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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명문高’ 검정고시 인맥과 파워

“좌절 인생, ‘패자부활전’ 칼 갈며 생존력 키웠다”

  • 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숨은 명문高’ 검정고시 인맥과 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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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 합격자수, 사법시험 합격자수 매년 상위권 랭크
  • 좌절과 방황 이겨낸 검정고시派, 참여정부 성격과 잘 맞다?
  • 고교동창회보다 결속력 약해도 ‘마음으로 밀어주기’는 더 끈끈
  • ‘검정고시 출신’ 편견 싫어 법조인, 전문직, 공무원 선호
  • 고교 내신 안 좋은 학생들에겐 유일한 탈출구
‘숨은 명문高’ 검정고시 인맥과 파워

검정고시 출신들의 동창회인 전국검정고시총동문회 창립 총회.

법무법인 화우의 박영립(54) 변호사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아버지가 작고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학교를 더 다닐 수 없었다. 장남인 그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여관 조바(심부름꾼), 음식점 점원, 막노동, 신문배달…안 해본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일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초등학교 학력으로 취직할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공장에 취직하려 해도 최소한 중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했다. 평생 먹고살 수 있는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고 학원을 알아보던 중 검정고시학원을 알게 됐다. 검정고시에 합격하면 학교를 안 가도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학력을 준다는 것이었다. 못다 한 공부에 대한 미련과 열정이 솟구쳤지만 결심은 쉽지 않았다. 당장 입에 풀칠을 해야 했고, 그가 돈을 벌어야 동생들이라도 공부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졸업장이라도 따자는 생각에 주경야독을 했어요. 그러다 고졸 검정고시까지 합격했고, 내친김에 대학에 진학해 변호사가 됐으니 검정고시가 제 인생을 바꿔놓은 셈이죠.”

구두닦이 출신 판사

박 변호사의 경우처럼 검정고시는 정규 교육과정을 밟지 못한 사람에게 시험을 통해 학력을 인정해주고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는 제도다. 검정고시는 1925년 일제 조선총독부가 서울과 평양에서 실시한 ‘검정고시’에서 유래했다. 1950년 ‘대학 입학자격 검정고시 규정’이라는 문교부령으로 정식 제도화됐고, 1968년 지금의 대학수학능력시험 격인 대학입학 예비고사와 구별하기 위해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로 개칭돼 오늘에 이른다. 시험은 각 시·도 교육위원회에서 주관한다. 지금까지 검정고시를 통해 학력을 취득한 사람은 160만명, 이 가운데 고졸 검정고시 출신만 10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검정고시 출신은 대개 경제 사정으로 학업을 포기했던 사람들이라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도 높지 않고, 사회지도층은 더더욱 적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검정고시 파워’는 의외로 막강하다. 서울대의 경우 1960∼80년대엔 검정고시 출신 합격자가 해마다 80∼100여 명에 이르렀다. 1983년엔 135명이 합격하기도 했다. 고교 평준화 이전이든 이후든 고교 출신별로 신입생 숫자를 산출하면 항상 5위권 안에 들었다. 명문고는 부침을 거듭했지만 검정고시는 꾸준히 ‘명문고’ 자리를 유지한 셈이다. 최근 사정도 마찬가지다. 서울대 합격자 중 검정고시 출신은 2002년 89명, 2003년 66명, 2004년 53명, 2005년 34명, 2006년 40명으로 특목고를 포함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그뿐 아니다. 법률신문사에서 조사한 지난 5년간 사법시험 합격자 출신고교를 보면 서울 대원외국어고(163명) 다음으로 검정고시 출신(72명)이 많다. 한영외고(66명), 순천고(55명), 대일외고(44명) 등 내로라하는 명문고를 압도한다. 전체 법조인 1만4831명의 출신고교를 따져도 경기고(417명), 경북고(305명), 전주고(256명), 서울고(220명) 다음으로 검정고시 출신(215명)이 많다.

검정고시 출신의 법조계 인사로는 우선 김석휘(72) 전 법무부 장관, 이근웅(59) 전 사법연수원장이 눈에 띈다. 임성덕(49) 서울고검 검사, 김대호(49) 서울남부지검 부장검사, 지상목(47) 인천지원 부장판사, 조욱희(50) 부산지검 동부지청 부장검사, 김칠준(47) 법무법인 다산 대표 등도 검정고시 출신 법조인이다.

광주지원 서정암(45) 판사는 구두닦이 출신 판사로 유명하다. 그는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자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어머니를 도와 3년 동안 농사만 지었다. 그러다 ‘서울에 가면 야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상경, 구두를 닦으며 2년 만에 검정고시로 중·고등 과정을 통과했다. 직접 번 돈으로 대학에도 진학했다.

“어렵게 대학을 졸업했지만 이미 서른이 넘어 취직이 안 되더라고요. 오기가 생겨 사법시험을 준비했죠. 검정고시를 치러본 게 사법시험 준비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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