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대 국정과제에서 제외…국가적 관심 미흡”
- 151층 인천타워, 국제학술연구단지 등 수도권 규제로 난항
- 외국의료기관 유치하고도 설립기준 없어 ‘동작 그만’
- 승인 받으려면 36개 법률 65개 사항 협의…평균 160일 소요
- “사회주의적 형평성, 국수주의적 태도 넘어설 수 없나”
- “경제자유구역 담당하는 대통령비서관 신설해야
흙으로 물을 막는다면 주역(周易)의 64괘 중 사(師)괘에 해당한다. 땅(坤, ) 밑에 물(坎, ). 숱한 상징적 의미를 가진 주역의 괘를 이렇듯 단순하게 적용해도 되는지는 모르지만, 재미 삼아 사(師)괘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전문가에게 물어보았다. 숭실대 철학과에서 ‘정이천의 주역 해석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최근 ‘주역, 마음속에 마르지 않는 우물을 파라’는 책을 펴낸 심의용씨는 이렇게 풀이했다.
“사(師)는 전쟁터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군사(軍師)를 뜻한다. 땅의 한가운데 물이 모이는 모양을 상징하는데, 이는 사람을 모으고 군대를 일으켜야 전쟁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전쟁에 나서려면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모이고, 군사를 일으킬 수 있다. 전쟁과 정치는 다르다. 다급한 전쟁 상황에서 왕은 비록 최고권력자이지만 군사(지휘관)에게 전권을 부여해야 한다. 그래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위기의식’ ‘무기력’
흥미로운 해석이다. 송도국제도시를 취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들은 얘기의 핵심이 고스란히 담겼기 때문이다. 한국에 새로운 발전모델을 제시하겠다던 명분이 희미해지자 송도국제도시를 일으킬 핵심요소, 외국 기업이 외면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중앙정부가 경제자유구역청에 전권을 위임하지 않아 개발사업은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무한경쟁의 시대에 한국 경제를 살려보겠다는 지방정부의 의지에 힘을 실어주지 않고 있다. 바다 위에 거대한 땅은 만들어놨지만, 군사를 일으키지 못한 채 주저앉아 있는 꼴이다.
서울과 가깝기도 하고, 새로 태어난 도시가 궁금하기도 해서 해마다 한두 번은 송도에 다녀왔다. 갈 때마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바뀌어 있어 놀랐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앞에는 거대한 컨벤션센터 공사가 한창이었고, 그 옆으로 65층 무역센터가 터를 닦고 있었다.
지하철 공사가 진행 중인 곳으로 차를 몰았는데,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이 뻗어있다. 그 뒤 6·8공구엔 국내 최고층인 151층짜리 인천타워가 세워질 예정이다. 영종도와 송도, 제2·제3경인고속도로를 연결하는 인천대교 자리엔 어느덧 교각이 세워졌고 곧 상판이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그 앞에서 태국 출신 노동자가 오가는 차량을 안내하는 광경도 인상적이었다. 머지않아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인들이 우리와 섞여 새로운 기업을 일구고 가치를 창출할 것이다.
연세대 송도국제화복합단지는 지난해 말 개발계획을 변경, 재경부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20만평의 부지에 외국대학 캠퍼스와 연구시설, 대학 캠퍼스가 들어설 예정이다. 첨단의료복합단지도 대기 중이다. 서울대 의대 등 국내 7개 연구센터가 공동으로 설립할 의료단지는 싱가포르의 바이오 폴리스, 영국 케임브리지의 바이오 클러스터보다 규모와 실력에서 앞설 것으로 예상된다. 단, 국무조정실이 이곳을 첨단의료단지로 선정하는 절차가 남아 있다.
인천시와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직원들은 덕분에 3년 만에 이렇듯 놀라운 성과를 일궈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화려하고 웅장하다. 그러나 이번 방문에선 특이한 기운이 감지된다. 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지휘하는 경제자유구역청 안에는 어찌된 일인지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때론 무기력한 모습도 눈에 띄었다. 열심히 뛰고 있지만 앞으로 내달리지 못해 답답해하는 눈치였다. 질문 하나에 수십 가지 답변을 하는 것으로 봐서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무엇 때문일까.
이대로 될 것인가? 송도 국제도시 모형 전시관을 찾은 방문객들.
‘작정하고 파헤친’ 보고서
‘신동아’가 입수한 이 보고서에 따르면 감사원은 ‘사업추진의 지연, 기반시설 조성의 취약 때문에 외국인 투자유치는 미미한 실정’이라고 진단했다. ‘사업을 추진하는 기구의 효율성과 전문성이 미흡하다’거나 ‘각종 규제로 사업추진이 지연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또한 ‘고용창출이나 경제발전의 시너지 효과가 큰 외국 첨단기업을 유치하기보다 개발사업자 위주의 투자유치가 이뤄지고 있다’고 비판했고, ‘투자협약에 비해 외국인 직접투자 실적은 저조하다’고 꼬집었다. ‘주변 경쟁국과 비교해 인센티브나 투자자 보호 등 외국 투자기업의 경영 및 생활환경이 아직도 열악한 수준’이라는 평가도 내놓았다.
마치 작정하고 파헤친 듯 보고서 곳곳에 날카로운 분석이 번뜩인다. 감사원은 우선 경제자유구역사업의 추진체계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추진체계는 이렇다. 가장 상위 조직이자 심의·의결기구인 ‘경제자유구역위원회’가 있다. 위원회는 정부위원 16명, 민간위원 8명으로 구성된다. 그 밑에 위원회를 보좌하는 ‘경제자유구역기획단’이 있다. 재경부 직원 10명, 각 부처 파견인원 15명으로 구성돼 있다. 기획단 밑에 국내 3개 경제자유구역청(인천, 부산진해, 광양)이 나열돼 있다.
감사원은 경제자유구역사업의 최고 심의·의결기구인 위원회가 기본정책 수립과 규제개혁 추진, 중앙행정기관과 자치단체의 갈등을 조정하기보다 개발계획 변경이나 실시계획 승인 등 실무적인 업무 위주로 운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위원회를 보좌하는 기획단도 기획·정책지원 업무보다는 개발 및 외자유치 같은 실무업무에 치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평가기능의 미흡함을 지적하는 대목도 눈에 띈다. 경제자유구역은 재경부, 건교부, 해양부, 환경부 및 시·도 등이 관련된 중요 국책사업인데도 국무조정실의 특정 평가를 받지 않고 재경부의 자체 평가만 받는다. 자체 평가도 추진상의 문제점을 심도 있게 분석하기보다 추진상황을 파악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게 감사원의 지적이다. ‘눈 가리고 아웅’ 한다는 얘기다.
더욱 큰 문제는 2004년 6월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가 ‘동북아시대위원회’로 개편되면서 경제자유구역사업이 100대 국정과제에서 제외됐다는 사실이다. 이어서 2005년 3월 경제자유구역업무는 국민경제자문회의로 이관되면서 관련 업무가 축소돼 ‘국가적 관심이 미흡한 실정’이라고 지적됐다.
“대부분 협의기간 초과”
경제자유구역기획단의 전문성도 도마에 올랐다. 기획단 25명 중 15명이 다른 부처 및 지자체에서 파견한 인원인데, 빈번하게 교체돼 업무의 연속성과 전문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노동부 및 관세청이 파견한 인원은 소속기관 업무와 관련이 없는 물류 및 특별자치단체 도입과 투자유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 투자유치를 담당하는 직원 중 37.6%만이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투자유치 과정’을 이수, 전문성을 높이려는 노력도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획단에 대한 비판은 거세게 이어졌다. 기획단은 2005년 6월 제1차 물류·경제자유구역회의에서 인천 등 3개 경제자유구역 사업비를 35조5181억원으로 보고했으나, 홈페이지엔 31조8541억원으로 게재했다. 이를 두고 감사원은 “기획단이 총 사업비 규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꼬집었다. 또 감사원은 기획단과 경제자유구역청이 국비 및 지방비에 대한 중·장기 또는 연차별 재원조달계획을 수립하지 않아 사업을 추진하는 데 차질을 빚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자금 조달에 대한 지적도 구체적이었다. ‘경제자유구역법’엔 외국 투자 기업의 임대용 부지조성과 의료·교육시설에 국비를 지원하도록 규정돼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비를 기반시설(도로 및 공동구)에 한정적으로 지원하고, 공원과 녹지, 일부 외국인학교 용지까지 사업 시행자에게 부담시켜 조성원가에 전가하도록 했다.
국제컨벤션센터 신축 공사장(위)과 23만평 부지 위에 세워질 지식정보산업단지 건설 현장.
규제완화 실태도 살펴보자. 우선 경제자유구역에서 사업시행자가 실시계획을 승인받기 위해서는 평균 160일이 걸리는 것으로 분석됐다. 예컨대 송도 국제업무단지는 승인 신청일로부터 95일이 지나 승인을 받았다. 송도 선도개발사업은 101일, 어민보상용지 승인은 216일이 걸렸다.
구역 내에서 승인을 받으려면 36개 법률에 의한 65개 사항을 관계부처와 협의해야 한다. 문제는 협의에 대한 절차나 기준을 마련하지 않아 각 부처에서 인·허가기준에 따라 협의한다는 것이다. 특별지구로 대접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일례로 ‘경제자유구역법 시행령’ 제12조 2의 규정에 ‘협의 요청을 받으면 관계 행정기관장은 30일 이내에 의견을 제출’하도록 돼 있으나, 대부분 협의기간을 초과한다고 감사원은 지적했다.
미루고 핑계 대고…
2005년 9월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송도 어민보상용지 기반시설 건설공사 실시계획승인’을 경제자유구역위원회에 상정하는 데만 7개월이 소요됐다. 또 기획단은 도시계획 및 토지이용계획 등의 서류를 보완하라며 위원회 개최까지 4개월을 흘려보냈다. 자문회의를 마치고도, 위원회 상정안건은 3∼4건 이상이 돼야 한다는 ‘이상한’ 사유를 들어 3개월 지연해서 처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승인완료까지 216일이나 걸렸다.
경제자유구역에 ‘자유’가 없다는 탄식은 옥상옥의 결재 단계 때문이다. 단순한 노선변경이나 개발일정 조정도 재경부 장관의 승인을 받도록 돼 있다. 감사원은 “(중앙정부가) 경제자유구역청에 위임한 사무는 전무한 실정”이라며 “사업추진이 지연되고, 행정의 비효율을 초래한다”고 우려했다.
이 같은 각종 규제도 모자라 인천경제자유구역은 수도권 규제까지 받고 있다. 수도권정비계획법에 따르면 송도지구는 성장관리권역이나 과밀억제권역으로 분류돼 있다. 말은 경제자유구역이라고 해놓고는 수도권규제를 이유로 취득·등록세를 중과(3배)한다. 국내 첨단기업이 융합된 산업 클러스터를 만들려면 외국 기업을 유치해야 하지만 이런 규제 탓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감사원은 학술연구단지가 들어설 송도 5·7공구나 151층 인천타워가 들어설 6·8공구가 수도권정비권역으로 지정돼 애로가 많다고 밝혔다. 과밀억제권역에선 대학을 신설할 수 없으며 대기업은 공장을 짓거나 증설할 수 없다. 성장관리권역에서도 대학 신설은 금지되고, 공장은 반도체 등 10개 첨단공장에 한해 25∼50% 증설만 허용하고 있다.
경제자유구역이 성공하려면 세계적인 수준의 외국 기업이 들어와야 한다. 1200만평이 넘는 지역을 만들어놓고 기업을 유치하지 못하면 그건 공터나 마찬가지다. 도로를 닦고 전철을 놓아봐야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감사원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스위스 국제경영연구개발원(IMD)이 2005년 펴낸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외국인 투자에 대한 인센티브 및 규제완화가 경쟁국과 비교해 떨어진다. 인센티브 측면에서 싱가포르가 3위, 영국이 16위, 중국이 17위인데 비해 한국은 27위다(순위가 낮을수록 외국인 투자에 우호적).
외국 기업 차별 정도에서는 싱가포르가 12위, 영국 21위, 중국 36위인데 한국은 45위로 꼴찌에서 네 번째다. 한국은 외국인 투자자 보호장치 측면에서 39위를, 외국인 투자자의 국내기업 지배허용 측면에서 33위를 차지해 하위권에 머물렀다. 감사원은 “(한국의 경제자유구역이) 세계적인 선도기업을 유치하지 못해 고용창출과 기술이전 등 국민경제 파급효과가 저조하다”고 밝혔다.
“생리휴가가 뭔데요?”
외국인 기업 규델리니어텍에서 일하는 스위스 출신 기술자(왼쪽)와 지하철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태국 노동자.
특별법에 따르면 외국인학교의 내국인 학생 비율을 10%(개교 후 5년까지는 30% 수용)로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내국인 학생 비율을 10%로 제한할 경우 외국인으로 90%를 채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렇게 되면 경영수지는 나빠지고 결국 손해 보는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외국인학교가 경제자유구역에 들어가길 주저하고 있다. 가까스로 지난해 3월 송도국제학교를 착공했으나 추가 유치는 어려운 실정이다.
병원 설립의 경우엔 상황이 더 어렵다. 경제자유구역에 영리 외국의료법인을 설립하고 내국인 진료를 허용하는 것으로 법을 개정하고도 병원 유치에 차질을 빚고 있다. 2005년 10월 미국 의료기관인 NYP를 유치하기로 협약을 체결했지만 설립기준을 마련하지 않아 실무협의가 지연되고 있다. 외국 의료면허 인정기준, 외국환자 유치를 위한 소개 및 알선행위 허용, 의약분업 예외 인정 여부 같은 설립기준을 만들지 않아서다.
감사원의 지적에 경제자유구역청에서 일하는 실무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얼마 전까지 경제자유구역청에서 근무했던 관계자의 말은 감사원 지적보다 비난의 수위가 훨씬 높다. 그는 경제자유구역엔 ‘자유’도 없고, ‘특별함’도 없다고 말한다. 수년 동안 규제완화를 주장했지만 거의 풀리지 않았으며, 정부가 특별한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있다고 했다.
“경제자유구역에 관한 법을 자세히 읽어보면 주로 시가지 건설 및 조성에 관련된 것이다. 도시 인프라를 개발하는 시행자에게 주로 혜택이 돌아가도록 돼 있다. 그러나 이는 경제자유도시를 만드는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곳에 터를 잡을 기업을 어떻게 유치하느냐다. 기업 규제 완화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야 하는데 이런 내용이 없다.
유일한 3가지 규제완화 조항이 있다. 첫째, 채용인원의 2%를 장애인이나 국가유공자로 채워야 한다는 의무고용조항을 적용받지 않는다. 둘째, 생리휴가를 무급으로 할 수 있고 파견업무를 확대하거나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셋째, 대기업은 중소기업의 고유영역으로 지정된 분야라도 진출할 수 있다. 이런 말 같지도 않은 혜택을 들고 외국 기업을 만나면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다. 도대체 이런 게 왜 ‘혜택’이냐고 되묻는다.
생리휴가 무급제는 그들을 이해시키기 힘든, 영어로 번역하기도 어려운 제도다. 그들은 아예 이런 제도 자체를 모른다. 의무고용 면제도 그렇고, 대기업의 영역 확장도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다. 외국 기업은 고용의 자유 보장, 인허가 과정의 단순함 등을 요구하지만 우리로선 들어줄 수가 없다. 노동계의 주장이 워낙 거세고, 정부가 이를 적당히 수용하는 분위기에서 경제자유구역이라고 예외적용을 주장하기 어렵다. 부처 이기주의 때문에 ‘원 스톱’ 서비스도 불가능하다.”
“늦으면 진다”
경제자유구역청이 숱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외국 기업 유치는 단 두 건에 그쳤다. 송도 바이오단지에 입주한 의약품 제조업체 셀트리온과 자동차 부품조립 로봇을 제작하는 규델리니어텍이다.
그런데 이마저 송도국제도시가 부여하는 혜택에 매력을 느껴서 왔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셀트리온이 2억4900만달러를 투자한 것으로 발표됐으나 실제 투자한 금액은 3000만달러에 불과했다. 나머지 2억1900만달러는 KT·G 등 국내업체가 투자한 것이다. 이렇듯 ‘빵빵한’ 국내 파트너가 있기 때문에 송도에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규델리니어텍엔 50년 동안 무상으로 토지를 임대해줬는데, 이런 특별대우는 상당히 이례적이다. 경제자유구역청 전 고위관료가 증언하듯 모든 외국기업에 특별한 혜택을 주지 못한다면 외국 기업 유치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제다.
송도국제도시 내 사무실 빌딩을 연결한 통로 밑으로 컨벤션센터 공사 현장이 보인다.
2001년 9월 모 일간지는 ‘동북아 물류센터 건설 국제회의’의 내용을 게재했다. 동북아 경제포럼 한국위원회 주최로 열린 국제회의에서 “한국이 5년 내에 항만시설을 확충하고 국제자유도시를 지정하지 않으면 동북아 거점으로서 위치를 빼앗길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국제 경쟁력을 갖춘 수도권을 육성하려면 수도권 개발에 대한 일방적인 규제를 벗어나 거점을 전략화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내용도 나왔다. 동북아 경제포럼엔 남덕우 전 국무총리, 김만제·이승윤·진념 전 경제부총리, 고병우 전 건설부 장관 등이 참여하며 ‘IBC(국제 비즈니스 센터) 포럼’으로 확대 개편됐다.
이 기사를 읽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남덕우 전 국무총리, 이승윤 전 경제부총리 등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들이 제시한 물류중심국이라는 콘셉트를 발전시키라고 당시 이기호 청와대경제수석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1년 뒤, 경제자유구역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노무현 정부 초기인 2003년 인천, 부산진해, 광양의 3개 도시가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됐다.
당시 경제자유구역이란 콘셉트를 도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학자는 전일수 전 인천대 동북아물류대학원장이다. 전 교수는 한국 경제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두 가지 문제점에 주목했다. 하나는 사회주의적인 형평성이 너무 강조되고 있다는 점, 둘째는 국수주의적 태도가 팽배해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태도로는 세계가 점차 개방화하고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때에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전 교수는 두 가지 걸림돌을 넘어서려면 획기적인 신도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선진국 수준의 규제 완화, 뭐든 한 번에 인·허가받을 수 있는 정부기구의 설립, 이를 통해 외국기업을 유치하고 이들과 함께 새로운 발전 모델을 만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실험실’이 바로 경제자유구역이란 아이디어였다. 다음은 전 교수의 말이다.
“경제자유구역법 1조(목적)에는 외국인 투자기업의 경영환경과 외국인의 생활환경을 개선함으로써 외국인 투자를 촉진하고, 나아가 국가경쟁력의 강화와 지역간 균형발전을 도모한다고 돼 있다. 경제자유구역에 선진적인 조건을 부여해 외국인이 정주(定住)하도록 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발전 모델을 확립해 한국 전역으로 확산하자는 것이다.
대만은 1980년대부터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중심국이 되기 위해 논의를 시작했고, 1995년 본격적인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대만은 해운, 정보통신, 관광 등 6대 산업 중심국을 구상했다. 대만이 뛰고 있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가 비록 늦었지만 노력하기에 따라 동북아 중심국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천에서 성공하면 한국 전체로 파급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같은 기업만이 한국 경제를 견인할 수 있다는 시각에서 벗어난 시도였다. 한 지역이 국가를 성장시키는 동력으로 활약할 수 있다는 견해였다. 그러려면 경제자유구역 밖의 세상과 다른 전략이 필요했다. 이것이 이른바 ‘차별화 전략’이다. 2002년 경제자유구역법을 제정하고 동의했던 많은 사람은 기업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고, 외국기업을 유치하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지역에 특혜를 준다기보다 새로운 실험에 대한 국가적 투자로 이해한 것이다.
대통령과 10분 면담
분배와 균형발전을 들고 나온 노무현 대통령후보가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하자 경제자유구역의 앞길이 불투명해 보였다. 대통령의 균형발전전략과 인천의 차별화전략은 근본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철학이 다르면 누군가는 접어야 하고, 그렇다면 패자는 분명해 보였다.
2003년 2월 노 대통령은 각 지자체 단체장과 10분씩 면담하는 시간을 가졌다. 안상수 인천시장에게도 10분이 주어졌다. 이 짧은 시간에 무엇을 보고할까 고민하던 안 시장은 인천대교 건설의 필요성만 강조하기로 마음먹었다. 인천대교 건설계획은 국방부, 건설교통부, 예산처 등이 반대해 논의조차 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인천대교를 만들지 못하면 송도국제도시는 공항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활력을 잃을 처지였다.
10분 보고를 마친 뒤 청사로 돌아오자 동양제철화학 이수영 회장이 환한 웃음을 띤 채 안 시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연은 이랬다. 이 회장은 안 시장이 대통령 보고를 마친 뒤 곧바로 노 대통령 눈에 띄어 잠깐 대화시간을 가졌다. 그때 노 대통령은 이 회장에게 안 시장이 왜 인천대교 건설의 필요성을 주장하는지 설명을 부탁했다. 이 회장은 당시 인천상공회의소 회장을 겸직해 인천대교 건설의 필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중앙정부만 똑똑하다?
이 회장의 설명을 들은 뒤 노 대통령은 임채정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을 불러 해결하라고 지시했고, 결국 인천대교 건설에 착공할 수 있었다. 안 시장은 “인천대교 건설은 대통령의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며 “그때는 대통령도 동북아 중심도시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그 다음엔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일까. 2003년 노 대통령과 만난 뒤 경제자유구역 건설에 대해 자신이 붙은 안 시장은 2004년 초 대통령 탄핵사태가 벌어지면서 불안해졌다. 탄핵의 이유가 행정도시 이전이었고, 2004년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두자 행정도시 이전과 지역균형발전에 힘이 실렸다. 안 시장은 “균형발전위원회에서 제동을 걸면서 경제자유구역 프로젝트는 점차 대통령의 관심에서 멀어졌다”고 말했다. 실제 감사원에서도 지적했듯 경제자유구역 건설계획은 100대 국정과제에서 제외됐고, 국민경제자문회의로 업무가 이관되면서 축소됐다.
균형발전전략과 차별화전략은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러나 경제자유구역 사업이 지지부진한 근본적인 문제는 이런 철학적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감사원과 경제자유구역청 직원들이 지적한 숱한 문제는 대통령과 각 정부부처의 결단에 따라 한 번에 풀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풀리지 않는 것은 중소 지방정부라도 국가발전을 위한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놓고 이를 실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중앙정부가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는 중앙정부의 오만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를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경제자유구역 사업이 난항을 겪자 지난해 12월 재경부는 차관회의에서 특별지자체 설립을 담은 경제자유구역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경제자유구역청을 특별지자체로 전환하고, 국가 공무원을 파견해 원 스톱 서비스를 구현하자는 내용이었다. 행정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해 건설부나 재경부 장관의 권한을 이양하자고 했다.
재경부의 주장은 그동안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에 권한을 이임하지 않아 생기는 문제를 풀어낼 수 있을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경제자유구역 사업을 맡고 있는 실무자들은 전혀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다. 인천시는 “특별지자체로 전환될 경우 시는 경제자유구역 내 도시계획권 등 자치행정권을 상징하는 권한을 잃는다. 종국에는 재경부가 경제자유구역을 관할하게 될 것”이라며 “전문가에게서 일을 빼앗아 초보자에게 넘기는 격”이라고 비난했다.
중국 쑤저우 공업단지의 성공
재경부가 중심에 서면 마치 그동안 풀리지 않은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주장하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사실상 재경부 장관이 경제자유구역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등 주도권을 행사했다. 그럼에도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은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관심을 갖지 않아서다. 각 부처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사람들이 관심이 없다 보니 각종 규제는 풀리지 않고 서로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경제자유구역에서 일하는 실무자들은 청와대에 ‘경제자유구역 담당 대통령비서관’을 신설하든지, 국무총리 산하 위원회로 두고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2001년 경제자유구역 논의가 시작됐을 때부터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를 통해 경제자유구역 사업을 풀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기회와 비전은 중앙기관만이 내놓을 수 있다는 태도는 우리 사회에서 종종 목격된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 협력사의 관계에서 대기업은 협력사를 종 부리 듯 한다. 대등한 관계로 보지 않는다. 생존전략은 대기업이 도출하고, 협력사는 이를 충실하게 따르면 된다는 논리다. 이렇듯 기회를 창출하는 문을 꽁꽁 닫아두자 실력 있는 중소기업들은 국내 대기업과 협력하기를 피하고 외국 기업과 일하려 한다.
누구라도 실현성 높은 아이디어를 가져오면 채택하는 구조, 이것이 결여된 정부나 기업은 앞으로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중국에 배울 게 있다. 중국의 경제자유구역 쑤저우(蘇州) 공업단지는 싱가포르 리콴유 전 수상의 주선으로 싱가포르 정부와 중국 정부가 합작해서 개발한 곳이다. 삼성전자 등 세계적인 외국 기업을 공격적으로 유치해 10년 만에 첨단 도시와 일류 대학원 도시의 복합체를 건설했다.
쑤저우도 건설 초기엔 중앙정부의 각종 규제 때문에 외자 유치 실적이 부진했다. 그러자 쑤저우시(市)는 중앙정부에 실정을 보고하고 자율적으로 공단을 운영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베이징 정부는 “유리한 조건이면 우선적으로 실행하고 실사구시로 실효를 거두도록 하라”며 시의 요청에 응했다. 쑤저우시는 중앙정부의 규제에서 벗어나 독립경영을 했고, 공업단지를 발전시켰다. 쑤저우 공업단지의 성공사례는 중국 전역으로 확대돼 신도시에서 적용되고 있다.
‘꽃은 피도록 하고…’
인천공항이라는 세계적 공항을 확보하고 있는 인천경제자유구역은 이를 활용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 중이다. 인천공항을 브라질, 미국의 애틀랜타, 두바이, 그리고 네덜란드의 스키폴 공항과 연결해 세계적인 물류중심지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남미에서 출발한 화물이 북미를 거쳐 아시아로, 그리고 중동을 경유해 북유럽의 허브 네덜란드로 움직이는 네트워크를 구상 중이다. 이를 위해 두바이와 협력관계를 맺었고, 애틀랜타에 본사를 둔 델타항공과 접촉하고 있다.
꿈을 품도록 하고, 꽃은 피도록 하고, 말은 하도록 하는 세상. 중국은 사회주의가 한창이던 1950년대부터 이런 말(百花齊放, 百家爭鳴)을 공개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중국이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자본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만한 소리다. 한국은 사회주의적 형평성, 국수주의적 태도 앞에서 아직 머뭇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