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와대·통일부·정보당국을 두드리는 ‘손’
- “신의주-평양 고속도로 건설 참여하면 정상회담 힘쓰겠다”
- 유일한 공식 루트, ‘국정원 대북전략국-노동당 통일전선부’
- 2002년 포상자들이 국정원에서 연쇄 승진한 까닭은?
- “중국과 금강산에서 구체적인 얘기까지 오갔지만…”
- “통전부보다 힘있는 채널을 찾아라!”
- 여권·야당·평양…모든 키워드는 대선으로 통한다
- 미국은 왜 정상회담에 긴장하는가
노무현 대통령이 2006년 11월27일 신임 차관급 내정자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후 환담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변양균 정책실장, 남인희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노 대통령, 한진호 국정원 2차장, 서훈 국정원 3차장, 이수혁 국정원 1차장.
이미 중국 기업들을 중심으로 컨소시엄 준비단계에 이르렀다는 계획을 두고, 이 사업가는 사뭇 다른 뉘앙스의 말을 덧붙였다. 사업을 책임진 북측 실력자가, 남측이 이 사업에 자본을 투자하는 조건으로 남북정상회담 추진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고 약속했다는 이야기였다. 자신은 평양을 드나들며 이 실력자측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고, 이 인물은 남측에 알려진 것 이상으로 김 위원장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설득도 이어졌다.
같은 사업 아이템을 갖고 타진해온 것은 이 사람만이 아니었다. 당시 한 통일부 관계자도 유사한 내용을 들고 온 사업가를 만났다고 말했다. 청와대, 여당 주변에도 유사한 접촉이 있었다. 그해 가을 무렵 이 통일부 관계자는 정보 루트를 통해 그 타당성을 검증했으나 결론은 “신뢰하기 어렵다”였다.
“참여정부 초기부터 남북정상회담을 걸고 비즈니스를 상의하러 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자신이 북한의 누구와 선이 있는데, 이러저러한 조건이 충족되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설득해 정상회담을 성사시켜줄 수 있다는 식이었다. ‘당신과 내가 정상회담 성사의 막후채널 노릇을 하면 나라를 위해서도 큰 영광 아니냐’는 말도 잊지 않았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안보부처 핵심에서 일했던 한 관계자의 말이다. 정상회담에 대한 노 대통령의 원칙을 숙지하고 있던 이들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겠지만, 모두 다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관계자는 “자리를 떠나면서 후임자에게 그런 이야기에 혹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말했다.
남북정상회담이 정치권을 달구는 화두로 떠올랐다. 여권과 정부 관계자들의 잇따른 발언과 언론보도로 분위기는 한껏 들뜨고, 야당은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취임 이후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원칙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청와대의 의중이 바뀐 것 아니냐는 분석이 쏟아져 나온다.
과연 남북정상회담은 추진되고 있는가. 추진된다면 어떤 경로로 어떤 사람들을 통해 어떤 수준까지 논의된 것일까. 그간에는 어떤 접촉이 있었고 어떤 결과물이 있었나. 최근 일련의 흐름은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일까. 전현직 관계 당국자들과 대통령 측근, 정보기관 주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 구체적인 내용을 하나하나 따라가보자.
세 가지 경로
남북이 정상회담 문제를 협의할 수 있는 채널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우선 공식-공개 채널. 언론에 보도되는 남북간 협상장에서 논의하는 것이다. 내용 자체는 공개되지 않을 수 있지만 의제가 있었다는 것은 공개되게 마련이다. 2005년 6월 평양을 방문한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정상회담을 제의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다음으로는 양측 정보기관이 주축이 되는 공식-비공개 채널이다. 국가정보원 3차장 휘하 대북전략국과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 관계자들이 파트너다. 접촉사실은 물론 그 구성원도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다.
세 번째는 이른바 ‘비선(秘線)’ 라인이다. 양측 최고지도자 핵심 측근들이 회담의 조건이나 형식을 사전에 조율하는 식이다. 2000년 6·15 정상회담은 박지원-송호경으로 대표되는 비선라인의 사전협의를 국정원과 통전부가 이어받는 식으로 준비됐다.
이 가운데 현재 유일하게 인정받는 채널은 국정원-통전부 채널이다. 북한 핵실험 이후 공개협상 테이블은 사실상 중단상태에 놓였고, 비선 라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흘러나오지만 최소한 지난해 말까지는 ‘힘이 실린 상태는 아니’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국정원-통전부 라인의 중심에는 알려진 바와 같이 서훈 국정원 3차장이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시기 국정원의 대북 채널이던 이른바 ‘KSS라인(김보현 당시 국정원 3차장, 서영교 대북전략국장, 서훈 대북전략조정단장)’의 일원이었던 서훈 차장은, 대북송금 특검 이후 잠시 주춤했지만 2004년 초부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정보관리실장으로 일하며 청와대의 신임을 얻었다. 그 해 연말 대북전략국장으로 친정에 복귀한 그는, 이후 2005년 6월 정동영 장관의 김정일 위원장 면담과 9월 장관급회담에 동행해 막후조율 역할을 맡으며 대북 라인의 성공적인 부활을 이끌었다(‘신동아’ 2005년 11월호 ‘국정원 대북라인 재가동됐다’ 참조).
2004년 연말부터 재가동된 대북 라인, 특히 정상회담과 관련한 정부의 업무 보고체계는 대통령-통일부 장관-국정원 대북전략국으로 확정됐다. 통일부에선 정동영-이종석-이재정 장관에 이르기까지 이 보고체계가 유지돼왔다. 국정원뿐 아니라 정부 전체를 통틀어 정상회담 문제를 청와대에 보고할 수 있는 공식 자격을 가진 것은 서훈 국장뿐이었다. 대북전략국이 사안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통일부 장관에게 보고하면, 통일부 장관은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형식이다.
이는 사실상 안보 문제를 총괄했던 정동영 장관의 당시 위상이 주요한 원인이었지만, ‘대북업무에 대해서는 국정원이 아니라 통일부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노 대통령의 원칙이 반영된 것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중평이다. 다만 ‘중요한 진전사항’이 생기면 서훈 국장 역시 청와대 보고에 참석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직속상관인 국정원장과 3차장 역시 통일부 장관 보고와 거의 동시에 대북전략국의 관련보고를 받았다. 고영구 원장에 비해 김승규 원장은 이 문제에 덜 적극적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최준택 당시 3차장의 경우는 직원들에게 정상회담 성사를 업무목표의 하나로 언급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북전략국의 카운터파트인 북한의 노동당 통전부는 남북대화·교류와 공작을 함께 담당하는 핵심기관이다. 국정원과 통전부가 주요 회담 준비에 관여하거나 은밀하게 사전조율을 하는 것은 오랜 관행. 장관급회담의 북측 단장을 맡고 있는 권호웅 책임지도원(공식 직함은 내각 책임참사)은 서훈 차장과 오랫동안 접촉선으로 일해왔다. 서 차장은 2005년 6월 정 장관과 김 위원장의 면담에 림동옥 당시 통전부 제1부부장과 함께 배석한 바 있다.
거듭된 접촉, 돌연한 무산
지난해 11월 외교안보부처 인사개편에 따라 서훈 국장은 3차장으로 승진했다. 1954년생인 서 차장은, 57세에 그 자리에 앉은 김보현 전 차장이나 58세에 임명된 최준택 전 차장에 비해 빠르게 승진한 셈이다. 함께 일해온 국정원 대북 라인의 주요 멤버들도 그대로 연쇄 승진했다는 후문. 대표적인 경우가 서 차장의 뒤를 이어 대북전략국장에 임명된 C국장이다. 2002년 정상회담 2주년을 맞아 이뤄진 공로자 포상에서 서 차장은 홍조근정훈장을, C국장은 근정포장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국정원 소속의 포상자 11명 가운데 상당수가 현재도 같은 업무를 맡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서 차장의 승진을 ‘정상회담 준비용’이라는 해석을 내놓았지만, 꼭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는 게 정부 관계자들의 평가다. 오히려 그간 탁월한 업무성과를 보여온 서훈 차장의 공을 노무현 정부가 끝나기 전에 치하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인사로 보는 게 옳다는 것. 최근 물러난 한 안보부처 고위관계자의 말이다.
“서 차장이 국장이라고 해서 통전부와의 교섭에 문제가 있을 리 없다. 어차피 남북협상에서 중요한 건 신뢰이지 직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분이 공개되는 차장이 됨으로써 통전부측 인사들과 직접 접촉하는 데는 불편해졌다고 볼 수도 있다. 당장 베이징에만 가도 알아보는 눈이 많을 것 아닌가. 언론 등을 통해 서 차장의 신분이 국내외에 속속들이 알려진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대북 라인에 힘을 실어준 것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정상회담용이라는 건 절반만 맞는 해석이다.”
2000년 6·15 정상회담 당시 평양에서 인민군을 사열하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북한측은 돌연 논의를 원점으로 되돌려 관계자들을 당혹케 했다는 전언이다. 한 당국자는 “뒤늦은 평가지만, 10월 핵실험 강행을 내부적으로 확정지은 북한측이 정상회담 논의에 부담을 느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면 이처럼 ‘매우 구체적인 부분까지 진행됐다’는 일부 관계자들의 설명이 과장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쉽게 말해 국정원-통전부 라인의 ‘가치’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5월25일로 예정됐다가 끝내 무산된 남북철도연결 시험운행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국정원 대북라인이 막후에서 준비한 지난해 4월 장관급회담에서 철도연결 행사 개최에 합의했지만, 통전부측의 공언과는 달리 행사일 하루 전에 갑자기 취소된 바 있다.
당시 사전접촉에서 통전부측은 국정원측 인사들에게 “군부와의 조율도 끝마쳤으며, 반드시 된다”고 확언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보고 받은 이종석 당시 장관은 행사예정 이틀 전까지 “어떤 형태로든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가 수세에 몰리기도 했다. 2006년 5월 이전의 국정원-통전부 라인은 정상회담 문제를 포함해 신뢰 깊은 논의를 진행했지만, 그 이후로는 미사일 발사, 핵실험 등이 이어진 까닭에 구체적인 내용을 교환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통전부의 쇠락?
눈여겨볼 것은, 이후 핵실험을 전후한 시점까지 국정원 라인과는 별개로 이른바 ‘비선’의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여권의 유력정치인인 L씨와 대통령의 386측근인 A씨가 그들이다. 이들이 비슷한 시기에 통전부와는 다른 채널과 해외에서 접촉해 정상회담 문제를 논의했다는 설이다. 쉽게 말해 공식 라인의 신뢰도가 떨어져 일을 만들어내지 못하니 ‘보다 힘있는 인사’들을 접촉해 김 위원장을 설득해야 한다는 논리였던 셈이다.
통전부의 위상이 2000년 정상회담 이후 꾸준히 하강곡선을 그렸다는 분석도 비슷한 맥락에 서 있다. 2003년 김용순 당 중앙위 대남담당비서, 2004년 송호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이 사망한데다, 한참 정상회담 문제가 떠돌던 지난해 8월에는 대남사업을 총괄지휘해온 림동옥 통전부 부부장이 사망했다. 이후 이를 승계한 최승철 부부장이나 권호웅 책임지도원, 김만길·전종구 조평통 서기국 부장 등은 모두 40~50대여서 김정일 위원장에게 정상회담을 적극적으로 설득할 수 있을 만큼 비중있는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선’들이 접촉한 북측 인사들은 각각 강관주 대외연락부장과 국가안전보위부의 부부장급 인사측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L씨의 경우는 베이징에서 직접 강관주 부장을 만났다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김일성 주석의 외오촌조카로 알려진 강관주 부장은 1986년 중앙당의 핵심부서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부장으로 있던 조직지도부 부부장에 발탁돼 그를 보좌하면서 신임을 얻은 ‘측근 중의 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통전부, 작전부, 35호실과 함께 ‘3호청사’로 불리며 대남공작의 일환을 담당하고 있는 대외연락부는 전통적으로 통전부와 경쟁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통전부가 남북회담과 교류 등 공식적인 대남업무를 담당한다면, 대외연락부는 공작원 파견과 훈련 등 비공식적인 대남공작업무를 맡고 있다. 정상회담을 둘러싸고 서울에서 국정원과 비선이 엇갈렸다면, 평양에서는 통전부와 대외연락부가 엇갈린 형국이다.
2006년 7월13일, 부산에서 열린 남북장관급회담에 참석했던 권호웅 북한 내각 책임참사가 김해공항에서 귀환 비행기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국정원 주변에서는 김 위원장의 비선을 자임한 북측 인사들이 기사 서두의 사례처럼 평양 실세의 이름으로 ‘장사를 하려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이후 국정원측은 이들의 신원이나 위상을 교차확인하는 방식으로 정상회담 논의 가능성을 직접 검토했지만, “역시 길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관련해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8월 언론사 외교안보분야 논설위원들과의 비공개 간담회에서 “북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합리적인 판단이 빗나갈 때가 많다. 국정원도 잘 알지 못한다”며 “북한과의 통로는 공식적인 통로가 가장 정확하다. 그간 비공식적 통로도 시도해봤으나 성과가 없었다. 그것이 정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통하는 통로인지도 확인하기 어려웠다”고 말한 바 있다. 앞서 설명한 일련의 정황과 관련해 음미할 만한 대목이다.
부산한 움직임
그러나 이후에도 비공식 라인의 접촉이 이어지고 있다는 설은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 11월9일 ‘오마이뉴스’는 “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재가를 받은 핵심(측근) 인사들이 북한 핵실험 후인 10월 중순 베이징에서 접촉한 데 이어 10월 하순 ‘제3의 장소’에서 회담을 갖고 6자회담 복귀 일정 및 향후 정상회담 추진 등을 의제로 폭 넓은 대화를 나눴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와 함께 11월 이종석 장관의 후임으로 임명된 이재정 장관의 ‘소신 발언’도 정상회담 추진 분위기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이 장관은 1월8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남북정상회담은 살아있는 현안이고 당연히 이뤄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필요하다면 이를 위한 특사교환도 검토할 수 있다는 것. 1월13일에는 통일부가 청와대 보고용으로 작성한 ‘2007년 업무추진 계획’에 ‘북핵 상황이 장기 정체 시에는 돌파구 마련을 위해 고위급 특사 파견 등 남북 최고당국자 수준의 접촉을 추진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보도되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국정원의 움직임도 부산하다. 대북전략국 외의 부서에서도 정상회담과 관련해 갖가지 아이디어를 모으는 작업이 폭넓게 추진되고 있다. 관계자들에게 사실상 ‘총동원령’이 내려진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 최근 만들어진 한 보고서는 중단된 대북지원을 재개하는 방안을 정상회담 분위기 조성의 방법으로 지목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최근 국정원 일각에서는 정상회담 개최를 설득하기 위해 통전부 이외의 ‘보다 힘있는’ 다른 루트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 시도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여기에는 장기간 대북 라인을 오로지하며 비교적 빠른 속도로 승진한 서훈 차장에 대한 내부의 견제구도도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대북 라인이 구체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현재 상황을 발판 삼아 이를 넘어서보겠다는 시도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서훈 차장의 승진으로 원내 서열이 ‘엉킨’ 몇몇 관리관급 간부가 거명되기도 한다. 국정원 내의 고질적인 지역갈등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다.
국정원 주변에서는 김만복 원장 취임 이후 일심회 사건 등 간첩사건에 대한 업무처리가 이전에 비해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정상회담 분위기를 의식한 것 같다’는 목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특히 김승규 원장 시절 한껏 사기가 고양됐던 2차장 산하 안보수사국의 불만은 보다 직접적으로 확인된다. 비선 접촉 창구로 전해지고 있는 강관주 부장의 대외연락부가 일심회 사건의 북측 배후로 지목돼 있다는 점에서 미묘한 대목이다. 대북전략국만이 정상회담 문제를 신경 쓰던 지난해까지와는 달리, 국정원 조직의 상당부분이 이 문제의 영향권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계속되는 비선 라인의 움직임이나 최근의 발언, 국정원 주변의 흐름은 국내정치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올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분위기 반전이나 이른바 ‘영남개혁세력’의 독자생존을 목표로 하는 측근들 처지에는 정상회담 카드가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안보부처 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는 “386측근 등 여권 정치인들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만복 원장이나 ‘대선공신’ 가운데 한 사람인 이재정 장관이 이 부분을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능력’의 문제
평양측 인사들이 서울의 이러한 분위기를 일정부분 활용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가능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추진을 위해 정상회담 문제를 걸고 나오는 식이다.
역시 안보부처 핵심에서 일한 인사는 “평양은 내부 환경이 어려워지면 대외정보기관의 움직임이 빨라지는 경향이 있다. 관련이 없어 보이는 북측 인사들이 정상회담을 말하는 것도 그 연장선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평했다. ‘비선’ 접촉은 그러한 플레이에 말려드는 것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대북송금 특검으로 임기를 시작한 노 대통령은 그간 여러 차례에 걸쳐 남북협상의 투명성을 강조해왔다. 이 때문에 노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추진한다 해도 어떻게든 국정원 대북전략국을 중심으로 하는 공식라인을 통한다는 원칙을 지키려 한다는 게 전현직 청와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국정원-통전부 라인의 신뢰성이 전성기에 비해 떨어졌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고, 사실상 모든 언론과 야당이 서훈 차장을 주목하고 있는 현재 상황은 보안이 생명인 정상회담이 이 라인을 통해 이뤄지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정상회담을 둘러싼 최근의 과열 분위기는 오히려 그 성사 가능성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 된 셈이다. 실제로 이를 성사시켜 정치적 카드로 활용한다 해도, 대선에서 의미 있는 변수가 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청와대 주변에서까지 흘러나온다. 한 전직 청와대 관계자의 말이다.
“청와대가 정말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싶었다면 이재정 장관 등의 발언을 자제하게 해 잡음을 최소화해야 했다. 서훈 차장 승진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지금은 실질적인 진전도 없이 부산만 떨어 상황이 악화된 꼴이다. 전략이 없었던 것이다.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 실제로 성사시킬 ‘능력’이 없다는 게 가장 정확한 진단이라고 본다. 참여정부의 한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