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 제의 담화는 많은 국민을 놀라게 했다. 개헌제의 동기는 무엇일까. 왜 지금 발표했을까. 정치권 막후에서 회자되는, 개헌 제의의 ‘물밑작업’과 ‘물 타기’ 논란을 알아봤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1월11일 청와대에서 긴급 기자 간담회에서 4년 연임제 개헌의 추진방향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날의 대통령 담화는 통상의 대통령 담화와 다른 점이 있었다. 한 청와대 출입기자는 “일반적으로 청와대는 대통령 담화 하루 전에 담화가 예정된 사실을 언론에 통보한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당일 오전에야 문자로 통보가 왔다. 청와대 내에서 급작스럽게 담화가 결정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언론 통보 직전까지 개헌 담화가 있을 것이라는 예고기사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담화발표 하루 전인 1월8일 오전 ‘대형 사건’이 있었다. ‘세계일보’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6년 11월 한일정상회담에서 ‘동해’를 ‘평화의 바다’로 부르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전격 제의한 것으로 7일 전해졌다”고 단독 보도했다. 청와대는 이날 ‘청와대브리핑’을 통해 “일본이 과감한 발상 전환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동해 명칭 문제는 하나의 사례로 언급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청와대브리핑이 밝힌 노 대통령의 발언 내용은 이랬다.
“가령, 동해 바다를 한국은 동해라고 하고 일본은 일본해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 두 나라가 ‘평화의 바다’, ‘우의의 바다’, ‘화해의 바다’로 하면 두 나라 사이에 대화의 토대가 될 것이다.”
이날 오전부터 여러 매체는 세계일보 보도 내용과 청와대의 반박을 함께 보도하기 시작했다. 청와대브리핑은 “일본의 발상 전환을 촉구한 대통령의 취지를 무리하게 부풀려 시비 거리로 삼는 무책임한 보도를 중단하기 바란다”고 당부했지만 여론은 정반대로 흘렀다.
“평화의 바다물과 백두산이…”
대다수 사람은 ‘취지야 어찌 되었든 한국 국가원수가 일본 총리 앞에서 먼저 동해 대신 평화의 바다라는 용어를 썼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평화의 바다 발언에 민심은 분노의 바다”(세계일보 후속보도). 노 대통령의 ‘평화의 바다’ 발언을 전한 인터넷 게시판에도 난리가 났다. 노 대통령을 비판하는 댓글이 폭주했다. 한나라당은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를 요구했다.
“대통령 잘 둬서 애국가도 ‘평화의 바다물과 백두산이…’로 고쳐 불러야겠다”는 비아냥이 쇄도했다. 여권 일각에선 “반일(反日) 외교로 얻은 지지마저 모두 잃게 생겼다. 대통령은 더 이상 기댈 곳이 없게 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사실 1월8일의 사태는 상상외의 심각한 상황이었다. 한 여권 인사는 “민족감정을 자극한 것은 벌집을 건드린 일이다. 대통령의 ‘퇴임이후 정치생명’마저 위태로워지는 위기다”고 말했다.
그런데 다음날 오전 전격적으로 대통령의 개헌 담화가 발표되자 여론은 일거에 개헌 이슈로 뒤덮였다. 한 청와대 기자는 “8일 오전의 세계일보 보도와 9일 오전의 급작스러운 담화 사이에는 시점상 어떤 연관이 있을 수 있다. 평화의 바다 파문을 잠재우기 위한 물 타기로 생각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경재 전 의원은 “개헌 담화는 평화의 바다 사태를 잠재우기 위한 비장의 카드”라고 했다.
보고서 “국정실패는 한나라 때문”
‘동아일보’는 “개헌 제의는 2006년 12월 이후부터 청와대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됐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개헌 제의에 대한 물밑 준비는 그보다 4개월 전인 2006년 8월부터 본격화됐다는 시각이 있다. 8월 무렵에 세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선 이병완 대통령비서실장은 “노 대통령의 지시로 지난해 여름부터 (개헌) 논의가 시작됐다”고 밝혔다. 개헌 담화 직후 청와대에선 정태호 팀장을 중심으로 한 정무팀이 개헌의 당위성에 대한 대국민 홍보에 적극 나서고 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정무팀을 신설해 정태호 팀장을 임명한 시점이 8월27일이었다.
‘한국사회의 변화와 헌법개정의 필요성’ 연구 용역보고서.
한나라당 관계자는 “국회의장과 사무처장은 모두 여당 소속이다. 국회 명의로 발주됐지만 사실 이 용역보고서는 여권이 ‘개헌 및 대선 전략’ 수립에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한나라당에 적대적이고 여권에 호의적으로 서술된 용역보고서 내용에 잘 나타난다는 것. 다음은 보고서 내용이다.
“야당 한나라당은 대선 가도에 청색신호등이 켜졌다고 희색이 만면하다. 열린우리당의 실패는 오직 이 정당의 정책과 리더십의 실패 때문만인가? 따져보면 열린우리당의 주요 개혁정책의 상당수는 의회에서 버티고 막아낸 한나라당의 역할에 의해 실패하거나 훼손됐다. 상당수 정치학자는 현행 대통령제가 원활한 국정운영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노정해왔다고 주장해왔다. 대통령의 5년 단임 임기제는 파행적 국정운영을 불러왔다. 불완전한 한국형 대통령제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환시키는 방법에 있어서는 개헌을 통해 그 제도적 틀을 변경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보고서와 개헌담화 내용 일치
보고서는 한나라당의 국정방해와 개헌동기를 연결지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보고서는 “우리 사회는 권력구조를 바꾸더라도 큰 문제는 없다고 본다”면서 개헌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했다.
“제도적 수정을 뒤로하고 적합한 운영에만 힘쓰자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라고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권력구조 문제점들은 제도적 측면에서도 함께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 보고서는 소규모 개헌을 제안했다. 여권의 ‘원포인트 개헌’ 안과 맥을 같이한다.
“개헌을 통해 전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상당한 비용을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제도 개선의 방향성은 기존의 제도를 바탕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들을 수정하는 쪽으로 지향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고 안전한 선택이 될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개헌의 방향으로 “대통령의 임기를 5년에서 4년으로 줄이고 중임을 허용하자”, “대통령의 임기와 국회의원의 임기를 같이하고 대선과 총선의 시기를 맞추자”고 제안했다.
이같은 보고서 내용은 노무현 대통령이 개헌담화에서 제안한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중임’이라는 표현을 ‘연임’이라는 표현으로 바꾼 것만 다르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개헌 보고서에도 나타나듯 여권은 국정(國政)실패의 책임을 ‘제도’와 ‘야당’에 돌리려는 의도에서 개헌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개헌 담화는 결국 대선 전략의 일환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은 채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여권 내부에서 회람됐다. 보고서는 친(親)여권적 관점에서 203쪽에 걸친 방대한 분량에 걸쳐 개헌의 당위성을 설득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논리와 풍부한 해외 사례를 제공하고 있다. 여권에서 개헌 공감대가 확산되는 데 일정 정도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청와대가 개헌안 준비과정에서 이 보고서를 참조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