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선을 앞두고 조선노동당이 준비하는 초대형 ‘북풍’
- 북한 신년사는 한나라당 집권 막으라는 공개 지령
- 등록마감 6일 이후 ‘후보자 유고(有故)’ 정당은 교체 후보 못 내
- 문세광 사건과 아웅산 사건 때도 보복 못한 한국의 현실
- 후보자 유고시 대체 후보 내도록 대선 연기하고 요인 경호 강화해야
2006년 5월20일 서울 신촌 부근에서 면도칼 테러를 당하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 범인 지충호씨는 확신범임을 주장해 사건의 배후는 드러나지 않았다. 원 안은 범인 지충호씨.
그야말로 ‘천양지차(天壤之差)’를 보이는 것인데 정치인들은 이 차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12월19일의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건다. 이렇게 중요한 정치 이벤트에 뜻밖의 불청객이 참여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휴전선 이북에서 독재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조선노동당이 이 선거에 관여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내비친 것이다.
대통령선거 때마다 불어온 북풍
과거의 대통령선거에서는 총풍(銃風)이니 흑금성(黑金星)이니 오익제(전 천도교 교령) 파동이니 하는 이른바 ‘북풍(北風)’이 불었다. 이 북풍은 남쪽의 정치 세력이 자파 승리를 위해 불러들인 측면이 강했다. 그런데 올해 말에 실시되는 17대 대선에서는 북한이 직접 북풍을 불어넣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이 북풍은 한국 정치 지형을 뒤흔드는 초대형 태풍이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여론 추세라면 17대 대통령선거에는 한나라당 후보가 이길 가능성이 높다. 한나라당은 당내 경선에서 2위를 한 사람을 후보로 내세워도 여당 후보를 이길 수 있을 정도로 현재 지지도가 높다. 따라서 한나라당에서는 당내 경선에서 2위를 한 사람이 탈당해 출마하는 것을 막는 일이 급선무다.
북한이 준비하는 북풍은 한나라당의 집권을 단숨에 꺾어버릴 정도로 강력할 전망이다. 도대체 북한이 준비하는 북풍은 어떤 것이기에 유력한 집권 후보 세력인 한나라당의 대권 장악을 일거에 꺾어버릴 수 있다는 것일까.
17대 대통령선거일은 헌법과 공직선거법에 따라 12월19일로 확정되었다. 헌법 제68조 1항은 ‘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되는 때에는 임기 만료 70일 내지 40일 전에 후임자를 선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만료일은 2008년 2월24일이므로, 차기 대통령을 뽑는 선거는 70일 전인 2007년 12월17일부터 40일 전인 2008년 1월15일 사이에 치러져야 한다.
공직선거법은 이 헌법 조항을 토대로, 제34조 제1항 제1호에서 ‘대통령선거는 그 임기 만료일 전 70일 이후 첫째 수요일로 한다’고 규정해놓았다. 노 대통령의 임기 만료 70일 전인 2007년 12월17일은 월요일이니 그 주 수요일인 12월19일이 17대 대통령선거일로 확정된 것이다.
공직선거법 제33조 제1항 제1호는 대통령선거 기간을 23일로 한정해놓았다. 따라서 각 후보는 12월19일에서 23일 전인 11월26일부터 대통령선거일 하루 전인 12월18일까지 23일간 유세를 펼친다. 17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은 11월26일부터 선거 전날까지 전국을 누비며 자유롭게 선거운동을 펼칠 수 있다.
이러한 유세를 하려면 각 후보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후보 등록을 해야 한다. 공직선거법은 제49조 제1항에서 ‘대통령후보자 등록은 대통령선거 24일 전(대통령선거 운동 개시 하루 전)에 한다’고 규정해놓았다. 따라서 각 당의 대통령후보자는 11월25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후보자 등록을 하고 다음날부터 선거운동에 돌입한다.
하지만 후보자들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윤회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인지라 예상치 못한 사태를 맞을 수 있다.
대선 레이스 6일 후에는 후보교체 불가
이런 상상을 해보자. 현직 대통령을 배출한 A당에 대한 국민 지지도는 10% 내외일 정도로 형편없고, 야당인 B당은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 덕분에 그 지지도가 50%를 넘었다.
그로 인해 유능한 재사(才士)가 몰려들어, B당은 대통령후보를 확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B당에서 대통령후보자를 결정하는 경선은 대통령선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했다. 이 경선에서 B당은 1위를 한 B-1씨를 대통령후보로 확정했다. 그때부터 B-1씨를 포함한 B당 수뇌부는 2등을 한 B-2씨가 탈당해 다른 당의 후보나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는 것을 염려한다.
B-2씨가 탈당해 대통령후보로 출마하면 그의 표는 B-1씨의 표를 갉아먹을 것이 분명하다. 그로 인해 A당의 후보인 A-1씨가 어부지리로 당선된다면 B당은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된다. 그리고 B-2씨가 B-1씨를 꺾고 대통령이 되는 역전극이 일어난다면, B당은 B-2씨를 향해 ‘헤쳐모여’를 할 것이므로 B당은 존폐의 위기를 맞게 된다. 이러한 혼란을 두려워한 B-1씨와 B당 수뇌부는 B-2씨의 탈당을 막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그 결과 B-2씨는 경선 패배를 인정하고 B당에 남아 B-1씨의 당선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이로써 B당이 17대 대통령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11월25일이 되자 B당의 B-1씨는 대통령후보로 등록하고 다음날 본격적인 유세에 들어갔다. 전국을 돌며 ‘유권자 속으로’ 들어가는 대장정에 돌입한 것.
경호 측면에서 봤을 때 후보자는 이때 가장 위험한 상태에 놓인다. 선관위에 대통령후보로 등록하면 그날부터 경찰 경호팀이 출동해 후보자를 근접 경호한다. 그러나 유세기간에는 후보자가 ‘마구잡이’로 유권자를 만나는지라, 완벽한 경호가 이뤄질 수가 없다.
유세 시작 엿새째 되는 날, 경천동지할 사건이 일어난다. 당선이 유력하던 B-1 후보가 유세 도중 폭탄 테러를 당해 곁에 있던 측근들과 함께 사망한 것이다. 순식간에 정국은 혼란에 빠져든다.
하지만 유력한 후보자가 사망했다고 해서 예정된 선거를 치르지 않을 수는 없는 법. 암살범에 대한 수사는 검찰과 경찰에 맡기고 선거는 절차대로 치러진다. 후보를 잃은 B당은 즉각 B-2를 새 후보로 내세우려 한다. 그런데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공직선거법을 거론하며 B-2씨를 B당의 후보로 등록해주지 않는다.
결국 B당은 후보를 내지 못해 대선에 참여하지 못한다. 12월19일 투표가 끝나고 개표 작업에 들어가자 많은 유권자가 B-1씨를 지지한 사실이 확인된다. 그러나 B-1씨는 사망했으므로 그에게 기표한 표는 전부 무효처리된다. 그리고 유효표 중에서 최다 득표를 한 A당의 A-1 후보가 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발표가 나온다.
집권에 실패한 B당은 그제서야 공직선거법을 살펴본다. 그리고 이 법 51조 때문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B당의 대통령후보자 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가슴을 친다. B당을 울린 공직선거법 제51조는 다음과 같다.
‘대통령선거에 있어서 정당 추천 후보자가 후보자 등록기간 중 또는 후보자 등록기간이 지난 후 사망한 때에는 후보자 등록 마감일 후 5일까지 제47조(정당의 후보자 추천) 및 제 49조(후보자 등록 등)의 규정에 의하여 후보자 등록을 신청할 수 있다.’
신익희 급서의 전례
B-1씨가 후보자 등록 마감 후 5일 이내에 사망했다면 B당은 이 법 제47조에서 규정한 정당 후보자 추천에 필요한 절차를 거쳐 바로 B-2씨를 새 후보로 등록할 수 있었다. 그러나 B-1씨는 후보자 등록 마감 엿새째 되는 날 암살됐기에 B당은 교체 후보를 내세울 수 없었던 것이다. 공직선거법 제51조는 후보자 교체는 후보자 등록 마감 5일 후까지만 가능하다고 못박고 있다.
이 가정을 소설 같은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60년밖에 되지 않는 대한민국 헌정사는, 선거기간 중 당선이 유력한 후보가 사망해 국민적 지지도가 낮은 다른 당 후보가 어부지리로 대권을 잡은 사실이 있음을 보여준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문세광. 민단 소속인 문세광은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소설 ‘자칼의 날’을 읽고 한국 ‘민주화를 위해서는 박정희를 제거해야 한다’며 자생적 테러리스트가 되기로 작심한 확신범이다. 조총련 오사카 지부의 김호룡은 문세광을 자극해 문세광으로 하여금 스스로 오사카의 파출소에서 권총을 훔쳐 한국 대통령 암살을 감행케 했다.
제2대 대통령선거가 있는 1952년이 다가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선출권을 가진 국회의원 중 상당수가 그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국회 간선으로는 재집권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 정부는 국민 직선으로 대통령을 뽑는 것을 주내용으로 한 개헌 작업에 들어갔다.
이승만 정부는 이러한 내용이 담긴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이어 ‘심야 날치기’ 방식으로 통과시켜 개헌에 성공했다. 이에 따라 제2대 대통령선거는 1952년 8월5일 국민 직선으로 치러졌는데, 이 선거에서 이승만 후보는 74.2%의 득표율을 기록해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헌법도 한 차례의 중임만 허용했으므로 이승만 대통령은 4년 후 다시 출마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54년, 이승만 정부는 영구집권을 위한 공작에 들어갔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는 연임 제한을 철폐한다는 것을 주내용으로 한 개헌안을 만들어 그해 9월8일 국회에 제출한 것. 이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대선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 집권할 수 있다.
당연히 국민과 야당은 이 개헌안에 반대했다. 당시 헌법은 개헌을 위해서는 재적 국회의원(203명) 3분의 2(136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해 11월27일 이 개헌안에 대한 표결이 이뤄졌는데, 재적 의원 3분의 2에서 한 명이 부족한 135명만 개헌에 찬성한 것으로 결과가 나왔다.
이에 따라 자유당 소속인 최순주 국회 부의장이 개헌안 부결을 선포했다. 그런데 이틀 후 그는 “재적 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4사5입(四捨五入)하면 135명이 된다”며 부결 선포를 번복하고 가결을 선포했다(203명의 3분의 2는 135.3333명이므로 반올림하면 135명이 된다).
2년 전 심야 날치기로 개헌을 했던 한국은 또다시 사사오입이라는 편법으로 개헌하는 부끄러운 역사를 만들게 되었다. 지금 이 개헌은 한국 헌정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사사오입 개헌’으로 불리고 있지만 이 개헌으로 이 대통령은 영구 집권을 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56년 5월15일 한국은 이승만의 영구 집권 여부를 결정하는 3대 대통령선거를 국민 직선으로 치르게 되었다. 사사오입 개헌에 넌더리를 낸 많은 유권자는 이승만의 영구 집권에 반대해 제1 야당인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를 지지했다.
그런데 선거일을 불과 열흘 남긴 5월5일, 호남 유세를 위해 광주로 내려가던 신익희 후보가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당시 선거법도 선거 열흘 전에는 후보자 교체를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로 인해 민주당은 대체 후보를 내지 못하고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가 3대 대통령당선자로 확정됐다.
‘한나라당 세력을 매장하라’
한국은 선거운동 기간 중 당선이 유력한 후보가 사망함으로써 국민적 지지도가 낮은 사람이 대통령에 뽑힌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 정치를 연구해온 북한이 이러한 허점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은 17대 대선에 출마한 한나라당 후보에게 테러를 저지를 수 있을까. 북한을 이끄는 조선노동당은 매년 초 당 기관지인 ‘노동신문’과 인민군 기관지 ‘조선인민군’,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의 기관지 ‘청년전위’ 사설란에 똑같은 내용의 신년사를 발표한다. 올해도 조선노동당은 3개 관영 매체의 공동사설 형식으로 신년사를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이런 대목이 들어 있다.
‘남조선에서 반(反)보수 투쟁은 민족 대단합 실현의 중요한 고리이며 사회의 진보와 통일운동의 전진을 위한 관건적 요인이다. 지금 한나라당을 비롯한 반동보수 세력은 외세를 등에 업고 매국 반역적인 기도와 재집권 야망을 실현해보려고 발악적으로 책동하고 있다. 사회의 자주화와 민주화, 조국통일을 바라는 남조선 각계각층의 인민들은 반(反)보수 대연합을 실현하여 올해의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매국적인 친미반동 보수세력을 결정적으로 매장해버리기 위한 투쟁을 더욱 힘 있게 벌여 나가야 한다.’
‘시간차 핵폭탄’
북한은 17대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남조선에서 반(反)보수 대연합을 결성해 한나라당을 비롯한 친미반동 보수세력을 결정적으로 매장하는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북한은 1946년부터 신년사를 발표해왔지만 한국의 대통령 선거를 들먹이며 특정 정당을 매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은 적은 없었다.
북한은 왜 예년에 볼 수 없던 특이한 내용이 담긴 신년사를 내놓았을까? 오랫동안 북한을 분석해온 전문가들은 이 문구를 가리켜 ‘조선노동당이 내리는 공개 지령’이라고 해석한다. 이들은 ‘민주화’한 한국 사회엔 조선노동당의 지시를 적극 수용하는 세력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것이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 움직임이다. 한총련은 1월8일 자체 홈페이지에 올린 1, 2월 사업계획 초안에서 ‘1회적이고 사안별 투쟁이 아니라 우리 민족 대 미국과의 최후 대결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반보수 대연합을 형성해야 한다”며 “1, 2월 중 지역별로 한나라당 규탄집회를 1회 이상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젊은이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편벽된 이념일지라도 100% 흡수할 가능성이 있다. 그중에선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이념 투쟁에서 승리하겠다는 자생적인 테러리스트도 나올 수 있다.
박정희 정부도 1972년 10월유신을 통해 영구집권을 시도했다. 그로 인해 일본에 있는 민단에서는 10월유신에 반대하는 세력이 생겨나 많은 젊은이를 매료시켰다. 1974년 초 오사카에 있던 북한 조총련 조직원 김호룡은 ‘반(反)독재’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박정희의 독재를 혐오하던 민단 소속 청년인 문세광을 감화시켰다.
김호룡은 문세광을 조총련계 병원에 거짓으로 입원시켜 며칠간 정신교육 위주의 밀봉교육을 받게 했다. 이 교육을 통해 문세광은 박정희를 제거하는 자생적 테러리스트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소설 ‘자칼의 날’을 읽은 그는 소설 내용을 본 떠 오사카의 한 파출소에서 권총을 훔치고, 이를 분해해 한국에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8월15일 서울 남산의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행사장에 잠입해,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문세광은 그때까지 한 번도 실탄사격을 해본 적이 없던 터라 첫 발을 자기 다리에 쏘는 실수를 했다. 그러나 정신을 집중해 절뚝이며 뛰어나가 박 대통령을 향해 총을 겨눴다. 이 총알이 연단을 맞추자 깜짝 놀란 박 대통령이 뒤로 넘어지면서 연단 밑으로 숨었다. 그러자 문세광은 총구를 옆으로 돌려 육영수 여사를 정확히 저격해 절명케 했다.
문세광 사건은 적개심에 불타는 순수한 젊은이는 별다른 훈련을 받지 않아도 유능한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에 자생적인 친북주의자가 존재하는 한 북한이 반보수 대연합 운동을 강화할 경우 이와 유사한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북한은 공작원을 직파해 테러를 감행할 수도 있다. 1983년 미얀마에서 일어난 아웅산 폭발사건은 북한군 정찰국 소속의 강민철 대위와 신기철 상위 등이 일으킨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현장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화를 면했지만, 이 폭발로 김재익씨 등 전두환 정권의 핵심 인재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문세광 사건은 북한이 자생적 테러리스트를 이용해 ‘스리쿠션’ 방식으로 한국 요인 암살을 시도한 것이고, 아웅산 사건은 암살을 직접 감행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렇게 큰 사건을 당했음에도 한국은 전혀 응전(應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범인이 잡혔는데도 북한은 두 사건에 대한 개입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미국이 이러한 꼴을 당했다면, 군사력을 동원해 테러를 감행한 나라를 응징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HID(북파공작대)를 보내 북한군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한국 내부에서 반공 분위기를 고취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이러한 전력이 있는 한국이 대통령선거를 눈앞에 두고 당선이 유력한 야당 후보자가 암살되는 사건을 당하면 어떻게 될까. 테러리스트는 확신범이기 때문에 자기 소신으로 결행했다고 주장할 것이고, 북한은 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지금은 냉전이 끝나고 남북 교류를 중시하는 유화 정국의 시절이다. 따라서 일각에서 ‘대통령이 암살된 것도 아니다. 문세광 사건 때도 그냥 넘어갔는데 야당 후보자 피살 때문에 남북관계를 긴장시킬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면, 한국 사회는 중구난방으로 의견이 갈려 응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B당은 정부에 불만을 터뜨릴 것이고 이에 다수 언론이 동참함으로써 국정은 엉망이 된다. 주가는 떨어지고 외국 투자 자본이 빠져나감으로써 경제 사정마저 암울해진다. 북한이 주도한 B당 후보 암살은 한국 사회를 암흑으로 몰아넣는 ‘시간차 핵폭탄’이 되는 것이다.
암울하기만 한 이 시나리오를 피할 방법은 무엇일까. 한나라당 김정훈 의원은 일찍부터 이 문제를 고민해왔다. 그는 이러한 사태를 피하려면 공직선거법 제 51조에 ‘당선이 유력한 정당의 후보자가 사망하거나 심신 상실의 상태에 빠지면, 그 정당이 다른 사람을 제47조(정당의 후보자 추천) 및 제49조(후보자 등록 등)의 규정에 의하여 후보자로 등록 신청할 수 있도록 대통령선거일을 대통령 임기 만료일 40일 이전의 첫째 수요일로 연기해야 한다’는 것을 제2항으로 추가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후보자 유고시 선거 연기해야
헌법이 허용한 임기 만료 40일 전까지의 선거 기간을 활용해, 대통령선거일을 현역 대통령 임기 만료 40일 전 첫째 수요일로 연기하고 그 사이 유력 정당은 대체 후보를 낼 수 있게 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김 의원이 내놓은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당론으로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 개정안을 내놓을 경우 어떤 역풍이 불어올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익보다는 당리당략을 좇는 데 여야가 따로 없는 것이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대통령후보자에 대한 경호 강화이다. 대통령후보자에 대한 경호는 경찰청 훈령 12호인 ‘경호규칙’에 따라 경찰이 담당하는데 경호규칙은 대통령선거일인 23일 동안만 대통령후보자를 경호하게 되어 있다. 대통령당선자가 확정되면 그때부터는 대통령경호실이 당선자에 대한 경호를 전담한다.
주요 정당은 대개 대선 6개월 전에 경선을 펼쳐 대통령후보를 확정하는데, 이때 경찰은 후보자를 경호하지 않는다. 테러는 정치행위이기 때문에 장기간 공작을 펼친다. 테러리스트들은 후보자 경호를 담당하는 정당원으로 위장 침투해 있다가 선거 개시 6일 후 경호하던 대상자를 암살할 수도 있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려면 주요 정당의 후보자가 확정된 다음부터 바로 전문 경호인력이 경호를 맡는 것이 좋다.
김정훈 의원은 이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요인경호법안’도 발의해놓았다. 이 법안은 국회 행자위에 제출돼 있으나 행자위 또한 각당의 당리당략이 얽혀 이를 선뜻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다.
17대 대선을 앞두고 유력한 정당의 대통령후보가 암살되면 한국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여당 후보가 암살될 경우에도 마찬가지의 혼란이 일어난다. 17대 대선을 앞두고 북한은 투쟁 경고를 요란하게 울리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안일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나라당조차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