아봤습니다. 자녀들에겐 멘토이자 ‘해결사’ 노릇을 하게 될 겁니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한나라당 박진 의원입니다.


    박진 한나라당 의원의 영어 정복기
    박진 의원은 “감히 말하건대 영어공부에 왕도(王道)는 있다”고 첫마디를 뗐다. ‘모방-숙달-응용’ 3단계 방법이라는 이 왕도는 노력 여하에 따라 조기에 정복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는 “나 역시 스물여섯 살 때까지는 외국에 한 번도 나가지 않은 채 이 방법만 가지고도 일정 수준 이상의 영어실력을 갖추게 됐다. 이후 유학생활도 따져보면 마지막 응용의 단계를 조금 더 확장시킨 차원이다. 이 3단계 학습법을 체계적으로 거치지 않으면 한국인 토종이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문화를 경험한다는 측면에서 당연히 기회가 되면 외국에 체류해보는 게 좋지만, 단순히 영어만 배우려 한다면 한국에서 혼자 하더라도 전혀 밀릴 게 없다. 인터넷이나 영상매체의 발달로 영어 공부 환경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 아니냐”며 후학들이 자신있게 영어공부에 임할 것을 주문했다.

    첫 번째 ‘모방’의 단계는 암기(memorize)로 표준영어 문장을 따라 하는 것이며, 두 번째 ‘숙달’의 단계는 모방한 영어를 살아 있는 어휘(active vocabulary)로 만들어 바꾸는 단계이며, 세 번째 ‘응용’의 단계는 한마디로 영어로 생각(think in English)하고 영어로 말하는 단계다. 이 3단계를 통해 영어는 차츰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온다고 한다.



    메아리 만들 때까지 외운다

    그는 초등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에는 영어공부를 하지 않았고, 중학교에 가서 본격적으로 영어 공부를 했다. 영어 과외 역시 생소한 일이었다. 지금처럼 영어학원이 많지도 않았을뿐더러 원어민에게 영어를 배운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영어 공부의 왕도를 찾기 위해 나름대로 참고서를 보면서 노력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당시를 떠올린다.

    그는 중1~고2 때까지는 하루에 영어공부에만 4시간 이상을 투여했다. 이 시기에 그가 선택한 방법은 무조건 통째로 암기하는 것이었다. 영어를 국어로 쓰는 원어민이 아닌 이상 표준영어(standard English)를 외우는 것 이외의 방법을 찾기 힘들었다. 문법, 단어, 구문(syntax)은 물론 웬만한 문장은 통째로 외웠다. 정통기본영어, 성문종합영어, 1200제(題) 같은 당시 유명한 영어 문법 참고서도 달달 외울 정도였다.

    그러나 무조건 암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입으로 큰 소리를 내며 적극적으로 외우는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당시에 유행하던 비틀스의 노래 가사를 책가방에 넣고 다니며 아침, 저녁으로 외우고 다녔다. ‘예스터데이’에서 ‘오블라디 오블라다’에 이르기까지 안 불러본 노래가 없어, 덕분에 지금도 비틀스 노래는 눈 감고도 부른다는 게 박 의원의 말이다.

    그는 “이것이 영어를 시작하는 ‘모방’의 단계다. 눈으로 보기만 하는 영어는 죽은 언어와 다름없다. 언어는 펄펄 뛰는 등 푸른 생선처럼 살아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공부도 재미있어진다면서.

    되든 안 되든 큰 소리로 외우며 내 입에서 소리가 나올 때,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귀로 들으며 암기할 때 영어는 살아있는 자신의 언어가 된다.

    “한때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중국의 ‘미친 영어(Crazy English)’가 바로 이러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서 한 권을 큰 소리로 읽으며 암기하다보면 어느새 머릿속에는 영어의 메아리처럼 숱한 단어와 다양한 구문이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그는 ‘누구나 만드는 단어장’이지만 활용 여하에 따라 그 효율은 천양지차라고 강조했다. 두꺼운 노트에 단어를 적어내려가는 것은 단어를 한 번 ‘기록’해본다는 것 외에 다른 큰 의미가 없다는 게 그의 생각.

    “손에 잡히는 크기의 카드 모양이 좋다. 큼직한 노트 들고 다니면서 단어 외우기는 힘들지 않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보다가, 심지어 무겁거나 거추장스러울 때는 버릴 수도 있는 그런 단어장이 좋다. 단어 구문 문장, 특이한 표현 등 조금이라도 필요가 있겠다 싶으면 다 적어놓고 외워야 한다.”

    문장 중심 영어는 영자신문으로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교과서와 참고서 외에 ‘타임’ ‘뉴스위크’ 같은 시사잡지를 매주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주로 커버스토리를 읽었다. 물론 고교1년생 수준으로는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영어 시사잡지를 읽으면 교과서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살아 있는 단어를 만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단어 위주가 아닌 문장 중심의 학습도 이뤄진다.

    특히 시대 흐름을 반영한 새로운 조어들은 영자신문이나 시사잡지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다. 그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공(中共)’을 방문, 마오쩌둥 주석을 만나 미중 외교관계 수립을 통한 데탕트(detente)에 전격 합의했다. 당연히 시사잡지의 커버스토리로 다뤄졌다. 그는 밤을 새워가며 그 기사를 몇 번이고 읽었다. 당시 ‘데탕트’라는 말은 그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그야말로 격변하던 와중이었다. 결국 ‘타임’지로 영어 공부를 하다가 3학년 2학기 때 이과에서 문과로 진로를 전격적으로 바꿔버렸다. 국제정치를 공부해서 남북통일에 기여하겠다는 작은 소망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대 법대 진학 후 외무고시를 거쳐 외교관이 됐다. “한 줄의 영어 문장이 단초가 돼 인생이 바뀌어버린 케이스”라고 한다.

    그는 영자신문 읽기와 영어 라디오 방송 청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영자신문은 영어 공부에 비타민과 같은 요소다.

    “모자라면 결핍증이 생긴다. 내과 의사이던 아버지께서 영자신문을 매일 집에 가져오셔서 읽어보라며 주곤 하셨다. 영자신문을 하루에 30분만 읽어도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시간이 없다면 제목이라도 훑는 습관을 붙이면 좋다.”

    그는 인터뷰하는 날도 기자에게 양복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낸 A4용지 4장을 보여줬다.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 주장에 대한 뉴욕타임스 기사와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지역 미군 증파 계획에 대해 쓴 워싱턴포스트 기사를 인쇄한 것들이었다. 그는 요즘도 틈나는 대로 영어를 보면서 머리에 ‘기름칠’을 하지 않으면 결핍증이 생길까 두렵다고 했다.

    그는 어느 정도 독해력이 생긴 뒤로는 ‘까만 것은 영어요 흰 것은 종이’라는 식으로 기계적으로 글을 대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대신 글과의 ‘적극적인 상호작용’이 중요하다고 했다. “똑같은 말을 왜 이렇게 어렵게(혹은 쉽게) 썼을까” “직설적으로 안 쓰고 돌려서 표현했네”라며 수시로 자문해보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 무언가 자극을 준 색다른 표현들은 1차적인 관심이 컸던 만큼, 적어놓고 암기하면 더 쉽게 자신의 영어 자산으로 승화된다고 한다.

    그는 집중적으로 듣기 훈련을 하는 데는 영어 라디오 방송 청취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아직까지 없다고 확신한다. 비주얼(visual)의 방해 없이 듣는(hearing) 연습을 하는 것이야말로 귀를 제대로 틔울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

    그 역시 학창시절 틈만 나면 AFKN 뉴스를 들었다. 해설서를 구입해 들리지 않은 부분은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박진 한나라당 의원의 영어 정복기

    박진 의원(가운데)은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의 통역을 전담했다. 경기고 재학시절 영어경시대회에서 1등을 도맡아 했고, 영국에서 대학 교수생활도 했다. 영미권 주류인사들도 그를 ‘영어의 귀재’라고 평가한다.

    부분이든 전체이든 반복이 중요한데, 이 역시 멍하니 시간만 잡아먹기보다는 짧은 시간이라도 집중해서 듣는 게 중요하다. 그는 음악방송, 일기예보, 뉴스로 점차 수준을 높여갔고, 다양한 소재를 섭렵하는 중에 단어실력도 부쩍 늘어갔다.

    모방의 단계에서 익힌 단어와 구문을 이처럼 시사잡지 읽기를 통해 내 것으로 만들고, 영자신문 구독과 영어 라디오 방송 청취로 입과 귀를 트이게 하는 것이 ‘숙달’의 단계다. 숙달의 단계에 들어서면 서서히 자신감이 붙기 시작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영어가 머릿속에서 들리기 때문이란다. 밤에 자면서 영어로 꿈을 꾸기도 하고 심지어 영어로 잠꼬대를 하기도 한다.

    ‘영어 근육’ 만들고 단련해야

    숙달의 단계에서 그가 선택한 또 하나의 방법은 ‘자막 없이 영화 보기’였다. 영화에서는 실제 통용되는 생활영어를 배울 수 있다. 평소 접하기 힘든 속어(slang)를 배울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영화를 통해 배운 적절한 속어는 실제 생활영어에서 도움이 됐다. 특히 코미디나 오락 프로그램을 보려면 어느 정도의 슬랭 지식이 요구된다.

    그는 영화 ‘대부’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 등의 대본을 사서 혼자 공부했고, 그러던 중 리처드 기어 주연의 ‘사관과 신사’를 보고 해군장교에 대한 환상이 생겨났다. 실제로 영어 때문에 그는 해군장교가 되어 또 인생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는 영화를 보면서 ‘영어공부’라는 부분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오히려 동기유발요인이 떨어지므로, 최대한 즐기면서 공부할 것을 주문했다. 나중에 다시 대본을 보면서 표현을 확인할 때는 감동적인 장면이나 재미있었던 부분만 골라 선택적으로 학습하는 게 지루함을 덜 방법이라는 것.

    영어 소설을 읽는 것에 대해 그는 “쉽고 재미있으며 가벼운 소설을 골라 읽는 것이 효과적이다. 한글 번역판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영어 소설과 더 친숙해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한 ‘영어 근육 양성’을 강조한다. “야구 골프 축구 농구 등 집중력을 요하는 운동선수들에게 요구되는 능력 중 하나가 바로 근육의 기억(muscle memory)이다. 영어는 입 운동이다. 숱한 반복으로 훈련의 성과를 입의 근육이 기억할 때 비로소 자신의 기술로 승화될 수 있다. 머리가 아닌, 입 근육과 몸 전체로 영어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말도 오래 사용하지 않으면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근육이 기억을 해야 모방한 단어가 살아 있는 단어(active vocabulary)로 남게 된다”고 덧붙였다.

    “모방에서 숙달의 단계로 넘어갈 때 많은 사람이 좌절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멈춰버린다. ‘역시 남의 나라 말이니까 안 돼’라고 체념하면서. 이 단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자신있게 말하고, 자신있게 틀리는 것이다. 상대방이 잘 알아듣지 못했을 경우엔 “You know what I mean?” 식으로 표현을 살짝 바꿔 다시 말해보는 응용력을 발휘해야 한다. 절대 기죽을 필요가 없다. 영어 문법은 웬만한 외국인보다 한국인이 한 수 위이기 때문이다. 또한 틀렸을 때 옆에서 지적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영어 표현의 실수를 그때그때 고쳐주는 외국 친구들이 있으면 더욱 좋다.”

    틀리는 것을 두려워하다보면 결코 입에서 제대로 된 영어가 나올 수 없다. 틀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을 다시 틀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영어는 용감한 자에게 다가온다.

    그의 경우 틀린 것을 다시 실수하지 않기 위해 ‘실수 목록(error list)’을 준비했다. 공책에다 틀렸던 단어, 문법, 구문을 꾸준히 정리하고 이를 반복 학습했다. 활용하기 어려운 구문은 아예 통째로 외워 나갔다.

    숙달의 단계는 영어 공부의 결정적 ‘돌파구’다. 이 2단계를 잘 넘기면 영어로 생각하는 마음의 벽(mental wall)이 뚫리는 것을 경험한다. 이때쯤이면 즐거운 마음으로 영어가 입에서 그냥 튀어나온다. “By the way”나 “I’m wondering if…”나 “Having said that…” 같은 표현들이 입 속에서 맴돈다고 한다.

    그는 2단계 때 흔히 겪는 몇 번의 ‘좌절’을 적절히 즐겨야 한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아무리 많이 공부해도 실력이 별로 늘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오히려 ‘고지가 얼마 안 남았다’는 확신을 갖고 미련하게 정진해야 한다. 영어실력이란 꽤 긴 간격을 두고 한 번씩 비약적으로 오르는데, 말하자면 매일 일정량의 바람을 주입하다보면 풍선이 부풀다가 어느 순간 터져버리는 상황과 비슷하다. 터질 때가 되면 본인이 실력이 늘었다는 것을 직감한다.”

    토종 영어로 외국 수재들을 가르치다

    박 의원이 내세우는 3단계 ‘응용’은 영어가 물처럼 흐르는 ‘자유회화(free talking)’의 단계다.

    “프리 토킹의 핵심은 ‘영어로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어로 먼저 생각하고 이를 영어로 옮겨 말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두 가지 언어를 DNA 접합하듯 꽈배기처럼 병렬 내통해야 한다. 응용의 단계는 생각의 모드를 영어로 바꿔, 영어의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단계다. 이 단계가 되면 원어민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게 되며, 틀린 표현을 사용하더라도 교정하기 쉽다.”

    그는 이 시점부터 영영사전을 본격적으로 사용할 것을 권한다. “영한사전만 보다보면 ‘A는 B이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어느 정도 실력을 쌓은 다음에는 영영사전에서 보는 단어가 한국말로는 어떻게 번역될지 혼자서 고민해보는 ‘역발상’이 중요하다. 그래야 표현별로 미묘한 뉘앙스 차이를 숙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 말로는 engagement를 ‘포용정책’이라고 번역하지만 이를 영어적으로 좀더 가깝게 해석하자면 ‘원칙 있는 대화정책’이 된다. 영한사전만 보다보면 이런 영어적 상상력에 대한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다.

    응용의 단계로 진입하는 길목은 좁고 어렵다. 그 역시 학창시절부터 외무고시 합격 이후까지 꾸준하게 영어실력을 쌓았지만 숙달에서 응용의 단계로 넘어가는 데는 그전 단계들을 거칠 때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해군장교로 만기 제대한 뒤 26세 때인 1983년 유학을 떠났다. 국비 장학생으로 뽑힐 만큼 영어실력이 있었지만, 그와 부인 모두 외국에 나가 사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하버드대와 옥스퍼드대를 거치며, 자존심이 닳아서 없어질 만큼 교수들에게서 수없이 지적을 받았다고 했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MPA(공공정책학 석사) 과정에 반기문 현 유엔사무총장과 함께 입학해 공부하던 때였다. 리포트를 제출하면 빨간 펜으로 교정받는 것이 다반사였고, 어느 날엔가는 리포트가 빨간색으로만 뒤덮이기도 했다. 그는 밤을 새워가며 지적 사항을 하나하나 익혔다고 했다.

    그는 영작이나 영어 에세이 쓰기 연습에 대해 “사실 이 부분만큼은 한국인들보다는 네이티브 스피커들에게 교정을 받는 게 가장 좋다. 나도 유학 가서 실력이 눈에 띄게 는 부분이 영어 라이팅(writing)이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즘은 유학 가지 않고도 충분히 영작 실력을 쌓을 수 있다는 게 그의 말. 그는 “인터넷 검색창에서 ‘essay’와 ‘correction’을 치면 원어민들도 이용하는 영어 에세이 전문 첨삭지도 사이트들이 뜬다. 이런 사이트들에 자신의 글을 보내 피드백을 받는 게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실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이르지 못했다면 우선 남이 쓴 글들을 ‘모방’해보는 게 순서다. 공부하며 정리해둔 인상 깊은 표현들을 응용해도 좋고, 아니면 잡지의 어느 한 페이지를 따라 적어가며 영미권 스타일의 글쓰기를 체득하는 방법도 좋다. 다만 앞서 독해 때도 마찬가지였듯이, “왜 이런 표현을 썼고, 이렇게 씀으로써 작자는 어떤 효과를 노렸을까”를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영어 펜맨십(받아쓰기)’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고 그는 충고한다.

    숙달된 회화를 위해서 그는 “외국의 일대일 대담 방송 프로그램을 구해보고 거기 나오는 표현들을 따라 해보라”고 충고한다. 계속 하다보면 하다못해 말을 머뭇거릴 때 쓰는 말부터 해서, 남의 말을 적절히 수긍하면서 자기 주장을 펴는 유형화한 문장 정도는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게 된다는 것.

    많은 사람이 고민하는 ‘발음’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그는 “어차피 원어민과 똑같이 구사할 수는 없으나, 영어를 큰 소리로 따라 하는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영어 근육’을 자연스럽게 연마할 수 있고 그러다보면 리듬이나 악센트가 비슷해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발음이 좋아진다”고 말했다.

    다만 발음이 ‘영미권 사람들과 똑같지 않은 것’과 ‘틀린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그는 ‘틀린 발음’은 반드시 수정해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우리말로 똑같이 ‘ㄹ’인 R과 L, ‘ㅍ’ 인 P와 F는 음성학적으로는 완전히 다르다. 이런 건 반드시 정확한 발음을 내도록 스스로 의식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의사소통에 심각한 장애가 될 수 있다.”

    7년간의 유학생 생활을 끝낸 뒤 그는 영국의 뉴캐슬대학에서 국제정치를 강의하게 됐다. 영어 종주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리(數理)공식도 없는 국제정치를, 그것도 200여 명이 들어찬 대강당에서 영어로 강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시간을 강의하려면 적어도 5시간씩 준비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그는 ‘정통기본영어’와 ‘성문종합영어’로 공부한 한국 사람도 영국 대학생들을 영어로 당당하게 가르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이후 청와대 비서관 생활을 거친 뒤, 그는 뉴욕대에서 1년간 LLM(법학석사과정)을 공부하며 미국 뉴욕주 변호사 시험(bar exam)에도 도전했다. 이틀에 걸친 시험에서 첫째날 객관식 시험은 총 6시간 동안 200문제를 풀도록 돼 있었다. 한 문제의 길이는 거의 두 페이지 분량으로, 108초에 한 문제씩 풀어야 했다. 현지인 수준의 속독(speed reading) 능력이 요구됐다. 45세의 나이였지만 그는 3단계 학습법으로 익힌 독해능력을 바탕으로 전문용어에 대한 보충과정을 통해 결국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영어로 사고하며 개성을 담아라

    응용의 단계에 들어서면 ‘나만의 편한 영어 스타일’을 개발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말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는 보통 ‘저 사람 말 잘한다’와 ‘저 사람 영어 잘한다’를 구분하지만 사실은 같은 것이다. 한국말 잘하는 사람이 영어도 잘한다.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말하는 프리토킹을 넘어 나만의 분명하고 창의적인 표현을 쓰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예외가 없다.”

    그는 대통령 공보·정무비서관으로 있던 문민정부 5년 동안 100여 차례에 걸친 김영삼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영어통역을 전담했다.

    1993년 7월,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청와대를 방문했다. 청와대 녹지원에서 두 대통령이 함께 새벽 조깅을 마친 후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의 좌우명인 ‘대도무문(大道無門)’을 붓글씨로 일필휘지해 클린턴 대통령에게 선사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공보비서관이던 그에게 뜻을 묻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는 대도무문을 직역해서 “큰 길에는 정문이 없다(A high street has no main gate)”라고 했지만, 클린턴 대통령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조금 멋을 부려 “정의로움은 모든 장애물을 극복한다(Righteousness overcomes all obstacles)”라고 설명했지만, 클린턴 대통령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싶어 아예 미국 스타일로 “고속도로에는 요금정산소가 없다(A freeway has no tollgate)는 의미다”라고 설명하니 그때서야 클린턴 대통령은 박장대소했다. 그는 “영어의 응용이 외교에 이바지(?)한 예”라며 웃었다.

    또 하나, 김영삼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상징하기 위해 즐겨 쓰는 말인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의 통역에 관한 에피소드다.

    청와대를 방문하는 외국 정상들이 이 말을 들으면 섬뜩하게 느낄지 모르지만 과거 민주화 투쟁을 해온 김 대통령은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이 말을 즐겨 사용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 인종차별에 맞서서 평생 민주화 투쟁을 해온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김 대통령은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 설명하면서 특유의 이 표현을 했다.

    그는 순간 고민하다가 이렇게 통역했다. “Strangle the rooster, still the dawn breaks(수탉의 목을 졸라도 동은 튼다).” 이 표현은 생각보다 상당히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김 대통령과 접견을 마치고 나온 만델라 대통령은 그에게 엄지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Strangle the rooster” 하며 웃어 보였다.

    그는 “영어가 남의 나라 말이라고 해서 소극적으로 임하지 말고, 더욱 적극적인 사고로 임하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공부하려면 ‘활어(活語)’를 먹어야

    1995년 3월 영국 런던의 총리관저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존 메이저 영국 총리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메이저 총리는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16세에 학업을 중퇴하고 노동판에 뛰어 들었다가 영국 보수당의 총리가 된 입지전적 인물.

    김 대통령이 한반도 정세를 한창 설명할 때였다. 맞은편의 메이저 총리가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은 후 옆자리의 외무장관에게 전달하고, 외무장관 역시 메모를 읽고는 옆에 있는 토머스 해리스 주한 영국대사에게 다시 전달했다. 해리스 대사는 싱긋 웃은 뒤 다시 역순으로 메이저 총리에게 메모를 전달했다. 정상회담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해리스 대사를 만날 기회가 있어 그가 그날의 메모에 대해 물어봤다.

    해리스 대사는 웃으며 “메이저 총리가 ‘저 사람의 영어는 우리 내각 어떤 장관의 영어 수준보다 나은 것 같다’는 조크를 적어 보냈고, 나는 ‘저 사람은 내 친구인데,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어를 배웠기 때문입니다’라고 답을 적어 보냈다”고 말해줬다.

    그는 “이 일화를 소개하는 건, 꾸준히 어학공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해 뜰 날’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는 의정활동 중에도 짬짬이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파이낸셜타임스’ 같은 영자신문 인터넷판과 CNN과 BBC 방송을 본다. 가끔은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하는 키퍼 서덜랜드 주연의 액션 드라마 시리즈 ‘24’를 자녀들과 함께 보기도 한다.

    “영어 공부를 게을리하면 내 몸은 영어의 기억을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최신 영화를 봐야 요즘 시대에 맞는 어휘와 신조어를 학습할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좋든 싫든 영어는 치열한 글로벌 경쟁의 시대에 꼭 필요한 우리의 기본무기다. 따라서 애국심이 투철할수록 영어 공부는 더 열심히 해야 한다. 그만큼 국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살아 움직이는 싱싱한 ‘활어(活語)’를 먹어야 한다. 그 속에서 모방과 숙달, 그리고 응용의 3단계만 숙지해도 영어 실력은 몰라보게 향상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흘린 땀방울이 왕도를 향해 가는 에너지이자 대한민국의 경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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