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대 초반, 탈북한 젊은이들을 훈련시켜 선교사로 만들겠다는 포부로 한국 기독교계의 야심찬 지원을 받아 진행된 비밀선교 프로젝트. 그러나 함께 일하던 조선족 동조자의 배신으로 이들은 한날한시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보내졌다. 어떤 이는 곧바로 처형당하고, 또 어떤 이는 정치범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 비극의 종장(終章). 그들은 과연 순교자인가, 무모한 열정의 희생양인가. 이 기사를 쓴 주성하 기자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2001년 탈북해 당시 중국에 머물며 사건의 현장을 목격했다. 주 기자는 2003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현재 편집국 국제부에서 일하고 있다.
그때 갑자기 밖에서 문을 쾅쾅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렸다. 방안은 한순간에 긴장으로 가득 찼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문가로 다가가 살창문을 열고 물었다.
“쉐이야(누구십니까)?”
바로 그 순간 출입문이 부서질 듯 열리면서 철모를 쓰고 고무곤봉을 든 군인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삐에뚱(꼼짝마)! 삐에뚱!”을 연발하며 살기 찬 표정으로 방안에 뛰어든 군인들은 닥치는 대로 발로 차고 사정없이 곤봉을 휘둘렀다. 방안에 있던 남자들은 밥상 밑으로, 방 구석으로 피해보았지만 부질없었다.
밥상 위로 올라간 장교가 밥공기를 마구 발로 차며 고함을 쳤다. 30명도 더 넘게 밀려든 군인들은 방안 남자들 머리를 마구 때려 숙이게 한 뒤 수갑을 채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잠시 후 군인 세 명이 한 사람을 붙잡는 식으로 이들을 데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이들은 밑에 대기하고 있던 미니버스에 짐짝처럼 실렸다. 모두 버스 통로에 머리를 박게 한 뒤 좌석에는 공안들이 빙 둘러앉았다. 조금이라도 머리를 들 기미만 보이면 이리처럼 달려들어 발길질을 해댔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60평 남짓한 한 차고. 이곳에는 벌써 20여 명의 남자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감시 속에 줄지어 앉아 있었다.
미니버스는 다시 경적을 울리며 떠났다. 약 1시간 뒤, 다시 10여 명이 발길질을 당하면서 들어왔다. 이렇게 잡혀온 사람은 다음날 새벽 3시까지 모두 76명에 이르렀다. 미국 시민권자인 목사, 한국인 선교사, 탈북자 61명, 조선족 13명으로 모두 남자였다.
이들은 한국 기독교의 후원을 받아 비밀리에 운영되던 북한 선교사 양성조직의 일원이었다. ‘북한 선교는 북한 사람이 해야 한다’는 목표 아래 통일에 대비한 북한 선교사 5000명을 양성하려던 장기간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1998년부터 3년간 창춘(長春), 지난(濟南), 정저우(鄭州), 충칭(重慶), 창두(昌都), 시안 등 광활한 중국 대륙의 도시를 전전하면서 진행되던 북한 선교사 양성은 북한 보위부의 추적과 내부의 배신자, 중국 공안의 협조로 인해 350명 양성을 끝으로 마감됐다.
비록 전 과정을 밝힐 수는 없지만, 기자는 시안에서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해 매우 소상히 알고 있다. 한국 기독교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할 수도 있는 이 사건에 대해 언젠가는 그 전모를 기록하리라 마음먹고 있었지만, 선교 초기 상황을 잘 알지 못해 선뜻 기사화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체포됐다 추방당한 최광 선교사(현 열방빛교회 목사)가 최근 펴낸 실화집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에 선교 시작 당시를 소상히 기록했다. 이를 바탕으로, 최 목사가 체포 직후 추방된 까닭에 실화집에 실리지 못한 시안 체포자들의 이후 행적은 기자가 보충했다.
한국 기독교 사역자들이 주도한 탈북 선교사 양성작업은 시안에서만 진행된 것이 아니다. 당시 중국 각지에는 일명 ‘통독반’이라고 하는 탈북 선교사 훈련기지가 곳곳에 있었다. 그러나 시안 사역장만큼 큰 규모는 아니었고, 각기 다른 교회의 지원을 받으며 진행된 까닭에 서로 연계가 없었다. 1990년대 말 붐을 이루던 탈북선교사 양성작업은 시안의 대규모 체포 이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 와중에 많은 탈북자가 목숨을 잃었다. 이 작은 기록을 통해 그들의 이름이 재조명되기를 바란다.
“체포되어 중국 검찰원 조사를 받을 때 검사가 ‘너는 영웅이다. 지금은 중국의 법을 어겼으니 판결을 받아야 하지만 역사는 너를 인정해줄 것이다’고 하더군요.”(중국 감옥에서 보내온 김권능 선교사의 편지 중에서)
‘탈북자를 북한 선교사로’
1998년 최광 선교사는 42세의 늦깎이 대학원생(총신대 선교대학원)이었다. 그가 통독반을 시작한 것은 그해 8월 중국 단기 선교길에 오르면서였다. 여기서 그는 한국 선교사들의 보호를 받는 북한 청년들을 만나게 됐다. 이들과 함께 20일을 보내면서 최 선교사는 탈북자들을 북한 사역을 위한 선교사로 키우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신학대학원을 휴학한 그는 그때부터 탈북자들과 함께 살았다. 그가 택한 방식은 독특했다.
그때까지는 탈북자들에게 집을 제공한 뒤 일주일에 한두 번 방문해 먹고살 돈을 쥐어주는 한국 선교사가 많았다. 이들은 탈북자들을 돕는다는 빌미로 소속 교회에서 선교비를 받고 정작 자신들은 호화주택에서 살았다. 탈북자들도 이를 짐작하고 있었지만 달리 갈 데가 마땅치 않고, 공짜로 먹여주기에 선교사들에게 붙어 살았다. 일종의 공생관계였던 셈이다.
최 선교사는 이 벽을 허물었다. 그는 모든 생활과 사역을 100% 공개한다는 생각으로 탈북자들과 한 방에서 살았다. 당시 그와 함께 지낸 탈북자는 9명.
최 선교사는 ‘독재자’로 불릴 만큼 엄격한 규율을 적용했다. 당장 술 담배를 금지했고,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 존칭을 쓰게 했으며, 일어나서 잘 때까지 성경공부를 시켰다. 성경공부는 8시간 만에 신약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을 수 있도록 녹음된 속독 성경 테이프를 듣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일과는 이랬다. 오전 6시에 일어나 7시까지 새벽기도, 아침을 먹고 7시 반부터 12시까지 오전 통독, 오후 3시까지 점심식사와 낮잠,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한 시간 기도,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오후 통독, 저녁 8시부터 식사, 9시부터 10시까지 묵상, 11시 취침.
하루 종일 앉아 테이프에 따라 성경을 읽으면 몸은 파김치가 된다. 외출은 금지됐고 토요일 하루만 체력단련을 목적으로 외부 운동이 허용됐다. 이 일과는 2001년 6월 시안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지켜졌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탈북자들에게 하루 종일 꼬박 성경을 읽으라고 하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술과 담배를 당장 끊으라고 한 것은 여간 고통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2기 훈련을 위해 모집한 53명의 탈북자 중 30명이 중도에 떠나기도 했다. 술, 담배를 안 준다고 선생을 때리고 난동을 부리는 일도 빈번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시안 사역장에서 오전 통독시간에 이상수라는 학생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처음엔 화장실에 갔으려니 생각했지만 한참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잠가놓은 출입문 열쇠는 통독반을 운영하는 선생이 갖고 있었고 5층이라 창문으로 나갈 수도 없는데, 말 그대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갑자기 밖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내다보니 이상수가 빨랫줄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다가 4층에 매달려 있고 중국 사람들이 “도둑이야!” 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공안에 신고가 들어갔음은 분명한 일. 이 훈련장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은 짐 하나 챙기지 못한 채 현관문으로 빠져나와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 이상수도 빨랫줄을 타고 내려가 도망쳤다. 담배의 유혹을 참지 못하고 꽁초를 얻기 위해 밖에 나가려다 발생한 사건이었다.
통독반은 이런 사건의 연속 속에서 성장했다. 통독반의 규모가 커지면서 사역비가 없어 밥을 굶어야 할 때도 많았다. 이럴 때는 금식기도로 버텼다.
1기 10명, 2기 23명, 3기 50여 명
최 선교사는 1998년 8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1차로 10명의 제자를 키워내 북한 선교사로 내세웠다. 이들의 이름은 주광호, 유기풍, 김권능, 민선주, 방무디, 박요한, 진칼빈, 허익두, 최바울, 전요셉(조선족)이다. 통독반에 들어오면 대개 성경에 나오는 이름으로 개명을 한다. 따라서 이들의 진짜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중 3명이 북한에서 사형을 당했다. 또 1명은 북한 감옥에, 또 다른 1명은 중국 감옥에 아직도 수감돼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최 선교사는 설교 훈련까지 시킨 1기 제자들을 모두 선교사로 임명해 탈북자가 많은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로 파견했다. 제자를 모집해 오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현지에서 탈북자 53명을 모집한 뒤 내륙으로 들어와 사역을 시작했다. 이중 23명만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탈북선교사 양성작업을 주도하다 2001년 체포되어 추방당한 최광<br>당시 선교사(현 열방빛교회 목사)와 그가 최근 펴낸 실화집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최 선교사는 실화집에서 자신의 목표가 선교사 5000명을 양성하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혼자만의 힘으로 이러한 대규모 사역을 하기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집세를 내야 하고 먹을 것도 조달해야 했다.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최 선교사의 뒤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소록도북성교회 등 50여 개의 국내외 교회가 있었다. 이외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교계 관련 미국·한국 기업들이 있었다. 총신대 김의환 총장은 현지를 찾아와 격려하기도 했다. 탈북자 북한 선교사 양성사업은 이렇듯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다. 한국 기독교계의 후원 아래 벌어진 사건이다.
피를 뿌리다
북한 보위부는 2기 사역이 시작됐을 무렵부터 통독반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옌볜에서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특무를 학생으로 위장해 통독반에 심어놓기 위한 공작을 폈다. 3기에는 실제로 보위부 특무가 통독반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다행히 곧 탈북자들에게 적발됐다. 이미 옌볜에서 활동하다가 탈북자들에게 꼬리를 잡힌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사역장의 위치와 리더들의 신상을 보고하면 보위부가 공안과 협조해 체포를 단행할 예정이었다. 북한 보위부 요원이 북송된 탈북자들에게 “너 통독반에 있다 왔지?” 하면서 집요하게 캐묻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부터였다.
통독반 선교사 중에도 순교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1기 선교사로 옌볜으로 나간 진칼빈과 박요한은 보위부 특무를 학생으로 모집하려다, 보위부의 의뢰를 받은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칼빈은 한국으로 가는 것이 꿈이었던 26세의 애티 나는 청년이었다. 박요한은 초기에 글도 읽지 못하던 사람이었으나 성경에 빠져든 뒤부터는 밤늦게까지 혼자 성경을 공부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꼭 목사가 되어 북조선의 많은 영혼을 구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라고 내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최광 목사의 실화집 중에서)
북한 보위부는 이들을 체포하자마자 포고문을 내고 ‘시범 케이스’로 공개처형했다.
사역장을 누구보다 울린 사람은 당시 60세이던 2기 장만식 아바이였다. 장 아바이는 통독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체포됐다. 호송차를 기다리던 공안들은 담장에 이들을 세워놓고 두 명의 보초만을 남긴 채 밥을 먹으러 갔다. 장 아바이는 학생들에게 “내가 저쪽 높은 담장으로 도망치면 너희들은 이쪽 낮은 담장으로 도망쳐라”고 했다. 이미 그는 공안에게 맞아 운신하지 못할 상태였지만 남을 위해 자신을 바친 것이다. 그의 희생으로 학생들은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담을 넘은 학생이 목격한 것은 장 아바이가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맞고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장 아바이는 북한에서 농촌 노동당 비서였다. 그러나 체제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정치범 수용소에 감금됐다가 보위원이 술에 취한 틈을 타 권총까지 빼앗아 탈북에 성공했다.
이후 그는 북한 보위부 감옥에서 단식 끝에 숨졌다. 그 소식에 전 사역장 구성원들이 며칠 동안 울었다.
1기 주광호 선교사는 칭다오에서 사역하다가 체포됐다. 북한 보위부 요원이 직접 와서 그를 호송했다고 한다. 그보다 한 달 전 그의 부인인 탈북자 서모씨가 베이징에서 체포됐다. 서씨는 북한 감옥에서 보위원들을 향해 기독교를 전도했다고 한다. 당시 감옥에서 그에게 감명 받은 한 여성이 ‘나도 예수를 믿어야겠다’고 생각하고 3기 학생으로 들어왔다. 주 선생과 부인 서씨의 이후 소식은 알려진 바 없지만, 그들이 지금도 살아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김권능 선교사는 불법 밀입국 조직혐의로 12년형을 받고 현재 중국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다. 그는 시안사건 뒤 북한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모집해 한국으로 보내는 일을 했다. 한국으로 오는 루트를 제일 먼저 개척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한국에 올 기회가 수없이 많았지만 늘 남에게 순서를 양보하다 자신은 결국 체포되고 만 것이다. 중국 공안이 언제 그를 북송할지 알 수 없다. 북송되면 사형을 면하기 어렵다.
김 선교사와 함께 학생들을 한국에 보내던 2기 이용섭 선교사도 체포돼 4년형을 받았다. 그러나 3년 뒤 중국 공안은 그의 형기를 감형하고 북송했다. 북한 보위부가 이미 그의 행적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어 그 또한 희생된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들의 희생으로 수십명의 학생이 한국에 무사히 입국할 수 있었다.
시안사건 당시 중국 공안이 모든 사역장을 동시에 습격할 수 있었던 데에는 김광철이라는 조선족의 배신이 있었다. 당시 사역장은 10여 명의 조선족을 데리고 있었다. 공안 검열이 있을 때나 시장에서 장을 볼 때 중국어에 능통한 조선족들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이들은 탈북자들과 한 방에서 지내며 성경을 공부했다. 그러나 2기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내세워진 김씨는 옌볜에 파견된 뒤 현지 북한 보위부 출장소에 사역장들을 밀고하면서 그 대가로 2만달러를 요구했다. 이 때문에 시안의 12개 비밀 사역장 가운데 8개가 발각됐다. 그가 모르던 4개 사역장은 안전했다.
보위부에서는 중국 공안에 협조를 요구했다. 시안에 공안을 끌고 왔던 김씨는 시안의 차고에서 군인들에게 마구 구타당했다. 중국 군인들도 배신자인 그를 증오했던 것이다.
죽음의 북송
시안에서 초기 탈북자들이 감금된 곳은 어느 군부대의 차고였다. 처음엔 모두들 너무나 뜻밖에 벌어진 일이라 넋이 나가 있었다. 머리를 조금만 들어도 발길질과 곤봉이 날아들었다. 이곳 군인들은 이들을 파룬궁 수련생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침 6시경이 되자 사태가 달라졌다. 6시는 일과상 아침기도 시간이었다. 한 선교사가 “우리 기도합시다” 하고 소리쳤다. 군인들의 매질이 시작됐지만 모두들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 당황한 것은 군인들이었다. 점차 밀려나던 군인들은 차고 문을 닫고 동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차고 안은 기도소리로 가득 찼다. 눈물을 뿌리는 기도는 2시간 넘게 계속됐다.
밖에서 한 장교가 들어와 한국말로 “조용히 하라, 죽이지 않는다”고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군인들이 여러 차례 몰려와 진압하려 했지만 서로 팔짱을 낀 탈북자들은 피를 흘리면서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찬송가 소리가 차고를 가득 메웠다. 김철수라는 탈북자가 만든 ‘북한선교가’였다. 그는 이 노래를 주광호 선교사에게 가르쳐주고 선교하러 북한으로 들어갔다. 이는 사역장에서 가장 많이 불리던 노래였고 부를 때마다 탈북자들은 울었다.
저녁 무렵 탈북자들이 기진맥진해 있을 때 군인들이 다시금 밀려들어왔다. 이번에는 한 사람씩 끌고 나가 차에 태웠다. 탈북자들은 모두 시안 서탑감옥에 수감됐다. 6월13일 이들은 기차로 옮겨졌다. 약 200명의 군인이 이들을 호송했다. 호송하는 군인들은 옌볜 변방기동대 소속이었다. 열차 한 칸을 통째로 전세 내어 호송했다. 한 장교는 “너희들 때문에 기차를 전세 내느라 10만위안이 들었다”면서 “사실 우리도 너희를 잡기 껄끄럽지만 보위부의 독촉이 하도 심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가는 도중 차 한쪽 구석의 막을 친 곳에서는 끊임없이 비명소리가 새어 나왔다. 신문이 시작된 것이다. 공안들은 전기곤봉으로 고문하며 웃어댔다. 15일 투먼 변방 수용소에 도착한 이들은 감방 5개에 나눠 수감됐다. 벽에는 탈북자들이 북송되기 전에 남긴 글들이 가득 씌어 있었다. 진칼빈과 박요한이 쓴 글귀의 흔적도 있었다.
이 수용소에서는 1년 전 탈북자들의 폭동이 일어난 적이 있다. 당시 폭동을 주도했던 북한 의사 출신 탈북자는 복부에 총을 맞고 다 죽게 돼 북송됐는데, 북한 보위원들이 “쌍놈의 중국 새끼들…” 하면서 “왜 그 놈들 다 때려눕히지 못하고 왔느냐”고 오히려 화를 냈다고 한다. 이곳에서 탈북자들에 대한 처우가 극악하다는 사실을 북한 보위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 공안들은 남자 수십명이 우르르 들어오자 초비상에 들어갔다. 한 명씩 불러내 초주검을 만들어 기를 꺾은 다음 회유전략에 들어갔다. 빵과 식수를 내주고는 14일간 조선족을 선별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훗날 북한으로 송환되어 처형당한 진칼빈 선교사가 중국 정저우 공원에서 최광 선교사와 찍은 사진(왼쪽). 제1기 훈련생들이 북한 선교사로 임명되던 1999년 4월의 어느 날, 중국 정저우에서 찍은 기념사진.
산 자와 죽은 자
이들은 즉각 온성 보위부로 끌려갔다. 이곳에는 남자 감방 2개와 여자 감방 1개가 있다. 2.5평 정도의 방에 40여 명이 갇혔다. 잘 때도 앉아서 자야 한다. 수인들은 번호로 불렸으며 ‘계호원’이라고 하는 20대 초반의 군인들은 이들을 장난삼아 때리고 기합을 주며 괴롭혔다.
보위부원들은 한 명씩 불러다 이유 없이 닥치는 대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말끝마다 “민족 배반자 새끼”라며 분풀이를 했다. 끼니때마다 식사라고 2~3숟가락 의 옥수수죽이 나왔다. 석 달만 감방에 있으면 영양실조로 일어서지 못한다는 곳이었다.
7월4일 보위부는 시안사건으로 잡혀온 탈북자들을 인근 회령보위부와 종성 옛 정치범 수용소 자리에 있는 도 보위부집결소에 갈라놓았다. 분리신문을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처음에는 자신들이 한 일을 부인했다. 그러나 보위부는 이미 전말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여기에 2기생으로 북한에 갔다 체포된 한 탈북자가 감옥마다 돌아다니면서 한 사람씩 확인해 고발했다. 8월28일까지 진행된 조사과정을 통해 모든 혐의가 확인됐다. 누군가 2년 전에 썼던 김정일을 단죄하는 시까지 그대로 보위부 보고서에 올라 있었다. 호송 중 족쇄를 찬 상태에서 보위부원 2명을 따돌리고 달아난 사람도 있었다. 아마 특수부대 출신이었을 것이다. 그 바람에 남은 사람들은 한동안 고생했다.
구금기간이 길어지는 가운데 흥미로운 일도 생겨났다. 기독교에 대해 궁금한 보위부원들은 야근 당직을 설 때 성경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야, 42번, 예수란 사람은 누구냐” 하면 지목을 받은 사람이 예수의 생애에 대해 쭉 이야기해주는 식이었다. 어떤 보위부원은 몰래 자기 방에 불러다 기도를 시키고는 흥미롭게 들었다. 그 보위부원은 자기를 위해 기도해준 선교사를 앞으로 때리지 말라고 부하에게 지시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단식을 하는 선교사도 있었다.
보위부는 조사가 끝난 뒤 선교사인 이선장, 김기철, 김철수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해 정치범 수용소로 보냈다. 정용철, 조복화, 강규홍, 신용재에게는 5~15년형이 선고됐다. 북한 감옥에서 5년 이상 살아있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아마 이들은 나중에 모두 잘못됐을 것이다. 또 북한에서 이미 죄를 지었던 사람들에게는 그 죄의 몇 배에 해당하는 형벌이 선고됐다. 나머지는 북한 보위부에서 보안서(경찰)로 넘겨졌다. 이는 정치범이 아닌 일반범으로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한국 선교사를 만난 사람은 사형 아니면 정치범 수용소행(行)이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 이후인 2001년에는 한국 사람을 만나거나 성경을 공부했다 하더라도 간첩활동을 하지 않았으면 석방하라는 김 위원장의 특명이 내려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다행히 많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다르다. 중국으로 단순 도강(渡江)을 한 사람도 3년형을 받고 감옥에 간다. 선교에 가담했으면 정치범 수용소로 간다. 북한이 옛날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보위부에서 보안서로 넘겨진 사람들은 온성 보안서 노동단련대에서 강제노동을 한 뒤 함북 청진시 집결소에 수용돼 강제노동에 참여했다. 물론 이 과정에 다들 짐승 취급을 당했지만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는 한 줄기 희망은 있었다.
몇 개월의 시차를 두고 석방된 40여 명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많은 이가 다시 탈북했다. 이들 중 재탈북해 지금까지 한국에 들어온 사람만 20여 명에 달한다. 중국에서 모집된 350여 명 전체로 본다면 50여 명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시안사건 이후에도 기자는 중국에서 한국인에 의해 초래된 탈북자 피해사례를 적지 않게 보았다. 한 예로 2002년 8월 탈북자들이 중국 외교부 앞에서 시위를 벌인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조직한 한국의 이른바 ‘북한인권운동가’들은 서울에 돌아와 이들의 희생이 “북한 민주화에 바친 고귀한 희생”이라고 떠들었다. 기자는 치를 떨었다. 역겨웠다. 그렇게 고귀한 희생이라면 왜 자기들이 직접 하지 않는가.
에필로그
심지어 국가도 탈북자들을 이용했다. 1990년대 후반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북한 첩보공작에 이용하다 남북정상회담을 전후로 철수하면서 이들을 버려두고 왔다. 결국 불쌍한 것은 북한에 끌려가 목숨을 잃은 탈북자들뿐이다. 목숨이 위태로운 타향에서 자신에게 던져진 생명의 동아줄인 줄 알고 덥석 잡았다가, 줄을 던진 사람의 목적에 따라 조종되던 끝에 위험에 빠지는 탈북자가 지금도 많다. 누가 이들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할 것인가.
기자는 시안사건도 같은 연장선에서 보았다.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금전적이든,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이용한 것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이 글을 쓰면서 최광 목사와 여러 차례 통화했다. 최 목사는 현재 12평 사글셋집에 여섯 식구가 기거하는, 한마디로 최하층의 삶을 살고 있다. 월세도 2년치나 밀렸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가정조차 돌보지 않고 여전히 북한 선교에 빠져 있다. 서울 금천구에 탈북자들을 모아놓고 열방빛교회라는 개척교회를 운영하고 있다. 아래에 시안식 선교사 양성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기자와 최 목사와의 대화 일부를 옮긴다. 그 속에서 시안사건의 교훈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중국 도시 한복판에서 탈북자들이 집단 기도를 하기도 했다. 이라크 바그다드 거리에서 목사들이 모여 통성기도를 했다 해도 이보다는 마음 졸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탈북자를 모아놓아야만 했나. 최 목사는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우리의 목숨은 하나님께 맡겼다’고 늘 말했지만 정작 잡히면 죽는 것은 탈북자들이고, 한국 목회자는 추방되면 그만이다. 스승은 살 수밖에 없고 제자는 죽는 순교라면, 과연 하나님이 그런 순교를 기뻐하시겠나.
“당시에는 옌볜이 위험해 탈북자들에겐 내륙으로 오는 길이 최선이었다. 오히려 오고 싶어하는 탈북자들을 다 받을 수 없어 안타까웠다. 나는 순교를 목적으로 북한 선교사를 양성하지 않았다. 안전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학생들을 서울에 보내기 위해 한국 정부에 건의했으나 장관이나 장군 출신이어야만 데려올 수 있다는 대답을 받았다. 탈북자들에게 한국행 길이 뚫린 것은 2001년 중반부터였다. 그때는 내륙에서 안전하게 지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 지금도 중국에서 시안에서와 같은 사역방식이 계속될 필요가 있다고 보는가.
“지금은 한국으로 오는 길이 다양하다. 탈북자들을 안전한 곳에 옮겨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역은 한국에서 할 수도 있고, 동남아에서 할 수도 있다. 물론 중국에서 탈북 형제들을 돌봐주는 것도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고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볼 수 있는 대규모 사역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 시안사건의 교훈이다. 그러자면 북한 선교에 헌신할 수 있는, 사리사욕 없는 많은 선교사가 중국에 가야 할 것이다.”
▼ 강제로 앉혀놓고 종일 성경만 읽게 하는 것은 북한에도 없는 강압적인 방법이다. 모집된 학생 중에는 ‘내륙에 들어가 성경이나 좀 읽으면 안전하고, 공짜로 먹고 입고 자고, 한국에도 갈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해 온 사람이 많았다. 이건 옳은 방법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모집하면 당연히 안 된다. 수많은 사람이 모집에 참여하다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교육방식은 당시에는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고 판단해서 채택했다. 중요한 것은 시안이 한국과 중국, 북한의 형제들이 화합된 마당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역 방법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국과 북한 사람들이 함께 섬기고 사랑할 때 비로소 진정한 통일이 가능하다. 이러한 목적을 빨리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 가장 훌륭한 사역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 신약 성경을 500번 이상 읽고 목사들도 입을 못 다물 만큼 성경을 줄줄 외우는 사람도 한국에 오자마자 제멋대로 사는 경우를 보았다. 어쩔 수 없는 환경에서 타의반 자의반으로 성경을 공부한 데서 나온 한계가 아닌가.
“자유로움을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해 한순간 탈선도 하겠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시안 출신으로 한국에 온 많은 탈북자 가운데는 국내에서, 해외에서 신학대학을 다니면서 진정한 북한 사역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