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지 내 ‘물길’이 있는 아파트가 ‘웰빙 트렌드’와 맞물려 각광받고 있다.
“왜 아니겠습니까. 당장 시작합시다.”
정부는 1999년 분양가 자율화를 실시했다. 금리가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이 대책은 빛을 발했다. 서울 서초가든 스위트, 롯데캐슬 84를 시작으로 값비싼 프리미엄 아파트가 줄줄이 나오고, 나오는 즉시 계약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건설사는 그전에는 생각에만 머물렀던 공격적인 시공과 분양을 할 수 있었다. 원목마루도 깔고 시스템 창호도 달고 커튼월 방식의 외관도 채택했다. 수입 대리석과 욕조, 각종 빌트인 제품으로 무장한 인테리어도 가능했다. 오직 건설사와 고객이 합의만 하면 종전 가격의 2배가 넘는 아파트가 탄생할 수 있었다.
중간에 끼어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던 정부가 빠지니 부동산시장은 살아났다. 파는 측은 원하는 것을 만들어냈고, 사는 측은 살맛나는 집에서 살게 됐다.
광고, 홍보비도 대폭 늘려잡을 수 있었다. 건설사는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적정 분양가의 1.5배를 불러봤다. 순조롭게 팔려 나갔다. 국가기관인 토지공사도 질세라 끼어들었다. 신도시를 만들면서 땅값 조성원가의 2배를 불렀다. 정부는 분양권 전매 가능, 소형평수 의무비율 삭제, 일시적 양도세 면제라는 보너스 카드까지 내놨다.
시장은 금세 복마전이 됐다. 구청은 분양권 전매 신청서에 도장 찍어주기에 바빴고, 당첨된 분양권은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수억원의 프리미엄이 붙어서 팔려 나갔다. 아수라장이었다. 분양가 규제시대에 지어진 기존의 아파트도 새 아파트 분양가격만큼 뒤따라 뛰기 시작했다. 평당 700만원짜리는 금세 1000만원이 됐고, 300만원 오르는 데 걸린 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에 다시 1500만, 2000만원으로 수직상승했다.
“3억원짜리 아파트를 자기돈 1억원과 융자금 2억원으로 사서 6억원에 파니 3억원이 남았다”는 게 이맘때 유행하던 전형적인 아파트 투자기법이다.
‘아파트 가격 상승이 대세’라는 시그널이 도처에서 울리자 사람들은 융자를 통한 투자에 들어갔다. 집값의 80%까지 대출이 가능해지자 사람들은 월세나 전세를 낀 집을 자기돈 한푼 없이 사들였다. 이른바 ‘하드 레버리지(hard leverage)’라 불리는 대출은 부동산 가격 폭등의 1등 공신이었다.
청색 전화, 백색 전화, 반값 아파트
그러던 당국이 수년 만에 1차로 6억원 이상 아파트 담보대출을 옥죄었다. 비싼 아파트가 부동산 가격 급등의 원인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랬더니 6억원 미만 아파트들이 난리가 났다. 오히려 멀쩡하던 2억, 3억대 아파트들까지 마치 전봇대에 조르르 앉은 참새들처럼, 약속이나 한 듯이 5억9500만원까지 가격이 올랐다.
정부는 다시 모든 아파트 대출 규제 방안을 내놨다. ‘DTI(Debt to income)’라는 낯선 용어를 꺼내들었다. 상환능력을 근거로 해야 한다며, 대출 희망자 연봉의 4배만 융자해준다는 방안이다. 이는 결국 상대적으로 금융감독 당국의 제어가 덜한 외국계 은행과 대부업체의 배만 불리고 있다. 이들의 연 대출이자는 7%를 넘어가고, 조기상환수수료도 상당히 비싸지만 수요자의 발길이 잦아들지 않는다.
대출 규제는 돈줄을 막아 투자수요를 억제하는 데 큰 효과가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점은 실수요자가 피해를 본다는 점이다. 나아가 시장원리를 위배했다는 근본적인 자책감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바야흐로 지금의 우리나라, 특히 수도권은 온갖 아파트 규제의 실험장이다. 나올 수 있는 모든 부동산 대책이 다 등장했고, 위헌요소가 있는 불합리한 정책들도 등장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먹히면 다행이고 안 먹혀도 그만’이라는 식의 각종 대책양산은 결국 ‘반값 아파트’라는, 많은 학자가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한 방안마저 논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1960∼70년대에는 청색 전화, 백색 전화라는 용어가 있었다. 전화기가 귀해 재산권 1순위로 인정받던 시대였다. 전화는 프리미엄이 붙어 전매되기 일쑤였고, 월세를 받고 임대되기도 했다. 이런 전화가 백색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